[◆A/미사와] 문득 깨달은 순간
미유키가 아주 조금 등장합니다... 주의! 개연성 없음도 주의하고 이것저것... 이제 이건 고정멘트같군요 언제나 봐주시는 분들께는 감사합니다 umu)*
잠에서 깨어난 순간, 사와무라 에이준은 상실을 직감했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지만, 명백하게 달랐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평범한 일상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찾아 헤맸다. 두어번 둥근 눈이 깜박여지고, 윗층 침대천장만 멀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오늘의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었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감각이었다. 사와무라 에이준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했다. 그 감정은 진솔해서, 그의 내면 어딘가에 위치하여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얼굴모를 누군가를 떠올릴 때마다 사와무라는 조금 행복해지고, 조금 기뻐졌으며, 어딘가가 조금 쓰렸다. 두근두근 울리는 심장소리에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였다. 사와무라는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했다. 그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주 큰 문제처럼 느껴질 정도로 좋아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 스스로도 의아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잊은 거지? 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을 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누구지?
사와무라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같은 방의 쿠라모치 요이치였다. 사와무라는 자신에게 어서 일어나라며 걷어차는 선배에게 바락바락 소리치며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아침을 먹기 위해 니적니적 준비하며, 사와무라는 물었다. 무심한 목소리였다.
“쿠라모치 선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심까?”
“뭐? 그딴 걸 왜 나한테 물어?”
사와무라의 질문에 쿠라모치는 단박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전에 사와무라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쿠라모치는 일단 근본적인 의문을 찾았다. 사와무라는 그의 후배이자 룸메이트였고, 같은 부활동을 하고 있기도 했다. 즉, 함께 공유하는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더군다나 쿠라모치는 결코 둔한 타입도, 무언가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도리어 쿠라모치만큼 예리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런 쿠라모치마저도 제 시끄럽고 활발한 후배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런 간질간질한 분홍빛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쿠라모치는 당황스러울수밖에 없었다. 쿠라모치는 다시 되물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냐?”
“있슴다. 근데 모르겠슴다.”
이건 또 뭔 헛소리야. 쿠라모치는 이상한 말을 하는 후배를 다시 한 번 걷어차주는 것으로 선배의 애정을 과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배는 왜 때리냐며 버럭거리기는 했지만서도. 건방진 짓을 해 주는 후배에게 다시 한 번 관절기를 거는 것으로 아침을 맞은 두 선후배는 곧 아침을 먹으러 그제야 방 밖으로 나왔다. 쿠라모치에게 아침운동처럼 흠씬 혼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와무라는 여전히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아침공기인 탓인지 바깥은 생각보다 싸늘했다.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몸을 곧게 세운 사와무라는 여전히 곰곰히 생각에 빠진 채로 식당 안에 들어섰다. 누구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생각은 사와무라가 밥공기 세 그릇을 비운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평소 입장부터 쩌렁쩌렁했을 사람의 기묘한 침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바로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하루이치나 카네마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식사를 끝마친 사와무라가 제 숟가락 끝을 입에 물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까지 확인한 하루이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이준 군, 무슨 일 있어?”
“응? 응. 그럴지도?”
“무슨 일인데?”
하루이치는 직구로 물었고, 동시에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있었다. 알게모르게 틀림없이 신경을 끌었을 터였다. 고요한 사와무라 에이준은. 하지만 그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사와무라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결론은 담백했는지, 금방 사와무라는 하루이치를 돌아보았다.
“하룻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예상못한 질문에 하루이치의 표정이 단박에 흔들렸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당혹스러워하는 친구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사와무라는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도 좋아하는데,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그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그 상황에 마주쳤다는 답답함과 초조함을 논리없는 말로 모조리 뱉어낸 사와무라는 은근한 기대를 담아 하루이치를 바라보았다. 마치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사와무라의 말을 들은 주변이 숨죽여 시끄러워지는 것은 들리지도 않는지, 사와무라는 눈을 빛내며 하루이치를 보고 있었기에, 하루이치는 결국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응. 전혀!”
“그런데... 그, 좋아...하고?”
“응!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은 당당하기까지 했다. 하루이치는 할 말이 없었다. 에이준 군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루이치의 머릿속에 제일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루이치 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카네마루나 후루야, 토죠의 경우도 같은 것을 떠올렸을 터였다. 하지만 역시,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가장 확신되는 것이 야구라는 점에서 이미 망한 것 같았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야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야구를 잊었더라면 지금처럼 조용할 리 없을 터였고.
그렇기에 하루이치는 조금 감탄마저 나왔다. 하루이치마저도 사와무라의 감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사와무라 에이준이었는데도.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사방팔방 내뿜는 것을 훨씬 잘 하는 사와무라건만. 그렇기에 하루이치는 물었다.
“생각나는 이미지라던가, 그런 건?”
“으음...”
사와무라가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허공을 헤메는 시선이 불확실하게 어느 한 지점을 응시했다. 얼굴을 찐빵처럼 일그러뜨리며 끙끙거린 사와무라는 딱 한 마디를 뱉었다.
“노란색.”
“노란색?”
하루이치가 되물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노란색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근처에 노란 머리카락이나 눈을 가진 사람 역시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진행되기 전에 사와무라가 말을 이었다.
“보고 있으면 눈을 땔 수가 없어. 뜨겁고... 흙 냄새랑... 땀 냄새가 나고. 뭔가 머리가 멍하고 아득한데 심장이 두근두근해. 굉장히 기분이 좋아. 계속 그렇게 있고 싶었고. 좋아해. 보고 있으면 계속 좋아한다가 가득 쌓였어. 그래, 그런... 기분이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낯뜨거워질 정도의 고백이었다. 그 감정을 제대로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그 경악을 이끌어낸 장본인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 감정은 아직도 제대로 제 안에 있건만, 누구에게 향하는지를 기억해낼 수 없어 괴로웠다.
누구였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로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보고 있으면 행복해졌고, 조금 화가 났지만 그래도 좋았다. 언젠가는 인정하게 만들어주겠다며 이를 갈곤 했던──
“뭐야,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사와무라는 막 안쪽으로 들어서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잘생긴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네 짓이냐?’ 시선이 그리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와무라는 깨달았다. 깨닫지 못할 수가 없었다. 상대에 대한 기억은 잃었어도 몸은 놀랄 정도로 정직하게 반응했다. 심장뛰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아.”
이 사람이었다. 사와무라 에이준이 좋아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