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미사와] 상승포자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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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정도 질질 끌어서...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냥 올리는 것으로. 조금... 조금 긴 글.
00.
이 세상에는 불치병이 하나 있다.
01.
미유키는 턱을 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닫힌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언뜻 보였다. 귓가에 닿아오는 것은 틀어놓은 라디오의 뉴스소리뿐이었다. [상승포자 바이러스의 감염자가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 호흡기를 통해 감염된다는 가설이 유력합니다. 감염자의 주변인들은 근처에 가까이 가는 것을 주의해주시고,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매일 텔레비전을 켜면 나오는 뉴스내용이었다. 미유키는 별 생각 없이 라디오 프로를 돌려버렸다. 상승포자 바이러스, 현재 불치병. 생방송으로 감염자의 사망 모습까지 나온 적 있었으니, 미유키도 감염자에 대해 본 적 있었다. 아주 조금씩 빛가루처럼 바스러지다가, 결국 부서지듯이 빛과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죽음이라는 것을 고려하자면 꽤나 끔찍한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소름이 돋았을 뿐, 미유키는 금방 그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도리어 미유키의 신경을 간지럽히는 상대는 따로 있었다. 제 동거인, 그리고 연인. 오랫동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는 상대. 이름은 사와무라 에이준. 미유키의 곧게 뻗은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 표정에 은근한 초조함이 묻어났다.
프로 선수라는 직업 탓에 미유키는 한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겨우 틈을 내어 발도장을 찍었을 때 얼굴을 보았던 사와무라는 어딘지 이상했다. 표정을 잘 숨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억지로 숨기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초조해보이기도 했고, 피곤해보이기도 했다. 은근히 미유키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 미유키는 제 입술을 자근거릴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 미유키는 한동안 긴 오프시즌이었다. 그 사이에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되내이며, 그는 집앞에 섰다. 묘한 긴장감이 그 몸을 타고 흘렀다.
괜찮아. ...괜찮아. 미유키는 두어번 되내이고 집의 문을 열었다. 벨을 한 번 누르자 답변 없이 문이 열렀다. 사와무라. 미유키는 그 이름을 부르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는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현관에서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안쪽에서 문을 열어줬다. 아무도 없을 리 없었다. 애써 정돈한 얼굴을 살짝 구기며 미유키는 거실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야 미유키는 자신이 원하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사와무라.”
미유키의 부름에 상대가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미유키의 시선이 그를 쓸고 지나갔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수척해진 안색이나 조금 마른 티가 나는 몸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유키의 표정에 문득 걱정이 스쳐지나갔다. 사와무라는 그것을 잡아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전과 다를 바 없는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미유키의 걱정이나 이제껏 했던 고민을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의 강력한 위력을 가진 더없이 반짝거리는 미소.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향해 양 팔을 뻗었다. 그 행동이 요구하고 있는 바는 명확했다.
“미유키, 이리 와서 나를 꼭 안아주십쇼.”
“어?”
“빨리.”
상상도 하지 못했던 조름에 미유키의 표정에 당황이 스쳐지나갔다. 사와무라 역시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그는 모른 척 미유키를 재촉했다. 잠시 망설였던 미유키는 곧 거부감 없이 사와무라에게 다가가 그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느리게 등을 쓸어내렸다. 품에 안기는 온기는 언제나 마음 깊은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사와무라가 제 등을 마주 끌어안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미유키는 위화감을 감지했다.
“미유키, 상승포자 바이러스라고 암까?”
“......”
이 말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 미유키의 영리한 머리가 순간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최악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동시에 가장 현실에 가까운 결론이기도 했다. 소리없이 희게 질리는 미유키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유키를 끌어안은 사와무라는 그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전염병이라는 소문은 있어도 확실한 건 아니라고 했슴다. 그래도 미유키가 싫다면 어쩔 수 없네요.”
“...잠깐. 잠깐만, 사와무라.”
“그래도 아직 약도 없는 병이라고 하고. 혹시 미유키까지 감염되는건 저도 싫슴다.”
“잠깐만...”
한 쪽이 따라가지 못하는 대화는 평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미유키가 품 속에서 사와무라를 때어냈다.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순순히 떨어지는 에이준의 무게가 낯설었다. 그래, 그가 느낀 위화감은 이것이었다. 프로의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사와무라는 오랫동안 야구를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을 선수였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니었고, 당연하게도 근육의 무게를 포함해 그 몸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 가벼웠다. 사와무라의 그 몸이. 그럴 리 없고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도.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는 한 번 씩 웃었다.
“이제 감염 삼 개월 정도 됐슴다. 남은 기간은 훨씬 짧다고 함다.”
말 안해서 미안함다. 그리 덧붙이는 사와무라를 보며, 미유키의 표정이 멍해졌다. 머리에 데드볼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 어딘가가 심하게 욱신거리는 것도 같았다. 아니 한 군데 무너졌나? 뻥 뚫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그것도 아니고...
미유키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헤어질까요?”
사와무라는 물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유키는,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것에 관계없이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사랑했다. 그러니까 놓을 수 없었다.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 미유키의 대답에, 사와무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도 다시 한 번 미유키를 끌어안고 그 어깨에 뺨을 기댔다. 미유키는 자신을 끌어안은 손길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02.
미유키는 제 손에 들린 종이들을 팔랑거렸다. 언제나 스코어북이 자리잡던 그 손에는 이제 다른 것이 들려있었다. 신문부터 시작하여 어디에서든 처음 보는 정보라면 모조리 뽑아 모아둔 상승포자 바이러스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리 정독해봐야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현재 불치병. 해약제 발명에 차도 미미함.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흰 종이 위에 빼곡히 적혀있는 사실들에 눈을 돌려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사와무라는 벌써 많이 가벼워진 상태였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그 발이 몇 센치 정도 허공에 떠 있을 때도 자주 있었다. 아무리 시즌 중에 정신없는 상태였다고는 해도 저 정도까지 진행되는 동안 투병중인 사와무라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과거의 자신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다. 가볍게 땅을 박차는 것으로 허공에 부드럽게 떠오르기까지 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염병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병이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대학에서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던 야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전염병이 아니라고 해도 야구를 그만두게 된 것이 당연할 정도였다. 몸의 무게가 달라졌고, 결국 던지는 공의 위력부터 달라졌을테니까.
병. 그것도 약도 없는 죽을 병.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무게와 숨을 쉴 때마다 퍼져나오는 포자를 볼 때마다 사와무라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유키는 어딘가 단단한 것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그 때 자신이 곁에 없었다는 것에 더더욱 그랬다. 또다시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키며 미유키는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사와무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야구를 그만둔 뒤부터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사와무라의 말처럼, 꽤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사와무라는 꽤나 책을 자주 빌려읽었다. 그는 이제 발목에는 모래주머니에, 양 주머니에는 돌들까지 채워넣고 자신이 아닌 몸의 무게를 무겁게 만들어놓고 나서야 안전하게 외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인데다가 혹시 모를 위험성도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와무라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의 단골손님이었다. 미유키로써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알 수 없는 책들이었지만.
사와무라가 좋아하는 순정만화와 닮은 연애소설도 있었고, 고전문학이라던가, 혹은 위인전기 같은 것도 있었다. 미유키는 몇 번 들춰보고는 그만두었지만, 사와무라가 특히 집중해서 읽는 책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며칠이면 한 권을 다 읽는 사와무라가 일 주일이 넘도록 끼고 있는 책이라면 좋아하는 책일 테니까. 책의 내용은 대부분 희망적인 것이었다. 장애를 극복하고, 병을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무언가를 극복해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내용들. 미유키는 그런 책을 보며 울고웃는 사와무라가 진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할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투구 배분을 하는 것보다 사람 마음 하나 읽는 것이 오천 배는 어려웠고, 더 이상 투수가 아닌 사와무라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은 그보다도 더 어려웠다.
그런데도, 웃어줘서 다행이다. 미유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책에 코를 박고 읽다가도 때때로 사와무라는 고개를 돌려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언제나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금갈색의 동그란 눈동자가, 고등학교 때와 달라지지 않은 앳되고 밝은 눈동자가 호쾌히 휘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모습을 볼 때면 꽉 막혀있는 것 같던 명치깨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사와무라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미유키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 사와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동그란 두상과 조금 거친 머리카락. 그 틈새로 보이는 하얀 귀와 뻗어내려오는 목선을 전부 눈에 담았다. 사와무라가 호흡함에 따라 부드럽게 번져나오는 포자가 빛나고 있었다. 기분나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03.
이제 어딘가에 줄을 묶어두거나 무거운 것을 몸에 달아놓지 않으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사와무라는 가벼워졌다. 동시에 호흡으로 퍼져나오는 포자의 양도 훨씬 늘어났다. 참 잔인할 정도로 죽을 때를 착실하게 알려주고 있는 꼴이었다. 미유키는 몇 번이고 괴롭게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정돈했다. 사와무라가 웃고 있는데 미유키가 한심한 꼴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모를 전염성이라는 것은 정말로 짜증나는 것이었다. 차라리 전염성이라고 못이 박혔더라면 단 둘이서 집에 틀어박혀 시간을 함께 보냈을 터였고, 비전염성이라면 야구장이던 어디던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사와무라와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이도 저도 아닌 지금의 상황은 사와무라의 마지막 시간마저 대부분 속박하고 있었다.
결국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답시고 사와무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바깥으로 나갈 때는 마스크까지 꽁꽁 싸맨 채로 나가는 도서관이라던가, 아니면 가끔 미유키의 손을 꼭 붙잡고 데이트를 나서는 것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상승포자 바이러스의 감염자들에게는 사람 역시도 위험한 대상이었다. 몸이 빛과 먼지로 흩어지며 고통없이 죽는다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도 적잖았고, 그로 인해 납치되는 감염자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뉴스도 종종 뜨고는 했다. 그 기사를 볼 때마다 덜컥 겁을 먹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사와무라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으니까.
미유키는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소파 위’에 떠 있는 모습이었다. 스스로 몸을 땅에 붙이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미유키는 소파에 주저앉아 사와무라에게 손을 뻗었다. 체온이 맞닿고, 가볍게 힘을 주자 그 몸이 이끌려 내려왔다. 사와무라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미유키를 보며 방긋 웃었다.
“하늘을 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슴다!”
“니가 무슨 동화 속 공주님도 아니고, 무슨. 땅에 잘 붙어있으라고.”
“공주님은 아니어도 뭐 어떻슴까!!”
정말인데!! 그렇게 소리치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운넘쳐서, 미유키는 소리없이 안도했다. 지금 사와무라가 하늘을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는 이유도 아마 미유키를 걱정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유키가 한 말 역시도 진심이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하늘에 떠 있는 사와무라는 참 현실감이 없어서, 덜컥 불안해질 때가 자주 있었다. 땅에 잘 붙어있어 줘.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 죽지 마. 정작 가장 중요한 속마음은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미유키의 손을 힐긋 보았다가, 자신이 앉은 미유키의 무릎을 보았다가, 미유키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동그란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가볍게 그 입술이 뺨에 닿았다. 쪽, 하고 입술이 피부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유키의 표정이 순간 멍해지는 것을 보며, 사와무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 금갈색의 눈에 한가득 개구쟁이같은 감정이 아로새겨졌다.
왼뺨에 한 번, 오른뺨에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몇 번이고 쪼아대듯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미유키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닿는 것은 심장에 무리가 갈 지경이었다. 쩔쩔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주제에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의 힘은 전혀 풀지 않는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는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표정 웃김다, 미유키. 그리 말하는 연인을 보며 미유키 역시도 씩 웃어버렸다. 한동안 그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자신만만하고 성격 나쁜 미소였다. 사와무라가 사랑하는 표정 중 하나.
미유키의 얼굴이 바싹 가깝게 다가왔다.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사뫄무라가 손끝으로 미유키의 입술을 꾸욱 눌렀다. 은근한 불안감이 그 표정에 어렸다.
“호흡기 전염성일지도 모름다.”
“상관없다고 말하면 화낼 거야?”
“......”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 쯤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면서. 사와무라의 표정에 미묘한 불만이 드러났다. 그 표정을 보며 미유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곧장 사와무라의 손을 잡아 내리며 그 입술에 자신의 것을 내리찍는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맞닿은 입술을 혀로 슬쩍 핥아올리며 무심코 생각했다. 이대로 사라져버릴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텐데. 아니, 시간을 멈출수만 있다면. 그것도 아니면...
허튼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고,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아랫입술을 살살 자근거리는 것으로 제 머릿속의 온갖 잡념들을 떨쳐버리려 애를 썼다. 그게 미유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04.
자고 있는 사와무라를 보는 것은 미유키에게 심란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몸의 긴장이 상당히 풀어진다는 의미인지라, 사와무라는 자연스럽게 공중에 뜨고는 했다. 미유키는 그런 사와무라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린아이보다도 훨씬 가벼워진 무게가 괴로웠다. 더 강하게 안으면 이 몸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이제 감염 말기. 상승포자 바이러스 말기 환자들은 강하게 움켜쥐면 부서지고는 했다. 먼지가 되어서, 빛이 되어서.
얼마나 더 오래 사와무라를 볼 수 있지? 미유키는 정답 없는 의문을 중얼거렸다. 자고 있는 사와무라는 편안해보였다. 부드럽게 그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벼 미유키는 이마를 가져다댔다. 가볍게 서로의 이마가 맞닿았다. 코 앞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었다.
조금 원망스러울 정도로 사와무라는 멀쩡했다. 통증이 없기 때문인지, 이미 공포를 극복했기 때문인지는 미유키도 몰랐다. 다만 언제나 태양처럼 환히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미유키도 결국은 얼굴에 미소를 걸 수밖에 없었다. 미유키가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언제나 지금처럼 사와무라가 자고 있을 때처럼,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가끔 앓아도 아프지 않게, 종종 싸워도 행복하게, 그렇게 오래오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옛날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째서, 왜 이렇게 힘든 소망이 되어버린 거지?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등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05.
사와무라는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야구 시합의 재방송을 틀어주고 있었다. 천장에 가까워지지 않도록 한 쪽 팔을 소파에 묶어 놓은 사와무라는 유독 기분좋아 보였다. 미유키가 무심코 안도할 정도였다. 아침을 차리기 위해 부엌에 들어가있는 미유키에게도 어렵지않게 들릴 정도의 성량으로 사와무라는 노래하고 있었다. 즐겁게 살랑이는 음은 히팅마치였다. 미유키의 네라이우치.
동시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경기에도 미유키가 나오고 있었다. 사와무라가 사랑하는 야구복에 고글을 쓴 포수 차림의 미유키. 이미 생방송으로 본 경기였고, 결과가 어떤지도 알고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처음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얼굴로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발끝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여전히 사와무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미유키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미유키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대신 설명해주었다. 손끝도 머리카락도 전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팔목을 묶고 있던 끈이 묶을 대상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끝에서부터 조금씩 몸이 빛가루와 먼지가 되어 산화하고 있었다. 에이준은 그 황금색의 눈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보았다가, 부엌 방향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의 미유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상대 투수의 공을 골라내고 있었다.
미유키, 사와무라의 입이 그리 벙긋거렸다. 차마 목소리내어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쓰린 표정이 지어졌다.
부른다면 미유키는 틀림없이 달려올테고, 자신의 모습을 볼 것이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사와무라는 물끄러미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낮게 흥얼거리던 콧노랫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기분좋게 흥얼거리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몸은 점점 더 많이 부서져가고 있었다. 이게 끝이라고, 사와무라는 알 수 있었다.
미유키, 미유키... 사와무라가 속으로 끊임없이 그 이름을 되내였다. ...카즈야.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사와무라, 너무 과하게는─…”
미유키의 목소리가 단박에 흐려졌다. 틀림없이 제 연인이 노래부르고 있던 거실에 남은 것은 텔레비전의 소음 뿐이었다. 홈런을 쳤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회자의 목소리만 욍욍 울렸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텅 빈 거실을, 미유키는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사와무라?”
대답이 없었다.
“...사와무라?”
대답할 사람은 사라져 있었다.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06.
장례식은 간소했지만 찾아와준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뼛가루 한 줌 남기지 못한 죽음이었다. 남은 흔적이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남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미유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07.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남기는 게 없는데 쓸쓸하지 않겠어? 그리 묻는 미유키가 도리어 더 괴롭게 표정을 찡그리고 있어서, 사와무라는 웃어버렸다. 보이기에 한 점 거리낌 없는 밝은 미소였다.
미유키가 기억해줄텐데 뭐가 문제임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얄밉다고 웃어 넘겼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텅 빈 집의 소파 위. 사와무라가 마지막으로 존재했을 그 공간에 누워 미유키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사와무라는 언제나 불현득 미유키에게 찾아오고는 했다.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선명하게. 그리고 잊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게.
정말이지, 못된 녀석이었다. 더없이 고약했다.
08.
스코어북이라면 모를까, 책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미유키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은 흔적을 밟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와무라가 자주 찾아가던 도서관에서, 미유키가 기억하고 있는 책들을 모조리 빌려읽기 시작했다. 죽기 전 사와무라가 읽었던 책들이었다. 그것을 읽으며 사와무라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은 특히 사와무라가 좋아했던 것이었지만, 중반을 넘게 읽고 있는 지금까지도 미유키는 그 이유를 영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등장인물은 꽤나 사랑스러웠다. 미유키도 등장인물로서의 매력은 느끼고 있었다. 내용도 적당히 밝고 희망찼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갈수록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성의없어졌다. 미유키는 살풋 미간을 찡그리고 책을 훑어내려갔다. 그래, 단언컨대 미유키의 취향은 아니었다.
사와무라, 너는 이것의 어디가 그리 좋았던 거야? 대답없는 물음을 중얼거리던 미유키의 손길이 문득 멈춰섰다. 책 한귀퉁이에 새까맣게 쓰여진 낙서가 눈에 띄었다. 미유키가 책을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댔다. 잔뜩 흐트러진 글씨는 낯익은 것이었다. 미유키의 미간이 짧게 찡그려졌다. 글씨를 조금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였다. 펜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이 다 빠졌었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형편없는 글씨로 쓰여있는 문장은 딱 하나였다.
「조금만 더 오래, 미유키랑 같이」
살고싶어. 차마 덧붙이지 못했을 끝맻음을 속으로 삼켰다. 천천히 책을 덮어 멀찍이 밀어넣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자 어둠이 찾아왔다. 그 위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모습이 있었다. 제 연인의 모습이. 그 미소가. 그 온기를 품에 끌어안고 다시 한 번 속삭이고 싶었다.
“보고싶어, 에이준...”
네가 없다.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