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턱을 괴고 내뱉는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제 말이 틀림없다는 확신.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단박에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 “하아?” 하고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을수밖에 없었다. 손에 들려있던 게임기가 그대로 바닥에 내려졌다. 쿠라모치가 한 말이 딱히 어려운 문장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영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한 후배를 보며 쿠라모치는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사와무라 너, 엄청 미묘하게 미유키에게 사근사근하다고.”
“...제가? 말임까?!”
이, 무슨, 말도 안 돼! 거짓말하지 마십쇼!! 온 몸으로 거부반응을 드러내는 사와무라를 보면서도 쿠라모치는 확신어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도리어 제게 건방진 말을 읊는 사와무라에게 응징의 의미로 한 대 걷어차주기도 했다. 쓰읍, 짜식이 어디서 선배한테. 얻어맞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사와무라를 내려다보며 쿠라모치가 한 번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태생적으로 그리 곱지 않은 인상과 결합하여 굉장히 까칠한 분위기가 드러났지만, 사와무라는 아랑곳않고 징징거렸다. 쿠라모치에게 격렬하게 해명을 요구하는 몸짓이었다.
귀찮게시리. 괜히 말했네.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쿠라모치는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사와무라를 내려다보았다.
“본인은 무자각이냐?”
“제가 그럴리가 없슴다!!”
“뭐... 본인이 그리 믿고싶다면 믿던가.”
짧게 코웃음치는 모습이 절대 사와무라의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억울해졌다. 내가 뭘 했다고!! 맛있는 거 먹을 때 미유키 몫을 하나쯤 챙겨준 것도! 지나가면 꼬박꼬박 불러서 인사하는 것도! 없으면 찾는 것도! 다 그냥 선후배 사이에서도 할 수 있는 거잖아! 아니지, 배터리니까 더더욱!!
억울함과 항변의 의지로 번쩍번쩍 빛나는 그 눈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쿠라모치의 말을 납득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래, 바카무라는 그냥 멍청하게 있어라. 쿠라모치는 오래 끌지 않고 산뜻하게 놓아주었다. 깊게 신경쓰면 본인만 피곤해진다는 것을 쿠라모치는 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물론 그 죽일 놈의 정 때문에 완전히 신경을 끊기는 어렵겠지만.
듣지도 않는 쿠라모치에게 열심히 뭐라뭐라 씨알도 안먹힐 말들을 하는 사와무라를 그는 다시 한 번 걷어차주었다. 그것으로 대화를 강제로 끝마친 쿠라모치는 대놓고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게임에 집중하는 사와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은근히 호의를 내보내던 말던, 그게 투수로서 포수에게 보내는 어필이던 혹은 뜻모를 다른 감정 탓이던 쿠라모치는 전혀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만,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쿠라모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알 바는 아니라고 몇 번이고 자기세뇌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결국 하나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미유키의 태도였다.
사와무라가 묘하게 미유키를 챙기는 호감을 보인다면 미유키는 정 반대였다. 묘하게 사와무라에게 냉랭한 면모가 있었다. 조금 덜 챙기고, 조금 덜 신경쓰고. 물론 쿠라모치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의 차이였고, 포수로써 투수를 챙기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서 야구부 대표 둔탱이 사와무라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쿠라모치는 그것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내가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욕하면 기분 나쁜 원리라고 해야 할까, 제가 걷어차고 다니는 못난 후배놈이지만 남에게 홀대당하는 것을 보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다. 이래서 정이란 게 문제라니까. 쿠라모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신경쓰기 싫다고 중얼거려도, 결국 연관된 것이 사와무라고 미유키라는 사실에 제가 끼어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나한테 감사해야 할 거다, 사와무라. 들리지도 않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쿠라모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
“사와무라가 너한테 잘못한 거 있냐?”
쿠라모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유키의 앞자리로 옮겨가 물었다. 교과서를 집어넣자마자 스코어북을 꺼내 살펴보고 있던 미유키가 고개들어 쿠라모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 얼굴에 쿠라모치는 머릿속에 세워놓았던 하나의 가정을 지웠다. 사와무라야 워낙 바보이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미유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미유키도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쓰는 놈은 아니었다만. 쿠라모치가 가볍게 인상을 구겼다. 그럼 뭔데?
“너 사와무라한테 묘하게 냉랭하잖아.”
“내가 언제?”
“시치미 떼지 마라.”
어디서 아닌 척이야. 너도 사와무라도, 태도에 온도차이 있다고.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쿠라모치는 까칠하게 확답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미유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리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은근한 곤란함이 섞인 그 표정에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제 태도를 본인이 모르던 멍청이 후배와는 달리, 이 녀석은 고의로 그렇게 행동하던 모양이었다.
왜? 쿠라모치는 동시에 의문을 가졌다. 멍청하다 바보다 욕은 하고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기본적으로 좋은 녀석이었다. 어딜 가든 어떤 녀석에게든, 미움받지는 않을 타입. 더군다나 투수인 이상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싫어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사와무라를 싫어하는 건 아냐.”
제 뒷목을 쓸어내리며 미유키가 말했다. 쿠라모치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말을 꺼내면서도 여전히 곤란해하는 기색이 짙었지만, 쿠라모치는 그걸 무시했다. 시선으로 대답을 독촉하고 있었다. 무언의 강요를 받으며 미유키는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비어있는 운동장이 보였다.
스코어북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미유키는 망설였다. 정확히는 쿠라모치에게 말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을 터였다. 한 번 틈새를 보여주는 것으로 많은 것을 눈치챌 정도로 쿠라모치는 예민한 사람이었으니까. 몇 번이고 그리 주저하던 미유키는, 결국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지금보다 더는 곤란하니까.”
딱 한 마디. 그 뒤로 입을 다물어버린 미유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많은 것을 가정해두고 있던 쿠라모치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눈치채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동시에 인정사정없이 표정이 구겨졌다. 듣게 된 지금 확신컨대, 들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역시 깊게 참견하는 게 아니었어. 뒤늦은 후회였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쿠라모치를 배웅하지 않으며 미유키는 스코어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숫자들의 나열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스코어북을 보며 넋을 놓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방금 전의 대화가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다. 냉랭하잖아. 쿠라모치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이제 점점 더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날지도 몰랐다. 그 정도는 곤란해. 미유키는 입술을 짓씹었다.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할 리 없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지금보다 더 좋아하게 된다면, 곤란하니까. 미유키는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에게 은근한 호의를 보이는 사와무라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사와무라가 아직은 자각하지 못한 감정이노라고. 그렇기에 미유키는 반대로 냉정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은근하고 티나지도 않는 차이였지만, 그게 미유키의 최선이었다. 사와무라가 깨닫는다면 자신 역시도 지금보다 훨씬 더 참기 힘들어질테니까. 좋아해서는 안될 사랑이었고, 티내서도 안 되는 사랑이었다. 시작하지 않는 게 좋은 마음이었다.
내가 너를 더 좋아하게 만들지 말아줘. 헛된 소망이었다.
쌍방 짝사랑 미사와... 라고 해야 할지, 짝사랑 무자각 사와무라 >< 짝사랑 자각(+ 사와무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자각한) 미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