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썼던 이쪽(http://milkyway0218.tistory.com/117)의 연성에 이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 내용입니다.
언제나처럼 캐붕주의.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감사합니다 umu)
미유키 카즈야(3학년, 포수)는, 남들이 들으면 의외라고 할 지도 모르겠으나 고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었다. 물론 그 잘생긴 외모며 야구실력에서 오는 명성 따위로 인기는 많았고, 발렌타인 데이같은 이벤트성 날에는 책상에 초콜릿이 쌓여있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손꼽을 정도로 적다는 의미였다. 그건 미유키가 온전히 야구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온 탓도 있었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던데다가, 어릴 적에는 또래보다 작았던 탓도 있었다. 물론 가장 뒷쪽보다는 앞의 두 쪽의 이유가 훨씬 컸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삶이었건만. 미유키는 제 시선을 애써 추스르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사와무라를 보고 있는 제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게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속에서 은근한 열불이 치솟기도 했다. 아니, 내가 왜. 딱 그런 심정이었다.
고백과 거리가 먼 삶이었다고는 해도 용기있는 소녀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고, 미유키도 그런 것을 완전히 받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주일 전에 들었던 그 고백만큼 황당한 것도 없었다. 자판기 앞, 제 몫을 사러 나온 미유키와 쿠라모치의 심부름을 나왔던 사와무라. 자판기가 많은 것도 아니니 그 앞에서 마주친것은 딱히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 서로 더 나눌 대화도 없었고. 제 것만 뽑아 돌아가려는 미유키의 등에 대고, 사와무라가 한 마디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좋아함다, 미유키 선배.’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마자 미유키는 어딘가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연습 중이 아니라 홀로 제 방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벽에 이마를 대었을 터였다. 이런 기분도 벌써 몇 번째 일이었다. 딱 한 마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달라붙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을 떨쳐낼 수 없는 이유로 또 하나를 꼽자면, 지금 상황이 아닐까.
고백을 받았을 때, 그 뒤에는 이어지는 말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귀어 달라거나, 뭐 그런 것들. 미유키도 그런 말을 기다렸었다. 딱 잘라 거절을 하던, 생각을 더 해보겠다는 말을 하던 그 다음의 순서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사와무라는 그 한 마디만 던진 채 미유키를 뒤로 하고 홀랑 5호실로 떠나버렸고, 미유키만 혼자 남아 그 말에 대해 계속 곱씹고 있는 형상이었다. 좋아한다. 좋아합니다.
계속 고민만 하는 것도 답답하여 사와무라를 붙잡았던 것도 일 주일 전의 일이었다. 사와무라의 행동에 변화가 없어서,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심정도 없지는 않았다. 차라리 환청이었다던가 하는 쪽이 훨씬 편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기대도 사와무라가 보기 좋게 부숴버렸었지만.
‘네, 그런 말 했었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 방에 박살냈었지.
‘...? 내가 미유키 선배를 좋아하는 거랑 선배가 뭔 상관임까?’
이래서 바보란! 미유키는 제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리며 사와무라를 노려보았다. 정작 미유키를 고민에 빠뜨린 장본인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사와무라를 보는 미유키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도 있었다. 미유키는 고개를 돌렸다가 문득 자신을 보고 있는 코미나토와 눈이 마주쳤다. 졸업한 형이 아닌 동생 쪽. 움찔 어깨를 떠는 모습이 아무래도 처음부터 전부 본 것 같은 모양새였던지라, 미유키는 멋쩍게 웃어버릴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코미나토의 표정이 유독 곤란해보였던 이유를, 미유키는 그 날 저녁 깨달을 수 있었다. 듣게 된 목소리는 우연이었다.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뒤따르는 우렁찬 목소리. 코미나토와 사와무라의 대화소리였다.
“에이준 군, 오늘 미유키 선배가 꽤 노려보던데...”
“미유키 선배가? 왜지? 나 뭐 잘못한 거 있던가, 하룻치?”
“아니, 일단 그...”
고백에 대한 것부터가 문제이지 않을까? 코미나토의 목소리에 미유키는 무심코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민망해졌다. 코미나토도 알고 있었나. 그러고보니 이제껏 사와무라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자 이제는 불안해졌다. 사와무라의 성격이며 태도로 보아... 이제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지 걱정해야 되는건가? 미유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에이준 군. 고백을 했다고 하면 대답은 들었어?”
“무슨 대답?”
“뭐... 승낙이라던가, 거절이라던가. 그래서 사귄다던가, 마음정리를 한다던가...?”
미유키는 정말 진심으로 코미나토를 향해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사와무라와 후루야를 잘 다뤄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기 짝이 없었건만, 경기에서 잘 쳐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건만, 지금은 정말 기특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거! 미유키는 정말 진심으로 사와무라에게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쩌다보니 이런 식으로 듣게 되었지만. 선배이자 주장이 되어서 후배들 말을 엿듣고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미유키는 들려올 대답에 집중했다.
“에이, 무슨 대답을 들어!”
“아니, 들어야지.”
들려오는 바보같은 말에 순간 울컥할뻔한 미유키는 곧장 이어진 코미나토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료 상을 닮아서인지, 저 핏줄의 천성인지 단칼에 할 말은 똑바로 하는 저 성격에 감사했다.
“으음... 그치만 그냥 내가 좋아한다고 미유키 선배에게 말한 것에 불과하잖아? 사귄다느니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고, 바라지도 않았고... 미유키 쪽이 어떻든 그냥 내 쪽에서 계속 좋아하면 되는 거고... 끄응, 하룻치. 너무 어려운 건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거야!”
“에이준 군, 너무 단순해.”
가벼운 타박을 건내기는 했지만 동시에 코미나토는 적당히 상황을 깨닫고 정리한 모양이었다.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그 영향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와무라의 말을 듣던 미유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저 야구 바보는 사귈수도 있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은 채로, 그냥 말 그대로 미유키에게 말만 해 둔 것이었다. 좋아하노라고. 연애는 한 톨도 머릿속에 넣어두지 않은 일방적인 밀어붙임이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들으며 미유키는 소리없이 미간을 찡그렸다. 투수가 이기주의자인 것은 포수인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예외의 일 아니겠는가. 사랑이라는 것은, 물론 미유키 카즈야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굉장히 우습기는 하다만,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어찌 되던 두 사람이 연관된 일인데. 더군다나 짝사랑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내뱉은 고백이라면 더더욱.
물론 그 순간에는 거절할 생각이었기는 하지만, 아니 그보다 왜 사귈 생각이 없어? 내가 뭐 어디가 모자라서. 아니아니, 일단 고백해온 쪽은 그쪽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