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마오] 약속
앙스타 전력 60분. 「어린 시절의 장래희망」
“리츠, 일어나라니까?”
푸념에 가까운 말을 내뱉으며 마오가 가볍게 리츠의 몸을 흔들었다. 당연히 이불 속의 리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굼벵이처럼 이불 속에 파묻혀서는 미동도 없는 리츠의 모습에 마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애초에 리츠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아이돌의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한가한 주말이었으니 일찍 깨울 필요도 없었지만, 자고 있는 리츠를 찾아와서 깨우는 것은 오랜 버릇같은 것인지라 오늘도 그 버릇이 발동된 것에 가까웠다. 마오는 두어번 더 리츠를 흔들다가 손을 때어냈다. 그가 아침에 약한 것 정도야 마오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 이 정도면 제 버릇에게 성의표현은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리츠를 깨우는 목소리가 잦아들자 방에는 단박에 침묵이 찾아왔다. 집중해봐야 들리는 것은 새근새근 일정하게 들려오는 리츠의 숨소리뿐이었다.
...이제 뭘 하지? 마오가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짧은 고민에 빠졌다. 원하던 원치 않던 언제나 바쁘게 살아가는 마오였지만 오늘은 정말 유독 한가한 날이었다. 학생회의 일은 어제 케이토 선배 덕분에 완전히 끝낼 수 있었고─물론 주말이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오겠지만─, 그 외에 딱히 부탁받은 일도 없었다. 편안하게 쉴 수 있겠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꽤나 신이 나 있었던 것 같지만, 정작 당일이 되니 몸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게 낯설었다. 몇 번 손을 달싹였던 마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고 있는 리츠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리츠, 네 방 좀 둘러봐도 돼?”
“으음...”
“괜찮아?”
“...마 군 좋을대로...”
마음대로 해... 웅얼거림에 가까운 허락에 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크게 한 번 방을 돌아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니 방 내 방 구분없이 놀았기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 눈 감고도 훤히 꿰고 있었지만, 중학교 무렵부터는 조금씩 그런 일이 줄어들어서, 지금에 와서는 리츠를 깨우러 들어올 때가 아니면 방에 잘 걸음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는 등교준비에 바빠 이렇게 한가하게 방을 둘러볼 정신머리따위는 남아있지 않고 말이다. 마오는 새삼스럽게 방을 찬찬히 살폈다. 눈에 익은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뒤섞여 있어서 유독 낯설었다. 마오가 손을 뻗어 리츠의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쥐어들었다.
어렸을 때는 리츠가 사쿠마 선배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마오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리츠와 소꿉친구인것과는 별개로 딱히 레이와 마주칠 일이 없었던 마오는 그 사진으로 처음 레이의 얼굴을 익혔었다. 액자에 넣어 둘 정도로 리츠가 꽤 좋아했던 사진이었다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자리잡은 건 나이츠의 사진이었다. 다섯이 같이 찍은 것은 아니고, 잡지에 컨셉사진으로 찍혔던 것을 적당히 잘라 넣은 것 같았다. 마오가 액자를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마오와 리츠가 함께 찍었던 어린 시절의 사진만 예전과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눈대중으로 겉만 훑는 방구경은 금방 끝날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서랍 하나하나를 다 열어보는 것은 마오로써도 딱히 내키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결국 리츠를 깨우던가 학교에 등교해볼까 고민하며 마오가 침대 옆에 털썩 앉았다. 바닥을 짚은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어라? 반 쯤 침대 밑에 몸을 숨긴 종이를 꺼내들며 마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약간 색 바랜 하얀 종이는 투박한 공지였다. 학부모 총회...? 이거 초등학교 때 거잖아? 순간 기가 찬 얼굴이 되어 마오가 리츠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기분좋게 자고 있는 소꿉친구는 전혀 시선을 못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마오는 자연스럽게 타박을 입에 담았다.
“리츠, 초등학교 가정통신문을 왜 가지고 있어? 이런 건 제때제때 버리라고.”
“으~응?”
“이게 대체 언제 거야? 이거 버린다?”
몇 학년 때지? 리츠가 3학년인가? 그럼 내가 2학년 때? 마오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가정통신문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2학년인 지금에 와서 초등학교 2학년 무렵 가정통신문은 무척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이건 왜 아직 갖고 있는 거지. 마오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곳에나 꿍쳐놓은 것이 발굴되었다기에는 리츠의 방은 꽤 깨끗했다. 사쿠마 선배를 방에 들이기 싫으니 리츠도 꼬박꼬박 제 방이 더럽지 않을 정도로는 청소했을 터였다. 이런 것이 이렇게 오래 발견되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그렇다면 리츠가 버리지 않게 챙겼다는 말이었다. 사고가 거기까지 진행될 무렵, 하얀 손이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마 군, 버리면 안 돼~.”
“리츠, 깼어?”
“아니, 다시 잘 거야...”
하암. 짧게 하품하는 모양새가 정말로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럼에도 몸을 일으켰다는 사실 하나가 놀라워 마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눈으로 저를 보는 마오를 마주하며 리츠가 느릿하게 미소지었다. 나른하니 잠에 취한 미소였다. 몸은 여전히 이불에 파묻혀있는데다가 머리카락도 부스스했지만 두꺼운 커튼이 쳐 진 어둑한 방 안의 리츠는 사쿠마 형제 특유의 오묘한 매력을 고스란히 흘리고 있었다. 반 정도 떠진 붉은 눈으로 저를 빤히 보는 리츠의 시선이 어쩐지 진득해서, 마오가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거 왜 안 버리는 거야? 중요한 건가?”
“기억 안 나, 마 군?”
이거. 리츠가 마오에게서 빼앗은 가정통신문을 빙글 돌렸다. 하얀 종이에 검은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가 쓰여있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조금 못생긴 글씨였다. 사쿠마 리츠. 사쿠마 마오. 그렇게 쓰여있었다. 마오의 뺨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 반 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리츠의 이름은 본인이 썼겠지만, 글씨체가 다른 제 이름은 어린 시절의 자신이 쓴 글씨였다.
이걸 언제? 반 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자 리츠가 여름에, 장래희망. 하고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에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기억은 마오의 몫이었다. 짧은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기억났다. 리츠가 저 가정통신문을 받았던 무렵 2학년이었던 마오는 미래 장래희망에 대한 가정통신문을 받았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뭘 해야 할 지 몰랐던 마오에게 리츠가 끈질기게 요구했던 기억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나중에 뭘 해도 좋으니까, 꼭 내 신부도 해 줘. 마~군.
으아아. 마오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과거 지금보다 보송보송하고 사랑스러웠던 어린 리츠의 집요한 밀어붙임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까지 기억나버린 탓이었다. 그대로 방과후 리츠의 가방에 있었던 가정통신문 뒷면에 꾹꾹 이름을 눌러썼던 것마저도. 언젠가 이렇게 해 주겠다는 약속에 가까웠다. 그 뒤로 일주일 정도 내내 신경썼던 것 같지만, 한 번도 리츠가 말을 꺼낸 적 없어서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이걸 왜 아직도 갖고 있는 거야...”
한탄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작은 목소리가 애처롭게 흘러나오는 것에, 이불 속에 들어갔던 리츠가 빼꼼 얼굴만 내밀고 곱게 웃었다. 장난기 조금 섞인 미소가 짖궂었다. 예쁘게 지어진 미소가 마오를 콕콕 찔렀다.
“그야, 마 군이 처음 써 준 혼인증명서고~?”
“그렇게 말하지 마, 리츠!”
“언젠가 또 써줄거지?”
“......그런 거 몰라!”
거부는 안 하네, 마 군. 리츠가 이불로 제 입가를 가리고 씩 웃었다.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마오의 모습이 조금 어두운 방 안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목까지 차오르는 만족스러움을 꿀꺽 삼키며 리츠가 기분좋게 잠을 청했다. 꽤 즐거운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