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카오] 너의 기적 5
세상을 만들었던 순간부터 떠받들어진 물의 왕이라고 해 보았자 대단한 거 하나 없었다. 기적도 내려줄 수 없는 왕 따위, 일견 꼴사나울 뿐이었다. 사람 하나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왕이라니. 한심해요... 카나타는 몇 번째일지 모를 비난을 스스로에게 쏟아냈다. 중얼거려봤자 비참하기만 했지만 그 감정 자체가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었다. 하얀 발가락으로 모래사장에 몇 번째일째 모를 흔적을 남겼다. 햇볕이 고스란히 내리쬐는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익어버릴만큼 뜨거웠지만 물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를 쓰다듬어줬던 카오루가 무슨 생각을 하며 떠났을 지 짐작도 가지 않아서 겁이 났다. 앞으로 다시는 카오루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요? 카나타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받을 수는 없었다. 다만 확신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덜컥 겁을 먹을 만큼 무섭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하아.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뱉어내는 순간이었다. 카나타의 위로 엷은 그늘이 졌다. 머리 위에 얇은 겉옷이 덮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빛을 등지고 그림자 진 사람의 형상이었다. 빛을 등진 탓에 그림자가 진 금발 머리카락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동시에 누구보다도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카나타가 숨을 삼켰다.
“「카오루」...?”
“뭐 하는 거야, 카나타 군. 날씨도 더운데 바다에도 안 들어가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그늘로 손을 잡아끄는 사람은 진짜로 카오루였다. 어라? 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이는 카나타를 보며 카오루가 웃었다.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와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작게나마 정말 웃는 얼굴이어서, 카나타는 이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답하는 카나타를 보며 카오루가 다시 손을 이끌었다. 카나타가 거부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조급하게 그 뒤를 잰걸음으로 쫒았다.
“「어디」에 가는 건가요, 카오루?”
“장에. 이번에 꽤 큰 장이 섰거든.”
기우제 전에 열리는 마지막 장이라 엄청 크게 열린 모양이야. 그리 말하는 카오루는 앞장 서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만큼은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이 상냥한 카오루의 목소리 그대로라서, 카나타는 내심 안도해버렸다. 어찌 굴어야 할 지 몰라 쩔쩔매면서도 카오루에게 붙잡힌 손이 따뜻해지는 게 좋았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는게 조금 신경쓰이는지, 단단히 손을 고쳐잡는 카오루의 손길에 카나타도 생각을 지우고 굳게 마주잡았다. 뜨거운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카오루의 온기라고 생각하면 마냥 좋았다.
마을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꽤 길었다. 카오루는 이런 길을 따라 오가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꽤 옛날에 카오루를 본 뒤로 내내 그 바다에 머물렀지만 마을로 걸음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혹여 바다를 비운 사이 카오루가 찾아오면 어쩌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거는 순간에도 이렇게 손을 잡고 마을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는데. 카나타가 고개돌려 카오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앞서 걷던 카오루의 발걸음은 카나타에게 맞춰 조금 늦춰졌고, 뒤따라 걷던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맞춰 조금 걸음을 재촉했기에 이제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자박자박 걷다가도 시선을 느끼면 돌아보아주는 카오루의 옆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언제나 반짝거리는 머리카락도, 별을 빻아 가루를 내어 뿌려놓은 것 같은 눈도 제대로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니 머쓱하다는 듯 웃는 얼굴도 시야에 한가득 들어찼다. 바로 이곳에 있었다. 카나타의 뺨이 행복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장이란 건 정말 대단하구나. 카나타는 소리없이 감탄했다. 마지막으로 인간들 사이에 끼어들었던 게 몇 년 전이더라?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인간을 좋아하여 그 사이에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는 다른 두 왕과는 달리 카나타는 물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창조를 전담하는 그가 세상을 만들고 삶을 전담하는 와타루가 세상에 생명을 뿌리면 카나타는 레이가 이 세계를 소멸시킬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바다 속에서 잠을 잤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 안 되니 해류에 몸을 맡기고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카오루를 만난 건 그야말로 수많은 우연이 겹친 운명이었다. 한 번 강하게 카오루의 손을 맡잡은 카나타가 곧 그것을 놓았다. 무관심하여 지나친 사이에 인간들은 그들끼리 또 발전해있었다.
“카오루, 「이건」뭔가요?”
“그건 인형. 실로 짜서 만든 거네.”
“「이것」은요?”
“대나무로 만든 공이야. 발로 차면서 노는 거.”
호오. 카나타가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저번 세계였던가 저저번 세계였던가.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아주 어렴풋하게 들었다. 다른 세계를 만들고 같은 인간을 만들면 아주 다르면서도 닮은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지금도 재미있었다. 카나타가 물건들을 매만지며 즐거워하는 동안 카오루도 엷게 웃었다. 그리고 소리없이 장을 둘러보았다. 원래라면 음식이나 농작물을 파는 가게가 가장 많았을텐데, 눈에 띄게 수가 줄어있었다. 가뭄의 여파였다. 카오루가 소리없이 쓰게 웃었다가 금방 표정을 지웠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카나타야 그 전설 속의 왕 중 한명이니 인간들의 수근거림따위는 신경쓰이지 않는 것 같지만 카오루가 신경쓰였다. 카나타의 옷차림도 꽤나 눈에 띄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카오루였다. 여러가지 이유로 지금 이 영지에서 영주의 막내아들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은근히 닿아오는 시선에 감정이 가득했다. 이해는 했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이거 쓰고 있어, 카나타 군.”
“어라? 「이건」 뭔가요, 카오루?”
“하오리. 명주로 짠 거야.”
너무 눈에 띄어서 안 되겠다. 얼굴은 가리고 적당히 빠지자. 골목길로 잡아끄는 카오루의 손길에 카나타가 급하게 머리 위에 덮어진 옷을 정리했다. 머리카락을 가리고 웃옷도 거의 가려졌다. 카오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빠른걸음으로 성큼성큼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카오루는 이 근처 지리에 익숙해보였다. 카나타로써는 길을 찾을 엄두도 나지 않는 골목이었다. 왼쪽 오른쪽 방향이 어지럽게 꺾였다. 두 갈래는 물론이요 세 갈래 길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을 보며 카나타가 카오루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한 번 놓치면 바다로 돌아가기 전까지 절대 못 본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는 의문만 갖고 카오루를 졸졸 쫒아다니다가 문득 그의 걸음이 멈췄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놓고 카오루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라. 카나타는 잠깐 망설였다.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요? 허락받지 못한 불청객이 들어갔다가 카오루에게 또 미움받는다면 그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되어버릴 터였다.
입장은 단박에 포기하고 문가 근처에서 하늘구경이나 하기로 결정했다. 흙놀이를 하거나 하늘을 보며 넋을 놓거나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카오루는 금방 나왔다. 카나타의 머리카락을 가린 하오리가 치워지고 그 목에 무언가 걸렸다. 카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익숙한 촉감이었다.
“자, 선물.”
“「카오루」...?”
“이제껏 내내 받았으니까.”
생각해봤는데. 나도 뭐 하나 줘야겠다 싶더라고. 전부 카나타 군에게 받은 걸 재료로 쓴 거야. 카나타가 제 목에 걸린 것을 천천히 매만졌다. 세공된 진주와 산호로 촘촘히 장식된 목걸이였다. 카나타가 하나 둘 카오루에게 쥐어주었던 것이었다. 카나타가 고개를 들어 카오루를 보았다. 조금 쑥쓰러운 것처럼 웃는 카오루가 보였다. 상냥한 카오루. 다정한 카오루. 정말로 좋아하는 카오루...
카나타가 손을 뻗었다. 그 몸을 덥석 끌어안아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한 품 가득 들어차는 온기와 조금 당혹스러운 듯 내는 목소리가 모두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