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토모] 불협화음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겼어요.”
마시로 토모야는 히비키 와타루의 앞에서 덤덤히 고했다.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몸까지 섞었던 남자의 앞에서. 말은 무참한 회색이었고 더없이 건조했다. 히비키 와타루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의자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던 와타루를 토모야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드문 눈높이였다. 당혹스러움을 능숙하게 감추고 그저 무심함을 가장하여 토모야를 보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단지 물끄러미 와타루의 눈을 응시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담긴 감정의 색을 읽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했던 말을 내뱉은 토모야이기에 잘못 짚을까 두려워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Amazing, 그렇군요.”
내뱉는 말은 그런 것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지만 남은 것은 자조 뿐이었다. 결국은 토모야군도. 실망과 닮은 것. 뒷맛 씁쓸한 그런 말만 남아서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안기지도 않을 거고, 부장이랑 키스하거나 손 잡을 일도 없어요.”
“......네, 알고 있답니다.”
토모야에게 다른 사랑이 생겼으니 와타루와의 관계는 거기서 끊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부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듣는 순간 울컥 치미는 무언가가 있었다. 히비키 와타루는 훌륭한 연기자였고, 그 감정을 모조리 능숙하게 숨겨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토모야가 한눈에 반했던 완벽한 히비키 와타루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엷은 미소가 걸쳐진 얼굴은 자연스럽게 눈부셨다. 토모야의 눈이 서벅하게 와타루를 스쳐지나갔다. 물기 없는 모래처럼 버석한 시선이었다. 잘 있어요, 부장. 자연스러운 인사와 함께 토모야가 몸을 돌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박혔다. 문으로 걸어나가, 문고리를 잡고, 열린 문 틈으로 나가서, 몇 발자국. 문을 닫았다.
텅,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관계의 종말을 고했다.
두 명에서 한 명으로 변한 연극부 부실은 고요했다. 무대가 크게 비었다. 혼자 남은 히비키 와타루는 생각했다. 사실 자주 있었던 일이었다. 토모야처럼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내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사랑한 상대에게 외면당하는 것 정도는 몇 번이고 겪었었다. 틀림없이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상처 난 환부를 서걱서걱 잘라 멀리 버리면 금방 잊었다. 감정을 넣어놓은 상자를 닫아버리면 그만이었다. 토모야에 대한 감정도 똑같이 행동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괴로울까요. 히비키 와타루는 생각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욱신거렸다.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저물어가는 슬픔에 마음이 아팠다. 송곳이 자비없이 푹푹 찔러들어오는 감각이었다. 와타루가 얼굴을 가렸다.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잔뜩 웅크린 몸에서 많은 것이 꿈틀거렸다. 토모야 군, 토모야 군. 부르지 못한 이름이 한가득 차올랐다. 목구멍을 간지럽히다가, 치밀었다.
“후회할 것 같아요.”
무심코 새어나온 말이 모든 진심이었다. 이성이 말보다 늦게 깨달음을 물고 왔다. 자각하는 순간 와타루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대로 뛰쳐나갔다. 지금 토모야를 놓치면 후회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찾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을까. 적어도 1학년인 토모야보다는 3학년인 와타루가 숨겨진 통로나 지름길을 더 잘 알았다. 유메노사키 학원을 뒤집어놓으며 와타루는 토모야를 찾았다. 사랑하는 어린 토끼는 언제 재주를 그렇게 익힌 것인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라이브를 뛸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은 있었지만, 달리기와는 조금 별개인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지쳤는데도 토모야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토모야 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불길한 상상뿐이었다. 얼굴 모를 소녀와, 그 옆에서 웃고 있는 토모야. 종종 와타루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수줍게 웃는, 붉은 뺨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이렇게 달려서 겨우 찾은 토모야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그답지 않게 대책 따윈 없이 막막한 구석 투성이였다. 와타루의 머리 한구석이 찌릿하게 울렸다.
아, 찾았다. 와타루의 눈에 그 뒷모습이 비쳤다. 다행히 혼자 걷고 있었다. 부드러워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똑바르게 걷는 걸음걸이, 정면 외에는 잘 보지 않고 걷는 모습까지 빠짐없이 마시로 토모야였다. 토모야 군! 와타루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쳐서 숨소리가 섞인, 갈라진 목소리였다. 꼴사나웠다. 토모야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와타루를 곧게 바라보았다. 부장? 당혹이 어렸다.
“가지 마세요, 토모야 군.”
그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토모야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제 얼굴을 보는 토모야를 보며, 와타루가 모든 것을 쏟아냈다. 언제나 완벽하게 감춰놓았던 것을 모조리 풀어냈다. 표정부터가 엉망이라고,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추스릴 여유도 없었다.
“사랑합니다, 토모야 군. 가지 마세요, 제발...... 제가 조금 더, 잘 할 테니까...”
이렇게까지 타인에게 매달린 것은 처음이었고, 여기서 뿌리쳐지면 어디까지 형편없어질지 아주 잘 알았다. 공포가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어깨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토모야도 그걸 기민하게 눈치챘다. 토모야의 표정이 이상하게 찌그러졌다. 몸을 섞는 그 순간까지도 한 번도 좋아한다 말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저 저를 심심풀이로 여기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지금 이 모습은. 기묘한 현실이 눈 앞에 들이밀어졌다. 토모야가 느리게, 와타루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와타루의 표정에 절망이 어렸다.
“......우리, 대화가 많이 필요했던 것 같네요.”
솔직하게 말해준다고 약속하면, 돌아가서 얘기해볼래요? 붙잡은 손은 놓지 않고, 토모야가 제안했다. 가냘픈 실이 다시 얽혀들었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