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AZUMA/NOVEL

[마타이부]

별빛_ 2014. 2. 12. 22:34

 

비가 쏟아지는 오후였다. 마타타기는 푸른색 우산을 쓰고서 질척질척한 땅 위를 걷고 있었다. 궂은 날씨 때문일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리고 훨씬 더 자신만만했던 시절.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사람들 뿐이었던 동료들과 함께 우주까지 가서 전 은하를 걸고 축구를 했던 기억들. 솔직히 말해서 어이없다면 어이없고, 남한테 말해준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확률이 농후한 일들이었지만 뚜렷한 현실이었다. 지금도 종종 만나곤 하는 동료들과는 그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국가대표 때의 일이라고 저 좋은대로 해석하곤 했지만 그래주면 이쪽이 감사할 노릇이었다.

우주에서 돌아온 뒤, 중학교 내내 축구에 매달렸었다. 마타타기뿐만 아니라 모든 어스 일레븐이 그랬다. 각자 취미가 다르고 특기 분야가 달랐지만 축구에 흥미를 느꼈고, 축구가 좋았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전공분야를 잠시 뒤로 미루고 축구에 여념이 없었다. 비록 어스 일레븐은 각자의 학교로 흩어졌지만 풋볼 프론티어에서 상대팀으로 만나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추억이었으니까. 그렇게 중학교 2학년, 그 분기점을 지나고 남은 중학교 생활을 마타타기는 이제껏 살아온 길지 않은 삶에서 가장 즐거웠던 추억이노라 단언할 수 있었다. 다만 고등학교의 생활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어린아이보다는 어른으로 취급받는 나이가 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시작하면서 마타타기는 위기감을 느꼈다. 함께 우주에 나간 사람들과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전부 그들의 시합을 세계대회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마타타기는 풋볼 프론티어 인터네셔널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의 스트라이커였다. 다만 그것이 도리어 마타타기를 짓눌렀다. 그는 본디 육상선수가 꿈인 사람이었다. 열 한명이 함께 달리는 필드도 나쁘지 않았지만, 육상 트랙도 좋아했다. 사실, 둘 다 놓을 수 없을 만큼 좋아했기에 괴로웠다.

더군다나 다른 문제도 마타타기를 괴롭혔다. 자라기를 성격이 좋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마타타기는 자신이 삐뚤어져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주에서 그것을 개방하고 제멋대로 구는 법을 배웠다. 그것으로 마음은 훨씬 자유로워졌지만 몸은 훨씬 압박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받게 되면 어떤 사람이던 지치기 마련이었다. 마타타기 역시 그랬다. 결국은 다시 얌전한 사람의 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함께 필드를 사용했던 동료들과, 그 외 몇 명... 손가락으로도 어렵지 않게 셀 수 있을 정도의 소수였다.

마타타기는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두 동생들과 어머니. 그것을 짊어지고 사회에 나가 무사히 싸워 이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벌써 고등학생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시간도 일 년이 채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평소라면, 아니 옛날이었다면 이렇게 지치고 고민이 생겼을 때 당장에라도 텐마의 곁으로 달려갔을 것이었다. 텐마, 마츠카제 텐마. 마타타기 하야토가 인정하는 유일한 주장이었다. 사실 축구와 육상을 고민하는 이유 중 하나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축구는 결국 팀플레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시합이지만 마타타기는 자신의 성격을 온유하게 받아주면서도 팀을 훌륭하게 이끌만한 주장이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캡틴이 텐마여서일까, 마타타기는 나름대로 제 역할을 잘 수행하는 다른 주장을 몇 번이고 만났지만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팀원들 역시 세계를 재패한 국가대표 축구선수라는 명패가 부담스러웠는지 어지간하면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맴돌곤 했다.

마타타기가 축구와 육상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 것은 이 이유가 컸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축구로의 진로 전향을 당연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과 팀메이트가 되고, 갈등이 생기면서 마타타기는 진지하게 육상으로의 복귀를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축구 역시 달리기가 필요한 종목, 마타타기의 운동량은 육상 선수와의 운동량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이라도 육상으로 진로를 전향해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것 역시 알았다.

이러한 고민을 마타타기는 차마 텐마나 다른 동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텐마는 자신을 분명 걱정해주고,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고민해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창 제 꿈을 향해 달려가는 텐마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어쩐지 쪽팔리기도 했으니까. 츠루기 역시 텐마와 같은 쪽이었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마타타기와 처지가 비슷했다.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고 저 혼자 떠안고 있어야 하는 상황에 마타타기는 일견 화마저 났다.

마타타기는 비가 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산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까지도 회색빛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이었지만 빗방울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우산을 접고 아롱다롱 매달려있는 물방울을 털어내며 마타타기는 계속 걸었다.

그러다 마악 공원 근처 놀이터를 지나갈 무렵이었다. 마타타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이, 마타타기!”

“...왜 여기 있어, 이부키?”

역시나랄까. 목소리로 예상했던 장본인이었다. 훤칠한 키에 부슬부슬한 하얀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 어지간한 사람보다 평균 이상의 외모를 자랑하는 이부키를 마타타기는 올려다보았다. 아니 쏘아보았다. 이부키는 그런 마타타기의 모습이 익숙한지 별 말 하지 않았다. 평소의 얌전떨던 모습은 진작 버려버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마타타기 하야토로서 행동하는 모습은 도리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하려고 마타타기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이부키는 잠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하늘은 꾸역꾸역 먹구름을 뱉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고민하는 이부키의 모습을 마타타기는 몹시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실 이 녀석에게 가지고 있는 최근의 감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고민하는 마타타기와는 달리 이부키는 중학생 때부터 자신의 진로를 축구로 돌리고 현재 프로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실력 있는 골키퍼로서 예전부터 줄곧 주목받고 있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바로 제 앞에서 끙끙대고 있는 꼴을 보면서 마타타기는 화를 낼까 말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특별히 마음을 너그럽게 먹어 봐 주기로 했다.

그런 마타타기의 심정을 모르는 이부키는 결국 마땅히 답이 나오지 않는 것에 결국은 돌려 말하기를 포기했다. 마타타기의 불만어린 눈을 바라보며 곧장 물었다.

“너 축구 그만두냐?”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이부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마타타기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멱살을 잡고 협박하지 않은 것은 이부키가 동료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우산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매 역시 자연스럽게 매서워지는 것을 보면서 이부키의 표정도 굳어갔다. 마타타기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만두냐?”

“어디서 들었냐고 말했어.”

당황섞인 이부키의 말에 마타타기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 표정에 이부키는 숨을 푹푹 내쉬었다. 머리를 몇 번이고 거칠게 쓸었다. 자신에게서 나온 답을 듣지 않는다면 마타타기 역시 대답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이부키는 결국 입을 열었다.

“주장한테 들었어. ......네가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주장이?”

바늘로 찌르듯 날카롭던 마타타기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유해졌다. 그 사실에 이부키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주절주절 설명을 이었다. 상대가 텐마라면 마타타기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밀로 하라고 했었지만, 주장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네가 육상으로 전향할까하는 식은 아니었고, 너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았달까, 아 씨. 뭐라고 해야 하지....”

말재주가 없다는 것은 이렇게나 아쉬운 것이었다. 이부키는 썩 적당하게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설명 안에도 들어야 할 말들은 전부 들어있었다. 마타타기는 텐마가 이부키에게 어떤 말을 어떤 식으로, 어떤 기분으로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곤 부끄러움에 얼굴을 짚었다. 자신의 어린 주장은 이미 진작 제 마음을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하긴, 중학교 때도 충분히 좋은 주장이던 그는 고등학생이 된 지금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주장이었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텐마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마타타기의 모습에 잠시 멋쩍게 뺨을 긁적인 이부키는 곧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곤 말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너 진짜 축구 그만두냐?”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마타타기는 까칠하게 대답했다. 질문에 맞질문으로 답하는 것은 사람의 성질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실 진심으로 약간 의아하기도 했다. 텐마가 달려온다면 이해라도 하겠다만 이부키는 그저 예전 팀메이트, 동료. 심지어 같은 학교인 노자키나 테츠카도도 아니었다. 어째서냐고 묻는 마타타기의 눈을 피하며 이부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축구 그만두냐?"

“아, 진짜 끈질기네....”

이부키의 질문에 결국 마타타기가 미간을 좁히고 빈정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이부키의 표정은 무뚝뚝했다. 벌써 알고 지낸 햇수가 5년째였다. 이부키는 마타타기의 저런 모습이 대답을 해 줄 전조라는 것을 알았다.

“나도 몰라, 아직.... 하지만 어느 쪽이던 나쁘지 않겠지.”

진심이었다. 축구도 육상도 즐거웠다. 자신이 어느 쪽을 선택할 지는 아직 본인 스스로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느 길을 선택하던 나름 즐거울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마타타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부키가 표정을 구겼다. 엉망진창이 된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축구 해.”

“뭐?”

“육상 말고, 축구로 해.”

무슨 헛소리야. 마타타기의 표정이 명백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텐마마저 마타타기의 선택을 존중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건만 이부키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동료라고는 해도 이부키와 마타타기의 사이는 상당히 데면데면한 축에 속했다. 다른 수없이 많은 남들보다는 친했지만, 그렇다고 깊게 친하다고 말하기에도 어딘가 부족한. 마타타기는 텐마, 이부키는 신도. 한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주로 플레이의 무대를 바꿀 때까지, 두 사람 다 확실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선택을 종용하려 드는 이부키를 불쾌함에 얼룩진 얼굴로 올려다보며 마타타기는 쏘아붙였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건,”

마타타기의 말에 이부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펴며 초조해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마타타기는 조금 더 너그러움을 배풀어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마타타기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이부키는 결국 어설픈 답을 내놓았다.

“내가 너랑.... 축구를 하고 싶으니까.”

“네가 나랑?”

의외의 말에 마타타기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의혹이 가득찬 검은 색 눈이 이부키를 계속해서 쏘아보았다. 바늘처럼 콕콕 찌르는듯한 시선이 따가웠다. 하지만 이부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마타타기는 결국 이부키의 입에서 대답을 듣게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저 고집쟁이가 한 번 결심한 일을 물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의아함은 여전했다. 놀람도 여전했다. 함께 축구를 하고 싶다라, 축구 바보인 텐마 전용 대사가 아닐까 싶을 만큼 고전적이었지만 그만큼 무언가가 와 닿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기쁘거나 부끄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을지도 몰랐다.

마타타기는 힐긋 이부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멋쩍은 얼굴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애꿋은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그에 마타타기는 살짝 떠 보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육상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럼, 별 수 없어.”

실망스럽지만 당연한 대답에 마타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부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물론 너와 축구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내 욕심이야.”

아직도 미약한 망설임이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자신이 하는 말에 망설임은 없었다. 곧게 자신에게 닿아오는 그 시선에 어쩐지 움직일 수도, 험한 말을 쏘아붙일 수도 없었다. 아주 이상하다고, 마타타기는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욕심이지. 하지만 난 너랑 같은 필드에 다시 한 번 서 보고 싶다.”

의지가 가득 담겨서 반짝거리는 눈은 아름다웠다. 무심코 그렇게 생각되었다.

“너랑 같은 필드에서. 함께 달리고 싶을 뿐이야.”

낙인찍듯이 말을 끝마치고는 밀려오는 온갖 감정에 금방 자리를 피해버리는 이부키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타타기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우습지만, 정말 우습지만 저 말에 확신이 굳혀져 버렸다. 결국 자신을 설득한 게 이부키라는 게 우스웠다. 이 선택이 자신의 인생을 어떤 방향이던 완벽하게 갈라놓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도리어 꽉 막힌 어디 한 구석이 뻥 뚫리기라도 한 듯 속이 시원했다.

축구 해야지, 축구.

지금 당장 공이 차고 싶다고, 마타타기는 생각했다. 곧장 몸을 돌려 집으로 뛰쳐 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변하는 주변 풍경과 뺨에 닿아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마타타기가 호쾌하게 웃었다. 기분 좋은 미소였다.

비에 젖은 바닥은 어느 새인가 전부 말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