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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마오] 한 눈에

별빛_ 2016. 11. 1. 19:22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른 퇴근이었다. 드물게 있는 날에 기분이 좋았다. 하루 종일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진 날씨였지만 버스는 바로 도착했고, 심지어 빈 자리가 있어서 내내 앉아서 갔다. 부모님이 귤을 한 상자 사서 택배로 붙였다는 메세지를 받았고, 며칠 전 샀던 웃옷이 생각보다 보온력이 뛰어났다. 주머니가 따끈했다. 단골 카페에서 추운 날씨라며 커피에 쿠키 서비스를 받았고, 회사에서도 상사의 말에 뜨거운 것 삼킬 때가 없었다. 일 끝나는 속도도 빨랐고. 내일 벼락이라도 맞는 거 아냐? 이사라 마오는 농담을 중얼거렸다. 너무 운이 좋아서 무섭기도 했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저 스스로에게 그리 되내였다.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 채였다. 

 정말로,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서점에 들렸다. 한동안 일에 치여 밀어두었던 책 몇 권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이돌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한 잡지들이 입구에 알록달록하게 놓여있었다. 제대로 눈에 담지도 않고 스쳐지나가며 만화 코너에 들어섰다. 우리 집에 몇 권까지 사 놨더라? 본 지 오래된 탓에 기억이 흐릿했다. 만화책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마오가 곧 좀 더 눈에 익은 표지 다음 권부터 최신권까지 뽑아들었다. 곧장 돌아가서 씻고 눕는다면 밀렸던 것도 모조리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들뜨는 기분에 마오는 기분좋게 웃었다. 

 바로 그 무렵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마오의 등을 찔렀다. 저기, 짧게 부르는 목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뭔가 실수라도 한 게 있나,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하얀 목도리를 두른 사람이 서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기는 했지만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나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상대가 조심스럽게 모자챙을 위로 올렸다. 그제야 상대의 뺨을 간지럽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붉은 색과 시선이 얽혔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기묘하게 사람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만들었다. 


“갑자기 말 걸어서 미안해요.”

“아, 아니요......”


 하얀 손가락이 머플러를 아래로 내렸다. 드러난 얼굴은 놀라우리만치 미형이었다. 얼굴을 숨기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길을 가다가 몇 번이고 붙잡힐 외형이었다. 사랑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마오가 무심코 붙잡고 있는 만화책에 힘을 주었다. 평범한 회사원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미인이었다.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지. 속으로 이상한 확정을 지으며 마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표정이 자연스럽게 뻣뻣해졌다.  


“나 방금 그 쪽에게 반한 것 같아요.”

“......네?”


 음? 사고가 굳었다. 이사라 마오의 뇌가 상태이상을 알렸다. 야! 이거 이해하기 힘들어! 뇌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문맥적으로 어려운 말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상식이라는 존재가 이해를 가로막았다. 고양이를 빼닮은 눈매에 쏙 담긴 녹색 눈이 불안하게 사방으로 흔들렸다. 몇 번이고 평범한 서점의 내부를 둘러보다가 결국 눈 앞의 붉은 시선에 다시 사로잡혀버린 녹색이 곤란하게 휘어졌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죠?”

“나 방금 그 쪽에게 반한 것 같아요. 이름이 뭐에요?”


 눈 앞의 미인이 사랑스럽게 웃었다. 이사라 마오는 인정했다. 텔레비전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이 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저에게 납득할 수 없는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꽃처럼 고운 미소가 어른거렸다. 몰래카메라?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사기? 사이비종교? 또 뭐야, 장기매매? 그런건가? 머리가 빽빽하게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수많은 답들을 쏟아내며 마오는 가벼운 현기증마저 느꼈다. 상대가 웃으며 말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랑 노래는 많이 불러봤는데, 이런 기분이었구나. 처음 알았어요.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한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갔다. 마오는 눈 앞의 미인이 자신을 새우팔이 배에 팔아넘기는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저기, 저... 왜 저입니까?”


 하필 저를 표적으로 삼은 이유를 묻고 싶었다. 여기서 일을 잘 하게 생겼다던가, 건강하게 생겼다던가. 그런 말이 나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예정이었다. 요즘 사기 무섭네, 하는 생각을 덧붙여서. 이런 미인을 앞세운다면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사이비야, 사이비. 마오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외쳤다. 

 그리고 그런 마오더러 정신차리라고 뺨이라도 치는 것처럼, 상대가 웃었다. 사람의 무언가를 꽉 옥죄는 것처럼 어여쁜 미소였다. 무심코 숨을 멈췄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데, 계절을 역행해 해 진 여름 밤의 달을 연상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냥 전부 예뻐서요.”

“......”

“이름이 뭐에요?”


 이사라 마오입니다...... 신음처럼 대답을 흘렸다. 잘 부탁해요, 이사라 씨. 손을 내밀며 건내는 인사에, 무심코 맞잡았다. 이게 운수 좋았던 오늘의 마지막 행운일지, 아니면 행운들을 모조리 뒤엎을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판단하지 못하며, 마오는 일단 웃었다. 기가 다 빠진 허술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