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마오] 공백
거리는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사람의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사라 마오는 사쿠마 리츠의 현관 대문에 기대어 멍하니 회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가 어깨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작게 내뱉는 숨결은 희게 물들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발갛게 얼기 시작하는 뺨이며 손끝을 천천히 매만지던 마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거리의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걸음소리였다. 자박자박 다가와 저를 응시하는 리츠를 보며 마오는 작게 웃었다. 눈썹을 한껏 내리고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난처한 미소였다.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의미가 가득 담긴 미소. 그 표정을 한없이 응시하던 리츠의 표정이 문득 일그러졌다. 든든하게 옷을 챙겨입은 리츠와는 달리 마오의 옷차림은 꽤나 가벼웠다.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조금 급해진 걸음으로 다가온 리츠가 곧장 마오의 뺨에 손을 얹었다. 싸늘했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 군.”
“리츠가 나를 데리러 올 것 같아서.”
“마 군은 가끔 바보같아.”
고집쟁이. 마 군, 바보. 완전 바보. 투정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차마 막지 못해 흘러내리는 애정을 알고 있어서, 마오는 그저 곱게 웃기만 했다. 녹빛 눈동자가 꼼꼼하게 리츠의 얼굴을 훑었다. 하얀 얼굴, 붉은 눈동자. 살짝 위로 치켜올라간 눈매. 어여쁜 이목구비 모두 기억 속의 리츠와 똑같았다. 하나도 다르지 않은 사쿠마 리츠 본인이었다. 마오가 손을 들어 제 뺨을 짚은 리츠의 손을 감쌌다. 닿아 있는 리츠의 체온이 뜨거웠다. 얼어있는 뺨을 녹여줄 수 있을 정도로. 마오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얼굴을 직시한 리츠는 마오에게 붙잡인 제 손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잡아 내렸다. 한껏 가까워진 두 사람의 사이에는 이제 한 뼘의 틈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 군.”
“리츠가 보고 싶어서.”
“조금 늦게 만난다고 해서 마 군이 날 잊을 일도 없다는 걸 아는데.”
그리고 잊어도 용서했을 거야. 상냥하게 덧붙여지는 말에 마오가 리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리츠는 조금 미간을 좁혔다가 물었다. 얼마나 기다렸어? 마오가 대답했다. 계절 두 개 정도.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제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리츠의 손길을 받으며 마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리츠.”
“응, 마 군.”
“그 때... 리츠의 손을 못 잡아줘서 미안해.”
“괜찮아.”
내가 너무 서두른 것도... 미안해. 괜찮아, 이제는... 전부 용서해. 리츠가 속삭였다. 네가 쥐어주는 면죄부는 어쩜 이리 달콤한지. 마오는 조금 섧게 웃었다. 한 발자국 떨어졌다. 틈이 생기자 마주 볼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몇 분이나 한참을 응시했다. 리츠의 시선은 여전히 슬픈 기색이었다. 선 고운 눈매 끝에 감정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었다. 마오는 떨어지지 않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에게도 그 감정이 붙어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리츠가 눈을 감았다. 손을 내밀었다.
“가자, 마 군.”
“응.”
“길이 엄청 멀 거야.”
“상관 없어.”
마오가 환히 웃었다. 리츠가 내민 손을 붙잡아 텅 빈 거리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머리에 어깨에 닿았다가, 쌓이지 않고 떨어져버리는 눈송이들을 보며 두 사람이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닿아있는 네 체온만이 따뜻했다. 같은 세상에 함께 있었다. 네가 없는 세상에 내가 있기 너무도 힘겨웠다. 결국, 있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