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마오] 봄
날이 좋았다. 리츠는 문득 눈을 떴다. 뺨에 닿는 바람이 따뜻하고 건조했다. 볕 잘 드는 양지에 드러눕고 싶다는 충동을 부채질하는 바람이었다. 소년은 그런 충동에 약했지만, 그만큼 의욕도 대단치 않게 식어버리고는 해서, 몇 번 손가락을 움찔거리다가 그대로 몸에 힘을 풀어버렸다. 그늘진 곳에서 설렁설렁 불어오는 바람도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수마가 어깨를 잔뜩 짓누르고 있었으니 그것을 떨치고 일어날 의욕도 없었다. 사계절 내내 그나지 의욕을 내지 않기는 했지만, 리츠는 유독 봄만 되면 지나치게 게을러지고는 했다.
어제도 그랬다. 나이츠 전원이 모이는 외부스케줄은 오롯하게 그의 왕이 저 자신의 이름으로 얻어 온 것이었다. 그와 같은 유닛의 동갑내기ㅡ동급생이었어야 했을 한 학년 선배ㅡ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하는 리츠를 보고 겨울 내내 겨울잠을 자다가 갑자기 봄을 타는 거라고 대놓고 쏘아붙이고는 했다. 그 평가에 리츠는 긍정도 부정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목울음 한 번 길게 흘리고 말았다. 왕은 그런 기사를 보며 크게 웃고는 달콤한 봄노래 한 곡 써서 쥐어줬다. 리츠는 달갑게 받았다.
리츠는 봄이 좋았다. 밖에서 꾸벅 잠들기 딱 좋은 기온 하며 한들한들 피어나는 꽃이며. 묘하게 들떠서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섞여들면 저를 들들 볶는 사람도 적어진다는 이유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마오가 언제 저를 찾을 지 모르니 리츠가 잠드는 장소는 늘 꽃과는 한 겹 떨어진 장소였다. 아직 잎도 나지 않은 마른 나무들 근처나, 늘푸른나무의 풀숲 어딘가. 리츠가 그런 곳에서 잠들고 있으면 마오는 늘 그를 찾아오고는 했다. 마치 지금처럼.
리츠는 저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설핏 눈을 떴다. 리츠, 일어났어? 눈이 맞자 물어오는 목소리는 투박하게 다정했다. 리츠는 적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어져라 하품이 기어나왔다. 그럭저럭 눈은 떠졌다만 여전히 피곤했다. 좀 더 잘래. 투정처럼 칭얼거림이 흘러나오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적어도 리츠에게는.
“더 자긴 무슨. 수업 끝났다고. 어서 가자.”
“저녁까지 자다 가면 안 돼?”
내가 자는 동안 마 군은 무릎베개~. 리츠가 덧붙인 말에 마오의 표정이 대번 어이없어졌다. 봄의 학생회는 늘 바빴다. 1학년에는 막 학생회에 들어가서 바빴고 2학년은 새 학년이 들어오면서 변하는 일들이 많아 바빴고 3학년의 학생회장이 된 지금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작년의 에이치에게는 케이토라는 든든한 소꿉친구 부회장이 있었건만. 마오는 이런 걸 권고해주는 제 소꿉친구를 보며 아주 잠깐 심란해졌다. 틀림없이 잠들어있을 리츠를 데리러 오기 위해 급하게 일정을 처리한 삼십분 전의 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니 조금 더 심란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허나 리츠와 함께 자란 시간이 길었던 마오는 능숙하게 감정을 추스르고는 리츠를 끌어당겨 제대로 세웠다. 리츠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마오의 손길에 따라 제 다리로 섰다. 하암. 여전히 졸리기는 했다만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마오가 게으름을 피워줘서 따끈따끈한 무릎을 빌려줬더라면 더할나위없이 좋았겠지만, 뭐. 리츠는 마오의 어깨에 기대며 그 정도로 만족했다. 마오는 똑바로 서라며 투덜거렸지만.
“요즘 날씨가 좋지, 마 군.”
“그야 봄이니까. 곧 꽃들도 만개할걸.”
“마 군에게 힘든 시기가 오네~.”
능청 떨듯 덧붙인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마오는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끄응. 앓는 소리가 조금 새어나오기도 했다. 마오도 꽃은 좋아했다만 그것과 별개로 화분증은 그를 많이 괴롭게 했다. 약은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지만 별개의 문제였다. 낮잠 자기 편하다는 이유로 리츠가 봄을 좋아했다면 마오는 가을 즈음을 제일 좋아했다. 꽃이 지고 안정을 찾을 즈음의 계절. 겨울이 오기 직전의 평화. 마오는 저에게 기대어 걷는 리츠의 머리 위에 살짝 뺨을 기댔다. 붉은 눈동자가 도록 굴러 온기를 응시했다.
학생회장의 업무는 각오하고 있었다만 각오와 현실은 본디 늘 다른 법이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른 것처럼. 봄에는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려서 힘든 게 당연했다. 누군가에게 지친 티를 내지 못하는 그였으니, 어리광은 아주 찰나의 순간만 허락되었다. 이 순간만큼 리츠는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벗이자 연인이 되어주었다. 리츠는 손이 많이 가는 소꿉친구를 퍽 좋아했다. 리츠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 군이 원한다면 나도 무릎베개 해 줄 수 있으니까~.”
“......나 참. 내가 너도 아니고,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슬쩍 떨어지며 멋쩍게 웃어버리는 그 미소를 보며, 리츠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주제에 달갑다는 듯이 그렇게 웃어버리면 아무도 안 속는다고, 마 군. 덧붙일 말은 속으로면 살짝 삼켜버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