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SP/NOVEL

[포케스페] 루비사파16

별빛_ 2018. 4. 4. 00:35

이쯤되면 시험기간에만 등장하는 사람같지만 오늘은 과제가 너무 하기 싫어서 온 거니까 일관성 없... 없... 없는 걸까요? 슬슬 자기자신에게 자신감이 떨어지는 요즘... 퇴고 안하는 글만 짧게 쓸 시간도 부족할만큼 과제가 많다니 이게 학교냐...... (막말) 연성하고 싶어질때 늘 생각나는 루비사파 꾸준히 사랑하고 있어! 

지인분께 연성키워드 받았답니다 : 도서관

 

 

 

 

 

*

 

 

 루비는 사파이어가 정적을 빚어내는 순간을 사랑했다. 물론 그녀의 모든 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랑하고 있었으나, 모든 사랑 가운데 유독 특별한 경우는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태양보다 더 찬란한 미소로 저에게 웃어주는 사파이어를 호흡 한 줌까지 내줄 수 있을 정도로 열렬하게 사랑했다면, 침묵과 함께 공기에 파묻혀 있는 사파이어는 하염없이 보고 또 보고 싶을 정도로 경애했다.

 청년의 기로에 막 발을 딛기 시작한 소년은 조용히 안경을 고쳐 썼다. 얄팍한 렌즈가 시선을 제대로 숨겨주리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지만, 조금쯤이라도 걸러줄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제 시선이 진득해지지 않게 조심스러움을 뒤집어쓰며 루비는 의식적으로 책을 내려다보았다가, 몇 분 되지 않아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벌이 꽃에 모여들듯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듯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날카로운 눈매 사이에 박힌 붉은 눈동자가 끈질기게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본디 이런 시선 하나 못 알아차릴 정도로 무딘 그녀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책에 푹 집중하고 있는 모양인지 루비의 시선을 영 알아차리지 못한 기색이었다. 루비는 그 사실에 소리없이 안도했지만, 동시에 기묘한 감정이 제 어딘가에서 뭉글거리며 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보잘것 없는 질투였다. 제 감정의 이름을 알아차린 그는 능숙하게 그것을 속에 삼켰다. 

 

 본디 사파이어는 자신이 모르는 지식을 머리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좋아했다. 산으로 바다로 직접 뛰어다니며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몸으로 느끼며 배우는 모습이 너무 강해서 티가 잘 나지 않지만, 머리도 좋고 영리했다. 그녀는 저 관동지방의 그린과 마찬가지로 지방을 대표하는 박사의 혈육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포켓몬과 함께했고 옹알이 한 마디를 내뱉던 시절에도 그녀의 주변에는 포켓몬에 대한 수많은 지식이 기포처럼 떠다녔다. 비록 사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는 하나 전문서적도 무리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사파이어가 도서관에 걸음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밖에서밖에 얻지 못하는 지식이 있는 만큼, 책으로밖에 얻지 못하는 지식도 있어. 그녀의 입술은 유려하게 문장을 내뱉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도서관에서 더 공부를 하려고. 아빠의 서재에도 없는 책들이 많더라고. 그래서 요즘은 책 읽느라 굉장히 즐거워. 언어를 끝마치며 수줍게 미소짓던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도 루비는 똑똑히 기억했다. 덕분에 루비는 자신이 하려던 모든 말을 그대로 들어내어 어딘가의 쓰레기통에 처박을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밖을 돌아다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루비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루비는 그 사실에 지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루비가 여유롭고 한가한 사람이었다면 문제 없이 사파이어의 뒤를 쫒아 백날천날 도서관에 앉아있을 수 있겠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또한 바쁜 사람이었다. 루비와 사파이어의 만남은 언제나 두 사람의 작은 타협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루비는 자신의 비는 시간 전부를 사파이어에게 투자해도 아깝지 않았지만, 사파이어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위해 루비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만나기 전, 루비는 사파이어와 더 오래 함께있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부드럽게 돌려 불만을 표하려고 했었다. 물론 사파이어의 말 한 마디에 모조리 취소된 계획이었다. 그냥 루비는 저가 사파이어를 쫒아 도서관에 드나드는 시간을 들렸다. 공간의 특성상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거나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지만, 고요하게 집중하는 사파이어의 모습을 가만히 볼 수 있는 정적인 시간은 마음에 들었다. 

 사파이어의 행동은 언제나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루비는 언제나 그 목적을 흐트러트릴 수 없었다. 루비가 콘테스트 마스터를 목표로 노력하고 있는 만큼 사파이어도 호연지방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좀 더 깊게 공부를 이어 가고 싶어했다. 애초에 아버지인 털보 박사의 조수로 일하고 있기도 했고, 도감소유자로써의 명칭 역시도 궁구하는 자. 그녀가 책에 빠져드는 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루비가 의상 만들기와 콘테스트 기술 연구에 투자하는 시간과 똑같았다. 루비의 이성은 당연하게도 그녀를 이해하고 응원했다. 

 

 허나 세련된 이성이 외치는 말과 감춰진 본성이 외치는 말은 전혀 달랐다. 루비는 사파이어의 앞에서 나한테 조금 더 신경 써 달라고 투정부리고 싶은 본성을 우아하게 내리눌렀다. 루비는 능숙한 연기자였고, 어린 시절 꾸역꾸역 뒤집어 쓴 겉가죽은 이제 온전히 루비의 것이 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루비의 본성은 단순했다. 그는 승리를 위해 투쟁하는 자였다. 어릴 적에는 대상이 배틀이었고, 커서는 콘테스트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사파이어의 본성은 섬세했다. 거칠고 무딘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녀의 본질은 루비보다 백 배쯤 다채로워서 루비는 언제나 사파이어를 대할 때 극히 조심스러워졌다. 지극한 애정과 조금도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그를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사파이어는 한결같이 루비를 사랑해주었고, 루비도 그 마음의 영원을 믿었지만 신뢰와 불안은 별개의 차원에 그려져 있었다. 루비는 제 자신이 제 사랑을 상처 입힐까 늘 무서웠다. 한 번의 경험은 그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한 번의 상처가 둘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다시 가까워지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깊은 인연, 그리고 천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 필요했다. 루비는 두 번의 상처가 생겼다가 아물어지는 그 시간을 무사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루비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졌다. 루비는 사파이어의 앞에서 불필요한 부분까지 늘 인내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내를 결코 그녀에게 들키지 않았다. 사실 루비는, 상냥한 사파이어가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보일 반응조차 두려웠다. 루비는 그녀의 앞에서 늘 약자였다. 

 사파이어, 나의 사파이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루비는 잘 알았다. 사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견디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녀가 루비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예를 들어 에메랄드를 대하듯 좋은 친구로만 여기더라도 루비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녀의 태도와 행동거지, 몸짓과 언어 모든 것에서 루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고, 그 사실은 루비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루비의 인내를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영원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의 차원이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면서 손에 쥐고 있던 책은 이미 덮어 내려놓은지 오래였다. 하염없이 저를 보는 시선을 뒤늦게 눈치 챈 사파이어가 고개를 들었다. 깊은 붉음과 청아한 쪽빛이 얽히는 순간 반사적으로 루비가 웃었다. 다정한 미소였다. 사파이어 역시 가벼이 미소지었다. 사파이어는 눈짓으로 책의 남은 분량을 잠깐 확인하고는 루비에게 입모양으로 언어를 벙긋거렸다. 이것만 다 읽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자. 말을 이해한 루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이어는 다시 마법처럼 책에 빠져들었다. 루비는 글을 따라 좌우로 움직이는 섬세한 눈동자를 꼼꼼히 응시하며 턱을 괴었다. 보석을 닮은 눈동자가 퍽 몽롱했다. 책에 소모할 집중력은 이미 증발한 지 오래였다. 루비는 다른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손을 잡아야지. 루비는 계획을 위해 여러가지 생각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사파이어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루비는 아마 오래오래 그 계획을 곱씹으리라. 실제로 집으로 돌아가는 노을진 거리에서 사파이어가 활짝 웃는 얼굴로 루비의 손을 먼저 덥석 잡아올 때까지. 그래서 이리저리 골몰한 계획을 조용히 접어 시도하기도 전에 이루어져버린 수많은 계획들 사이에 한 자리를 더 끼워넣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