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라] 루트 F
소꿉친구 설정 날조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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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너를 기다렸어. 열 아홉 살의 진 유이치는 제 오랜 소꿉친구의 손을 잡고 종종 그렇게 속삭였다. 4월에 태어난 진 유이치는 삶의 첫 숨을 튼 그 순간부터 7월에 태어날 아라시야마 쥰을 기다렸다고. 사실 갓 태어난 순간부터 미래를 보았더라도 갓난아기가 무엇을 알았겠냐만은, 아라시야마는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도리어 필요도 없는 사과를 하며 진의 어깨에 다정하게 머리를 기대거나, 정답게 손을 잡아주고는 했다. 3개월은 그런 사과를 할 만큼 긴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부드러운 온기는 좋으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버릇처럼 또 같은 말을 했다. 줄곧 너를 기다렸어. 나는.
진 유이치와 아라시야마 쥰은 소꿉친구다. 그것도 갓난쟁이 시절 걸음마를 같이 하는 사진조차 있는 진짜배기 소꿉친구. 보더에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정보였다. 딱히 비밀 정보는 아니었으니, 어쩌다 알게 되는 사람이 조금씩 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긴 우정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었다. 애초에 두 사람의 입대 시기나 포지션이 완전히 다른 탓이 컸다. 진 유이치는 보더 상층부 중에서도 진보다 늦게 입대한 사람이 있는 구 보더 소속이었고, 아라시야마 쥰은 4년 전 현 보더가 만들어지던 초기 시기에 입대했다. 아라시야마가 트리온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코나미 키리에조차 있다. 구 보더 소속 대원이며 동시에 아라시야마 쥰의 사촌동생. 양 쪽 모두와 연관이 있는 존재조차 있으니 아라시야마와 진이 소꿉친구였다면 진작에 구 보더 소속이지 않았을까.
......다들 다음과 같은 전제를 깔고 그저 진과 아라시야마가 보더에서, 혹은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보더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만나긴 했으니까 아예 틀린 말까지는 아니고. 두 사람도 직접적으로 소꿉친구냐는 물음이 없으면 뚜렷하게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두 사람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만났더라도 언젠가 이런 색으로 물들어 있었을 텐데. 그저 조금 빨리 만나 더 쉽고 빠르게 스며든 것 뿐이거늘.
그러니 오늘도 진 유이치는 청명하게 웃는 아라시야마 쥰의 미래를 응시하며 안심했다. 오늘도 너는 찬란하고, 내 미래의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모두 눈이 부신다. 네가 사랑하는 세상이 안전하니 네가 울 일은 없고, 네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안전하니 네가 괴로워할 일은 없고, 무엇보다 네가 안전하다.
진 유이치는 그 사실에 다시 한 번 만족했다.
진 유이치는 제 기억이 존재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아라시야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이름도 제대로 없었던 미래시의 사이드이펙트와 제 삶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던 시기라고 기억한다. 울고, 고민하고, 말했다가, 혼나고, 싸우고, 다시 한 번 울고, 또 새로운 미래를 보고, 머리가 아프고, 눈도 아프고, 괴로워서 토하고...... 그 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억들이었지만, 그 사이 단 하나. 아라시야마만큼은 선명했다. 옆에서 같이 울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혼나고, 같이 싸우고 자신을 끌어안아 달래주던 기적같은 소꿉친구. 조막만한 손발을 가진 어린 아이면서도, 아라시야마는 당차고 씩씩한 꼬마였다. 우는 진을 제 등 뒤로 숨기고, 유이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대신 화를 내 줄 수 있던 꼬마.
그런 진이 아라시야마에게 심정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의지하게 된 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정의롭고, 다정하며, 늘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친구. 아라시야마도 어렸던 만큼 지금의 진이 찬찬히 생각해봤을 때 서툴렀던 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동갑내기의 입장으로 봤을 때 어린 시절 아라시야마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만화에서 나오는 히어로 같았다. 언제나 진을 지키려고 해 주는 진만의 히어로. 저에게 알 수 없는 걸 보여준 하늘이 그나마 베풀어준 저를 위한 존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생각은 훨씬 더 견고해졌다. 하얀 괴물이 엄마를 데려가버렸어. 나한테 남은 건 쥰 밖에 없어. 진은 그리 외치며 몇날 며칠을 울며 보냈다. 정체 모를 희고 커다란 무언가에게 살해당한 어머니를 저 혼자 목격한 이후로 이리저리 노력해보았지만,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겠는가. 믿어주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아라시야마 뿐이었다. 어머니도 제 아들이 미래를 본다는 것을 알아 진의 말에 불안해하긴 했으나,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나갈 수밖에 없는 몸이었다. 무엇보다 언제나 뚜렷했던 진의 미래시와 달리 괴물이, 악마가 엄마를 공격한다는 진의 말이 평소보다 훨씬 모호한 탓도 있었다. 트리온병의 존재를 모르던 시절, 끝내 어머니는 트리온병에게 습격당해 차가운 몸으로 돌아왔다. 진은 진정 혼자가 되었다.
뚜렷한 일가친척도 없는 진을 받아준 건 옆집에 사는 아라시야마네 집이었다. 갓난쟁이 시절부터 소꿉친구로, 형제처럼 지낸 입장이었으니 아라시야마 가족으로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진이 아라시야마 집의 군식구로서 조금씩 적응해나갈 무렵, 진의 인생에 새로운 사람이 접촉했다. 구 보더의 사람들. 모가미 씨. 진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그 시절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며 말했던 진의 발언을 건너건너 들어 한 발 늦게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하얀 괴물, 악마, 그리고 실제로 살해당한 어머니. 진은 몰랐지만 아마 트리온 반응 역시도 있었겠지. 그들은 진 유이치에게 사이드이펙트가 있을 것까지 짐작하며 무척 조심스럽게 접촉해왔다. 진도, 그들이 싫지는 않았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의지하던 아라시야마 쥰이 있는 진 유이치는 보더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저 길도 싫지는 않아. 어쩌면 행복도 있겠지. 하지만 쥰이 있는데 힘들게 싸워야하는 길을 가고 싶지 않아. 엄마처럼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싸우는 건 무서워. 행복하고 평범하게 있고 싶어. 쥰의 곁에서.
보더로 들어오라며 꾸준히 부탁해오는 사람들에게 진은 미래의 정보만 살짝 전달해주는 미약한 도움만 건내주고 꾸준히 거절했다. 그는 싸움과 친하지 않았고, 스스로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특별한 무언가보다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미래에 역시 쥰과 함께 있는 미래보다 좋은 미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안이했던 진 유이치의 세상이 다시 한 번 깨졌다. 아라시야마 쥰이 살해당하는 미래를 보았다. 최악의 미래였다.
최악이 갱신됨에 따라 최선의 미래도 바뀌었다. 아라시야마가 살아있다는 기본 전제가 없다면 진의 세상도 흔들린다. 우선 그가 살아남아야했다. 모든 최고의 미래 위에 생존이 올라갔다. 그가 죽지 않을 미래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건, 보더와 손을 잡는다면...... 진 유이치가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니, 못 한다면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보더와 함께하는 건 아라시야마가 살아가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최소조건이었다.
보더의 핵심 전력, 마더 트리거라고 칭해도 부족함 없을 존재. 진 유이치가 보더에 합류한 이유는 그토록 사소했다. 내 친구가 죽지 않을 미래가 필요해. 사소하고 이기적인 욕망이었다.
쥰 쨩이 죽는 건 싫다며, 엉엉 우는 얼굴로 모가미 소이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뭐든 할테니 이걸 바꿔달라 울던 어린 진 유이치는 늘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보더의 실력파 엘리트로 자랐다. 아라시야마가 죽는 미래를 무사히 넘기고, 대규모 침공을 겪고, 보더의 규모가 커지고, 아라시야마도 보더에 입대하고...... 그 수많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진 유이치의 지침은 변하지 않았다. 네가 살아서, 행복한.
이기적인 지침이나 네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이타적으로 굴어야 하니 결과적으로 눈 없는 나침반은 평화를 가리켰다. 오늘도 네 미래는 안전하고, 나는 너를 위한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그럼 너는 나를 끌어안으며 무리하지 말라 속삭여준다.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행복 속에서 진은 만족했다.
"쥰."
"응?"
"너무 좋아."
"으음? 나도 좋아해."
그래, 오늘도 세계는 완전하다. 그러니 내일의 세계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게 팔을 벌려 주는 아라시야마를 기꺼이 끌어안았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