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라] 북극성
네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네가 가장 찬란했을 때. 너는 나를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다.
병이었다. 진은 미래를 보는 특별한 사이드 이펙트의 소유자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아라시야마가 쓰러지는 미래를 본 순간 이미 늦어 있었다. 젊고 건강했는데. 그 말은 이미 떠난 사람을 추억하는 말로 남아버렸다. 보더에서도 손에 꼽히던 우수한 병사는 네이버의 침략이 아니라 작은 바이러스의 침략으로 죽었다. 사람은 참 보잘 것 없는 이유로 죽는다. 목에 사탕이 걸려도 죽고, 떡을 잘못 삼켜도 죽고, 실내와 화장실의 온도 차이로도 죽는다. 생각보다 많이. 그리고 병에 걸렸다는 사망원인은 정말 어처구니 없을만큼 흔한 사망원인이었다. 쓰러지는 미래가 보여서 며칠 더 빨리 병원에 데려간 정도로는 아라시야마를 살릴 수 없었다. 며칠 더 빨리 그를 병원에 가둬두었을 뿐이었다.
진 유이치는 가끔 그 날의 꿈을 꾼다. 너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의 꿈. 턱이 한결 가냘프게 말라있던 아라시야마가 흰 침대 위에 누워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네 얼굴 위로 네가 죽는 미래가 겹쳐지듯 어른거려서, 진은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아니면 멀리멀리, 죽음도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아라시야마를 품에 안고 도망치고 싶었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서, 진은 창백한 얼굴로 아라시야마 옆에 얌전히 앉았다. 아라시야마는 제 연인의 시퍼런 낯에 도리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만큼 상냥했다. 죽어가고 있는 건 저 자신이었으면서.
아라시야마는 진에게 두 가지를 물었다. 내가 살 수 있을까? 진은 부정했다. 조금의 확률도 보이지 않았다. 단 1%의 확률이라도 있었으면, 진은 희망에 말라버렸겠지만 아라시야마는 분명 그거로 충분하다며 웃었을텐데. 허나 눈에 시뻘겋게 핏대가 설 만큼 미래를 헤집어도 없었다. 조각조차도, 계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답을 기다리는 아라시야마 앞에서 천천히 고개를 흔드는 작은 몸짓조차 괴로웠다. 아라시야마는 그런 걸 묻는 게 무척이나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진의 대답을 들을 아라시야마는 잠깐 병원의 천장을 응시했다. 같은 무늬의 흰 색 타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천장이 아라시야마에 무슨 답을 주었는지 진은 모른다. 다만 아라시야마는 평온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나한테 트리거를 빌려 줄 수 없을까? 진은 그 부탁조차 거절했다. 그래, 알았어. 아라시야마는 무척 담백하게 거절을 납득했다. 그는 언제나 진의 선택을 믿었으니, 이번에도 그랬던 걸까.
진은 천천히 그 날의 일을 곱씹었다. 태엽을 감으면 노래를 들려주는 오르골처럼, 진은 늘 제 머리에 태엽을 감고 똑같은 풍경을 머리 속에 천천히 그려냈다. 그 때 그 선택이 옳았을까, 틀렸을까, 대안은 없었을까, 있었다면 그 대안은 옳았을까, 아닐까. 진은 늘 자신의 선택을 고민했고 그만큼 이미 결정한 일을 되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 순간 그 둘뿐이었던 병실에서 있던 모든 일은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되었다. 제 사랑과 함께한 마지막 순간이었으니 회상한다고 하여 누가 손가락질 할 수는 없으리라. 진 유이치는 턱을 괴고 몽롱한 바다색 눈동자로 허공을 멍하니 맴돌았다.
생존확률이 제로라는 사실을 알고 난 네가 블랙 트리거가 되고 싶어하는 건 알았어, 아라시야마. 병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트리온은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부하들에게, 동료들에게, 후배들에게 무언가 남겨주고 싶어한다는 것도 눈을 보고 바로 알았어. 익숙한 눈이었어. 몇 번이고 봤으니까. 네 눈이 그렇게 빛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트리거를 줬더라면 성공률도 꽤 높았을 거야. 그 때 보였던 미래로 따지자면, 8할 쯤 되는 확률로 성공했을텐데. 그 정도면 미래시 중에서는 거의 이뤄지리라 말할 확률이야, 높은 확률이거든.
하지만 아라시야마, 만약 그 미래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너를 강탈하게 되는 거야. 네가 사랑했던 가족들에게서, 네가 사랑했던 부하들에게서 전부. 블랙트리거가 되어버린다는 건 결국 네 시신도, 그리하여 네가 여기 잠들어있다고 기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위안도 가족에게서 빼앗아 버리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들도, 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함께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전부. 그 순간이 욕심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네 가족들이잖아. 네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들한테서. 그리고 똑같이 너를 사랑해주고, 그리하여 너를 이렇게 멋지게 키워 준 사람들에게서…… 나는 이미 너를 받아갔는데. 그러니 그 권리마저 훔쳐갈 수는 없었어.
게다가 블랙트리거 아라시야마를 내가 사적인 욕심으로 절대 놓지 못하는 미래도 보였거든. 네가 나를 적합자로 골라 버려서 그래. 아니, 뭐. 그래. 너니까 적합자는 분명 상당히 많이 있었겠지. 하지만 내가 더 강했으니까 나는 너를 놓지 않아. 후우진조차 놓는데 정말 오래 걸렸어. 너는 얼마나 더 붙잡고 있게 될까…… 나도 몰라. 그 이후의 미래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블랙 트리거가 된 너는 분명 뛰어난 트리거였겠지. 어쩌면 너를 사용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더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그랬겠지. 블랙 트리거가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너에게 트리거를 주고 네 마지막 말을 듣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전해주고 유서를 쥐여주며 마지막으로 너에게 트리거를 쥐여주는 게 옳았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어떻게 그러겠어? 그게 가장 옳은 길이고 현명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네가 죽을 걸 알고 있는데. 단 며칠이라도 네가 더 살 수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진이 몇 번이고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라시야마의 두 번의 물음에 모두 부정의 대답을 내놓은 진은 마지막 부탁만큼은 들어주고 싶었다. 아라시야마는 손을 뻗었고, 진은 기꺼이 그걸 붙잡았다. 맞잡는 손에는 아직 조금 힘이 들어 있었다. 아라시야마는 구명줄이라도 붙잡는 것처럼 간절하게 저를 잡아오는 연인을 보며,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정답일지, 아라시야마도 분명 고르지 못했던 게 뻔했다. 진도 그랬다. 방금 너에게 가망이 없노라 말한 주제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진은 아라시야마의 손만 잡고 있었다. 따뜻하고, 여전히 단단한.
'……있지, 진.'
'……응.'
'외로워진다면……'
아라시야마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생명의 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허공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미래를 보는 사람은 늘 진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마치 아라시야마가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찰나, 진은 예언을 받아듣는 사제가 되어 제 신이 읊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진의 곁에는 사람이 많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응.'
'타마코마에도, 본부에도. 보더는 늘 진의 편이야.'
'아닐 때도 있는걸.'
'다들 솔직하지 못할 뿐이야.'
다들, 진의 편이야. 아라시야마는 그렇게 속삭여줬으나 진은 속으로 입을 비죽였다. 그럼 솔직하게 늘 내 편을 들어주는 아라시야마가 곁에 있어주면 되잖아. 울면서 매달리고 싶었다. 바로 저 자신이 아라시야마에게 마지막으로 가망이 없다는 말 따위를 지껄였으면서도, 인간은 누구나 절박한 마음으로 가망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마련이었다. 진은 꼭 그런 마음으로 아라시야마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네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응.'
'하늘을 봐, 진.'
아라시야마가 다정하게 진의 눈을 응시했다. 하늘을 닮은 제 연인의 눈을.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는 그 슬픈 눈을 아라시야마는 신뢰를 담아 응시했다.
'내가 빛나고 있을 거야.'
'아라시야마,'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진.'
너는 다섯 개의 별 중 하나인 아라시야마 쥰이니까, 분명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하늘로 올라가면 다른 별들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언젠가 괜찮아지더라도, 큰 별 하나는 이제 될 수 없잖아.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진은 어떠한 부정 한 마디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라시야마의 손을 끌어당겨 제 뺨에 대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면회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아라시야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라시야마도 그랬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수시로 찾아오는 아라시야마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진은 수면제를 먹고 몇날 며칠을 강제로 잠들었다. 울면서 코나미가 진의 뺨을 때리며 억지로 깨우는 순간, 진은 그 통증이 아라시야마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탄임을 알았다. 네가 없는 세계는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뺨을 얼얼하게 만들고 가슴 어딘가를 잘라내 버리며 시작되었다.
"……아라시야마."
겨울 공기는 차가웠다. 진은 짧게 입김을 내뱉었다. 희게 흩어지는 공기 사이로 진은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 없는 어두운 하늘을.
"거짓말쟁이."
네가 없는 하늘에 별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진짜로 보이지 않는 건지, 내 눈이 흐려져 보이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하지만 네가 없어, 아라시야마.
하늘에도 땅에도 내 곁에도.
어디에도 네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