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라] 10000000 + 1
아라시야마. 나, 사실 미래를 보는 힘 같은 거 없어.
어느 날 찾아온 고백은 은밀하고 평범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 고백을 들은 대상자, 아라시야마는 도통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옅게 미간을 좁혔다. 미래를 보는 힘이야 누구에게나 없는 것이라지만 진 유이치는 홀로 그 모든 법칙 위에 서 있던 사람 아니었는가. 미래시의 사이드 이펙트 소지자, 진 유이치라는 명제를 통째로 흔드는 말에 아라시야마는 혼란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하고 늘 그러하듯 진의 말을 신뢰하고 납득하기에 진은 이제까지 미래를 보는 수많은 행동거지를 보여 왔다. 그렇다고 농담하지 말라고 넘기기에도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진은 아라시야마에게 웃지 않는 얼굴로 농담을 한 적 없었다.
그럼 이건 진실? 그러면 이제껏 행동으로 증명했던 수많은 말들은? 그리고 진의 예지는? 혼란에 빠져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는 아라시야마를 보며 진은 조금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고 싶었지만, 영 잘 되지 않았다. 조금 초조한 듯 진은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긴장하기도 하고, 어쩌면 겁을 먹기도 한 태도에 아라시야마는 그제야 마음을 정했다. 진이 하는 말이 어떤 것이든, 얼마나 믿기 힘든 것이든 아라시야마는 진을 믿었다. 그를 믿기로 아주 예전에 마음을 정했다. 그러니 지금 하는 이 말이 얼마나 믿기 힘든 말이더라도 진이 말한 이상 아라시야마는 신뢰해야 했다. 한 번 눈을 꾸욱 감았다 뜬 청년은 새롭게 믿어야 하는 명제 위로 쌓이는 질문을 차곡차곡 물었다.
"그러면 이제까지 했던 예지들은 뭐였어? 감?"
"아니, 그건 아니야."
"사이드 이펙트 검사는 어떻게 통과했어?"
"사이드 이펙트는 있어. 아마."
"예지는 아니고?"
"아니야."
"하지만 예지를 했던 것과 연관이 있지?"
"맞아."
간단한 질답을 주고받으며 진은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히는 기색이었다. 아라시야마는 그런 진을 아주 천천히 관찰했다. 그는 제 오랜 벗에게 어떤 긴장도 주고 싶지 않았다. 미래를 보는 그 능력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더 물어도 괜찮을까, 아닐까. 그만둘까 아닐까. 아라시야마의 저울에서 진실이나 의문 따위는 감정보다 낮은 가치를 가졌다. 우선 상대가 괜찮아진 다음에 천천히 들어도 괜찮았다. 특히 소중한 사람의 감정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한 아라시야마의 가치를 진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진은 크게 심호흡하며 제가 괜찮다고 행동으로 어필했다. 좀 더 물어도 괜찮다는 친구의 배려에, 아라시야마는 조금 고민하다가 물었다.
"미래를 볼 수는 없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했던 일을 할 수 있었어?"
"아라시야마는 회귀나 루프라는 거 알아?"
"회귀? 루프?"
아라시야마가 검지손가락으로 허공에 빙글 원을 그렸다. 이거? 무언으로 묻는 아라시야마를 보며 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비슷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라시야마를 보며 진은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계속 사는 거야. 꿈인지 현실인지 이제 모를 정도로."
"계속 산다고?"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가다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어서 다시 진 유이치로 태어나는 거지. 그리고 또 삶을 살아가는 거야. 계속."
"계속?"
"계속. 아주 오래."
나는 미래를 보는 게 아니야, 아라시야마. 나는 과거를 보고 있어.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의 기록과 경험이 곧 미래가 될 만큼 오랫동안 살아왔으니까.
"아마도, 이게 '사이드 이펙트' 라고 인식되는 것 같아."
"과거를……."
"그래서 이걸 미래시의 사이드 이펙트 삼기로 했지."
몇 번째의 삶에서, 라는 문제는 삼켜버렸다. 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살았고, 끔찍하게 오래 살아가다보면 기억은 마모되기 마련이었다. 진은 닳고 닳은 기억의 흔적만 겨우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만으로도 인간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많았다. 백만 번, 아니 천만 번? 감히 헤아리기도 힘든 시간의 파편 속에서 진은 살아왔다.
처음엔 몇 번이고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했다.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 모두 붙잡고 최고로 행복한 선택을. 최선의 미래를 만들어 내가 위해 애를 썼다. 아무리 행복해도 죽으면 다시 시작되는 것에 환멸을 느낄 때까지 열심히 살았다.
그 다음으로는 괴로워서 몇 번이고 포기했다. 스스로 삶을 몇 번이고 내던지다가, 그조차도 질려버릴만큼. 시간이 독처럼 끔찍하고 숨쉬는 것조차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스물은 커녕 열 살도 되기 전에 스러지듯 사라지던 삶들이 촘촘하게 이어졌었다.
그걸 끝냈던 게 너였어, 아라시야마. 너는 모르겠지. 몰라줬으면 하니까 말해주지 않을거야. 진 유이치는 웃었다. 아홉 살의 어느 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집에 처박혀 있던 날. 어머니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숨만 쉬는 아들을 위해 눈물 짓기도 지쳐가던 날에 네가 찾아왔다. 집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단단하게 정체되어 있던 긴 권태의 삶을 깨트리는 것처럼 들렸었다. 저도 어리면서 더 작은 동생들의 손을 암팡지게 잡고 죄송하다며, 야구공을 잘못 던졌다고, 다치지 않았느냐며 절절매던 어린 너는 내가 흘려보낸 모든 기력과 생명을 전부 뭉쳐 만든 것처럼 사랑스러웠다. 오랜만에 보는 아라시야마 쥰이, 그리고 처음 보는 어린 아라시야마 쥰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보였던 반응에 어머니는 희망을 보았다. 제 아들을 위해 그녀는 아라시야마를 간절하게 붙잡았고, 아라시야마는 그런 간절함을 뿌리칠 아이가 아니었다.
그 삶이 처음이었어. 어린 너와 친해진 첫 번째 삶. 길고 긴 삶의 순환을 처음 들은 아라시야마가 그 아라시야마였어. 내 영원을 너에게 종속시킨 것도 그 삶이었어. 진 유이치는 지금도 기억했다. 그 뒤로 수많은 아라시야마 쥰을 만나 수많은 사랑을 했고, 그 수많은 사랑이 진의 기억이 되었다. 쌓이고, 마모되고, 스러져버리는 기억들 사이로 사랑만 띄엄띄엄 빛나고 있어서 그걸 연결시키다보면 먼지가 된 기억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나왔다.
그 삶 이전에도 너를 사랑했지만 사랑조차 지쳐버렸던 때가 있었어. 그런데 권태와 탈력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사람도 너였어. 진 유이치가 아라시야마 쥰을 포기한 삶도 몇 번이나 있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친구로 응시한 적도 몇 번이나 있다. 그런데도 그 삶 이후. 내 긴 삶의 도돌이표를 너에게 말한 그 삶 이후부터 너와 만난 모든 인생이 특별해졌다. 이전에도 특별했지만, 이후로 더 특별해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말해주지 않을 터다. 너는 지금처럼, 많은 것을 짐작한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아주는 지금의 아라시야마 쥰이니까.
"……힘들었겠네."
"그럴 때도 있었지."
"늘 같은 삶을 살았던 거야?"
"그럴 때도 있었고, 아니었던 때도 있었고. 엄청 많아."
그래도 대부분 미카도 시에 있었지. 보더에 있었어. 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진에게 가치 있는 많은 것이 여기 있었으니, 진은 중력에 이끌리는 위성처럼 미카도 시로 돌아왔다. 기억도 감정도 이곳에 묶여 있으니 몸만 떠나도 보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떠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런 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라시야마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라시야마는 늘, 깊게 생각이 잠기면 녹색 눈동자가 허공을 노려보며 몽롱하게 색이 번진다. 진은 그 색을 좋아했다.
이번 삶의 아라시야마 쥰은 친구다. 진 유이치는 수많은 아라시야마를 사랑했지만 늘 삶을 엄격히 구분하려고 애썼다. 그는 같은 사람이고 자신도 같은 사람이지만 저번 삶에서 사랑했다고 하여 지금 삶마저 사랑하는 게 옳은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명료한 이성조차 사랑과 인내로 갉아내며 버티고 있는 존재에게 가혹한 말이었으나 진은 늘 그렇듯 결벽적인 구석이 있었다. 고쳐지지 않는 천성이었다. 하지만 아주 예전에 시작했던 이 고민은 또 긴 시간을 소비한 뒤에 이미 답이 나온 난제였다.
"그럼 진은 미카도 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해 봤겠네."
"그렇지."
"보더의 사람들도 전부 알아?"
"아니. 의외로 전부를 알게 되는 일은 없더라."
"그렇다면 내일은 나랑 같이 보더에서 기다리다가, 처음으로 들어오는 모르는 사람을 알러 가자."
새로운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자.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새로 인연을 만들어보는 거야. 아라시야마가 그리 말하며 활짝 웃었다. 긴 시간이 쌓여있더라도,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아래쪽 모래들은 다 퍼지고 흐려졌더라도 그 위에 새로운 무언가를 쌓는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잖아. 그리 말하며 손을 뻗는 아라시야마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래, 이미 답이 나온 난제였다. 진 유이치의 고백을 들은 아라시야마 쥰은 늘 이렇게 새로운 '처음' 을 진에게 선사했다. 어느 시기여도, 어느 관계여도 상관없었다. 만난지 얼마 안 된 어린 아이여도, 삼십 대여도, 죽기 직전이어도. 친구여도, 이미 연인이었더라도 아라시야마는 늘 새로운 일을 진에게 제시했다. 그리고 그런 아라시야마에게 진은 가장 새로운 일을 겪고는 했다. 다시 한 번 너에게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삶을 곧 사랑으로 꾸려나가는 모든 기적의 시작이 또 하나 쌓이는 특별한 경험을.
진이 어설프게 웃으며 아라시야마가 뻗은 손을 잡았다. 응, 그러자.
그리고 다시 진 유이치는 천만 한 번째 사랑을 아라시야마에게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