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새벽의 연화 전력 60분
별빛_
2014. 11. 22. 22:44
흰 용의 손을 지닌 사내는 아주 우연히 잠에서 깨어났다. 해가 뜬 것은 아니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깨운것도아니었다. 그저 이유없이 눈이 떠졌고, 그렇기에 키쟈는 이미 달아나버린 잠을 찾아 헤멘다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시선을 느리게 주변으로 돌리자 보이는 것은 그의 일행들이었다. 소리없이 자고있는 청룡과 녹룡에, 한구석에서 자고있는 윤. 자는 모습마저 곱기 그지없는 주군과 그 옆을 지키는 괘씸한 인물에게까지 시선을 돌린 키쟈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사내가 넷, 여인이 한 분. 그리고 키쟈의 일행은 틀림없이 일곱이었다. 키쟈 본인을 제외한 계산이라 쳐도 하나가 없었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키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일행에 합류한 네 용의 마지막 한 명. 황룡 제노가 없었다. 그리고 키쟈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형제와도 같은 네 용이었으므로. 동시에 약간의 괘씸함 역시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모닥불을 지켜야하는 오늘의 불침범이 영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컴컴한 밤의 숲은 음침했고, 당장에라도 키쟈가 끔찍해하는 벌레가 튀어나올것만 같았지만 키쟈는 그를 감수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처음 마을을 나섰을때보단 훨씬 숲길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밝은 달빛에 의지하며 걸음을 옮긴 그는 곧 멀지않은 곳에서 황룡을 볼 수 있었다. 가만히 두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고 있는 황색의 용을.
달빛 아래 기도하는 황룡은 평소의 밝고 활발하다 못해 못미더울 정도로 천진난만한 황룡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고상했다. 그 광경에 할말을 잃은 키쟈는 잠시 머뭇거렸다. 진지해보이는 황룡을 방해해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백룡을 알아주듯 황룡이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키쟈가 그곳에 있음을 전혀 이상해하지 않는 시선이었다. 하긴, 어쩌면 당연했다. 그 역시도 키쟈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을터이니.
시선이 마주치자 황룡은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마저도 어쩐지 평소와 달라 백룡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황룡이 먼저 말을 걸었다.
"백룡, 안 자? 왜 일어났어?"
"그저 잠에서 깬 것이다. 그대야말로 어째서 이곳에 있는거지?"
가장 의아했던 질문에 제노는 그저 베시시 웃었다. 그리고 키쟈는 그것으로 제노가 침묵을 답으로 선택함을알았다. 차마 다그치기 뭐하여 키쟈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침묵이 다가왔다. 미묘한 무거움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는 것을 보며 황룡이 백룡에게 다가왔다.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있지있지 백룡. 백룡은 낭자를 만나서 좋아?"
"당연한것을!"
왜 그런 말을 하는거지? 라는 의문 대신 키쟈는 단언했다. 백룡으로 태어나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만을 삶의 의미로 여기고 자라온 그였으니. 그리고 그 모습이 만족스럽다는 듯 제노는 베시시 미소지었다.
"제노도 낭자가 참 좋아."
"그렇겠지."
"낭자가 좋은사람이라 다행이야."
...? 조금 어감이 이상한 말에 키쟈가 미간을 좁혔다. 어떤 의미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만 어쩐지 이상할만큼 마음에 걸렸다. 말갛게 달이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제노의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어른스럽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제노는 다른 용들도 참 좋아."
"그래."
마찬가지다. 라는 말은 조금 낯간지스러워서 생략했음에도 제노는 마치 들은것마냥 웃었다. 맑은 웃음이 낭랑했다.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하늘의 달을 가리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곱게 눈을 휘며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치 달을 붙잡는것처럼. 말도 안되지만 정말로 그렇게.
"제노에게는 여기있는 백룡도, 꿈나라에 있는 청룡과 녹룡도 정말 소중한 사람이니까... 아, 당연히 낭자랑 학이랑 윤도."
그리 덧붙이며 제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표정은 평소와 같은 미소였다. 이상하리만치 낯선 얼굴이 아닌, 아는 얼굴.
"그러니까 반드시 제노가 잘 지킬거야."
"...그대는 네 용들 중에 신체능력이 제일 떨어지지 않나."
"엑, 모른척 해주면 안 되는거야?"
백룡도 심술궂네. 그리 말하며 제노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키쟈는 남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실질적으로 가장 강한것은 키쟈일터임에도, 어쩐지 정말로 제노에게 보호받는 듯 해서. 그리고 놀라운 점은 그것이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낯선 감각에 당혹스러워하는 백룡에게 황룡은 웃으며 손을 뻗었다. 이만 가서 자자! 하고 외치는 그 목소리에 키쟈는 결국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상념을 떨쳐냈다. 어차피 용들은 형제였고, 지킴받는것은 나쁜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제노가 뻗은 손을 왼손으로 붙잡으며 백룡은어두운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만 꿈 같았던 달 아래의 숲을 뒤로하고 그가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의 곁으로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