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VEL

[◆A/미사와] 십이국기AU

별빛_ 2015. 7. 30. 01:06




00.

 기린은 본디 이름이 없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왕만을 위한 존재였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죽은 뒤에 남는 시신도, 남길 이름도 없으니 삶이 끝났을 때 남은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 명의 인간보다도 덧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드물게 이름을 선사받아 흔적을 남기는 기린들 역시도 존재했다. 자신의 주인, 자신의 왕, 기린에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중하디 중하고 귀하디 귀한 사람에게 너 역시도 중하고 귀한 존재노라, 너를 총애하고 있노라 인정받아 이름을 받게 되는 존재였다. 제 주인에게서 미유키御幸라는 이름을 선사받은 흑기黑麒 역시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미유키, 미─ 유─ 키─. 일반적으로 상서로운 색이라는 금색을 타고 태어나는 다른 기린들과는 달리 흑색의 갈기를 지닌, 그렇기에 타 기린들보다 더 강한 힘을 타고났다는 한 마리의 흑기는 입 안으로 제 이름을 굴려보았다. 소리없이 벙긋거리는 입모양이 더없이 기꺼웠다. 자신이 선택해 그 발밑에 무릎꿇었던, 황금의 눈을 가진 제 왕이 그 이름을 내려준 지 닷새 째. 물론 나라의 재보, 그 고귀한 신분의 존재를 선뜻 이름으로 부르는, 그보다는 부를 수 있는 존재조차 많지 않았기에 이름을 듣기란 쉽지 않았다. 시간이 더 흐르고, 더 오랫동안 살아가며 그 세월이 쌓인다면 자신의 이름을 들은 시간마저도 차곡차곡 쌓여나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의 왕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만이 유일하게 타인이 부르는 이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물론 왕과 기린의 사이였고, 기린은 왕의 반신이니 타인이라고 말하기도 조금은 기묘한 사이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차치해두고서라도 말이다. 한 마리의 흑기는 고개를 들어 한 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왕이 품고 있는 왕기. 눈꺼풀 너머로도 태양처럼 빛나는 강렬한 그 모습에 흑기는 결국 입가에 웃음을 그렸다. 누군가 장난처럼 흘려낸 말을 흑기 역시도 들은 적 있었다. 모든 기린은 왕을 척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 말을 들었을 적의 흑기는 몇 년째 왕을 찾지 못했던 탓에 여유가 없었고, 그렇기에 그 말에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을 뿐이었지만, 지금이라면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 모든 기린은 왕을 척애했다. 흑기, 그 미유키 역시도 그랬다. 


01.

 사와무라는 평범한 농민 집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두 부모님이 간절히 빌어 태어난 난과의 속에서 웃고 있던, 그야말로 평범하디 평범한 시골 소년에 불과했다. 나라에 왕이 없기 때문에 나라 여기저기서 요마가 출몰하고 끊임없이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그야말로 살기힘든 팍팍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변에 있는 유일한, 그리고 커다란 불안거리였을 뿐, 사와무라 자체는 커다란 문제가 없었다. 부모님을 포함한 마을의 나이드신 어른들은 왕이 없다는 것을 크나큰 걱정거리로 여기고 몇 번이고 한숨을 이어나갔지만,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옥좌에 주인은 없었고, 그저 고귀하시다는 흑기 님만 계실 뿐이었다. 나라 한가운데에서 조금 빗겨나있는 위치에 콕 박힌 농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와무라는 왕이 있는 나라를 알지 못했다. 왕이 계시다는 타국에도 가 본 적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의 기린님께서는 그 어떤 기린 님들보다도 귀하고 드물다고는 하지만, 왕이 없다면 30년만에 죽어 사라져버린다는 기린 님은 벌써 2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사와무라가 성인으로써 한 몫을 다하고,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막 가질 무렵이면 그 기린 님은 사라져 없을 터였다. 사와무라는 아주 가끔 그것을 떠올리며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 어디서든 흔히 걸려있는 기린 님의 초상을 볼때면 더더욱 그랬다. 인간으로 현신하고 있는 모습은 본 적 없이, 그저 기린 본신의 모습뿐이었지만 큼지막하게 그려진 검은 갈기의 우아한 생명체를 볼 때면 사와무라는 이유없이 가슴이 뛰었다. 저렇게나 아름다운 생명체가 그리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아직 젊다못해 어리기에 기린의 유무에 대해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사와무라에게는 진심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다른 마을의 아이들은 그러지 않았으면서도, 유독 사와무라는 그러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신호일지도 몰랐다. 평범하지만 평화로웠던 사와무라의 삶에 무언가가 끼어든다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신호. 

 그리고 사와무라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생일이 지나 막 열 일곱이 되었을 무렵의 여름날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던 오전의 태양 아래에서 사와무라는 빛나는 갈기를 보았다. 흔히 그렇다고 전해들은 금빛이 아닌 강철빛의 검은 갈기. 태양빛을 등지고 언뜻 금갈색이라는 착각이 들기까지 하는 특별한 갈기색을 흩날리며 그의 삶에 날아든 것은 한 마리의 기린이었다. 짐승의 생명체로 전변하고 있는 그 모습에 사와무라는 단박에 시선을 빼앗겼었다. 가장 처음 눈에 담은 그 순간에는 그저 지나가는 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기린 님의 행차를 지켜볼 수 있었다니 영광이노라고, 뻣뻣하게 고개세워 바라보지 말고 어서 고개를 숙이라고 말하는 주변 친구들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은 그 검은 갈기였고, 그 금안에 가까운 눈이었다. 의식마저 빼앗겨버린 듯, 차마 숨을 마시지도, 들이쉬지도 못한 채 호흡을 멈추고 그 눈을 몇 번이고 탐했을까. 그제서야 사와무라는 자신이 기린 님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기린 님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역시도. 아주 느즈막한 깨달음이었다. 

 체구가 작지 않았음에도, 기린이 땅을 내딛는 것에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날아드는 것은 본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에도, 바닥에 내려앉을 때에는 어느 새인가 인간의 형상으로 전변하여 있었다. 아니, 어느 새인가라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그가 인간의 형상으로 전변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았다. 기린이라는 상서로운 생명체가 인간의 형상을 뒤집어쓰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로 경이였다. 

 기린 님이 자신에게서 한 번도 시선을 때지 않았다, 라는 것을 정말 뒤늦게 깨달은 것은, 그 ‘기린 님’이 사와무라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그 앞에 무릎꿇었을 순간이었다. 벼락이 내려치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단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 본능적으로 사와무라는 깨달았다. 지금의 이것이 자신의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이노라고.

“...천명을 받들어, 주상 전하를 맞습니다.”

 고요히 울리는 목소리는 낮고 깨끗했다. 사와무라의 손이 잘게 떨렸다. 곁에 있던 친구들은 기린 님이 땅에 내려앉기 이전부터 이미 무릎꿇고 있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사와무라가 유일했다. 

 사와무라 에이준이 유일했다. 

“곁을 떠나지 않으며, 소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바친다고 맹세합니다.”

 조금 느리지만 또렷하게 이어진 말은 확실하게 사와무라에게 닿았다. 그는 조금 멍한 정신으로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이마를 발등 바로 위에 대고, 아마 전변으로 보이지 않게 된 기린의 뿔을 그의 발등에 가벼이 올려놓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보이는 것은 흠 하나 없이 반듯한 등과 잘생긴 뒷모습 뿐이었다. 사와무라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겨우, 정말 겨우 붙잡고 있었다.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했다. 이것은, 기린의 말은, 이제껏 농가의 아들로 평범하게만 자라온 사와무라가 겪기에는 너무도 크고 대단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대답해야만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무릎꿇어버린 이 강건한 흑기에게 자신은 보답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복잡한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외쳤다. 

“...좋슴다! 허락함다!”

 이 대답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놓을지, 아직 사와무라는 제대로 짐작하고 있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대답을 듣고 고개를 드는 흑기의 모습을 보며 사와무라는 호쾌히 웃었다. 마을에서 사랑받는, 태양을 닮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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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이것저것... 시간축도 엉망진창이지만 개인만족으로 한 번 끄적끄적 해봅니다 u u) 동양풍의 미유사와가 보고싶었기에 좋아하는 십이국기로 한 번 AU 해보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