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카나타 X 여우 카오루
찬란한 햇볕을 고스란히 빼닮은 밀밭 색 털에 회색에 황금 섞인 눈동자. 모양 좋은 세모난 귀가 허공에 비죽 섰다. 세로로 날렵한 동공이 매력적인 젊은 여우는 고민이 있었다. 사실 한없이 걱정에 가까운 고민이었지만, 고집스럽게 고민이라고 묘사했다. 아니, 내가 이런 걸 고민해야 해? 조금 자존심도 상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몇 번 서성이던 카오루는 곧 탐스러운 꼬리로 몇 번 바닥을 내리쳤다. 온 몸으로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 불만을 한몸에 받아야 할 대상은 여전히 싱글벙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카오루는 조금 더 불만에 찼다. 완전히 골이 난 기색의 잘생긴 여우를 보며 푸른 털의 들고양이는 한 번 길게 울기만 했다.
“카오루, 볕이 좋아요~.”
“날이 춥거든?”
이제 겨울이야! 살얼음이 언다고! 카오루가 털을 세우고 짧게 하악질했다. 얕은 호수에서 첨벙거리며 물놀이를 하는 카나타가 이보다 더 못마땅할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건지고 싶지만 잘 관리해놓은 결 좋은 털을 상하게 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더군다가 틀림없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물일 게 뻔했다. 바다를 구경하는 건 좋아했지만 찬 물에 물장구를 치고 싶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차마 발도 담그지 못하고 물가 근처를 서성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카오루의 모습이 뻔히 보이면서도 카나타는 호숫물에 제 앞발을 참방였다. 춥지만 기분 좋은 물놀이였다. 카오루가 저를 신경써준다는 점에서 추가 점수도 있었다. 카나타가 기분 좋게 다시 한 번 울었다. 냐야─.
“이제 슬슬 나와, 카나타 군.”
“조금만 더 놀고요~.”
“그러다 얼어죽어!”
카오루가 불만스럽게 꼬리를 세웠다. 카오루는 아직 수련 중인 여우였기에 인간화를 할 수 없었다. 얕은 호수에 첨벙 들어가 카나타를 건져오지 못한다는 점에서 드물게 수련의 의욕마저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재능은 있으나 수련을 즐기지 않아 아직까지 인간화를 못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카오루의 목구멍에서 작은 그르렁거림이 기어나왔다.
카나타 군! 캬앙거림이 섞여나오는 카오루의 울음소리에 결국 카나타가 먼저 포기했다. 더 카오루를 화나게 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꼬리가 길게 섰다. 좌우로 한 번 살랑이고는 한 번 몸을 털고 총총 호수에서 걸어나오는 카나타를 보며 카오루가 단박에 달음박질쳐서 카나타에게 다가갔다. 겨울나기를 위해 털갈이를 하여 길고 북슬해진 털이 모두 흠쩍 젖어있었다. 작게 떨리는 뺨을 몇 번 핥아주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기만 혀에 닿았다. 으으. 카오루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추워요, 카오루~.”
“당연히 춥지!”
카나타 군 바보! 카오루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그 귀를 살짝 깨물었다. 카나타가 귀를 한 번 털었다. 카오루~. 어리광처럼 달라붙는 목소리에 카오루가 길게 한숨을 삼켰다. 재능도 실적도 카나타 쪽이 뛰어났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카오루가 길게 카나타의 몸을 핥았다. 남의 몸, 그것도 수컷을 그루밍해주는 데에는 서툴러서 조금 헤매기는 했지만, 물기는 차근차근 줄어들고 있었다. 카나타도 의외로 능숙하게 제 몸을 정돈하기 시작하니 멀쩡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도 이 정도 정돈에 즉각 털이 마르는 건 둘 다 일방적인 동물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특별한 생명체이기 때문이었지만.
여우 걱정시키는 재주가 있는 고양이. 카오루가 카나타의 꼬리를 다시 한 번 살짝 물고는 떨어졌다. 속 편한 미소가 얄미웠다. 평소의 카나타는 수컷을 싫어하는 카오루가 곁에 둘 정도로 독특하고 상냥한 들고양이었지만, 가끔 물장난으로 카오루의 속을 썩일 때가 있었다. 그것만큼은 카오루도 어찌할 수 없는 카나타의 고집이었다.
한창 그루밍을 해 준 탓에 복슬복슬 탐스럽게 관리 잘 되어있던 카오루의 털이 조금 엉망이었다. 카나타가 사과의 의미로 카오루의 곁에 바짝 붙었다. 카나타의 꼬리가 제 몸을 감싸는 것을 보며 카오루가 조금 미묘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조금 기쁘고, 적잖게 부끄러웠다. 좌우로 크게 꼬리를 살랑이던 카오루가 곧 카나타의 몸에 꼬리를 바짝 붙였다. 체온이 곧장 닿을 정도로 몸이 가깝게 닿았다. 누가 보더라도 퍽 다정한 태도였다.
“이제 추우니까 물장난 하지 마, 카나타 군.”
“그건 싫어요~.”
“감기 걸릴거라고? 아니, 감기가 문제가 아니고 얼어 죽을거야.”
우린 아직 동사를 막을 정도로 강하지 않잖아. 응? 카나타의 목덜미를 핥아주며 카오루가 조근조근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상대의 말에는 누구나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카나타 역시도 그랬다. 본격적인 설득에 들어가니 카오루의 말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몇 번 귀를 파닥인 카나타가 길게 울었다. 갸웅거리는 울음소리가 애처로웠다.
“물놀이......”
“진짜 익사체, 아니 동사해버릴거야.”
나 두고 그럴 거야? 카오루가 부끄러움을 삼키고 필승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분홍빛 혀가 코를 몇 번 핥았다. 쑥쓰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기대를 담아 저를 바라보는 카오루의 모습에 카나타의 의지는 단박에 꺾였다.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쫑긋한 귀가 추욱 쳐졌다. 명백한 항복의사였다.
“알았어요......”
“으음, 대신 내가 놀아줄테니까.”
너무 풀이 죽어버린 카나타에게 카오루가 심심한 위로를 건냈다. 달래주는 그 말에 카나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슬복슬한 털에 얼굴을 묻으며 카나타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그르렁거림을 삼켰다. 꺄웅. 대신 튀어나온 것은 어린 울음소리여서, 카오루도 작게 웃었다.
작은 짐승들이 서로 몸을 기댔다. 따끈한 체온이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