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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카오]

2021. 6. 29. 03:14 from ENSTARS/NOVEL

 

  카오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귀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게 스스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귀 뿐만 아니라 얼굴이며 목덜미까지 화끈거렸다. 상대가 귀엽다는 듯 제 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더더욱 그랬다. 카나타 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라는 말로 시작하는 온갖 항의가 가슴에 맴돌았다가 입천장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에 고스란히 녹아내렸다. 안 그래도 꽉 감고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진짜 치사해. 정말 치사하다. 제일 큰 문제는 그 치사한 카나타 군에게 도통 이길 수 없는 저 자신이다. 아니면 이길 마음도 들지 않는 이 감정이거나. 


  진짜 불공평해. 좋아하면 지는 거라는 말은 카오루도 알고 있다지만, 카나타 군도 나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카나타 군은 나한테 이기기만 하는 거야. 그 어처구니없는 불공정에 카오루는 답잖게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었다. 치사해. 카나타 군은 치사해. 저 좋을대로 마음껏 카오루의 입안을 잔뜩 헤집다가 마지막으로 쪽 소리내어 떨어지는 입술에 카오루는 그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얼굴이 익은 문어마냥 따끈하고 말랑해져 있다는 사실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카오루, 귀여운 얼굴이네요~.”
“카나타 군은 왜 이렇게 멀쩡한 거야…….”

 

  우리 방금 키스했는데, 나는 지금도 심장이 터져서 쓰러질 것 같은데 같이 키스한 카나타 군은 왜 그렇게 깔끔한 얼굴로 방실방실 웃고 있는거야. 키스하는 내내 느꼈던 불공평함이 다시 솟구쳤다. 붉어진 얼굴을 아직 수습도 채 못했으면서 선 고운 눈썹이 잔뜩 좁혀지고 뾰로통하게 뺨이 부어올랐다. 삐죽삐죽 성게마냥 불만을 표시하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는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다처럼 웃었다. 

 

  저 자신이 아무리 불평을 말해봤자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는 연인을 보며, 카오루는 다시 한 번 입을 삐죽였다. 카나타는 분명 자신이 첫 번째 연인이었고 카오루도 키스는 카나타가 처음이었다. 둘 다 상대에게 첫 키스를 바쳤고 그 때는 분명 둘 다 엇비슷하게 뻣뻣했던 것 같은데, 카나타는 대체 뭘 어디서 어떻게 한 것인지 키스할 때마다 쑥쑥 실력이 늘더니 지금은 입맞춤 하나로 카오루를 새빨갛게 만들만큼 능숙해졌다. 카오루는 지금도 입술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정말 치사했다. 

 

  키스할 때마다 목석처럼 굳어져서는 구명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카나타의 등이나 옷자락을 잡는 것밖에 못하는 카오루에 비해 카나타는 조금씩 카오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늘의 키스도 귀라던가 허리라던가 분명 만졌다. 죽을만큼 부끄러운 것과 별개로 카나타가 생각보다 손이 빠르다는 걸 카오루는 매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다지 싫지 않다는 것도. 이러다가 어느 날 카나타가 키스하다 넘어뜨리면 홀랑 넘어가버릴지도 몰랐다. 아직 둘이서 그런 쪽 이야기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기는 하지만 어쩐지, 아니, 나 이렇게 쉬운 남자가 아닌데! 아니, 아닌가? 생각해보면 카나타 군에게는 매번 쉬웠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아 진짜! 

 

  몇 번이고 삐죽거리다가 저 혼자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골이 난 듯, 부끄러운 듯 어쩔 줄 모르는 연인을 앞에 두고 카나타는 꽃처럼 곱게 웃었다. 제 연인은 어떤 표정도 참 잘 생겼다는 소감도 속으로 몰래 남겼다. 도록 눈을 굴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한 카나타가 살짝 몸을 움직였다. 

 

“카오루~.”
“응?”

 

  쪽. 물처럼 다가온 카나타가 다시 한 번 카오루에게 가볍게 뽀뽀했다. 매끈한 뺨이 따끈따끈했다. 카오루가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을 보며 카나타가 살랑살랑 연인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늦장 부리면 지각해 버릴 거에요.”
“어? 어……. 으, 응. 그렇긴 한데.”
“후후. 또 놀러와요.”

 

  아니, 난 이제 이 수족관, 이 방에만 들어오면 카나타 군이랑 한 키스가 생각나서 곤란할 지경이라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이렇게 이 백 퍼센트 사적으로 써도 돼? 묻고 싶은 질문이 턱끝까지 올라왔으나 카오루는 참아냈다. 제 손을 잡고 능숙하게 길을 찾아 나가는 카나타의 뒤를 쫒으며 카오루는 잠시 주변을 장식한 수조를 흘려보았다. 

 

  둘 다 아이돌을 하고 있는 만큼 두 사람의 데이트는 무척 은밀하고, 바깥에 내보일 수 없는 종류였다. 그나마 학창시절부터 친구로 유명했기 때문에 손도 못 잡고 너무 가까이 붙을 수는 없어도 단 둘이서 놀러라도 나올 수 있는 거지, 오랫동안 친구 아니었으면 혹시 모를 안전을 위해 무조건 둘 사이에 누군가 끼워서 나왔어야 할 뻔했다. 카나타 친구인 레이라던가, 카오루 친구인 치아키라던가. 누가 끼든 힘들 뻔 했으니 계속 친구라고 공언해둬서 다행이라고 카오루는 몰래 생각한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의 취향상 주로 가는 곳은 바다였지만, 바다에 간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해양생물부 부원인 소마가 생각나거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놀리고 싶어지는 귀여운 후배가 보고싶어져서 소마나, 같은 서클인 시노부며 세나까지 부르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보니 제대로 된 ‘데이트’ 가 하고 싶어질 때는 도리어 수족관에 왔다. 

 

  카나타가 경영하는 이 수족관에서는 CCTV가 없거나 관계자 외, 혹은 카나타 외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있다보니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어린 시절 추억도 있고, 학창 시절 같이 이곳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도 있으니 여러가지로 소중하긴 한데 이런, 이런 식으로……. 여기서……. 

 

  카오루는 카나타에게 붙잡히지 않은 쪽 손으로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 출구고, 밖으로 나가면 다시 말끔한 얼굴의 아이돌 하카제 카오루가 되어서 친구인 신카이 카나타와 거리와 간격을 지키며 표정을 관리해야 하는데. 그러니 이제 그만 좀 생각해야 하는데……. 

 

  입안 살을 아프지 않게 자근자근 씹으며 카오루가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아이돌, 나는 아이돌이다.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할 수는 없어. 팬들이 사랑해주니까. 터질 것 같은 심장도 제 입술이며 뺨에 닿았다 떨어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르르 휘어지는 상냥한 눈도 모두 꽁꽁 싸매서 제 안 구석에 잘 보관해둬야 했다.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카오루는 가까스로 제 페이스를 회복했다. 나가는 문을 앞에 두고, 단단히 맞잡고 있던 손이 아쉽게 떨어졌다. 미련 가득한 손길로 손바닥을 한 번 쓸었다가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간지러운 온기에 카오루는 한 번 어깨를 움츠렸다가 펴며 웃었다. 이럴 때의 카나타는 귀여웠다. 돌아가야 한다고 머리로 아는 것과 별개로 영 돌아가고 싶지 않은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연인의 시선을 느끼며 카오루는 모르는 척 먼저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동조해서 망설여버리면, 또 키스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키스받으면 다시 빠르게 수습해 낼 자신이 없었다. 분명 늦어버릴거다. 

 

  문을 열자 에어컨과 수조 특유의 냉기로 서늘했던 공기가 빠지고 열에 데워진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우왓, 더워. 이제 여름이네. 무심코 중얼거리며 손으로 볕을 가린 카오루가 몇 걸음 앞서 걸었다. 

 

“카나타 군은 이제 잡지 촬영하러 가야 하지? 시간 맞춰서 갈 수 있겠어?”
“멀지 않답니다. 괜찮아요~.”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카나타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하고, 카오루는 기숙사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물론 카오루도 날짜가 바뀌기 직전 즘에는 또 유닛 스케줄이 있었다. 유닛 컨셉이 컨셉이다보니 카오루는 심야 방송이 제법 있었다. 카나타는 반대로 해가 떠 있을 무렵 스케줄이 많았고. 오늘처럼 쉬는 시간이 딱 맞는 법은 드물었다. 인기 아이돌이란 그런 법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힐긋거리며 카오루나 카나타를 보는 사람이 늘고 있으니 아쉽더라도 손 한 번 잡을 수 없다. 멋지게 그려진 아이돌의 완벽한 미소 속에 아쉬움을 곱게 접어 넣으며 카오루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나중에 또 봐, 카나타 군. 카나타도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찬가지로 곱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카오루. 

 

 

 

***

 

 

 

“오! 체리네요, 맛있겠다~.”
“란 군이랑 유우타 군 몫도 사 놨어. 씻어서 먹어.”
“야호~!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신이 나서 통통 튀는 발랄한 주황색 머리카락을 응시하며 카오루도 조금 즐겁게 웃었다. 저 쌍둥이는 대화하는 상대를 즐겁게 하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귀엽기도 하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카오루는 조금 멋쩍어지기까지 했다. 기숙사에 들어오는 길에 본 과일가게에서 체리를 보고 맛있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카오루의 목적은 좀 더 다른 곳에 있었다. 같은 방 유우타와 나기사에게는 낯부끄러워 절대 말 못 할 이유지만. 바구니에 두어 주먹 넘게 담긴 체리를 열정 어린 눈으로 응시하던 카오루가 그대로 꼭지가 달린 체리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살살 씹어 달콤한 과육은 삼켜 먹고, 카오루는 그대로 체리 꼭지를 혀로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카오루는 지고만 있는 게 싫었다. 저도 자존심이 있는데, 최소한 능숙하게 카나타와 키스하고 싶지 않겠냐 말이다. 이래뵈도 배덕의 아이콘 UNDEAD의 양대간판인데! 닳고 닳은 섹시한 이미지로 팔리고 있는데! 물론 아이돌이니 실제로는 아니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지만! 어디 가서 쪽팔리고 낯뜨거워 말도 못 할 일이었다. 정말 최소한, 카나타의 혀가 들어오면 저도 거기에 제대로 응해주고 싶었다. 허나 문제가 있다면 키스를 잘 하는 방법 같은 걸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최선의 연습은 실전이라는 말도 있지만 카나타랑 키스만 하면 떨려 죽겠는데 연습이고 뭐고, 정신이 쏙 빠져 버리니 카나타와의 키스는 제외. 카나타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키스는 애초에 고려할 가치도 없으니 제외하고, 그러다보면 풍물로 들은 우스갯소리라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혀로 이 체리 꼭지를 매듭 지을 수 있으면 된다고 하던데……. 카오루는 혀 끝에 닿는 체리 꼭지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지만, 이걸 어떻게 매듭을 지으라는 건지. 몇 번이고 헤매도 혀만 아프고 딱히 묶이지는 않았다. 몇 번 실패하고 나니 오기가 솟았다. 하카제 카오루는 본디 뭐든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요령이 좋고 센스도 있다. 지금은 영 영뚱한 곳에 기운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하나, 둘, 셋……. 몇 번이고 실패하다가 가까스로 매듭다운 매듭을 묶은 게 여덟 번 째 체리였다. 한 번 성공하면 그 이후는 쉬웠다. 요령을 깨친 카오루는 금새 체리 꼭지를 뚝딱 묶어냈다. 

 

  ……이건 이제 할 수 있겠는데, 그래서 키스랑 이거랑 요령이 비슷한 건가? 이런 식으로…… 하면 되나? 느즈막히 연습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 낸 카오루가 심각한 표정으로 묶은 체리 꼭지들을 내려다보았다. 연습이 된 것 같냐고 물어보면 애매하다는 답밖에 줄 수가 없었다. 일단 혀를 움직일 수는 있겠는데, 카나타랑 키스 중에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한 번, 그리고 이렇게 하면 카나타가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만큼 카나타를 그렇게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면 또 한 번 고개를 기울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성공은 했는데 의문만 남은 연습이었다. 몇 번 고개를 갸웃갸웃 좌우로 기웃거린 카오루가 곧 남은 체리들을 정리하고 묶은 꼭지들을 버린 뒤 침대로 가 앉았다. 

 

  끄으응. 아무것도 모르고 즐겁게 제 몫의 체리를 씻어 와서는 냠냠 먹기 시작한 유우타를 턱 괴고 쳐다보며 카오루는 전혀 딴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야 카나타 군이랑 키스를 잘 하지. 카나타 군은 왜 능숙해져서 나한테 이런 부끄러운 고민을 하게 만드는 거야. 카나타 군은 어디서 키스 배워 왔어. 나는 여전히 적응을 못 하고 있는데 카나타 군은 괜찮아? 나랑 키스하는 거 좋아? 내가 이렇게 굴고 있는데도? 카나타 군은, 카나타 군은……. 머릿속이 푸르고 녹빛으로 꽉 차서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이것도 다 카나타 군 때문이야. 책임을 제 연인에게 밀어버리며 카오루가 몇 번 고개를 흔들었다. 감히 인기 아이돌의 머리를 개인 한 명으로 꽉 채워 버리다니, 카나타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몇 번이고 제 안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카나타를 쫒아내려 노력했다가 실패한 카오루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상상하니 보고 싶다. 우스운 일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진짜 중증이다. 이상하다, 사귀기 전엔 안 이랬건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카오루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한계를 모르고 부풀어 오르는 풍선 같았다.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지 카오루 본인도 모르는 풍선. 제대로 된 첫 연애라 그런 건가? 아니면 아이돌이라? 하루 24시간 내내 같이 있을 수 없어서? 그도 아니면 들키면 안 된다는 위기감? 그런 거에 불타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고민해도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걸 다 차치하고, 그냥 카나타가 웃고만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행복하고 들떴다. 잔잔하게 파도치는 해안가에서 느긋하게 누워 있을 때와 비슷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언제나, 언제나. 신카이 카나타만 줄 수 있는 감정. 웃는 얼굴로 타인을 웃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을 아이돌이라고 한다지만, 카오루도 팬들을 미소짓게 만들 수 있지만. 역시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주는 감정은 역시 달랐다. 

 

  그냥……, 카나타 군이라면 뭐든 괜찮다고. 전혀 멋있지도 않고 평소 이미지를 와장창 깨 먹는 행동거지라고 해도 카나타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는 이 감정. 카오루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카나타를 사랑했다. 그와 입을 맞출 때면 그 거대한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펑 터질 것처럼 들썩거렸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얼어버렸다.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정직하게 몸으로 드러나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는 파업을 해 버렸다. 키스에 익숙해지지 않는 건 그 탓도 컸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나머지 얼어버리는 탓.


  팬, 아니 팬이 아닌 사람들이 가득 찬 거대한 돔 무대에 혼자 서는 일이 생기더라도 제대로 무대를 진행하며 그 사람들을 제 팬으로 만들어버릴 배짱이 있는 하카제 카오루가! 

 

  큰일 났네. 정의하고 나니까 천 배쯤 부끄러운데……. 카오루가 양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카나타의 생각을 이렇게나 하고 나니 또 카나타를 만나고 싶어졌다는 점이었다. 만나서, 또 키스하고 싶었다. 연습한 보람도 없이 또 뚝딱거릴 확률이 높다지만 그래도. 그래도……. 

 

  진짜 낯 부끄러워서 죽겠다. 아이돌로서 팬에게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표정을 베개에 파묻어 숨겨버리며, 카오루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반짝거리는 금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새빨갰다. 카나타에게 키스받았던 몇 시간 전과 똑같이.

 

 

 

***

 

 

 

  카나타는 이불 속에 완전히 파묻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고 몸을 웅크렸다. 같은 방을 쓰는 히요리나 린네가 언젠가 지나가듯 한 번쯤 카나타에게 그러면 덥지 않느냐 물어봤지만, 카나타는 고집스럽게 이불 속에서 라디오를 듣는 행동거지를 고집했다. 당연히 더워서 당장이라도 차가운 물에 풍덩 들어가고 싶을 정도지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 전체적으로 어두워지고, 무엇보다 라디오의 소리가 잘 들리는데다가 주변의 소음이 한결 차단되고, 라디오를 들으며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장점들을 고려하자면, 놀랍게도 카나타는 더운 것조차 감수할 수 있었다. 히요리나 린네가 그다지 나쁜 룸메이트는 아니었지만─뭐, 제 세계를 뚜렷하게 구성하는 카나타 기준으로 나쁜 룸메이트가 되기도 힘들겠다만─카나타도 제 연인의 라디오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순간 정도는 오롯하게 혼자 있고 싶었다. 연인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표정 같은 건, 연인에게만 보여주고 싶지 않은가. 

 

  UNDEAD의 이미지답게 느즈막한 밤, 22시에 시작하는 하카제 카오루의 한 시간짜리 라디오는 카나타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귀엽고 성실한 연인이 최선을 다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지 않은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종종 카오루가 저에게 말하는 기분이 들어서, 가끔 제 옆에 없는 카오루가 절실하게 보고 싶어지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지만 카나타는 과감하게 감수하고 있었다. 이 라디오는 생방송이 아닌 녹화방송이기 때문에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을 때에는 전화를 걸어버리기도 하면서. 

 

  평소보다 조금 더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카오루가 첫 번째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성실하나 욕심 있는 청자답게 사연보다는 카오루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카나타가 살짝 눈을 감았을 때, 문득 주변이 살짝 어수선해졌다. 이불 속에 쏙 들어찬 카나타의 귀까지 들어오는 깨끗한 노크 소리 세 번. 밤이 늦었는데 손님이라니, 극히 드문 일이었다. 방에 있던 다른 두 사람도 딱히 기다리던 손님은 아니었던 듯, 한 텀 늦게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

 

  앗. 이불 바깥 소식에 관심을 끄고 카오루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던 카나타의 귀에 새로운 카오루의 목소리가 얇게 겹쳐졌다. 손님의 목소리는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히요리와 린네에게 사과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를 들으며 카나타가 라디오를 끄고 이불을 헤쳤다. 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힌 건 카나타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쏙 내민 순간과 거의 동시였다. 카오루. 진짜 카오루였다. 

 

“카나타 군에게 잠깐 볼일이 있어서. 미안, 카나타 군. 잠깐 나와줄 수 있어?”
“저 말인가요? 괜찮긴 하지만…….”

 

  카나타가 버둥버둥 우선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카오루, 분명 날짜 바뀔 때 쯤 스케줄이 있다고 헀었는데. 힐긋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시각이 22시에서 대략 15분 정도 지났으니, 이동시간까지 고려하면 삼십 분 내에 카오루는 기숙사에서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볼일? 낮에 데이트 할 때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거리면서도 카나타는 망설임없이 카오루에게 다가갔다. 살짝 땀에 젖어 달라붙은 카나타의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정리해주며 카오루가 카나타를 데리고 방 바깥으로 나왔다. 

 

  ES의 기숙사에서는 사람 없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카나타의 방에도 린네와 히요리가 있고, 카오루의 방에도 란과 유우타가 있고. 기숙사 건물에도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카오루는 어떤 요령인지, 인적 드문 계단에서도 CCTV에 찍히지 않을 사각을 잘도 찾아냈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오는 길에 한 명도 마주치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CCTV의 사각을 잘 찾아내는 건, 카오루가 유메노사키 시절 아이돌을 하면서도 은근슬쩍 신경쓰며 행동했었으니 의외랄 것도 아니었지만. 

 

“카오루, 바쁘지 않나요~? 갑자기 할 말이 생긴 건가요?”
“한 20분쯤은 시간 남았으니까 괜찮아.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래도…….”

 

  바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더라도 아이돌 중에 제 기척 죽이는 게 특기인지 뭔지 잘도 은밀하게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카오루는 카나타와의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카나타의 뺨이 불만으로 막 빵빵하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할 때 쯤이 되어서야 카오루는 만족하고 카나타와 시선을 맞췄다. 

 

“일하러 가기 전에 카나타 군이 보고 싶어서 불렀어.”
“…….”

 

  정말 별 일이었다. 부끄럼쟁이 카오루가 이런 발언이라니. 심지어 일정이 안 맞아서 한 달이고 못 만났던 때도 아니고, 당장 오늘 데이트를 했는데! 쌓일 뻔 했던 카나타의 불만이 마법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기쁨과 약간의 수줍음이 한가득 채웠다. 그리고 자갈처럼 굴러온 작은 걱정도. 혹시 이 반나절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게 아닐까. 기쁘지만 순진하게 기뻐해도 괜찮을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나타를 앞에 두고, 카오루도 잠시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너와 키스하는 연습을 하다가 너를 향한 감정이 너무 부풀어 올라서 촬영 전에 직접 보고 싶어졌다, 따위의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둘 다 서로의 생각에 잠긴 탓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건 카오루였다. 일단 시간에 쫒기는 사람은 그였으니까. 살짝 손을 뻗어 연인의 손가락에 살짝 제 것을 엮어낸 카오루가, 최대한 노력하였으나 그래도 쑥스러움을 영 이기지는 못한 표정으로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 표정이 더없이 사랑스러워서 카나타는 속입술을 깨물었다가 행복하게 웃었다. 둘 다 남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카오루가 와 줘서, 카오루의 라디오를 못 들었어요.”
“다음에 들어 줘. 끝나면 바로 홈페이지에 방영본이 올라오니까.”
“실시간으로 듣고 싶었는데.”
“실물 하카제 카오루는 싫었어?”

 

  싫을 리 없잖아요. 두런두런 이어지는 대화와 동시에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반듯한 이마가 툭, 닿았다. 동그랗게 이마로 전해지는 온기와 코가 맞닿는 거리. 가까이에서 보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그 속에 저 자신이 실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까지 고스란히 보였다. 

 

“만나러 와 줘서 기뻐요, 카오루.”
“……응.”

 

  아, 키스한다. 카오루는 무심코 그리 생각했다. 그냥, 그냥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느리게 눈을 감았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무척 순간적인 떠오름이었으나, 키스하는 카나타의 얼굴이 궁금했다.

 

  쪽, 입술이 닿았다. 카나타의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빤히 카오루를 보고 있었다. 쪽쪽, 닿았다가 떨어지고 또 닿았다가 떨어지고. 가볍게 몇 번이고 봄비처럼 키스해오는 카나타의 세례를 받던 카오루가 살짝 허리를 뒤로 뺐다. 

 

“……왜 눈 안 감고 그래.”
“키스받는 카오루가 귀여우니까요~.”
“그런 치사한 말 하지 마…….”

 

  부끄러움은 왜 늘 저의 몫인지. 카오루가 잔뜩 눈썹을 늘어뜨렸다. 젠장. 역시 카나타는 너무 치사했다. 이때까지 키스했을 때도 카나타는 카오루가 긴장으로 얼어서 파르르 떠는 꼴을 모두 보고 있었단 말인가. 정말 치사했다. 허나 불공평한 상대에게 조금이나마 공평해지기 위해 카오루는 부글부글 다시 끓기 시작하는 감정을 품에 안고 또 한 걸음 다가섰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조급함도 그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이번엔 눈 감아.”

 

  속삭이며 입술을 붙여오는 연인의 말에, 카나타는 순순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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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카오] 그 애

2019. 1. 27. 02:59 from ENSTARS/NOVEL



그 애는 너를 참 좋아하네.


하카제 카오루는 살면서 그 말을 퍽 많이 듣고 자랐다. 너는 언제나 카오루 본인이었고, ‘그 애는 성장하면서 꾸준히 주인을 바꿔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반 소년소녀가 대부분이었고, 중학교때는 나이의 고저를 가리지 않고 여자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소수의 남자아이들도 없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유메노사키 학원에 진학한 이후로 그 애의 주인 자리의 지분은 누구 한 명이 대부분 차지해버렸다. 아주 가끔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살짝 빌려 갈 때도 있었지만, 그 사람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여름 바다같은 머리카락에, 환한 탄산 음료같은 눈을 가진 소년. 파도 거품을 끌어모아 빚어낸 것처럼 수려한......

그래, 신카이 카나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신카이 카나타는 하카제 카오루의 그 애였다. 너를 참 좋아하는 그 애.

 


하카제 카오루, 이 인기 많은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 그 애가 날 참 좋아해주지. 고마운 일이야. 소년의 처세술이 성장함에 따라 대답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묻는 사람이 달라짐에 따라 역시 대답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소년은 그 애가 어떻게 자신을 보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애는 언제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른 사람이었었고, 다른 얼굴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딱 하나. 그 눈에 담긴 감정 하나만큼은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꼭 같았다.


달고 쓰고 조금 매운. 가끔은 애원 같고, 가끔은 원망같고. 하지만 늘 아주 간절했던. 카오루는 그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주변에서 무어라 속살거리지 않더라도 카오루는 어렵잖게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터였다. 그 애는 언제나 카오루에게만 물렀고, 카오루에게만 다정했고, 카오루에게만 유독 약했다. 카오루는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감정을 사랑 외에 알지 못했기에 그 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하카제 카오루의 그 애는 늘 하카제 카오루를 사랑했다. 제 감정을 전부 억누르지 못해 갈무리하고 갈무리해도 새어나오는 감정의 색만으로도 사람들은 카오루에게 그 애가 널 참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카오루는 그 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았으나, 그렇다고 카오루가 그 애를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황금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행동거지에 비해 끝내 다정해서 그 애를 매정하게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 애가 발밑에 주저앉아 커지고 커져서 닳고 닳은 제 사랑을 끝끝내 속에서 끄집어내어 날것으로 가져다 바치기 직전까지 하카제 카오루는 그 애의 사랑을 모르는 체 했다. 그 애와 꼭 같은 마음으로 그 애를 사랑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카오루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고작 그 정도였다.


그는 늘 진심에 약했다. 약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 주었다. 가벼이 만났다가 떨어지는 흥미 본위의 행동거지는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그 애와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리라 직감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 눈 때문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눈. 그 오묘한 보랏빛 사랑. 제 눈에 담긴 하카제 카오루가 좋다고, 제 시선, 자신의 눈동자에 가득 담기는 그 황금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고 외치는 그 시선을, 소중히 여겼다.

존중했다. 감사했다. 결국 미안했다.


카오루는 늘 그 애에게 깊이 감사했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그 애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늘 사랑하지 못했다. 그 애가 건내주는 사랑에 감사했고,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따뜻한 물에 들어가 몸을 머리 끝까지 담근 것처럼 편안해졌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상대와 꼭 같지 못한 애매한 파랑. 그 애와 하카제 카오루의 사랑은 언제나 그 애의 짝사랑이었다. 애닳은 외사랑을 견디지 못한 그 애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첫째, 고백. 그 애가 가장 많이 선택한 결과였다. 그 애는 결국 카오루에게 고백을 던졌고, 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카오루는 늘 정중한 거절의 말을 되돌려주었으니까. 여기서 그 애의 선택은 또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카오루와 남이 되거나, 친구로 남거나.


두 번째 선택지는 단념이었다. 카오루에게 거절당하고 친구로 남고 싶어하는 그 애와, 애초에 고백조차 하지 않은 그 애. 모두 이 선택지로 돌아왔다. 마음을 정리하고, 제 눈의 보라를 지우고 차분한 파랑이나 평온한 녹색으로 바꾸려고 안간힘을 썼다. 성공한 그 애는 카오루의 친구가 되어서 지금도 연락처 한 칸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실패한 아이는 또다시 남이 되었다.


이 패턴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변함없이 이어졌고, 카오루의 그 애는 늘 비슷한 주기를 가지고 바뀌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신카이 카나타는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하카제 카오루의 그 애였다.

그리고 하카제 카오루는 신카이 카나타를 그 애로 셈하지 않았다. 카오루만큼은 그랬다.

 


애초에 기본 전제가 틀렸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하카제 카오루만큼은 알았다. 타인이 생각하는 그 애는, 하카제 카오루를 유독 좋아하는 누군가였다. 하카제 카오루가 생각하는 그 애는, 자신을 보랏빛 눈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신카이 카나타는 달랐다. 꼭 과거의 그 애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주제에, 그의 눈은 늘 아름다운 청녹색이었다. 차분하고 평온했다. 다정했지만 뜨겁지 않았다. 신카이 카나타는 하카제 카오루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평온하게, 좋아해주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착각할 정도로 다정하게.


하카제 카오루는, 처음에는 그 낯선 사실이 신기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그는 물론 좀 많이 특이했고, 가끔 당황스러웠고, 자주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카오루는 카나타가 마음에 들었다. 그 애의 자리를 겉으로 차지해버려서 새로운 그 애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점부터 두둑한 보너스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카오루는 그 애의 보랏빛 시선을 좋아하고 감사했지만, 태어나 줄곧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그것과 끝내 이어지는 관계의 단절 혹은 변화에는 질려 있었다. 가볍게 생각할 수 없고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지 않을까 고민해야 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정신 한구석이 늘 예민하게 곤두서 있어야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카나타의 청록색은 마치 달콤한 꿈 같았다. 부드러운 비단에 둘러쌓인 휴식에 카오루는 만족했다.


사실 그러면 안 되었는데. 변화가 이끌어낸 평화에 만족하는 순간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임을 직감하지 못한 카오루의 불찰이었다. 카나타는 그 애가 아니었고, 카오루도 그 애의 짝사랑 상대가 아니었다. 둘의 관계에 애정이 기반이 되고, 그 위에 시간이 쌓였다. 시간과 감정이 만나 싹튼 마음을 품에 끌어안은 사람은 다름아닌 카오루였다.


그래, 하카제 카오루였다. 제 안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새로운 색을 카오루는 아주 느즈막히 발견했다. 얼마나 늦었느냐면, 그것이 제 안에서 한참을 끓고 끓어 모조리 눌러붙어버린 뒤에야 알아차려버렸다. 단단하게 몸에 굳어 붙어버린 감정은 떼어내기도 힘들었다. 뜯으려니 통증이 따라붙었고 지우려니 얼룩이 져서 그럴 수도 없었다. 이를 어쩔까. 하카제 카오루는 처치 불가 상태가 된 지 오래라며 배짱을 부리는 그것 앞에서 황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적보랏빛 감정을, 끈적끈적하고 끈질기고 고집 센 이것을.


카나타 군.”

, 카오루~.”

...... 아냐, 그냥 불러봤어.”

후후... 카오루도 참.”

 

가끔 실없는 행동을 하네요~. 농담처럼 덧붙인 카나타의 말에 카오루는 부드럽게 웃음지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매 속에 콕 박힌 에메랄드 색 눈동자는 여전히 청녹색이었다. 카오루는 제 눈에 빼곡하게 들어찬 적보랏빛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굳이 더 곱게 웃었다.


그 애는 너를 참 좋아하네. 카오루는 수십 번도 넘게 들었을 그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카나타를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카오루? 의아하다는 듯 저를 부르는 카나타의 목소리를 애써 모르는 척 하며, 하카제 카오루는 그저 숨을 삼켰다.


그 애는 너를 참 좋아하네. 누군가가 또 한 번 속삭였다. , 그 애는...... 나를 참 좋아해주지. 카오루는 평온한 척 답했다. 너도 그 애 좋아해? 가끔 카오루에게 따라붙었던 질문이 이번에도 드물게 쫒아왔다. 카오루는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대답을 내밀었다.


나는 그 애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 회색빛 눈동자 속 보랏빛이 쓸쓸하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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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마 군, 나 졸려. 머리를 쓰다듬어 줘. 마 군의 품에 날 끌어안고 다정하게 토닥거려 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그 위에 키스해 줘. 내가 마 군에게만 허락한 특례니까, 마 군도 마음껏 그걸 사용해 줘. 나는 기꺼이 마 군의 사랑을 받으며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게 굴 자신이 있는 걸. 

 사쿠마 리츠는 본디 저가 납득할만한 상대라면 누구에게나 쉬이 어리광을 피우고 연약한 척 굴었다. 번거로운 일을 크게 즐기지 않아서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은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결국은 게으른 고양이 시늉을 하며 저 좋을 정도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리츠의 가드가 낮아지는 사람은 양손으로 꼽을 만큼 있었지만 (애초에 나이츠 멤버만 세더라도 한 손은 거의 다 채웠으니까.) 이 정도의 요구를 하는 대상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아예 리츠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 리츠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 그의 연인. 이사라 마오뿐이었다. 

 

 물론 리츠의 사랑은 공사가 다망하여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리츠는 베개에 머리를 박고 퉁명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눈매는 이미 토라진 기색이 역력하게 가늘어져 있었다. 마오는 오늘이 리츠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으나, 연인의 생일을 위해 본인의 일을 쉬어버릴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았다. 매일 휴일이라고는 없는 바쁜 아이돌 생활을 보내고 있는 마오는 오늘도 오전부터 밤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쁜 아이돌인 리츠가 저녁시간인 지금 한가롭게 바닥을 굴러다닐 수 있는 이유는 나이츠 멤버들의 배려 덕분이었지만.

 하지만 마 군이 없으면 내가 쉬는 이유가 없잖아. 마 군도 없는데. 리츠는 다시 한 번 입을 비죽였다. 마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아 투덜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 이리 꿍얼거리고 있어도, 실제로 마오가 집에 도착해 다녀왔다며 리츠를 끌어안아 준 순간 물에 넣은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릴 무게 없는 투정이었다. 


 리츠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 제 집의 한 쪽 벽면을 멀뚱히 응시했다. 이 방은 리츠가 마오와 함꼐 꾸린 두 사람만의 보물상자였다. 리츠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의미없이 긁어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덮은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렸다. 어차피 생일에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니, 마오가 돌아올 때까지 한숨 푹 잠들 생각이었다. 잠자는 공주님이 되어 새근새근 자고 있으면 왕자님이 멋지게 다가와 키스로 저를 깨워 줄 테니까. 

 마 군, 나 지금 자니까 깨울 때는 키스로 깨워 줘. 본격적으로 잠들어버리기 직전 리츠는 마오에게 짧은 메일을 첨부했다. 장난과 진심이 반쯤 섞인 메일이었다. 진짜로 키스해준다면 럭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마 군이 와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리츠는 시계를 한 번 보고, 마오가 이 메일을 확인하고 답장한 뒤 돌아올 시간까지 따져본 뒤 알람을 맞춰두었다. 그래도 고된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연인을 일어나서 반겨주고 싶었다. 어서 와, 마 군. 하고 저가 웃는다면 마오의 녹빛 눈동자에 행복이 들어차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까. 

 자고 일어나서 시선이 얽혔을 때 마 군이 짓는 표정도 좋아하지만~. 리츠가 키득키득 웃고 휴대전화를 제 머리맡에 내려놓고 이불 속으로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짧은 진동이 울렸다. 


 어라. 리츠는 눈을 둥글게 떴다가 삼 초 쯤 고민했다. 확인할까, 말까. 괜사리 잘 자리잡은 편한 자세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 군에게 온 답장이라면? 리츠는 세 번 눈을 깜박였다가 결국 팔을 뻗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그리고 은근히 발목을 잡아오던 귀찮음을 감수한 보람은 기꺼이 있었다. 딱 한 문장짜리 답장을 확인한 리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술 모양의 이모티콘이 두 개. 앞으로 이 분 뒤면 집에 갈 테니까, 이걸로 대체. 


 메일은 짧았고, 리츠는 대문까지 한걸음에 달려나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마 군! 청년의 표정이 순식간에 화사해졌다. 리츠. 한 쪽 손에 꽃다발을 든 청년은 조금 수줍은 듯 제 연인의 환대를 받았다. 아직 오늘은 9월 22일. 오늘의 주인공은 망설임없이 양 팔을 뻗어 제 연인을 품에 끌어안고, 이모티콘으로 대체될 수 없는 두 번의 키스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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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카오] 폭설

2017. 12. 19. 23:38 from ENSTARS/NOVEL

* 페이트AU

-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벌써 며칠 째 내리는 눈이지만 요 몇 시간은 드물게 폭설이었다. 청년은 물끄러미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짙게 낀 하늘은 어두운 회색이었다. 흰 눈마저 어두컴컴하게 보일 정도로 흐린 공기를 가만히 내다보던 청년은 불만스럽게 미간을 한 번 좁혔다가 반듯하게 펴냈다. 말끔한 얼굴의 청년은 거리에 나가면 추위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수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광등 빛 아래에서도 자랑스러울 만큼 예쁘게 빛나는 긴 머리카락에 섬세하게 빚어진 이목구비. 다양한 색으로 곱게 빛나는 눈동자. 선 짙은 육체가 아름다운 청년은 눈만 내리는 하늘을 질리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눈을 크게 즐기지는 않았지만 이 커다랗고 화려하기만 하고 황폐하여 실속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집에서 유일하게 봐 줄 만한 것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에 더더욱 하늘하늘 땅을 장식하는 하얀 얼음조각에 집중할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잠깐 떼었다가 다시 굳게 붙인 뒤, 청년은 인기척을 향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몇 시간만이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마스터.”

“있다고 하면 있다고 할까......”


 상대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가 표정을 굳혔다. 청년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마스터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스터는 찬찬히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는 저가 소환한 서번트의 저런 표정을 처음 보았으니까. 소환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경박하고, 말을 잘 했으며, 비록 하필 저를 소환한 게 남자나며 투덜거리기는 했어도 마스터에게 서글서글했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마스터, 레이가 심려 깊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고? 아처 군.”

“그다지...... 마스터가 신경 쓸 건 없어.”

“거짓말 하지 말게나. 본 건 얼마 안 됐지만 아처 군의 이런 상태가 평소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네.”


 라이더인가? 레이는 정확하게 제 서번트의 이상원인을 짚어냈다. 아처가 약하게 미간을 좁혔다. 단 한 번으로 짚어낼 정도로 본인이 쉽게 행동했다는 게 불쾌했다. 제 행동거지가 알기 쉬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더군다나 상대는 아처가 인정한 마스터였다. 감정을 응어리처럼 품고 있기에 적당하지 않은 상대. 그는 곧 한숨을 쉬는 것으로 항복을 알렸다. 고개가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레이는 서번트를 따라 시선을 다시 창밖의 눈 오는 풍경으로 돌렸다. 이 눈이 내리기 전, 이 저택으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맞붙었던 서번트와 그 마스터의 모습이 순서대로 레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스터 모리사와 치아키와 그 서번트 라이더. 황금으로 만든 돌고래를 타고 파도와 함께 돌격하는 라이더의 진명을 짐작해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둘 다 딱히 진명을 숨기려는 의지가 강하지 않아보였다.) 레이는 자신의 아처와 상대의 라이더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지었던 표정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는데 말이지. 레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만약 성배전쟁의 서번트로 리츠가 소환되어 제 앞에 서면 저가 그런 표정을 지을까. 그 정도로 아처는 처참한 얼굴로 절박하게 저를 보았다. 본능적으로 선택한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 레이가 객관적으로 꽤 우위에 서 있던 상황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짧은 소강을 만들어낸 건 아처가 제 정신을 추스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처는 레이의 기대대로 빠른 시간 내에 혼란을 수습해냈다. 다만 그 이후에 찾아온 짙은 자괴감을 느리게 소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라이더와 아처 군은 비슷한 시대의 영웅이었던가?”

“알고 있으면서 질문으로 묻는 형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그럼 정말 모르는 것을 묻지. 어떤 사이였는가?”


 마스터의 질문에 서번트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아득한 과거. 전승은 전해져 내려오지만 둘의 뚜렷한 관계를 알기는 어려웠다. 다른 나라에 살던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단 둘 외에 아무도 모르는 시대였다. 애초에 그와 라이더의 관계는 전승으로조차 전해내려오지 않는 묻혀진 과거였다. 아처는 잠시 고민하듯 레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을 해 줄까, 말까. 아처가 창가에 조금 더 다가갔다.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고 흰 숨을 뱉으며 그는 제 마스터에게 진실을 고했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에......”

“......”

“눈송이만큼 하고 싶은 말이 생기던 사람.”


 내가 이 성배전쟁에 참여한 이유.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사람. 내가 전성기를 지금으로 선택한 이유. 어떤 답을 원해, 마스터? 전부 한 사람이야. 아처의 표정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라이더를── 신카이 카나타를 위해 소원을 빌기 위해 성배전쟁에 참여했다. 헌데 같은 전쟁 다른 클래스로 소환된 게 바로 그 장본인이라니. 희극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레이의 소원을 위해서라도 아처는, 하카제 카오루는 이 전쟁에서 유일한 승자가 될 마음을 굳힌 뒤였다. 보구까지 사용할 정도라면 카나타 역시도 카오루와 흡사한 결론을 내린 상태일 터. 그들 본인이 아니라 마스터를 위해서라도 둘은 싸워야만 했다. 


 카오루가 깊게 숨을 뱉었다. 창문이 뽀얗게 변했다가 천천히 바깥풍경을 투영했다. 눈은 깊이 높게 쌓이고 있었다. 흙을 덮는 눈처럼 이 감정도 아예 덮어버릴 수 있다면 편할 텐데 말이지. 그는 쓰게 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비참한 감정과는 별개로 냉정하게 행동할 자신은 있었다. 저를 도와줄 마스터도 있었으니, 연인에게 겨눌 각오도 되어 있었다. 비록 그 활을 쏜 뒤의 저 자신이 어떻게 될 지는 본인도 잘 몰랐지만. 










-


세이버 / 아처 / 랜서 / 라이더 / 캐스터 / 어새신 / 버서커 순서대로

레오 / 카오루 / 스바루 / 카나타 / 나츠메 / 나즈나 / 쿠로 그리고 마스터는

세나 / 레이 / 호쿠토 / 치아키 / 소라 / 토모야 / 케이토... 같은 느낌으로 상상한... 

슈랑 미카 에이치랑 와타루 마마랑 안즈는 다른 성배전쟁에서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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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타는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잔뜩 어두운 표정에 지나치게 우울해진 모습은 평소의 유하고 부드러운, 물 흘러가는 것처럼 웃는 얼굴의 카나타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틀림없이 천장에는 환하게 형광등이 반짝이고 있었다만 카나타가 틀어박힌 연습실 구석만 그림자가 지는 착각이 들었다. 심지어 컴컴한 기운이 꾸물꾸물 넓어지는 착각까지. 그런 카나타와 같은 유닛이라는 이유로 한 연습실에 있게 되어버린 유성대의 1학년들은 카나타의 반대쪽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울상이 된 미도리와 완전히 질린 표정의 테토라, 조금 겁에 질린 시노부는 소리없이 시선만으로도 대화를 나눴다. 입이라도 잘못 열었다가 상황을 악화시킬까 두려워 짧은 시간에 시선 대화라는 기술을 익혀버린 셋은 잔뜩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세 사람은 차라리 불처럼 타오르는 치아키가 간절히 그리울 정도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습에 조금 늦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슬슬 올 때도 되었는데...... 셋은 3초에 한 번씩 시계를 힐긋거렸다. 번갈아서 시계를 쳐다봐도 변하는 게 없으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빨리 좀 오십쇼, 대장! 어서 와 주시오, 대장공~! 모리사와 선배...... 속으로 그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답례라도 하는 걸까. 치아키는 마치 히어로처럼 연습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모두들! 아하하하, 다들 착하게 연습하고 있었나?”

“어서 오십쇼, 대장!!”

“보고 싶었소이다, 대장공~!!”

“선배......!”


 음? 치아키는 평소와 다른 열렬한 환영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가슴 뜨겁게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막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려는 순간 셋에게 붙잡혀 어두운 기운 앞에 섰다. 음?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유성 레드는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우는 물음표와 함께 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한 리더를 제일 앞세우고 세 사람은 열심히 항변했다. 어서 신카이 선배 좀 어떻게 해 주십쇼! 무, 무섭소이다! 화이팅......

 동료들의 뜨거운 응원을 뒤로 하고 강제로 기운 없는 카나타의 앞에 밀려 서게 된 치아키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카나타의 분위기가 워낙 우울하여 후배들이 겁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 유성대 3학년들은 제 권위를 내세우는 편이 아니니까, 가끔은 이런 식으로 반향이 오고는 했다. 카나타는 본디 존재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기도 했고. 치아키는 곤란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저기, 카나타? 무슨 일 있는 건가?”

“......”


 카나타는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 몸을 더 동그랗게 웅크렸다. 암묵적으로 보내는 거부의사에 치아키는 머리를 굴렸다. 카나타가 이토록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았다. 치아키가 딱히 짚이는 일이 없다는 건 유성대와 관련된 일은 아니라는 소리였고, 언데드와의 합동 라이브를 위해 방금 만나고 온 레이에게도 특별히 언질은 없었으니 기인 친구들 문제도 아닌 것 같은데. 잠깐 앓는 소리를 흘린 치아키는 반쯤 확신하며 물었다. 


“하카제와 관련된 일인가?”


 카나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떠진 연한 녹빛 눈을 보며 치아키는 씩 웃었다. 제대로 짚은 모양이었다. 치아키는 오늘 수업에 나왔던 카오루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카오루는 카나타보다 감정을 잘 갈무리하는 사람이었기에 (덧붙여서, 치아키에게는 카오루보다 카나타의 표정이 더 읽기 쉬운 점도 있었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카나타? 하카제와 싸우기라도 했나?”

“......치아키이~!”


 허어엉. 치아키이. 카나타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더니, 곧 숨길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카오루가 저를 싫어하면 어떻게 해요. 눈물을 뚝 떨군 카나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참고 참던 서러움이 터져나오기라도 한 것 같은 눈물에 치아키는 카나타가 우울하게 있던 방금보다 훨씬 더 당황했다. 카, 카나타. 울지 마라. 하카제가 널 싫어할 리 없다. 쩔쩔매며 달래는 치아키의 옆으로 후배들도 옹기종기 모여서 열심히 카나타에게 위로의 말을 건냈다. 물론 카나타가 왜 우는지 몰라 저가 잘못했다며 영문모를 사과나 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의 눈물로 넷이 완전히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삶아지는 상황을 겨우 벗어난 건 카나타가 가까스로 눈물을 그친 뒤였다. 조금 훌쩍이고 있기는 했지만 뺨의 물기를 닦아내고 진정한 카나타는 방금보다 썩 차분해져 있었다. 그러한 카나타를 앞에 두고 넷은 완전히 긴장해 있었지만. 말 조심하십쇼, 대장. 테토라는 치아키에게 잔뜩 눈치를 줬다. 울리면 안 돼...... 미도리는 우울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흐아아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소. 시노부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치아키는 다시 한 번 총대를 맸다. 


“음, 카나타. 오늘의 하카제는 평소처럼 보였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도 괜찮은가?”

“카오루한테 차였어요...... 카오루가 저한테 화를 냈어요, 치아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하카제가? 찼다고? 아니, 화를 냈다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카제가 카나타를 거절해? 치아키의 상식으로는 영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하카제는 가볍고 경박해보이기 쉽지만, 그가 얼마나 진지해질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카나타를 좋아하는지 치아키는 잘 알고 있었다. 카나타의 이야기를 하는 카오루가 얼마나 부드럽게 웃는지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치아키의 앞에서 카나타가 최대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울먹임과 서러움과 걱정 사이를 마구 비집고 튀어나오는 상황설명을 치아키는 최대한 간추리고 정리하려 노력했다. 유성대 대장의 입에서 간단한 한줄설명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음이 얼기 시작한 추운 날씨였는데 해변으로 데이트를 갔다가 하카제가 말리는 것도 듣지 못하고 물장구를 치는 바람에 하카제에게 혼이 났다는 건가?”


 카나타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엉. 어떻게 해요, 치아키. 다시 완연히 울상이 되어버린 카나타를 앞에 두고 유성대 네 사람은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신카이 선배가 잘못한 건 같슴다... 이를 어쩌면 좋소. 으, 으음......! 치아키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카오루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건 결국 이런 의미였구나 싶었다. 카오루도 좀 토라지기는 했겠지만 본격적으로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이를 어쩐다 고민하기 시작한 유성대들 사이로 미도리가 살짝 손을 들어 물었다. 


“그, 그럼 차였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그건, 그으. 며칠 전에 카오루랑 다음에 같이 가자고 수족관 티켓을 줬는데, 반성 끝내고 다시 신청하라면서 돌려받아 버렸어요......”


 이걸 어떻게 하죠. 카나타는 품에서 깨끗한 수족관 티켓 두 개를 꺼냈다. 데이트를 이런 식으로 거절당한 건 처음이었기에, 카나타는 다시 한 번 풀이 죽었다. 카오루는 늘 카나타에게 지나치게 물렀다. 물론 그에게 화가 난 순간까지도 그랬다. 테토라는 입가를 가지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제 착각이 아니라면 화해하고 사과할 찬스까지 아예 손에 쥐어준 것 같슴다. 시노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럼 그거 들고 정말 잘못했다고 빌면 되는 것 아니오? 미도리가 생각했다. 와아...... 치아키가 호쾌하게 웃었다. 모든 고민이 사라진, 악의 수장을 물리친 정의의 히어로같은 미소였다. 


“그걸 들고 다시 하카제에게 데이트 해 달라고 말하면 되겠군! 아하하핫, 다음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하면서 같이 가 달라고 다시 부탁하면 된다, 카나타!”

“그럴까요......?”

“그럼! 걱정하지 마라, 카나타! 하카제는 너를 정말 좋아하니까.”


 카오루가, 저를...... 카나타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발갛게 색 물든 뺨은 울어서 부은 탓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사랑으로 행복해져버린 카나타의 등을 떠밀며 치아키와 테토라, 미도리와 시노부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소소한 사랑싸움이었다. 나머지는 카오루가 잘 해 줄 터였다. 넷은 그리 믿으며 카나타를 그에게 보냈다. 고마워요. 방긋 웃고는 카오루가 있을 곳으로 바쁘게 뛰어가는 유성 블루의 뒷모습을 보며 네 사람은 잠시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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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카오] 밤

2017. 7. 6. 23:57 from ENSTARS/NOVEL





 카오루는 막 자정이 넘어가려는 시간을 보며 뻐근한 목을 풀었다. 오늘 하루도 피곤했다. 레이의 생활 패턴에 맞추다보면 자연스럽게 밤 스케줄이 늘어나기 마련이었지만, 낮부터 밤까지 일하는 빡빡한 일정은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체력적으로 조금 한계라고 해야 할까. 내내 신경써야 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카오루는 불이 켜져 있는 집을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열쇠는 옷 주머니에 당연히 들어있었지만, 집에 사람이 있는 듯 보이니 자연스럽게 벨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대문이 열리는 건 사랑스러웠다. 카오루의 입가에 무심코 미소가 걸렸다. 잔잔하게 휘어지는 곡선이었다. 


"카오루, 왔어요?"

"다녀왔어, 카나타 군."


 현관으로 들어서며 카오루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카나타가 허리에 손을 감아 왔다. 입술이 가볍게 쪽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술에 한 번, 뺨에 또 한 번. 시선을 얽고는 다시 한 번. 현관에서 쪽쪽거리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카오루가 카나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그는 조금 낮게 웃었다. 카나타는 오늘 이른 스케줄을 끝낸 뒤 내내 집에 있던 모양이었다. 안으로 발을 들이니 대번 기온이 서늘했다. 물고기들의 수온 문제도 있으니 에어컨을 잔뜩 틀어 둔 모양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서 고생한 건 카오루였으니, 그 인공적인 서늘함이 싫지 않았다. 도리어 기분 좋은 미소가 나왔다. 


 일단 옷을 벗고 씻은 뒤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온 카오루는 소파에 앉은 카나타가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았다. 카나타 군? 뭐 해? 그가 만지는 인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둥그런 몸체며 빵빵한 솜, 동글동글한 눈이 귀여운 돌고래 인형. 팬들에게 받은 조공품처럼 보였다. 해양생물이기는 하지만 카나타 군은 심해생물을 쪽을 더 좋아하지 않던가? 약간 괴상하게 생긴 것들. 카오루가 무심코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카나타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까마득한 바다의 에메랄드 색을 한껏 담은 연두색 눈이 즐거움을 담아 함뿍 휘어졌다. 곡선을 그리는 눈꼬리로 애정이 몽글몽글 굴러떨어질 것 같은 달큰한 미소였다. 한 입 베어물면 꿀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카나타가 인형이 입을 쪽 맞췄다. 에? 카오루가 무심코 소리를 내기도 전에 카나타의 키스를 받은 인형이 카오루의 입술에 꾸욱 눌렸다. 으움? 카오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형으로 간접키스를 날린 카나타는 마냥 행복한 듯 헤실헤실 웃었다.


"카오루 충전인거에요~. 오늘 하루 종일 못 만났으니까."

"아... ...하하하......"


 충전이 심장에 나빠. 카오루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몇 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지나치게 귀엽게 굴다가도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섹시해지기까지 한다. 정말 사람 심장 건강에 나쁜 남자다. 나한테만 이렇게 굴어주면 소원이 없겠는데, 가끔 카메라 렌즈에서도 이러니까 문제지. 카오루는 카나타가 안겨 준 인형을 내려놓고는 팔을 넓게 뻗었다. 


"그 정도로 충전되는 거야?"

"어......"

"나 여기 있는데."


 카나타 군. 은근한 목소리에 카나타가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저를 향해 똑바로 팔을 뻗고는 웃으며 기다리는 카오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곤란해요, 카오루...... 말끝을 늘이면서도 카나타가 카오루를 덥석 끌어안았다. 막 씻고 나온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몸은 따뜻했다. 카나타는 그 목덜미에 몇 번 입술을 대었다 때며 행복해했다. 그 몸에서 풍기는 체향이 카나타의 것과 몹시 흡사했다. 지독하게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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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이번

2017. 4. 7. 00:20 from ENSTARS/NOVEL



  카나타는 창 안쪽으로 보이는 광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머리 위로 잘게 뿌려지는 분수대의 물길은 이미 의식 저편에 날아간 뒤였다. 화사한 황금색 머리카락, 수려한 이목구비, 경박하게 꾸미고 있는 연한 눈동자, 하얀 피부. 선 고운 모양새며 발갛게 보기 좋은 혈색에 조금은 제멋대로 입은 교복차림 하나하나 놓치는 것 없이 집요했다. 물빛의 눈동자가 옷자락이라도 잡고 매달리는 꼬마아이마냥 그의 뒤꽁무니를 쫒았다. 클래스메이트인 치아키며 세나와 대화하는 게 즐거운 모양인지, 곤란한 표정도 지었다가 머쓱하게 웃기도 하는 그 다채로운 얼굴표정이 사랑스러웠다. 길게 단숨을 뱉으며 카나타가 분수대의 차가운 돌에 뺨을 대었다. 물기로 넉넉하게 체온이 빼앗겼다. 


 서른 여섯번째 너도 사랑스럽다. 

 카나타는 짧게 숨을 삼켰다. 서른 여섯번째 겪는 삼학년의 봄이었다. 그와는 반이 갈렸지만 친구들과는 한 반. 아직 2학년 A반에 전학생이 들어오지 않은 이른 시기였다. 앞으로 쏟아질 수많은 일들이 별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는 느리게 참잠했다. 시간을 돌리는 그 사이사이 수많은 변수들이 끼어들며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조금이라도 기억에 잠기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첫 번째의 과거였다. 시간을 돌린 이유, 너와 사랑을 했던 시간. 겨울, 졸업하기 전에 이별한 시간. 



 신카이 카나타는 사람이 아니었다. 흔히 인어라고 불리는 물에 사는 종족. 신비와 마법이 사라지며 인간의 세상에 발을 디딘 그는 인간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시간을 되돌렸다. 그가 제 곁을 떠나는 것도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길고 긴 삶을 사는 동안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고작 삼 년이라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끝없이 피부를 물에 적셔야 겨우겨우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건 카나타에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카오루가 살아서, 자신을 본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저를 사랑해주지는... 않지만요. 카나타가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돌이 닿는 뺨이 서늘하니 얼얼했다. 가장 첫 번째의 카오루는 카나타를 사랑했다. 시선에서, 태도에서, 어조에서 모두 티가 났다. 카나타 군,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는 꿈에서 들어도 가슴 저릿하게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오롯하게 첫 번째 기억 속의 하카제 카오루였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나고 몇 번이고 그를 사랑했지만 카오루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잘 있어, 카나타 군. 또 보자. 안녕. 겨울날 전해진 이별. 담백하게 떨어지는 손길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모두 분명하게 애정이 빛나고는 있었다만, 카나타와 같은 색은 아니었다. 깔끔한 친애. 우정. 살아있다는 그마저도 감사했지만 처음과 꼭 같지 않은 감정 탓에 늘 되돌아왔다. 3학년의 봄. 처음 사랑을 시작했던 그 무렵. 


 이번의 카오루는 처음의 카오루와 가장 많이 닮아있었다. 가끔 다정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유독 달았다. 이번이라면 사랑해줄까요. 나를 좋아해줄까...... 의문을 품으며 카나타는 얕은 분수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뽀그르르 올라오는 물거품이 보글보글 위로 터져올랐다. 좋아한다, 아니다, 좋아한다, 아니다. 물 소리만 요란했다. 


“카나타 군!”


 아, 그리고 그 너머의 너. 카나타는 저를 건져올리는 카오루를 보았다. 물 속에서도 선연하게 보이는 황금빛 어른거리는 빛무리 너머로 카오루가 있었다. 당혹스러운 듯 미간을 좁히고는 걱정스럽게 저를 보는 모습에 부끄러울 정도로 기뻤다. 서른 여섯번째로 보는 봄의 네가 상냥했다. 드문 일이었다.


“카오루~.”

“빠져서 위험한 줄 알았잖아. 위험하니까 고개 정도는 내밀고 헤엄쳐달라고.”


 깜짝 놀랐네. 실없는 일이었다는 양 한숨을 내쉬며 머쓱하게 웃는 얼굴에 카나타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수대에 뛰어들어 젖은 옷을 그제야 짜내며 불평하는 모습까지도 좋기만 했다. 카오루, 카오루. 수백번의 밤과 수백번의 낮을 지나 서른번이 넘는 봄을 돌아 만난 이번의 카오루. 

 좋아해요. 좋아해주세요.

 차마 건낼 수 없는 말을 마음 속 깊이 삼키며, 카나타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는 늘 그렇듯 다시 사랑을 시작했으니, 이제 사랑받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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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마오] 봄

2017. 3. 28. 00:48 from ENSTARS/NOVEL







 날이 좋았다. 리츠는 문득 눈을 떴다. 뺨에 닿는 바람이 따뜻하고 건조했다. 볕 잘 드는 양지에 드러눕고 싶다는 충동을 부채질하는 바람이었다. 소년은 그런 충동에 약했지만, 그만큼 의욕도 대단치 않게 식어버리고는 해서, 몇 번 손가락을 움찔거리다가 그대로 몸에 힘을 풀어버렸다. 그늘진 곳에서 설렁설렁 불어오는 바람도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수마가 어깨를 잔뜩 짓누르고 있었으니 그것을 떨치고 일어날 의욕도 없었다. 사계절 내내 그나지 의욕을 내지 않기는 했지만, 리츠는 유독 봄만 되면 지나치게 게을러지고는 했다. 

 어제도 그랬다. 나이츠 전원이 모이는 외부스케줄은 오롯하게 그의 왕이 저 자신의 이름으로 얻어 온 것이었다. 그와 같은 유닛의 동갑내기ㅡ동급생이었어야 했을 한 학년 선배ㅡ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하는 리츠를 보고 겨울 내내 겨울잠을 자다가 갑자기 봄을 타는 거라고 대놓고 쏘아붙이고는 했다. 그 평가에 리츠는 긍정도 부정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목울음 한 번 길게 흘리고 말았다. 왕은 그런 기사를 보며 크게 웃고는 달콤한 봄노래 한 곡 써서 쥐어줬다. 리츠는 달갑게 받았다.  


 리츠는 봄이 좋았다. 밖에서 꾸벅 잠들기 딱 좋은 기온 하며 한들한들 피어나는 꽃이며. 묘하게 들떠서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섞여들면 저를 들들 볶는 사람도 적어진다는 이유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마오가 언제 저를 찾을 지 모르니 리츠가 잠드는 장소는 늘 꽃과는 한 겹 떨어진 장소였다. 아직 잎도 나지 않은 마른 나무들 근처나, 늘푸른나무의 풀숲 어딘가. 리츠가 그런 곳에서 잠들고 있으면 마오는 늘 그를 찾아오고는 했다. 마치 지금처럼. 


 리츠는 저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설핏 눈을 떴다. 리츠, 일어났어? 눈이 맞자 물어오는 목소리는 투박하게 다정했다. 리츠는 적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어져라 하품이 기어나왔다. 그럭저럭 눈은 떠졌다만 여전히 피곤했다. 좀 더 잘래. 투정처럼 칭얼거림이 흘러나오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적어도 리츠에게는.


“더 자긴 무슨. 수업 끝났다고. 어서 가자.”

“저녁까지 자다 가면 안 돼?”


 내가 자는 동안 마 군은 무릎베개~. 리츠가 덧붙인 말에 마오의 표정이 대번 어이없어졌다. 봄의 학생회는 늘 바빴다. 1학년에는 막 학생회에 들어가서 바빴고 2학년은 새 학년이 들어오면서 변하는 일들이 많아 바빴고 3학년의 학생회장이 된 지금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작년의 에이치에게는 케이토라는 든든한 소꿉친구 부회장이 있었건만. 마오는 이런 걸 권고해주는 제 소꿉친구를 보며 아주 잠깐 심란해졌다. 틀림없이 잠들어있을 리츠를 데리러 오기 위해 급하게 일정을 처리한 삼십분 전의 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니 조금 더 심란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허나 리츠와 함께 자란 시간이 길었던 마오는 능숙하게 감정을 추스르고는 리츠를 끌어당겨 제대로 세웠다. 리츠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마오의 손길에 따라 제 다리로 섰다. 하암. 여전히 졸리기는 했다만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마오가 게으름을 피워줘서 따끈따끈한 무릎을 빌려줬더라면 더할나위없이 좋았겠지만, 뭐. 리츠는 마오의 어깨에 기대며 그 정도로 만족했다. 마오는 똑바로 서라며 투덜거렸지만. 


“요즘 날씨가 좋지, 마 군.”

“그야 봄이니까. 곧 꽃들도 만개할걸.”

“마 군에게 힘든 시기가 오네~.”


 능청 떨듯 덧붙인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마오는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끄응. 앓는 소리가 조금 새어나오기도 했다. 마오도 꽃은 좋아했다만 그것과 별개로 화분증은 그를 많이 괴롭게 했다. 약은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지만 별개의 문제였다. 낮잠 자기 편하다는 이유로 리츠가 봄을 좋아했다면 마오는 가을 즈음을 제일 좋아했다. 꽃이 지고 안정을 찾을 즈음의 계절. 겨울이 오기 직전의 평화. 마오는 저에게 기대어 걷는 리츠의 머리 위에 살짝 뺨을 기댔다. 붉은 눈동자가 도록 굴러 온기를 응시했다. 

 

 학생회장의 업무는 각오하고 있었다만 각오와 현실은 본디 늘 다른 법이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른 것처럼. 봄에는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려서 힘든 게 당연했다. 누군가에게 지친 티를 내지 못하는 그였으니, 어리광은 아주 찰나의 순간만 허락되었다. 이 순간만큼 리츠는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벗이자 연인이 되어주었다. 리츠는 손이 많이 가는 소꿉친구를 퍽 좋아했다. 리츠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 군이 원한다면 나도 무릎베개 해 줄 수 있으니까~.”

“......나 참. 내가 너도 아니고,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슬쩍 떨어지며 멋쩍게 웃어버리는 그 미소를 보며, 리츠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주제에 달갑다는 듯이 그렇게 웃어버리면 아무도 안 속는다고, 마 군. 덧붙일 말은 속으로면 살짝 삼켜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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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마오] 그리움

2017. 3. 11. 23:19 from ENSTARS/NOVEL




 마오는 어스름한 정신 너머로 잠에서 깨어났다. 요즈음 들어 유독 잠이 늘었다. 자도자도 피곤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드문 일이었다. 늘 적게 자고 성실하게 일했던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작게 하품한 청년은 제 눈가를 몇 번 부볐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이었다. 작은 하품 몇 번으로 애써 잠을 쫒아낸 마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옆에서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문득 입가에 곡선이 어렸다.

 리츠는 본디부터 야행성이었으니 새벽이 다가와 밤의 장막을 살짝 걷어낸 지금은 그가 잠들 시간이었다. 이미 반 이상 잠에 취해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강하게 같이 다시 잠들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달콤한 유혹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 칭얼거림에 훨씬 가까운 말들을 마오는 적당히 흘려 들었다. 여기서 오냐오냐했다가 누워버리면 하루를 꼼짝없이 날리게 될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니 오싹한 냉기가 슬금슬금 다가와 금새 달라붙었다. 한 번 팔을 쓸어내리며 마오가 짧게 어깨를 떨었다. 이제 한껏 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날이 쌀쌀했다. 그래도 제대로 해가 뜨면 볕이 따뜻해진게 티가 날 정도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리츠의 손을 잡고 꽃구경을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음, 물론 마오는 제대로 꽃구경을 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약을 제대로 챙겨먹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걷는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들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마오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벌써 봄이었다. 

 

 저번 겨울은 유독 혹독한 겨울이었다. 마오는 눈이 내리던 그 날들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워낙 괴로웠던 탓에 얇은 기억의 장막 한 겹을 덮어 쉬이 생각나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걸어 놓은 제약이었기에 마오는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저 봄이 왔다는 사실 하나에만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했다. 따뜻한 바람이 뺨에 닿으면 겨울이 끝났다는 사실에 행복해졌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마 군, 무슨 일 있어?”


 나른한 목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깨웠다. 마오는 대번 정신을 차렸다. 침대 위 이불 속에 쏙 들어가서는 얼굴만 빼꼼 내민 리츠와 시선이 마주쳤다. 반 쯤 감겨서 잠에 취한 얼굴로 나른하게 눈을 몇 번 깜박인 리츠는 늘어져라 하품했다. 졸린 기색이 역력했다. 얄쌍한 눈꼬리 끝에 자그마한 눈물방울을 매단 리츠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마 군, 같이 자자... 나 졸려... 응?”

“벌써 아침이야, 리츠.”

“어차피 할 일도 많이 없잖아...”


 그 말은 맞았다. 집안일과 소량의 서류작업을 제외하면 마오는 할 일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인 부지런함과 할 일의 유무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마오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탓에 말에 설득력이 떨어져버렸지만. 마오가 자연스럽게 리츠의 근처로 다가왔다. 침대 한 쪽이 움푹 퍼졌다. 마오가 걸터앉은 탓이었다.

 사실 케이토가 걱정이 많은 탓에 마오에게 그다지 일을 주지 않으려 들을 뿐, 마오 스스로는 본인이 몹시도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일을 더 받고 바쁘게 일해도 좋았다. 너무 한가하니 본인 스스로 적응을 못하고 있기도 했다. 겨울 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이제 봄의 초입이었고, 그는 괜찮았다. 옆에는 리츠까지 있었다. 몹시도 완벽했다. 나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온전하게 완벽했다.


 마오가 문득 손을 뻗었다. 리츠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마오의 손길에 리츠는 잠깐 눈을 떴다가 바로 감았다. 기분 좋다는 의미의 비음이 흘러나왔다. 마 군, 마 군. 어리광처럼 부르는 말은 온통 마오의 애칭 뿐이었다. 마오가 시선을 내려 제 연인을 응시했다. 


“마 군, 울지 마.”

“어?”


 리츠가 손을 뻗어 마오의 뺨을 천천히 닦아냈다. 마오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탁했다. 물기 젖은 그 사이로 보이는 검고 붉고 하얀 것들을 응시하며 마오가 이불자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수많은 장면들이 단 한 번의 깜박임 사이로 흘러 떨어졌다. 눈물에 섞여 사라졌다. 마지막 보았던 네 모습도, 가득하게 흐르던 피도, 그냥 잊으라며 속삭여주던 목소리도, 이별의 인사도. 마오는 기꺼이 기억의 베일 너머로 처박아 묻어버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넘겨 무시했다. 지금 제 앞의 사쿠마 리츠의 다정함에만 집중했다. 


 안 울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믿어주겠다는 양 웃어주는 리츠를 보며 마오는 애써 마주 웃었다. 소망은 기원을 낳고 기원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마오는 저가 만들어낸 기적을 한 줄기 희망처럼 부여잡고 있었다. 그게 썩은 동아줄인지 아닌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붙잡고 있다가 떨어지는 것도 비극적이겠지만, 잡지 못해 가라앉는 것도 분명 비극이었으니. 

 그러나 사랑만큼은. 그를 처음 잃었던 그 순간 자각했던 사랑만큼은 잊을 수 없어서 이사라 마오의 안에 분명 살아있었기 때문에. 리츠를 사랑한다는 걸 자각하여 피어난 마음만큼은 외면할 수가 없어서 마오의 겨울은 시한폭탄이었다. 언제 터져나와 상처를 입힐 지 모르는 폭탄. 훗날 반드시 마오를 망가뜨릴 괴물.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림자 너머의 사쿠마 리츠는 혀가 아리게 쓴 것을 애써 삼키며 기꺼이 제 사랑에게 웃어주었다. 그가 가짜로나마 저를 만들어 사랑해주고 있었으니, 리츠의 이름을 받은 그는 마오를 사랑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이사라 마오의 사랑만이 사쿠마 리츠의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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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음악실

2017. 3. 8. 21:34 from ENSTARS/NOVEL





 유메노사키 학원은 아이돌 육성학교로, 학년이 올라갈때마다 자퇴하는 수많은 학생들 덕분에 저학년에 비해 고학년의 숫자가 훨씬 적은 장소였다. 무사히 진학하는 자는 소수, 그 중에서 졸업하는 자는 소수, 그 안에서 진짜 아이돌이 되어 성공하는 자들은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극소수. 하카제 카오루는 그 중 첫 번째 관문을 넘고 3학년까지 진학을 성공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비록 뺀질뺀질하고 수업은 밥먹듯이 빠지며 여자아이들만 좋아하고 불성실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사람이었지만─그리고 그 중 대부분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그럼에도 그는 빛나는 재능과 눈부신 외모를 바탕으로 자신이 서 있을법한 입지 하나쯤은 너끈히 만들어냈다. 

 그런 카오루에게 있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교실 몇 개의 예비 열쇠를 손에 넣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메노사키 학원의 크기에 비해 아이돌 학부의 학생 자체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고학년은 더더욱 그랬다. 사용하지 않아 잠기게 된 교실도 몇 군데나 있었다. 카오루 그는 남자따위 질색이라고 말하는 것에 비해 태도가 둥근 편이라 동급생들에게 그럭저럭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던 탓에 여러 뒷구멍을 통해 은밀하게 열쇠를 몇 개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카오루는 그 중에서 서쪽 현관 3층 복도 끝에 있는 음악실을 가장 좋아했다.


 사용하지 않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교실은 개중에 가장 깨끗하고, 창문에 달린 커튼이 하얀 색이었다. 볕이 잘 안 들지만 노을이 지는 모습이 눈이 부시게 고왔다. 음이 약간 엇나가서 조율이 필요해진 피아노나 살짝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책상과 의자들도 나쁘지 않았다. 카오루가 자주 드나들며 종종 환기도 시킨 탓에 교실은 썩 멀끔해진 상태였다. 적어도 숨쉬면서 먼지 먹을 걱정은 없었다. 창가에 가깝게 닿은 자리에 걸터앉으며 카오루가 크게 몸을 폈다. 여자아이들을 만나러 다니며 즐겁게 사는 것도 좋았지만 종종 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누구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카오루는 이곳에 왔다. 


 문득 그는 낡은 교탁 위에 놓여진 화병을 응시했다. 카오루가 전세라도 낸 마냥 쓰고 있는 교실이었기에 조금씩 치워나가는 것 역시도 그였다. 즉 교실의 사소한 변화는 모조리 잡아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3학년 A반 본인 교실은 그렇게 못 하고 있었다만. 여하튼 그가 어제 깨끗하게 씻어 놓은 병에는 꽃이 두어 송이 장식되어 있었다. 카오루의 손길이 닿은 건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행동을 할 법한 사람을 추려보았다. 이 유메노사키 학원에 꽃이랑 어울리는 사람이야 무척 많았다만, 그것과 별개로 꽃과 친근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같은 유닛의 세 사람? 허어. 모조리 제외. 그 중 한가롭게 원예를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클래스의 사람들. 음, 그나마 이츠키나 텐쇼인. 세나라면 그럭저럭 꽃을 얻어왔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텐쇼인이라면 카오루가 이 교실을 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그의 짓일 확률이 제일 높다고 여겨졌다. 물론 그가 이 교실에 들어와서 화병을 채워놓을 이유도 없고 그렇게 행동했다고 상상해봐도 대단히도 징그럽다만...... 카오루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따지면 꽃이 장식되어져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누구지. 의문은 금방 풀렸다. 카오루는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카나타와 단박에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히자마자 곱게 곡선을 그리는 눈매가 꽃잎보다 여리게 말랑했다. 


“역시 여기 있었군요? 카오루~.”

“분수대에서 바로 여기로 온 거야? 다 젖었잖아, 카나타 군.”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곧장 사물함을 뒤져 마른 수건을 두어 장 꺼내왔다. 카나타를 위해 가져 온 것들이었다. 하카제 카오루가 이 교실을 좋아하는 이유 중 마지막 하나는, 이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분수대를 한참이고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이 교실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아는 건 알면서 눈감아주는 학생회장 텐쇼인 에이치와 학교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삼기인 사쿠마 레이를 제외하면 카나타 뿐이었다. 하카제 카오루의 하나뿐인 연인인 그, 단 한 사람뿐.


 드나들때마다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휴대전화도 잘 안 가지고 다니면서 카나타는 카오루가 이 교실을 왔을 때마다 귀신처럼 정확하게 찾아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카오루가 카나타의 젖은 머리를 털어주며 익숙한 타박을 늘어놓았다. 카나타는 듣는 건지 아닌건지, 방긋 웃기만 했다. 무어, 진작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당장 감기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카나타를 말려놓은 뒤에야 카오루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무 의자에 앉아 책상에 턱을 괸 카오루가 문득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 화병의 꽃, 채워놓은 건 카나타 군이야?”

“네에. 어제 우연히 받을 기회가 있었거든요...”


 카오루랑 닮아서, 아주 예쁘길래. 여기에 빈 꽃병도 있는 걸 알았고요. 카나타는 바다만큼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저 프리지아 꽃다발은 같은 오기인 후배인 나츠메에게 받았고, 그 나츠메는 같은 유닛의 선배인 츠무기에게 받았고, 그는 미카의 알바를 도와주다가 남은 꽃들을 보상으로 받았다고. 사람 손을 많이 탄 꽃인것에 비해 색이 곱고 상한 곳이 없었다. 곱게곱게 건내진 모양이었다. 카나타가 저를 위해 신경 써 주었다는 증거를 눈앞에 둔 카오루의 입가가 자연스럽게 물렁해졌다. 상냥한 미소를 그리는 연인을 보며 카나타의 얼굴에도 한껏 풀어진 곡선이 새겨졌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건 비밀이에요.”


 카오루의 곁에 바짝 다가 앉은 카나타가 은근히 웃었다. 카오루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곳에서 분수대가 한눈에 보이는 만큼 분수대에서도 이곳이 한눈에 보였다. 교실 창문을 가리는 하얀 커튼 너머로 어른어른 사람 그림자가 맴돌면 카나타는 대번 이곳으로 왔다. 가끔 허탕을 칠 때도 있었지만 열에 아홉은 제대로 카오루가 있었다. 텅 빈 음악실에서 은근히 기다렸다는 양 눈이 마주치면 대번 기쁜 표정을 지어버리는 게 귀여웠다. 애써 표정을 숨기고는 웃는 얼굴은 심장이 빠듯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진실이었으니까 카오루는 몰라주는 게 좋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적당히 수긍해서 납득하는 카오루가 귀여웠으니까. 카나타는 언제나 제 연인에게 심술궂고 무른 사람이었으니, 이번에도 그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대신 그 뺨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소리내서 떨어지자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눈이 맞았다.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무르듯이, 카오루도 카나타에게 지나치게 물렀다. 얽혀진 시선 사이로 전해지는 목소리가 다정한 척 은근한 요구를 담고 있었다. 카오루가 무심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카나타가 커튼을 쥐었다. 넓게 펼쳐져 얇게 가려진 천 한 장 너머로 입술이 닿았다. 첫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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