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는 너를 참 좋아하네.
하카제 카오루는 살면서 그 말을 퍽 많이 듣고 자랐다. 너는 언제나 카오루 본인이었고, ‘그 애’는 성장하면서 꾸준히 주인을 바꿔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반 소년소녀가 대부분이었고, 중학교때는 나이의 고저를 가리지 않고 여자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소수의 남자아이들도 없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유메노사키 학원에 진학한 이후로 ‘그 애’의 주인 자리의 지분은 누구 한 명이 대부분 차지해버렸다. 아주 가끔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살짝 빌려 갈 때도 있었지만, 그 사람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여름 바다같은 머리카락에, 환한 탄산 음료같은 눈을 가진 소년. 파도 거품을 끌어모아 빚어낸 것처럼 수려한......
그래, 신카이 카나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신카이 카나타는 하카제 카오루의 ‘그 애’였다. 너를 참 좋아하는 그 애.
하카제 카오루, 이 인기 많은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지. 그 애가 날 참 좋아해주지. 고마운 일이야. 소년의 처세술이 성장함에 따라 대답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묻는 사람이 달라짐에 따라 역시 대답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소년은 그 애가 어떻게 자신을 보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애는 언제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른 사람이었었고, 다른 얼굴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딱 하나. 그 눈에 담긴 감정 하나만큼은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꼭 같았다.
달고 쓰고 조금 매운. 가끔은 애원 같고, 가끔은 원망같고. 하지만 늘 아주 간절했던. 카오루는 그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주변에서 무어라 속살거리지 않더라도 카오루는 어렵잖게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터였다. 그 애는 언제나 카오루에게만 물렀고, 카오루에게만 다정했고, 카오루에게만 유독 약했다. 카오루는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감정을 사랑 외에 알지 못했기에 그 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하카제 카오루의 ‘그 애’는 늘 하카제 카오루를 사랑했다. 제 감정을 전부 억누르지 못해 갈무리하고 갈무리해도 새어나오는 감정의 색만으로도 사람들은 카오루에게 그 애가 널 참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카오루는 그 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았으나, 그렇다고 카오루가 그 애를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황금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행동거지에 비해 끝내 다정해서 그 애를 매정하게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 애가 발밑에 주저앉아 커지고 커져서 닳고 닳은 제 사랑을 끝끝내 속에서 끄집어내어 날것으로 가져다 바치기 직전까지 하카제 카오루는 그 애의 사랑을 모르는 체 했다. 그 애와 꼭 같은 마음으로 그 애를 사랑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카오루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고작 그 정도였다.
그는 늘 진심에 약했다. 약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 주었다. 가벼이 만났다가 떨어지는 흥미 본위의 행동거지는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그 애와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리라 직감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 눈 때문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눈. 그 오묘한 보랏빛 사랑. 제 눈에 담긴 하카제 카오루가 좋다고, 제 시선, 자신의 눈동자에 가득 담기는 그 황금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고 외치는 그 시선을, 소중히 여겼다.
존중했다. 감사했다. 결국 미안했다.
카오루는 늘 그 애에게 깊이 감사했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그 애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늘 사랑하지 못했다. 그 애가 건내주는 사랑에 감사했고,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따뜻한 물에 들어가 몸을 머리 끝까지 담근 것처럼 편안해졌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상대와 꼭 같지 못한 애매한 파랑. 그 애와 하카제 카오루의 사랑은 언제나 그 애의 짝사랑이었다. 애닳은 외사랑을 견디지 못한 그 애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첫째, 고백. 그 애가 가장 많이 선택한 결과였다. 그 애는 결국 카오루에게 고백을 던졌고, 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카오루는 늘 정중한 거절의 말을 되돌려주었으니까. 여기서 그 애의 선택은 또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카오루와 남이 되거나, 친구로 남거나.
두 번째 선택지는 단념이었다. 카오루에게 거절당하고 친구로 남고 싶어하는 그 애와, 애초에 고백조차 하지 않은 그 애. 모두 이 선택지로 돌아왔다. 마음을 정리하고, 제 눈의 보라를 지우고 차분한 파랑이나 평온한 녹색으로 바꾸려고 안간힘을 썼다. 성공한 그 애는 카오루의 친구가 되어서 지금도 연락처 한 칸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실패한 아이는 또다시 남이 되었다.
이 패턴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변함없이 이어졌고, 카오루의 ‘그 애’는 늘 비슷한 주기를 가지고 바뀌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신카이 카나타는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하카제 카오루의 그 애였다.
그리고 하카제 카오루는 신카이 카나타를 그 애로 셈하지 않았다. 카오루만큼은 그랬다.
애초에 기본 전제가 틀렸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하카제 카오루만큼은 알았다. 타인이 생각하는 그 애는, 하카제 카오루를 유독 좋아하는 ‘누군가’였다. 하카제 카오루가 생각하는 그 애는, 자신을 보랏빛 눈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신카이 카나타는 달랐다. 꼭 과거의 그 애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주제에, 그의 눈은 늘 아름다운 청녹색이었다. 차분하고 평온했다. 다정했지만 뜨겁지 않았다. 신카이 카나타는 하카제 카오루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평온하게, 좋아해주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착각할 정도로 다정하게.
하카제 카오루는, 처음에는 그 낯선 사실이 신기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그는 물론 좀 많이 특이했고, 가끔 당황스러웠고, 자주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카오루는 카나타가 마음에 들었다. 그 애의 자리를 겉으로 차지해버려서 새로운 그 애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점부터 두둑한 보너스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카오루는 그 애의 보랏빛 시선을 좋아하고 감사했지만, 태어나 줄곧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그것과 끝내 이어지는 관계의 단절 혹은 변화에는 질려 있었다. 가볍게 생각할 수 없고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지 않을까 고민해야 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정신 한구석이 늘 예민하게 곤두서 있어야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카나타의 청록색은 마치 달콤한 꿈 같았다. 부드러운 비단에 둘러쌓인 휴식에 카오루는 만족했다.
사실 그러면 안 되었는데. 변화가 이끌어낸 평화에 만족하는 순간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임을 직감하지 못한 카오루의 불찰이었다. 카나타는 그 애가 아니었고, 카오루도 그 애의 짝사랑 상대가 아니었다. 둘의 관계에 애정이 기반이 되고, 그 위에 시간이 쌓였다. 시간과 감정이 만나 싹튼 마음을 품에 끌어안은 사람은 다름아닌 카오루였다.
그래, 하카제 카오루였다. 제 안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새로운 색을 카오루는 아주 느즈막히 발견했다. 얼마나 늦었느냐면, 그것이 제 안에서 한참을 끓고 끓어 모조리 눌러붙어버린 뒤에야 알아차려버렸다. 단단하게 몸에 굳어 붙어버린 감정은 떼어내기도 힘들었다. 뜯으려니 통증이 따라붙었고 지우려니 얼룩이 져서 그럴 수도 없었다. 이를 어쩔까. 하카제 카오루는 처치 불가 상태가 된 지 오래라며 배짱을 부리는 그것 앞에서 황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적보랏빛 감정을, 끈적끈적하고 끈질기고 고집 센 이것을.
“카나타 군.”
“네, 카오루~.”
“음...... 아냐, 그냥 불러봤어.”
“후후... 카오루도 참.”
가끔 실없는 행동을 하네요~. 농담처럼 덧붙인 카나타의 말에 카오루는 부드럽게 웃음지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매 속에 콕 박힌 에메랄드 색 눈동자는 여전히 청녹색이었다. 카오루는 제 눈에 빼곡하게 들어찬 적보랏빛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굳이 더 곱게 웃었다.
그 애는 너를 참 좋아하네. 카오루는 수십 번도 넘게 들었을 그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카나타를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카오루? 의아하다는 듯 저를 부르는 카나타의 목소리를 애써 모르는 척 하며, 하카제 카오루는 그저 숨을 삼켰다.
그 애는 너를 참 좋아하네. 누군가가 또 한 번 속삭였다. 응, 그 애는...... 나를 참 좋아해주지. 카오루는 평온한 척 답했다. 너도 그 애 좋아해? 가끔 카오루에게 따라붙었던 질문이 이번에도 드물게 쫒아왔다. 카오루는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대답을 내밀었다.
나는 그 애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 회색빛 눈동자 속 보랏빛이 쓸쓸하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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