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트AU
-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벌써 며칠 째 내리는 눈이지만 요 몇 시간은 드물게 폭설이었다. 청년은 물끄러미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짙게 낀 하늘은 어두운 회색이었다. 흰 눈마저 어두컴컴하게 보일 정도로 흐린 공기를 가만히 내다보던 청년은 불만스럽게 미간을 한 번 좁혔다가 반듯하게 펴냈다. 말끔한 얼굴의 청년은 거리에 나가면 추위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수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광등 빛 아래에서도 자랑스러울 만큼 예쁘게 빛나는 긴 머리카락에 섬세하게 빚어진 이목구비. 다양한 색으로 곱게 빛나는 눈동자. 선 짙은 육체가 아름다운 청년은 눈만 내리는 하늘을 질리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눈을 크게 즐기지는 않았지만 이 커다랗고 화려하기만 하고 황폐하여 실속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집에서 유일하게 봐 줄 만한 것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에 더더욱 하늘하늘 땅을 장식하는 하얀 얼음조각에 집중할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잠깐 떼었다가 다시 굳게 붙인 뒤, 청년은 인기척을 향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몇 시간만이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마스터.”
“있다고 하면 있다고 할까......”
상대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가 표정을 굳혔다. 청년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마스터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스터는 찬찬히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는 저가 소환한 서번트의 저런 표정을 처음 보았으니까. 소환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경박하고, 말을 잘 했으며, 비록 하필 저를 소환한 게 남자나며 투덜거리기는 했어도 마스터에게 서글서글했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마스터, 레이가 심려 깊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고? 아처 군.”
“그다지...... 마스터가 신경 쓸 건 없어.”
“거짓말 하지 말게나. 본 건 얼마 안 됐지만 아처 군의 이런 상태가 평소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네.”
라이더인가? 레이는 정확하게 제 서번트의 이상원인을 짚어냈다. 아처가 약하게 미간을 좁혔다. 단 한 번으로 짚어낼 정도로 본인이 쉽게 행동했다는 게 불쾌했다. 제 행동거지가 알기 쉬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더군다나 상대는 아처가 인정한 마스터였다. 감정을 응어리처럼 품고 있기에 적당하지 않은 상대. 그는 곧 한숨을 쉬는 것으로 항복을 알렸다. 고개가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레이는 서번트를 따라 시선을 다시 창밖의 눈 오는 풍경으로 돌렸다. 이 눈이 내리기 전, 이 저택으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맞붙었던 서번트와 그 마스터의 모습이 순서대로 레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스터 모리사와 치아키와 그 서번트 라이더. 황금으로 만든 돌고래를 타고 파도와 함께 돌격하는 라이더의 진명을 짐작해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둘 다 딱히 진명을 숨기려는 의지가 강하지 않아보였다.) 레이는 자신의 아처와 상대의 라이더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지었던 표정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는데 말이지. 레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만약 성배전쟁의 서번트로 리츠가 소환되어 제 앞에 서면 저가 그런 표정을 지을까. 그 정도로 아처는 처참한 얼굴로 절박하게 저를 보았다. 본능적으로 선택한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 레이가 객관적으로 꽤 우위에 서 있던 상황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짧은 소강을 만들어낸 건 아처가 제 정신을 추스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처는 레이의 기대대로 빠른 시간 내에 혼란을 수습해냈다. 다만 그 이후에 찾아온 짙은 자괴감을 느리게 소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라이더와 아처 군은 비슷한 시대의 영웅이었던가?”
“알고 있으면서 질문으로 묻는 형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그럼 정말 모르는 것을 묻지. 어떤 사이였는가?”
마스터의 질문에 서번트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아득한 과거. 전승은 전해져 내려오지만 둘의 뚜렷한 관계를 알기는 어려웠다. 다른 나라에 살던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단 둘 외에 아무도 모르는 시대였다. 애초에 그와 라이더의 관계는 전승으로조차 전해내려오지 않는 묻혀진 과거였다. 아처는 잠시 고민하듯 레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을 해 줄까, 말까. 아처가 창가에 조금 더 다가갔다.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고 흰 숨을 뱉으며 그는 제 마스터에게 진실을 고했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에......”
“......”
“눈송이만큼 하고 싶은 말이 생기던 사람.”
내가 이 성배전쟁에 참여한 이유.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사람. 내가 전성기를 지금으로 선택한 이유. 어떤 답을 원해, 마스터? 전부 한 사람이야. 아처의 표정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라이더를── 신카이 카나타를 위해 소원을 빌기 위해 성배전쟁에 참여했다. 헌데 같은 전쟁 다른 클래스로 소환된 게 바로 그 장본인이라니. 희극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레이의 소원을 위해서라도 아처는, 하카제 카오루는 이 전쟁에서 유일한 승자가 될 마음을 굳힌 뒤였다. 보구까지 사용할 정도라면 카나타 역시도 카오루와 흡사한 결론을 내린 상태일 터. 그들 본인이 아니라 마스터를 위해서라도 둘은 싸워야만 했다.
카오루가 깊게 숨을 뱉었다. 창문이 뽀얗게 변했다가 천천히 바깥풍경을 투영했다. 눈은 깊이 높게 쌓이고 있었다. 흙을 덮는 눈처럼 이 감정도 아예 덮어버릴 수 있다면 편할 텐데 말이지. 그는 쓰게 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비참한 감정과는 별개로 냉정하게 행동할 자신은 있었다. 저를 도와줄 마스터도 있었으니, 연인에게 겨눌 각오도 되어 있었다. 비록 그 활을 쏜 뒤의 저 자신이 어떻게 될 지는 본인도 잘 몰랐지만.
-
세이버 / 아처 / 랜서 / 라이더 / 캐스터 / 어새신 / 버서커 순서대로
레오 / 카오루 / 스바루 / 카나타 / 나츠메 / 나즈나 / 쿠로 그리고 마스터는
세나 / 레이 / 호쿠토 / 치아키 / 소라 / 토모야 / 케이토... 같은 느낌으로 상상한...
슈랑 미카 에이치랑 와타루 마마랑 안즈는 다른 성배전쟁에서 싸웠습니다(?)
'ENSTARS >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나카오] 그 애 (0) | 2019.01.27 |
---|---|
[리츠마오] 올해도 생일 축하해 (0) | 2018.09.22 |
[카나카오+유성대] 추위 (0) | 2017.11.19 |
[카나카오] 밤 (0) | 2017.07.06 |
[카나카오] 이번 (0) | 2017.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