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라'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1.02.18 [진아라] 북극성
  2. 2021.02.16 [진아라] 스토리 박스
  3. 2021.02.13 [진아라] AS 부탁합니다!
  4. 2021.01.24 [진아라] 루트 F
  5. 2021.01.16 [진아라] 선택하는 미래

[진아라] 북극성

2021. 2. 18. 00:38 from WORLD TRIGGER/NOVEL

 

  네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네가 가장 찬란했을 때. 너는 나를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다. 

 

  병이었다. 진은 미래를 보는 특별한 사이드 이펙트의 소유자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아라시야마가 쓰러지는 미래를 본 순간 이미 늦어 있었다. 젊고 건강했는데. 그 말은 이미 떠난 사람을 추억하는 말로 남아버렸다. 보더에서도 손에 꼽히던 우수한 병사는 네이버의 침략이 아니라 작은 바이러스의 침략으로 죽었다. 사람은 참 보잘 것 없는 이유로 죽는다. 목에 사탕이 걸려도 죽고, 떡을 잘못 삼켜도 죽고, 실내와 화장실의 온도 차이로도 죽는다. 생각보다 많이. 그리고 병에 걸렸다는 사망원인은 정말 어처구니 없을만큼 흔한 사망원인이었다. 쓰러지는 미래가 보여서 며칠 더 빨리 병원에 데려간 정도로는 아라시야마를 살릴 수 없었다. 며칠 더 빨리 그를 병원에 가둬두었을 뿐이었다. 

 

  진 유이치는 가끔 그 날의 꿈을 꾼다. 너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의 꿈. 턱이 한결 가냘프게 말라있던 아라시야마가 흰 침대 위에 누워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네 얼굴 위로 네가 죽는 미래가 겹쳐지듯 어른거려서, 진은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아니면 멀리멀리, 죽음도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아라시야마를 품에 안고 도망치고 싶었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서, 진은 창백한 얼굴로 아라시야마 옆에 얌전히 앉았다. 아라시야마는 제 연인의 시퍼런 낯에 도리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만큼 상냥했다. 죽어가고 있는 건 저 자신이었으면서. 

 

  아라시야마는 진에게 두 가지를 물었다. 내가 살 수 있을까? 진은 부정했다. 조금의 확률도 보이지 않았다. 단 1%의 확률이라도 있었으면, 진은 희망에 말라버렸겠지만 아라시야마는 분명 그거로 충분하다며 웃었을텐데. 허나 눈에 시뻘겋게 핏대가 설 만큼 미래를 헤집어도 없었다. 조각조차도, 계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답을 기다리는 아라시야마 앞에서 천천히 고개를 흔드는 작은 몸짓조차 괴로웠다. 아라시야마는 그런 걸 묻는 게 무척이나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진의 대답을 들을 아라시야마는 잠깐 병원의 천장을 응시했다. 같은 무늬의 흰 색 타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천장이 아라시야마에 무슨 답을 주었는지 진은 모른다. 다만 아라시야마는 평온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나한테 트리거를 빌려 줄 수 없을까? 진은 그 부탁조차 거절했다. 그래, 알았어. 아라시야마는 무척 담백하게 거절을 납득했다. 그는 언제나 진의 선택을 믿었으니, 이번에도 그랬던 걸까.

 

  진은 천천히 그 날의 일을 곱씹었다. 태엽을 감으면 노래를 들려주는 오르골처럼, 진은 늘 제 머리에 태엽을 감고 똑같은 풍경을 머리 속에 천천히 그려냈다. 그 때 그 선택이 옳았을까, 틀렸을까, 대안은 없었을까, 있었다면 그 대안은 옳았을까, 아닐까. 진은 늘 자신의 선택을 고민했고 그만큼 이미 결정한 일을 되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 순간 그 둘뿐이었던 병실에서 있던 모든 일은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되었다. 제 사랑과 함께한 마지막 순간이었으니 회상한다고 하여 누가 손가락질 할 수는 없으리라. 진 유이치는 턱을 괴고 몽롱한 바다색 눈동자로 허공을 멍하니 맴돌았다. 

 

  생존확률이 제로라는 사실을 알고 난 네가 블랙 트리거가 되고 싶어하는 건 알았어, 아라시야마. 병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트리온은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부하들에게, 동료들에게, 후배들에게 무언가 남겨주고 싶어한다는 것도 눈을 보고 바로 알았어. 익숙한 눈이었어. 몇 번이고 봤으니까. 네 눈이 그렇게 빛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트리거를 줬더라면 성공률도 꽤 높았을 거야. 그 때 보였던 미래로 따지자면, 8할 쯤 되는 확률로 성공했을텐데. 그 정도면 미래시 중에서는 거의 이뤄지리라 말할 확률이야, 높은 확률이거든. 

 

  하지만 아라시야마, 만약 그 미래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너를 강탈하게 되는 거야. 네가 사랑했던 가족들에게서, 네가 사랑했던 부하들에게서 전부. 블랙트리거가 되어버린다는 건 결국 네 시신도, 그리하여 네가 여기 잠들어있다고 기도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위안도 가족에게서 빼앗아 버리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들도, 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함께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전부. 그 순간이 욕심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네 가족들이잖아. 네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들한테서. 그리고 똑같이 너를 사랑해주고, 그리하여 너를 이렇게 멋지게 키워 준 사람들에게서 나는 이미 너를 받아갔는데. 그러니 그 권리마저 훔쳐갈 수는 없었어.

  게다가 블랙트리거 아라시야마를 내가 사적인 욕심으로 절대 놓지 못하는 미래도 보였거든. 네가 나를 적합자로 골라 버려서 그래. 아니, 뭐. 그래. 너니까 적합자는 분명 상당히 많이 있었겠지. 하지만 내가 더 강했으니까 나는 너를 놓지 않아. 후우진조차 놓는데 정말 오래 걸렸어. 너는 얼마나 더 붙잡고 있게 될까 나도 몰라. 그 이후의 미래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블랙 트리거가 된 너는 분명 뛰어난 트리거였겠지. 어쩌면 너를 사용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더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그랬겠지. 블랙 트리거가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너에게 트리거를 주고 네 마지막 말을 듣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전해주고 유서를 쥐여주며 마지막으로 너에게 트리거를 쥐여주는 게 옳았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어떻게 그러겠어? 그게 가장 옳은 길이고 현명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네가 죽을 걸 알고 있는데. 단 며칠이라도 네가 더 살 수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진이 몇 번이고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라시야마의 두 번의 물음에 모두 부정의 대답을 내놓은 진은 마지막 부탁만큼은 들어주고 싶었다. 아라시야마는 손을 뻗었고, 진은 기꺼이 그걸 붙잡았다. 맞잡는 손에는 아직 조금 힘이 들어 있었다. 아라시야마는 구명줄이라도 붙잡는 것처럼 간절하게 저를 잡아오는 연인을 보며,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정답일지, 아라시야마도 분명 고르지 못했던 게 뻔했다. 진도 그랬다. 방금 너에게 가망이 없노라 말한 주제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진은 아라시야마의 손만 잡고 있었다. 따뜻하고, 여전히 단단한. 

 

'있지, 진.'

'응.'

'외로워진다면'

 

  아라시야마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생명의 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허공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미래를 보는 사람은 늘 진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마치 아라시야마가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찰나, 진은 예언을 받아듣는 사제가 되어 제 신이 읊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진의 곁에는 사람이 많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응.'

'타마코마에도, 본부에도. 보더는 늘 진의 편이야.'

'아닐 때도 있는걸.'

'다들 솔직하지 못할 뿐이야.'

 

  다들, 진의 편이야. 아라시야마는 그렇게 속삭여줬으나 진은 속으로 입을 비죽였다. 그럼 솔직하게 늘 내 편을 들어주는 아라시야마가 곁에 있어주면 되잖아. 울면서 매달리고 싶었다. 바로 저 자신이 아라시야마에게 마지막으로 가망이 없다는 말 따위를 지껄였으면서도, 인간은 누구나 절박한 마음으로 가망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마련이었다. 진은 꼭 그런 마음으로 아라시야마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네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응.'

'하늘을 봐, 진.'

 

  아라시야마가 다정하게 진의 눈을 응시했다. 하늘을 닮은 제 연인의 눈을.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는 그 슬픈 눈을 아라시야마는 신뢰를 담아 응시했다. 

 

'내가 빛나고 있을 거야.'

'아라시야마,'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진.'

 

  너는 다섯 개의 별 중 하나인 아라시야마 쥰이니까, 분명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하늘로 올라가면 다른 별들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언젠가 괜찮아지더라도, 큰 별 하나는 이제 될 수 없잖아.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진은 어떠한 부정 한 마디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라시야마의 손을 끌어당겨 제 뺨에 대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면회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아라시야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라시야마도 그랬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수시로 찾아오는 아라시야마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진은 수면제를 먹고 몇날 며칠을 강제로 잠들었다. 울면서 코나미가 진의 뺨을 때리며 억지로 깨우는 순간, 진은 그 통증이 아라시야마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탄임을 알았다. 네가 없는 세계는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뺨을 얼얼하게 만들고 가슴 어딘가를 잘라내 버리며 시작되었다. 

 

 

 

 

 

"아라시야마."

 

  겨울 공기는 차가웠다. 진은 짧게 입김을 내뱉었다. 희게 흩어지는 공기 사이로 진은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 없는 어두운 하늘을. 

 

"거짓말쟁이."

 

  네가 없는 하늘에 별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진짜로 보이지 않는 건지, 내 눈이 흐려져 보이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하지만 네가 없어, 아라시야마.

  하늘에도 땅에도 내 곁에도.

  어디에도 네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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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01. 초콜릿의 행방을 찾아라!

 

 

  다음 발렌타인 데이에는 초콜릿을 주면 안 돼? 

  그건 진 유이치가 짜낼 수 있는 용기를 모두 짜내서 겨우 건낸 말이었다. 너를 좋아한다는 솔직한 고백도 못하는 소년이 가까스로 내뱉은 일말의 사랑이었다. 매년 아라시야마는 발렌타인 데이를 챙겨줬지만, 진의 손에 쥐여지는 건 유독 좋아하는 쌀과자였다. 진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저가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동원하여 상대가 좋아할만한 것을 줬다. 애초에 아라시야마에게 있어서 발렌타인이란 기념일을 즐기며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는 수단이었으니 당연했다. 올해에는 초콜릿을 받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아라시야마 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잠시 하늘을 보고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활짝 웃으며 그러겠노라 말해줬다. 진의 부탁 속에 무슨 감정이 담겨있는지 그가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그저 오랜 친구의 변덕이라고 생각했을런지는 진조차 알 수 없었다. 

 

  무사히 초콜릿을 받아내는 미래도 봤다. 자신에게 웃으며 초콜릿을 건내주는 아라시야마 쥰을 확실히 봤으니, 진은 별 걱정 없이 마음을 놓았다. 발렌타인 데이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는 초콜릿. 그게 평범한 우정 초콜릿이어도 충분했다. 사소하고 꼴사나운 욕심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진 유이치는 미세한 혼란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우당탕탕 발렌타인데이 진아라 이벤트. 스토리를 단순하게 나열해보자면 진이 받았어야 했을 초콜릿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려고 가져온 우정 초콜릿 사이에 섞여있던 탓에 보더의 어딘가로 진의 초콜릿마저 흘러들어가버렸고... 진이 그걸 찾으러 가는 내용이었다 보더를 한바퀴 빙 돌고 만날 사람 다 만나며 아라시야마가 홍보부대답게 정말 초콜릿을 끝장나게 많이 뿌렸다는 사실만 깨닫고 쪼끔 씁쓸했던 진이 마지막으로 끝내 타치카와가 아라시야마가 준 자기 초콜릿이랑 같이 진 이름이 쓰여있는 것도 있길래 약올릴 겸 냉큼 그걸 먹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어서 속으로 눈물흘리면서 타치카와 멱살을 잡고 흔들뻔했는데 이즈미가 진 씨~ 아라시야마 씨가 부르는데요 하고 들어와서 타치카와를 구원해주고... 아라시야마 부대실로 돌아간 진은 아라시야마가 건내주는 하트모양 초콜릿을 받게 된다는 해피엔딩이었다 하트모양 초콜릿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무사히 준비하기 위해 우정초코를 하나 더 준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려던 초콜릿 사이에 섞어 보내버리고 시간을 벌었던 아라시야마 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를 짜내기 위해서 진의 사이드이펙트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난관에 부딪혀서(+발렌타인데이가 2시간 남았을 때 컴을 잡았으니 시간이 없었고) 스톱해버린 글 

 

 

 

02. 진단메이커

 

이 프로그램 > 재밌어서 애용하지만 역시 가끔 뒤에 사람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음

 

진아라 의 연성용 단문은 "괜찮다고 연기를 했지만 사실 나는 괜찮지 않았나봐."

kr.shindanmaker.com/702848

 

진아라 의 연성 문장
앞으로 더 얼마나 사랑에 빠져야 하는 거야?

kr.shindanmaker.com/679163

 

[ 진아라 ]
: "오늘의 하늘은 내게 누군가가 두고 간 선물같아. 어제보다 더 따뜻해."

kr.shindanmaker.com/529971

 

뭐 뒤에 사람 있으신지...... 물론 진아라콩깍지가 단단히 껴서 그렇기도 합니다만 정말 좋다고밖에 말할수없음 상황 생각하면서 좋아서 기절함 언젠가는 보면서 생각나는게 있으면 연성하려고 백업용으로 박아두기 

 

 

 

03. 블랙트리거

 

작품 내에서 눈물나게 만들고 겁나게 만드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지만 2차로 오면 이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음 울면서 좋다고 말해야 함 아라시야마 트리온 수치 7 진 트리온 수치 7...... 트리온 수치조차 똑같은 이 유사쌍둥이...... 사이드이펙트가 있는(=트리온이 발달되었다고 말하는) 진의 트리온수치가 7인걸 보면 아라시야마도 상당한 트리온인걸 알 수 있고 그건 곧 둘 다 블랙 트리거를 만들 조건은 충분하다는 소리가 된다... 사이드이펙트가 있는 진은 가산점을 받는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진에게 사망 플래그(ㅋㅋ) 비슷한게 너무 많이 꽂혀있어서 그런가 2차에서는 블랙트리거가 되는 진 연성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라시야마가 블랙트리거가 되는 쪽을 더 좋아한다. 남은 사람이 좀 더 괴로워지는 선택지겠지만... 그렇지만... 그래서 더 좋음 (망해버린 개인취향) 진도 아라시야마도 상대가 블랙트리거가 되어도 관성적으로 일어나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충격을 어떻게 소화해내는가는 다른 문제니까... 아라시야마는 죽도록 괴롭고 죽도록 슬퍼도 결국 주변인들과 함께 차차 이겨내며 블랙트리거 진을 진의 유산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진은... 진은...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진을 잃은 아라시야마가 과거를 딛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보는 사람이라면 아라시야마를 잃은 진은 눈앞에 강제로 보이는 미래를 과거에 고인 채로 응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진에게 현재가 되어 줄 아라시야마를 잃어버린 이상... 진은 미래를 만들어나갈 사람이고 본인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사이드이펙트를 가진 이상 이렇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책임감? 같은 감정이 무척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라시야마를 잃으면 정말 그 감정만으로 움직일거라고 생각함 으으음 미래를 만들며 미래에서만 살아가는 사람...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똑같은 진 유이치처럼 보이겠지만 속은 완전히 망가져있을 것 같다 어머니도 모가미 씨도 아라시야마도 진의 현재가 되어주는 사람을 세 번이나 잃은 진에게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낼 용기 따위는 흔적도 남지 않을 것 같음 어머니를 잃었을 때는 처음이었으니 모가미 씨를 받아들였고 둘이나 잃었을 때 이미 진의 용기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아라시야마가 그만큼 용기를 채워줬으니 진도 아라시야마를 받았던 건데 아라시야마마저 잃었다면... 역시 무리라고 생각해 

진은 블랙트리거가 되어도 두루두루 꽤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는 풍인같은 블랙트리거일거라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아라시야마는 까다롭게 주인을 가려도 좋다. 그게 고의는 아니고 블랙트리거가 되는 순간 급하고 절실했기 때문에 선택지가 좁혀졌다거나~ 하는 느낌도 좋아함 유마의 블랙트리거는 유마를 살리기 위해 만들어서 유마밖에 기동 못할것같은데 (물론 추측임 아무도 기동시험을 안해봤고 할수도 없으니...) 아라시야마의 블랙트리거도 눈앞에 위험한 상태였던 진을 살리기 위해 (꼭 진이 아니어도 괜찮음 '눈앞의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 아라시야마가 순간적으로 진을 위한다는 염원을 담아 만들어버린 바람에 의외로 기동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은 트리거면 좋겠다 '누군가' 를 위한다는 염원이 담겨버렸기 때문에 바로 그 '누군가'와 아라시야마와 특별히 파장이 닮은 진 정도나 쓸 수 있는 까다로운 블랙트리거

진은 미래를 보는 탓에 순간적인 강한 염원보다는 내내 마음의 준비를 하며 대비해왔기에 마지막 순간 모두를 위한 블랙트리거를 완성시킬 수 있다면 아라시야마는 미래를 볼 수 없으니 눈앞의 순간을 소망해버릴 수 있는 차이 좋아함 

진의 눈앞에서 아라시야마를 잃는 전개도 좋지만 아라시야마를 잃어버린 순간 진은 비틀리는 미래를 목격하며 아라시야마를 잃었음을 깨닫는 전개도 좋다

 

 

 

04.

 

미래시를 볼 수 있다는 건, 모든 관계에서 비겁해진다는 소리야. 

 

로 시작하는 진아라 보고싶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이미 알고 시작하는 대화인 거잖아 진의 입장에서는 (아니 물론 확률 문제도 있겠지만) 거의 보고 내는 가위바위보 느낌인데... 이 사람과 이 대화를 했을 때 어떤 대답이 나올지 어느 정도 알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관계에 용기를 낼 수 있을까? <- 늘 의문이 남는 지점임... 좋은 친구, 좋은 선후배... 물론 감사할 일이지만 이렇게 말했을 때 좋다, 이렇게 말했을 때 나쁘다는 걸 진은 대충 막연하게 알텐데 그러면 진은 이 관계의 진실성을 믿을 수 있을까 모르겠음 아니 상대의 감정만큼은 진짜니까 관계의 진실성은 믿지만 자신이 이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감정을 받아도 괜찮다는 확신이나 자신의 성실함을 믿을 수 있을까... 에 가까우려나 나는 당신이 좋아해줄 걸 알고 이런 말을 한 거야 이미 답이 있는 선택지를 보고 이런 행동을 한 거야 이렇게 제 자신을 부정적으로 응시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 놓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생각하기에 진은 너무 섬세하고 상냥함... 진 유이치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늘 얘의 행복에 의문이 남음 그래서 자꾸 아라시야마 붙여주고 있지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내 안에는 사랑에서도 아라시야마의 대답을 알수밖에 없어서 이건 비겁하다고 생각하며 차마 한 발자국 못 내딛는 진이 있다... 아라시야마가 그걸 붙잡아주는 해피엔딩 진아라를 제일 좋아하지만 아라시야마가 가지고 있는 건 정말 담백한 우정이고 진은 사랑이라서 진도 손을 내밀지 못하고 아라시야마도 감히 기만적으로 손을 내밀 수 없어서 딱 한발자국 모자란 진>아라도 좋다 네가 무척이나 소중하지만 그게 네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야... 반대로 진<아라일경우에는 이쪽이 훨씬... 파국이 아닐까 싶어서 상상이 잘 안간다 진은 우정이지만 아라시야마는 사랑이고 진은 미래를 본다... 성애적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랑하고 있는건 사실이니까 연인이 되는 미래도 있을거고 내내 친구로 남는 미래도 있을거고... 진이 어떤 걸 골라야 진실로 아라시야마에게 행복한 미래일지 확신이 없어서 도망쳐버릴것같음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진에게 부담이 된 걸 알아서 못 붙잡고 도망치게 그냥 두는 아라시야마... 파국이다 파국 

 

 

05.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다는 말을 하기에 아라시야마는 이미 가족이 제일 소중하고 진은 극단적으로 말하지면 세상의 평화가 제일 소중하다고 생각함... 상대에게 제일의 자리를 주기에 너무나 쥔 것이 많은 사람들끼리 빈 자리를 내어주는 연애...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소중하지 않은 건 전혀 아니고 마음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게 제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미묘함... 둘 다 그걸 알고 그걸 납득하며 인정하고 그 부분조차도 사랑하기에 둘의 사랑은 제일이 아니더라도 온전하게 완벽한 사이...

그 2% 부족한 최선의 사랑을 하는 진아라도 좋아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세상에서 제일이 될 수 있도록 관계가 변하는 것도 좋아함. 세상의 평화를 위해 결정적인 키 카드가 되어가는 아라시야마와 아라시야마의 가족이 되는 진 같은 거... 그리하여 언젠가 네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고 말해도 그게 진실이 되는 순간이 오겠지 그리고 진은 즐겁게 그 순간을 기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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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보더는 자동 시스템을 쓴다. 트리거 인식으로 열리거나 대실 안쪽의 사람이 열어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여하튼 소리 하나 없이 매끄럽게 열리는 문이라는 소리다. 허나 트리거 인증 자동 허가를 받고 혼자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며, 대실 안에 있던 대원들은 문이 벌컥 열리는 환청을 다 함께 공유했다. 잔뜩 토라진 얼굴의 진 유이치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아라시야마 부대실로 찾아왔다. 이미 몇 번이고 똑같은 일을 경험해 본 적 있는 아라시야마 부대원들은 익숙하게 시선을 공유했다. 저 표정은 어필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일지 모르겠다만, 저 표정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진이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며 아야츠지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를 가지런히 모아 한 쪽으로 치웠다. 다용도실에 들어선 키토라와 토키에다가 마실 것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꺼내왔고, 사토리가 소파 건너편에 나란히 놓인 의자를 끌어 옆쪽으로 가져왔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아라시야마 대원들의 연계를 보며 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 건너편에 나란히 놓여진 의자 중 하나를 끌어 앉았다. 아야츠지와 사토리는 소파에 앉았고, 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키토라도 아야츠지의 옆에 앉았다. 세 명이 앉아 소파가 오밀조밀하게 들어차자 토키에다는 사토리가 끌어줬던 의자에 앉았다. 아라시야마 부대 네 명과 함께 테이블에 동석한 진은 대놓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라시야마가 자리를 비웠으면서 동시에 아라시야마 부대 대원들이 그다지 바쁘지 않은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고 찾아온 건 진의 사이드이펙트 덕분일 터. 간단히 말해서 아라시야마 몰래 그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대원들은 모두 경험을 통해 진이 어떤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진은 늘 제 자랑스러운 연인에게 심장이 멎을 뻔 한 경험을 하면, 그걸 대원들에게 불평하러 오고는 했으니까. 이러라고 진의 트리거에 아라시야마 부대실 출입 인증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해 준 건 아닌데 말이다. 뭐어,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남이 들었다가는 어처구니 없어 호흡도 잊을 정도의 한심한 언쟁일 터다. 허나 그들은 모두 장본인. 나름대로 싸움을 앞둔 마음가짐으로 그들은 진중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상대에게 질 수는 없었다. 

 

  아라시야마 부대 대원들은 홍보 부대라는 특성까지 덧붙여져 사람과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사교를 이끄는 데에 특출난 재주가 있는 사람들 뿐이었지만, 다들 부러 말을 꺼내지 않고 완벽하게 웃는 얼굴로 진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앉으세요. 진이 들어온 뒤로 대실에 울렸던 소리는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차와 간식을 내온 뒤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각자의 표정을 바꾸지 않고 고스란히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아야츠지와 사토리, 다정하게 무표정한 토키에다, 그리고 뾰로통한 표정의 키토라. 평소라면 부드럽게 말을 걸으며 대화하는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줄 상냥한 사람들이 말한마디 없이 압박하는 공기는 무시무시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진작에 기가 죽어버렸을 분위기였으나 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하고 이겨 온 숙련자였다.

 

"어제 말이야."

 

  그리고 운을 떼는 사람은 늘 진 유이치였다. 불만이 있는 사람은 그였고, 컴플레인을 걸러 온 사람도 그였으니까. 그리고 꿋꿋하게 그 컴플레인에 항의할 사람들은 아라시야마 대원들이었고. 이기는 사람은 늘 달랐지만. 

 

"아라시야마랑 같이 있었는데."
"그렇군요."

"아라시야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진 유이치와 아라시야마 쥰은 연애하는 사이였다. 둘의 관계에 연인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이 붙은 건 정확히 6개월 전. 시작은 우당탕탕 차마 말로 적기에 부끄러운 둘만의 사건사고였으나 작은 눈덩이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눈사태가 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사랑싸움은 보더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대형 사고가 되었다. 그걸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연관 있는 대원들이 이리저리 뛰었던 사건들은 차마 보더 밖에 내보내지 못할 쪽팔린 사건이었다.

  작게는 대원 두 명의 감정싸움이라지만 크게 보면 미래시 사이드이펙트 보유자이자 보더의 기둥 중 한 명과 보더의 홍보부대 대장이자 시노다 파 최고의 병사의 감정적 갈등이었다. 타마코마 지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다른 두 파벌과도 온건한 관계를 취하는 진이나, 시노다 파의 필두나 다름없으나 키도 파인 네츠키 씨의 총애를 받는 아라시야마 둘 다 놓치기 힘든 인재였다. 무엇보다 둘의 감정싸움으로 둘 중 하나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이게 바로 보더가 얻을 수 있는 최악의 결과이리라.

  어처구니 없는 동갑내기 두 사람의 사랑싸움에 더 크게 휘말리기 전에 적당히 휘말린 죄 없는 사람들은 그 선에서 싸움을 무사히 끝내야만 했다. 그걸 위해 몇 사람이 개고생을 하고 낯부끄러운 말을 들어줬어야 하는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으나 카자마가 진저리를 치고 타치카와가 질린 표정을 지었으며 카키자키가 얼굴을 쓸어내리고 아라시야마 부대 대원들 모두가 한숨을 푹 쉬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끝내 라운지 한가운데에서 사과보다도 벌겋게 달아오른 진 유이치가 키쿠치하라도 들릴까 말까 긴가민가한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좋아합니다 고백을 하게 만든 대사건. 그리고 그 말을 용케 들어낸 아라시야마가 태양보다도 찬란하게 웃는 얼굴로, 모든 라운지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성량으로 나도 좋아한다 외치며 진을 끌어안은 바로 그 사건. 아라시야마의 목소리와 미소는 사건이 무사히 끝났음을 모두에게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특히 A급 B급 대원들─은 남의 고백을 듣고 그렇게 진이 빠진 건 처음이었으리라.

  여하튼 두 사람은 바로 그렇게 모두에게 알리며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낯부끄러울만한 연애를 했다. 둘 다 공사는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이었으나 두 사람은 공적인 자리도 사적인 자리도 보더인 사람들이었다. 운이 좋은지 나쁜지 모를 누군가들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걸 본 적도 있었고, 나란히 기대 앉아 있는 것도 본 적 있었으며, 귀에 정담을 속삭이는 것도 본 적 있을 터다. 그보다 심한 건 본 적 없지만, 학창시절의 청춘을 보더에 갈아넣고 있는, 분홍색 부족한 대원들에게 그것만으로도 지나친 자극이었다.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시선조차도 이미 충분히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낯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가끔 타마코마 지부나 미디어 대책실로 익명의 투서가 날아오니 확실했다. 여하튼 두 사람은 그렇게 화려하게 연애 데뷔를 했다. 중요한 아니었지만.

 

  당당하게 아라시야마 부대실 문을 열고 들어온 진은 엄한 눈으로 입을 열어 상세하게 어제 있던 일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출입제한구역 안에 포함된 놀이터 그네에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홍보 부대 대장은 이 미카도 시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한 구역 바깥으로 나가면 너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보더 내부에서 하기 조금 더 부끄러운 연애는 대체적으로 제한 구역에서 이루어졌다. 아라시야마의 방은 그의 가족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진의 방은 타마코마 내부에 있어서 자꾸 지부에 있는 사람들이 신경을 써 줘 민망했으니 별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 넓은 제한구역에는 당연히 보더의 카메라가 들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었고 진과 아라시야마는 모두 그곳을 훤히 꿰고 있었으니 연애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냥 진의 사이드이펙트로 오늘 네이버가 등장하지 않는 방향이 어디인지 찍어 그곳에서 만나면 됐다.

  어두운 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올라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어 은은하게 빛이 들어와 서로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정하게 웃는 모습도 충분히 보였다. 저번에 만나고 이번에 만나기까지 그 사이에 있었던 즐거운 일들을 두런두런 풀어내다가, 문득 그와 연관된 과거의 이야기를 건져내서 줄줄 대화하는 목소리는 조곤조곤 부드러웠다. 마지막으로 상당히 먼 곳에서 총소리와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밤에는 가까운 연인의 목소리만큼이나 먼 곳의 네이버를 잡는 소리도 참 잘 들렸다. 로맨틱과는 살짝 거리가 있는 환경이었으나 진은 충분히 만족했다. 아라시야마가 있고 저 자신이 있고 눈앞에 보이는 미래가 평화롭다. 그 이상 바랄 게 뭐가 있을까? 

 

  그리고 아라시야마는 언제나 진의 예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는 그 이상 바랄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증명해냈다. 대화하던 도중, 순간적으로 어두운 놀이터를 밝게 만들 정도로 환하게 웃은 청년이 그네에서 일어나 진의 앞에 다가왔다. 그네가 앞뒤로 움직이며 삐걱삐걱 작게 나던 소리가 뚝 그쳤다. 따라 일어서지 않고 여전히 그네에 앉은 채로, 진은 어렵잖게 이어질 미래를 봤다. 다가온 아라시야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자신이 고개를 들면 아라시야마가 이마에 키스해주는 미래. 행복한 미래였기에 부끄러운 기색을 참아낸 진은 기꺼이 아라시야마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약간의 기대와 행복을 담아서. 

  그리고 아라시야마는 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마가 아니었다. 진과 눈이 마주친 아라시야마는 작게 웃더니, 허리를 굽히고 눈을 감아 진에게 도장을 눌러 찍었다. 가볍게 소리가 날 만큼의 키스였다. 쪽, 그리고 다시 한 번 쪽. 갑작스러운 키스에 멀뚱히 눈을 뜨고 그 모든 것을 목격한 진은 얼이 빠졌다. 부드럽게 미소짓느라 눈이 예쁜 반달 모양으로 휘더니, 곧 얼굴이 한결 가까이 다가오면서 녹빛 눈은 눈꺼풀 밑으로 숨어버리고 긴 속눈썹과 하얀 이마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입술에 쪽. 살짝 떨어져서 눈을 뜨고 시선이 마주치자 이번에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다시 웃더니, 눈을 뜨고서 쪽. 

 

"아, 아라시야마......!"

 

  두 번의 키스를 머릿속으로 몇 번 굴려보며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진을 보며 아라시야마가 키득키득 웃었다. 어두워서 둘 다 뺨이 얼마나 붉어졌는지 따위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최소한 제 뺨의 열기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밤공기는 꽤 차가웠는데도, 손난로라도 된 것 마냥 따뜻했다. 

 

"그냥 이마에 키스하는 거였잖아!"
"그럴 생각으로 일어난 거기는 했는데."
"왜 갑자기......!"
"싫었어?"
"그건 아니지만!"

 

  이 세상 그 누가 너한테 키스를 받았는데 싫다고 생각하겠어? 자신은 공주님이 아니지만 아라시야마는 그림같은 왕자님인데. 곤란하지만 좋아서 곤란한 거였다. 한 손으로 입가를 몇 번이고 쓸어내린 진이 속으로 열심히 심호흡했다. 아라시야마는 가끔 이렇게 심장에 나빴다. 아니 좀 자주. 하지만 벌써 연애도 6개월 째. 이 정도의 두근거림은 거뜬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진은 농담처럼 말했다. 

 

"나한테 키스하고 싶었어?"
"진이 나를 올려다보는데, 어쩐지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윽, 그건......"
"그래서 그냥 키스하고 싶었어."

  아라시야마가 이번에는 무릎을 굽히고 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내내 그네에 앉아있던 진의 시야가 아라시야마를 따라 내려왔다. 진의 허벅지에 팔을 얹고 그 위에 제 턱을 얹어서 진을 올려다보는 아라시야마는 사랑스러웠다. 다리에 닿아오는 온기도 좋았다. 젠장, 두근거림에 내성이 생길만하면 아라시야마는 이렇게 엄청난 공격을 해댄다. 과연 아라시야마 대장. 화력전에 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남자였다. 진은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냈다. 

 

"실력파 엘리트는 아라시야마 대장을 유혹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
"그래그래."
"하지만 나는 지금 유혹하고 있는 거야."

 

  뭐. 진의 호흡이 뚝 멈췄다. 크게 벌어진 푸른 눈동자가 멍하니 제 연인을 담았다. 영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잠시 피했던 아라시야마는, 곧 눈썹을 내리며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넘어와 줄래?"

 

  멀리서 들리는 네이버를 포격하는 소리와 건물 무너지는 소리가 사실 진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나는 이미 전부 네 거인데. 지금 여기서 더 넘겨줄 것도 없다고. 보더에게 바친 몫을 제외하면 진 유이치는 흔적도 없이 아라시야마 쥰에게 속해버렸는데. 방금 떨어진 심장이 네 쪽으로 굴러간 것 같은데 그거라도 가질래? 머리가 어지럽고 호흡이 가빴다. 심장이 너무 떨려서 당장 실려가도 될 것 같았다. 진 유이치는 당연히 그 유혹에 넘어갔다. 거부할 수 있는 힘도 자격도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네에...... 그렇군요......"

 

  어느 정도 생략과 축소를 섞어 말해준 에피소드를 들은 아라시야마 부대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키토라의 시선은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대략 10도는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은 꿋꿋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일이 있을 때 이런 이유로 이 부대실에 찾아왔다. 

 

"우리 아라시야마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갈수록 심장에 나빠! 이러다 진 씨가 죽겠어! AS 요청합니다, 아라시야마 부대!"

"사토리 이의 있습니다! 우리 대장에게 그런 걸 가르친 건 진 씨 아닌가요! 이쪽이야말로 저희 소중한 아라시야마 씨에게 뭘 가르치신 거에요!"
"진도 이의 있어! 그런 거 안 가르쳤어! 아라시야마가 어디선가 배워 온 거라고!"

"키토라도 이의 있어요! 저희 아라시야마 씨가 진 씨 때문에 배운 거잖아요!"

 

  사토리와 키토라, 진이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했다. 토키에다와 아야츠지는 한 발 떨어진 심정으로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었다. 진심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진은 거진 장난을 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아라시야마 부대의 귀하디 귀한 대장이다. 아라시야마와 진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대원들이 일정 부분 아라시야마와 공유하던 시간을 양보해준 것도 알았다. 그러니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하고 무척 충족하게 행복하다고,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오는 거겠지. 연인의 대원들과 보다 친해지고 싶다는 희망사항도 있었을 것이고. 

  뭐어어, 아라시야마 에프터서비스를 요청하는 것도 아예 빈말은 아닐 것이다. 저들의 대장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탓에 죽을 것 같다고 투정을 부리는 진은 진심이긴 할테니까. 가장 처음 아라시야마 부대실 문을 열고 중얼중얼 아라시야마를 대체 어떻게 키운 것이냐고 물어보는 진은 참 절박해 보였었다. 저희들이 키운 건 아닙니다만 힘내라고 등을 두드려줄 정도였으니까. 그 뒤로 진은 종종 아라시야마 부대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진이 이겨서 대원들이 아라시야마 씨에게 그 부분은 말해두겠다며 두 손 들고 사과한 적도 있었고, 대원들이 이겨서 진이 끄응 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었다. 이제까지 전적은 4승 5패. 

 

  하지만 귀하디 귀한 대장을 보더 전체까지 끌어들여 모셔가지 않았던가? 둘의 사랑싸움에 가장 진하게 휘말렸던 사람들 중 하나가 여기 있는 아라시야마 대원들이다. 둘을 무사히 엮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진이 종종 찾아오는 데에 이 이유도 있을 터다. 고생해서 엮어둔 보람이 있도록 사귀고 있다고 어필해주는 거겠지. 진도 귀한 사람이다만 여기는 아라시야마 부대. 당연히 아라시야마가 더 귀한 곳이다. 진의 편이 되어 줄 아라시야마조차 없다. 그리고 승리보다 패배 카운트가 높은 것도 마땅찮으니, 토키에다와 아야츠지는 이제 절대적인 승리의 주문을 써야겠다는 시선을 교환했다. 

 

"진 씨."
"응?"

  토키에다가 부르는 것과 아야츠지가 찻잔을 내려놓는 건 거의 동시였다. 미래라도 본 것인지, 진이 조금 불안한 듯 아라시야마 부대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 씨, 벌써 그 사건 이후로 6개월 쯤 됐지요?"
"그, 렇지."

"6개월이에요."

 

  토키에다가 날짜를 강조하자 사토리와 키토라가 히죽 웃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두 사람은 대번 이해했다. 진 홀로 이해하지 못해 눈만 멀뚱히 껌벅였다.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는 실력파 엘리트에게, 사토리가 척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부족한 설명을 보충하듯 명랑하게 외쳤다.

 

"아라시야마 부대 에프터 서비스 품질보증 기간은 끝났습니다, 진 씨~! 앞으로는 진 씨가 열심히 해나가 주세요!"

"뭣!"
"저희 대장은 빨리 배우고 잘 배우는 타입이니까요. 진 씨에게 달려 있어요."
"화이팅! 저희 대장이 매력적인 건 뭐 어쩔 수 없으니까요."

"아라시야마 씨를 데려가셨으니 당연히 감수해야죠."
"쓰러질 것 같으면 전화하세요! 토리마루에게 연락해 드릴게요~."

 

  눈을 동그랗게 뜬 진을 응원하며 토키에다, 아야츠지, 키토라, 그리고 다시 한 번 사토리가 말했다. 제각각 승리의 미소를 짓는 아라시야마 대원들을 앞에 두고, 진이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아라시야마 부대. 아라시야마가 키워낸 대원들 다웠다. 이제 저들이 끼어들지 않아도 두 사람이 잘 사귀리라 믿고 있다는 의지표현 앞에 무슨 말을 할까. 이제까지 저보다 나이 어린 대원들에게 신세졌다며 고개밖에 숙일 게 없잖은가. 지는 싸움은 잘 하지 않는 승부욕 강한 진 유이치는 완전히 두 손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 아라시야마 부대 대원들에게 완전히 졌다. 

  대신 진은 웃고 있는 대원들에게 모이라며 손만 조금 휘저었다. 조금 뒤 제 사랑하는 연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 진과 대원들을 확인하고는, 자신만 따돌리고 다섯이서 놀았느냐며 서운한 듯 입을 비죽이는 미래가 보였으니, 이제 그걸 무사히 넘길 방법이나 머리 맞대고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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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진아라] 루트 F

2021. 1. 24. 03:13 from WORLD TRIGGER/NOVEL

소꿉친구 설정 날조 다수 

 

*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너를 기다렸어. 열 아홉 살의 진 유이치는 제 오랜 소꿉친구의 손을 잡고 종종 그렇게 속삭였다. 4월에 태어난 진 유이치는 삶의 첫 숨을 튼 그 순간부터 7월에 태어날 아라시야마 쥰을 기다렸다고. 사실 갓 태어난 순간부터 미래를 보았더라도 갓난아기가 무엇을 알았겠냐만은, 아라시야마는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도리어 필요도 없는 사과를 하며 진의 어깨에 다정하게 머리를 기대거나, 정답게 손을 잡아주고는 했다. 3개월은 그런 사과를 할 만큼 긴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부드러운 온기는 좋으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버릇처럼 또 같은 말을 했다. 줄곧 너를 기다렸어. 나는. 

 

 

  진 유이치와 아라시야마 쥰은 소꿉친구다. 그것도 갓난쟁이 시절 걸음마를 같이 하는 사진조차 있는 진짜배기 소꿉친구. 보더에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정보였다. 딱히 비밀 정보는 아니었으니, 어쩌다 알게 되는 사람이 조금씩 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긴 우정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었다. 애초에 두 사람의 입대 시기나 포지션이 완전히 다른 탓이 컸다. 진 유이치는 보더 상층부 중에서도 진보다 늦게 입대한 사람이 있는 구 보더 소속이었고, 아라시야마 쥰은 4년 전 현 보더가 만들어지던 초기 시기에 입대했다. 아라시야마가 트리온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코나미 키리에조차 있다. 구 보더 소속 대원이며 동시에 아라시야마 쥰의 사촌동생. 양 쪽 모두와 연관이 있는 존재조차 있으니 아라시야마와 진이 소꿉친구였다면 진작에 구 보더 소속이지 않았을까. 

 

  ......다들 다음과 같은 전제를 깔고 그저 진과 아라시야마가 보더에서, 혹은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보더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만나긴 했으니까 아예 틀린 말까지는 아니고. 두 사람도 직접적으로 소꿉친구냐는 물음이 없으면 뚜렷하게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두 사람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만났더라도 언젠가 이런 색으로 물들어 있었을 텐데. 그저 조금 빨리 만나 더 쉽고 빠르게 스며든 것 뿐이거늘. 

 

  그러니 오늘도 진 유이치는 청명하게 웃는 아라시야마 쥰의 미래를 응시하며 안심했다. 오늘도 너는 찬란하고, 내 미래의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모두 눈이 부신다. 네가 사랑하는 세상이 안전하니 네가 울 일은 없고, 네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안전하니 네가 괴로워할 일은 없고, 무엇보다 네가 안전하다.

  진 유이치는 그 사실에 다시 한 번 만족했다. 

 

 

 

 

  진 유이치는 제 기억이 존재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아라시야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이름도 제대로 없었던 미래시의 사이드이펙트와 제 삶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던 시기라고 기억한다. 울고, 고민하고, 말했다가, 혼나고, 싸우고, 다시 한 번 울고, 또 새로운 미래를 보고, 머리가 아프고, 눈도 아프고, 괴로워서 토하고...... 그 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억들이었지만, 그 사이 단 하나. 아라시야마만큼은 선명했다. 옆에서 같이 울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혼나고, 같이 싸우고 자신을 끌어안아 달래주던 기적같은 소꿉친구. 조막만한 손발을 가진 어린 아이면서도, 아라시야마는 당차고 씩씩한 꼬마였다. 우는 진을 제 등 뒤로 숨기고, 유이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대신 화를 내 줄 수 있던 꼬마. 

 

  그런 진이 아라시야마에게 심정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의지하게 된 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정의롭고, 다정하며, 늘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친구. 아라시야마도 어렸던 만큼 지금의 진이 찬찬히 생각해봤을 때 서툴렀던 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동갑내기의 입장으로 봤을 때 어린 시절 아라시야마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만화에서 나오는 히어로 같았다. 언제나 진을 지키려고 해 주는 진만의 히어로. 저에게 알 수 없는 걸 보여준 하늘이 그나마 베풀어준 저를 위한 존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생각은 훨씬 더 견고해졌다. 하얀 괴물이 엄마를 데려가버렸어. 나한테 남은 건 쥰 밖에 없어. 진은 그리 외치며 몇날 며칠을 울며 보냈다. 정체 모를 희고 커다란 무언가에게 살해당한 어머니를 저 혼자 목격한 이후로 이리저리 노력해보았지만,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겠는가. 믿어주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아라시야마 뿐이었다. 어머니도 제 아들이 미래를 본다는 것을 알아 진의 말에 불안해하긴 했으나,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나갈 수밖에 없는 몸이었다. 무엇보다 언제나 뚜렷했던 진의 미래시와 달리 괴물이, 악마가 엄마를 공격한다는 진의 말이 평소보다 훨씬 모호한 탓도 있었다. 트리온병의 존재를 모르던 시절, 끝내 어머니는 트리온병에게 습격당해 차가운 몸으로 돌아왔다. 진은 진정 혼자가 되었다.

 

  뚜렷한 일가친척도 없는 진을 받아준 건 옆집에 사는 아라시야마네 집이었다. 갓난쟁이 시절부터 소꿉친구로, 형제처럼 지낸 입장이었으니 아라시야마 가족으로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진이 아라시야마 집의 군식구로서 조금씩 적응해나갈 무렵, 진의 인생에 새로운 사람이 접촉했다. 구 보더의 사람들. 모가미 씨. 진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그 시절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며 말했던 진의 발언을 건너건너 들어 한 발 늦게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하얀 괴물, 악마, 그리고 실제로 살해당한 어머니. 진은 몰랐지만 아마 트리온 반응 역시도 있었겠지. 그들은 진 유이치에게 사이드이펙트가 있을 것까지 짐작하며 무척 조심스럽게 접촉해왔다. 진도, 그들이 싫지는 않았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의지하던 아라시야마 쥰이 있는 진 유이치는 보더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저 길도 싫지는 않아. 어쩌면 행복도 있겠지. 하지만 쥰이 있는데 힘들게 싸워야하는 길을 가고 싶지 않아. 엄마처럼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싸우는 건 무서워. 행복하고 평범하게 있고 싶어. 쥰의 곁에서. 

 

  보더로 들어오라며 꾸준히 부탁해오는 사람들에게 진은 미래의 정보만 살짝 전달해주는 미약한 도움만 건내주고 꾸준히 거절했다. 그는 싸움과 친하지 않았고, 스스로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특별한 무언가보다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미래에 역시 쥰과 함께 있는 미래보다 좋은 미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안이했던 진 유이치의 세상이 다시 한 번 깨졌다. 아라시야마 쥰이 살해당하는 미래를 보았다. 최악의 미래였다. 

 

 

  최악이 갱신됨에 따라 최선의 미래도 바뀌었다. 아라시야마가 살아있다는 기본 전제가 없다면 진의 세상도 흔들린다. 우선 그가 살아남아야했다. 모든 최고의 미래 위에 생존이 올라갔다. 그가 죽지 않을 미래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건, 보더와 손을 잡는다면...... 진 유이치가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니, 못 한다면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보더와 함께하는 건 아라시야마가 살아가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최소조건이었다.

  보더의 핵심 전력, 마더 트리거라고 칭해도 부족함 없을 존재. 진 유이치가 보더에 합류한 이유는 그토록 사소했다. 내 친구가 죽지 않을 미래가 필요해. 사소하고 이기적인 욕망이었다. 

 

  

 

 

  쥰 쨩이 죽는 건 싫다며, 엉엉 우는 얼굴로 모가미 소이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뭐든 할테니 이걸 바꿔달라 울던 어린 진 유이치는 늘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보더의 실력파 엘리트로 자랐다. 아라시야마가 죽는 미래를 무사히 넘기고, 대규모 침공을 겪고, 보더의 규모가 커지고, 아라시야마도 보더에 입대하고...... 그 수많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진 유이치의 지침은 변하지 않았다. 네가 살아서, 행복한. 

 

  이기적인 지침이나 네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이타적으로 굴어야 하니 결과적으로 눈 없는 나침반은 평화를 가리켰다. 오늘도 네 미래는 안전하고, 나는 너를 위한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그럼 너는 나를 끌어안으며 무리하지 말라 속삭여준다.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행복 속에서 진은 만족했다. 

 

"쥰."
"응?"
"너무 좋아."

"으음? 나도 좋아해."

 

  그래, 오늘도 세계는 완전하다. 그러니 내일의 세계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게 팔을 벌려 주는 아라시야마를 기꺼이 끌어안았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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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키자키 쿠니하루는 제 친구들의 연애에 참견을 하는 성정은 아니었으나, 가끔 문득 찾아오는 의문에 잠시 침묵하며 친구들의 모습을 응시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 시선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받는 사람들조차 의문을 느끼지 않을만큼 차분했으나, 사람 시선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두 친구들은 깜짝 놀랄 만큼 빠르게 카키자키의 시선을 눈치챘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대로 요령껏 은밀하게 시선의 주인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어렵잖게 저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카키자키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고요했던 시선 속 저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미약한 무언가를 사르르 녹여버리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 안에 담긴 신뢰가 멋쩍으리만치 기꺼워 카키자키는 늘 별 것 아니라며 웃어 넘기고는 했다.

 

  진 유이치와 아라시야마 쥰은 어느 쪽이든 보더 본부 내에서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들은 남의 시선에 예민한 것과 별개로 무척 무딘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시선을 받고 있다는 걸 눈치채는 것과 그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으니까. 아라시야마 쥰은 태생적으로 저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찬란하게 웃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고─그 특징 역시 그가 홍보부대로 선택받은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진 유이치는 자신이 감정이 담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그 시선에 하나하나 반응했다가는 진작 실려갈 터다. 

  여하튼 그들은 그렇게 민감하면서도 무딘 사람이었으나 특별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카키자키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두 사람의 소중한 벗이자 보더에 몇 없는 동갑내기 친구로 카키자키는 아라시야마와 진의 연애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들은 사람이기도 했다. 

 

  너희들이랑 같이 있는 일이 많으니까, 너희는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제 연애에 부끄러움 한 점 없는 아라시야마는 늘 그렇듯 빛나는 미소로 제 삶을 진과 겹쳐두었다는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도리어 걱정한 건 함께 그 사실을 듣게 된 세 사람 쪽이었다. 아라시야마 너, 우리한테 그 사실 말하는 거 진이랑 상담한 거 맞지? 하고 걱정스럽게 되물었던 카키자키와 그에 공감하며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던 유바. 아라시야마라면 몰라도 진은 그다지 공개 연애를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언제 사귀었고 언제 헤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제 사생활을 철저히 숨기는 쪽이라고 생각했으니 별 수 없는 걱정이었다.

  ......아니, 두 사람이었던가. 이코마는 걱정하는 두 사람과 달리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이더니 축하한다며 박수를 쳤으니. 아무튼 진심 어린 염려를 건내들은 아라시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럼, 진이랑 이야기해서 말해주는 거야. 그 말을 듣고 그제야 두 사람도 안심하며 축하의 말을 할 수 있었지만. 

 

  하지만 공공연한 공개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을 보게 된 지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도 카키자키는 가끔 지금 같은 의문을 느끼고 두 사람을 보았다. 동갑내기 친구들, 같은 부대 사람, 같은 지부 사람, 직속 상사......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정보를 알린다고 한다지만 혹시 두 사람 사귀어요? 라는 질문에 부정을 하지 않으니 정보는 암묵적으로 빠르게 퍼졌다. 아는 사람만 안다지만 그 정도면 다 아는 연애. 두 사람은 옆에서 보기에 꽤 담백한 연애를 했으나 군데군데 두 사람의 깊은 사이를 티내는 힌트가 있었다. 최대한 휴일을 같이 맞추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거나, 비슷한 색의 옷이 늘어난다거나, 예전에 같이 가 본 식당의 이야기를 하거나, 똑같은 삼푸 냄새가 나는 일 따위의. 눈치가 빠르면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는 사이. 공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사람답게 애정 어린 시선을 교환하거나 손을 잡는 일을 본부에서 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끼리 밥집에 몰려가 웃고 떠들 때에는 종종 서로를 향해 특별하게 웃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 정말 너희 연애를 하는 거구나. 그렇게 깨닫고 어쩐지 저까지 조금 수줍어질 정도로. 

 

  하지만 진 유이치는 왜 두 사람의 사이를 공인한 걸까?

 

  직접 묻기에는 지나치게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어 홀로 가끔 떠올리다가 지워버리는 의문이지만, 두 사람의 친구인 카키자키 쿠니하루는 아주 드물게 그런 생각을 했다. 

  

  이계에서 온 침략자와 싸운다는 어느 공상과학소설 못지않은 일을 현실로 겪고 있는 보더는 성별에도 크게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자기들도 싸우면서 목이나 팔다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날아가고, 제 몸은 커녕 집보다도 커다란 괴물을 몇 번이고 쓰러트린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동성인지 이성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리기 마련이었다. 어린아이들을 전쟁에 불러온 만큼 상층부에서 최대한 안전을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끝내 만약의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에서 일하는 그들은 제 감정에 솔직하고 그만큼 타인의 감정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 처음에 그렇지 않더라도, 위에서 그렇게 여기니 아래까지도 그렇게 여기게 되었다. 

 

  아라시야마 쥰이 둘 사이를 공인한 건 그다지 의외롭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에 부끄러움이 없고, 제 연인이 누구인지 모두에게 밝히는 사실을 기꺼워하고 기뻐할 사람이었다. 사실 보더가 바깥만큼 동성애에 미묘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아라시야마는 당당했을 거다. 하지만 진은 다르다.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아라시야마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라도 입을 다물어버릴 남자라고. 카키자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을 잠시 떠올렸다. 미래를 보는 특별한 사이드이펙트의 주인. 그렇기에 더더욱 제 감정에 조심스럽고 한 발 내딛기에 신중한 친구를. 

 

  수많은 '만약'을 직접 보고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내다보는 권리를 쥐고 태어난 청년. 아라시야마가 진심인 만큼 진도 진심일 터. 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동성의 남성을 두고 과연 고백을 할까? 아라시야마 쥰이 아니라 익명의 남성 누군가로 상상해도 고개가 갸웃 기울어질 문제건만 하필 그 사람이 아라시야마 쥰이라면? 보더 중 그 누구보다도 대중적이고, 누구보다도 인기 있으며, 누구보다도 보더가 아닌 사람들의 눈 앞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진은 자신이 아라시야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관계 없이 온전히 아라시야마의 미래를 위해 제 사랑을 포기할 남자였다. ......카키자키는 그렇게 해석했었다. 연애 소식을 주변에 넓게 알린다는 건 그만큼 아라시야마가 동성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름 모르는 대중에게 퍼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아라시야마가 그로 인해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을 확률도 동시에 높아진다는 뜻이고 말이다. 만약 아라시야마가 제 잘못이 아닌 일로, 그저 진과 연인관계라는 보잘것없는 문제로 손가락질을 받을 확률이 1%라도 존재한다면 진은 그 만약을 도저히 눈감지 못해 아라시야마를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만약의 만약 진이 사랑을 선택해서 연인이 되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두 사람만의 비밀 연애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틀렸나보네. 카키자키는 완전히 오답을 골라버린 제 자신에게 소소한 유감을 느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이런 의문을 계속 품고 있는 것도 우스우니 이제 훌훌 털고 잊어버릴 생각이었다. 둘은 잘 사귀고 있고, 최소한 남의 눈에 띌 정도로 싸우는 일 한 번 없이 지나치게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있으니 의문은 묻어버려도 별 문제 없으리라.

  마지막 물음표에 지우개를 가져다대며 카키자키가 고개를 들었다. 이코마와 아라시야마가 주거니 받거니 만담같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유바가 이마를 짚고 두 사람에게 인정사정없는 태클을 걸고 있었다. 뭐 태클에 아랑곳할 녀석들이 아니라 도리어 유바가 놀아준다는 사실에 신이 난 것 같지만...... 어라, 진은 어딨지?

 

"나 여기 있어, 카키자키."

"우왓. ......뭐야, 소리없이 오지 말라니까."

"날 찾을 것 같길래 미리 와 있었지."

"같이 놀고 있었다면 안 찾았을걸."

 

  진이 키득키득 웃으며 카키자키의 옆자리에 벽을 기대고 섰다. 그리고 사르르 그 푸른 눈을 접어 카키자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진의 사이드이펙트는 마음을 읽어내지 않지만, 이럴 때의 진은 꼭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오랜 벗으로서 카키자키는 조금도 움츠려들지 않은 척, 뻔뻔한 얼굴을 가장해 낼 수 있게 됐지만. 

 

"왜?"
"카키자키가 나한테 궁금해하는 게 있는 거 같아서."

"......이제 안 궁금해."

"아니, 대답해줘도 괜찮아. 진짜로."

 

  카키자키가 고르지 않은 미래선 어딘가에서는 직접 물어보는 미래도 있는 모양이었다. 진은 여우처럼 방글 웃었다. 저 얼굴이 어쩐지 얄미워서 카키자키는 그를 잠시 흘겨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원하는 흐름으로 넉넉하게 판을 짠 진 유이치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굳이 거스르고 싶을 정도로 카키자키는 반항적이지 않았다. 타치카와나 카자마라면 이 얄미움을 원동력으로 어떻게든 흐름을 비틀어내겠지만. 

 

"......그래서, 답이 뭔데?"
"그게 말이지."

 

  진이 살짝 소리를 죽이고 조금 떨어진 세 사람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그 사이에 있는 아라시야마를. 카키자키도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라 아라시야마를 보았다가, 진을 돌아보았다. 진은 보더에서는 드물게도 아라시야마를 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내 사이드이펙트는 미래를 보지만, 가장 최선의 미래를 고르는 건 내 사이드이펙트가 아니라 나잖아?"
"그렇지."

"최선인지 최악인지 분류하는 건 결국 나야."

 

  진 유이치에게 있어서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카키자키는 조금 걱정스럽게 진을 보았다. 최선부터 최악까지 더 좋은 미래와 덜 좋은 미래를 고르는 사람은 진이다. 그 누구도 진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보더의 모두가 진의 선택을 존중하고 신뢰했다. 자신이 선택한 최선이 있더라도 그 최선의 미래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없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무게를 짊어지는 사람은 모두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결국 진 유이치 혼자일 뿐인지라, 카키자키는 저의 괜한 의문이 진의 상처를 긁는 게 아닐까 안절부절 못하는 기분에 사로잡힐 뻔 했다. 그 전에 진이 방긋 웃는 얼굴로 카키자키를 응시하지 않았더라면. 

 

"특히 생사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최선이나 차선같은 거 구분하기 힘들잖아. 그치?"
"......그렇겠지."

"그래서 머리가 터질 만큼 생각하고, 눈이 빠질 만큼 들여다봤어. 아라시야마의 최선의 미래."

 

  진이 다시 아라시야마를 응시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아라시야마를.

  그를 짝사랑한지 몇 년 째, 어느 날부터 아라시야마 쥰에게 고백받는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기쁨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이 진 유이치를 사로잡았다. 그 이후 제 눈에 보이는대로 조심스럽게 피하기 시작하니 절대 고백을 피할 수 없는 미래가 보였다. 그 때부터 진은 필사적으로 아라시야마의 미래를 찾아다녔다. 나랑 사귀는 미래, 나한테 거절당하고 오래 독신으로 사는 미래, 거절당하고 다른 사람이 사로잡아 가는 미래, 사고로 다치는 미래, 아니 이 미래는 뭐야. 조심해야지. 몇 번이고 다시 고백해오는 미래, 누군가와 결혼하는 미래......

  별처럼 많은 미래가 아라시야마의 앞에서 징검다리처럼 총총히 놓여 제 식대로 빛나고 있었다. 모든 아라시야마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나름의 삶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진은 이 이상 더 노력할 수 없을 만큼 사이드이펙트를 날카롭게 갈고닦아 미래를 보고 또 봤다. 

 

"사실 나도 이제는 모르겠어. 이게 내 욕심으로 고른 미래인지, 아니면 진짜 최선인지......"

 

  그 많은 미래 속에서, 내 곁에 있는 아라시야마가 제일 행복해 보였다. 진 유이치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이마를 맞대고, 너를 믿노라, 너도 나를 믿어달라 믿어주는 아라시야마가. 아라시야마 쥰은 어떤 미래에서도 그 나름의 행복을 만들어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개중에서도 진의 옆에 있는 그가 유독 행복해보였다. 부드럽게 달아오른 뺨과, 한낮의 나뭇잎 사이 햇빛처럼 빛나는 눈. 새까만 머리카락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그 모든 모습이. 아직 진의 눈에 보이지 않을 헤어져버리는 미래나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릴 제 자신을 향한 공포까지도 누그러트릴 정도로. 멀고 먼 미래의 어드메에 있을 괴로움 따위는 한 점도 없을 정도로. 

  사실 진실로 진 유이치는 제 선택에 아직까지도 미약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아라시야마를 사랑하는 탓에 눈을 감고 미래를 보았던 게 아닐까? 사실 좀 더 행복한 미래가 있었는데, 그걸 일부러 보지 않고 넘긴 게 아닐까? 사실 다른 미래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행복해했는데, 그걸 저 좋을대로 해석한 게 아닐까?

 

  끝내 진은 아라시야마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그의 연인이 되었고, 아라시야마가 가장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미래를 따라 친구들에게 제 연인을 밝히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아라시야마의 손을 잡을 권리마저 얻었다. 그리고 아라시야마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선물했다. 아라시야마는 그 사실에 기뻐했고 진도 아라시야마의 기뻐하는 얼굴에 기뻐졌으나 그는 여전히 헤어나올 수 없은 얕은 늪에 잠겨있었다. 네 사랑의 최선은 나였을까? 나는 정말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너의 최선을 고른 게 맞을까? 

  참참히 가라앉는 눈으로 제 연인을 보는 진에게, 카키자키는 기가 차서 말했다. 

 

"그야 당연히 최선이겠지. 네가 고르고 아라시야마가 고른 미래인 거잖아."

"......"

"두 사람의 인생을 두 사람이 골랐는데 그 이상의 최선이 어디 있겠어?"

 

  가끔 바보라니까. 사랑같은 건 원래 욕심으로 하는 거라고. 저도 뚜렷한 사랑을 겪어본 적 없으면서, 설명하듯 그리 말하는 다정한 벗을 보고 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이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선이라 말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카키자키가 그렇게 말해준다는 걸 내 사이드이펙트가 이미 말하고 있었어."

"그렇겠지."

"하지만 역시 실제로 듣고 싶었어."

 

  이제는 아라시야마를 놓아줄 수 없는 걸. 체념과 애정을 담아 아라시야마를 녹아내릴 듯 응시하는 진의 옆모습을, 카키자키는 힐긋 보았다. 진은 연인으로서 아라시야마를 보고 있지만 카키자키는 옛 대장이자 오랜 친구로서 아라시야마를 본다. 카키자키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진이 볼 수 있는 것처럼, 진이 보지 못하는 부분도 카키자키는 볼 수 있었다. 그러니, 한 번 오답을 고르기는 했으나 해답지를 보니 꽤 훌륭한 추가점수를 받을 수는 있는 우수 학생 카키자키 쿠니하루는 다시 한 번 당당하게 제 답을 속으로 속삭였다. 이 눈 먼 사랑을 하는 제 친구를 향해서. 

 

  바보. 너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분명 이제 아라시야마도 널 놓아주지 않을 걸. 널 제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저 녀석이 알아버렸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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