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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상 사쿠마 레이는, 매년 초 그의 동생에게서 한 폭의 그림을 받곤 했다. 하얀 캔버스 속에 유려하게 그려진 젊고 생기 넘치는 사람.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림 속의 그는 조금씩 자라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로 시작하여, 오랫동안 소년이었고, 지금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형제이기에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눈, 빛을 표현한 붓칠 하나조차 사랑이 묻어 있었다. 이 그림은 그의 소중한 남동생이 집중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향이 공기를 기묘하게 맴돌았다. 훌륭한 작품이었다. 레이는 올 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그림 속의 청년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내며 그를 위해 비워놓은 벽의 빈자리를 채워 넣었다. 한 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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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재능 있는 유능한 화가. 거기에 덧붙여 외형마저 아름다운 화가는 주목받기 마련이었다. 사쿠마 리츠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미술상 중 톱으로 손꼽히는 사쿠마 레이의 하나뿐인 혈육이라는 점까지 합쳐져 리츠는 그 나이 또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화가였다. 미술계의 평가도 좋았고, 몇 번의 전시회도 성황리에 끝났다. 마치 백 년은 더 산 것처럼 연륜이 필요한 여러 가지 기법을 폭넓게 사용하는 그가 가장 잘 그리는 그림은 물감이 겹겹이 칠해진 밀도 높은 그림이었다. 수채보다는 유화에 능했고, 자연경관이나 풍경보다는 사람을 그리는 것을 즐겼고, 주의 깊은 관찰로 나오는 섬세한 표정묘사는 일품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라고 해야 하나, 고집이 있다고 해야 하나.’
평론가 중 누군가는 간단히 평했다.
‘편식이 심해.’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그의 그림을 딱 한 번만 둘러본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사쿠마 리츠는 종종 거리의 사람들이나 자화상, 제 혈육을 그리기도 했지만 늘 함께하는 모델은 언제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쿠마 리츠의 뮤즈였다. 시간의 흐름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사람. 수천 점이 넘는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 명의 소년. 거리에서 화가 본인이 발견해 데려온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성도 없는 거리의 아이였다. 조각상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들고양이같은 녹색 눈동자와 날렵한 몸매가 매력적이었다. 예술가 한 명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끔은 본인의 얼굴에 대고 무례한 소리를 하는 자도 있었다.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그리시지요. 출신도 모르는 더러운 자를... 리츠는 그 내려다보는 시선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미술상 형을 생각하여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런 인간들을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마 군의 가치도 모르는 바보들이야. 집에 돌아와 이불에서 뒹굴거리며 젊은 화가는 그리 평했다. 잠시 꾸물거리다가 저의 모델을 품에 끌어안았다. 운동을 즐기지 않아 얇게 말랐지만 부드러운 리츠와는 달리 단단하고 건강한 몸이었다. 동시에 몹시 따뜻했다. 리츠는 그 체온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 굳어있던 표정이 나른하게 풀렸다.
“걱정 마, 리츠. 신경 안 쓰니까.”
“응. 착하다, 마 군.”
쓰다듬어줄까? 아니면 예뻐해 줄까? 아이 다루듯 어르는 목소리에 마오가 엷게 미간을 좁혔다. 마오가 리츠보다 어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 역시도 성인의 나이가 되었건만, 리츠는 가끔 마오를 처음 만났던 일곱 살 배기 어린아이처럼 대할 때가 있었다.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불평하는 마오를 보며 리츠가 슬쩍 미소 지었다. 이런 식으로 어린 아이 취급을 하면 마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마 마오는 리츠와 본인의 실제 나이 차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이 그 안에 묻혀있는데. 물론 말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또한 리츠는 제대로 마오를 어른으로 보고 있었다. 아이 취급을 하고 있었다면 이런 감정을 품을 일은 당연히 없었을 테니까. 리츠의 입가에 남몰래 감정이 묻은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문득 검지손가락이 마오의 얼굴선을 가만히 훑었다. 담백하게 쓸어내려지는 손길에 마오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리츠에게 고정시켰다. 몇 번 눈을 깜박인 리츠의 시선이 조금 가라앉았다. 장미색에서 루비색으로 변하는 차이였다. 장난꾸러기에 응석쟁이 어린아이에서 일을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그 손길의 기저에 깔린 것은 애정이었다. 마오의 얼굴에서 목선을 타고 몸으로 흘러내리는 손길에 마오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가 곧게 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그의 모델이자 뮤즈로 일했다. 감정이 절제된 손길정도는 별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마오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저도 리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조금 근육이 붙은 마오의 팔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리츠는 아름다웠다. 사실 나 대신 자화상을 몇 백 점 그리는 쪽이 더 잘 팔릴 것 같은데. 마오는 여러 번 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마오도 잘 생긴 미청년에 속했지만 리츠는 그야말로 명화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마오가 화가이고 리츠를 모델로 착각하는 사람도 적잖았다. 그럴 때마다 리츠는 점잖게 오류를 고쳐주었지만, 뒤에서는 마오에게 투덜거리고는 했다. 마 군의 아름다움도 모르다니, 바보 아냐? 그런 식으로.
“마 군, 그림 그릴래. 준비 해 줘.”
“지금 당장? 알았어.”
리츠의 시선이 마오의 얼굴에 꽂혔다. 리츠는 꼼꼼히 마오를 살피다가 마지막은 꼭 눈을 응시했다. 언젠가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리츠는 간단히 답했다. 마오의 외모는 언제나 최고로 아름다우니 그 순간에 빛나는 녹빛의 색채를 보고 그림을 결정한다고. 오늘의 색은 그릴만한 가치가 느껴진 모양이었다. 정작 마오 본인은 모르는 차이였지만 리츠는 기민하게 사소한 것을 잡아내고는 했다. 화가의 직감일지도 몰랐다. 그림으로 완성된 화폭 속의 이사라 마오를 보면 그제서야 마오는 느즈막히 깨닫는 것이었다. 이 때, 이런 감정을 가졌고 리츠에게는 이렇게 보였구나. 하고. 리츠의 그림 속의 마오는 주로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수많은 얼굴을 보여줬지만 리츠는 행복에 잠긴 이사라 마오를 특히 좋아했다. 마 군은 언제나 예쁘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지만 사소한 행동이 다르다는 걸 리츠는 알고 있을까. 분노보다는 기쁨을 좋아했고, 슬픔보다는 즐거워하는 마오를 좋아했다. 그건 굉장히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서, 마오는 가끔 리츠의 그림을 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 사실을 리츠는 아마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영 몰랐으면 했다.
눈을 감은 리츠가 이미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처음에는 잠드는 거 아니냐고 부던히 의심했던─눈을 감고 이불에 얼굴을 묻는 것을 보며 마오가 캔버스를 꺼내고 물감을 준비했다. 이미지를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대로 오래 두면 실제로 잠들어버리니 서둘러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렸고, 그러면 한동안 토라져버리니까. 처음에는 낯선 준비에 쩔쩔맸지만 지금은 눈 감고도 해낼 수 있었다. 자주 사용하는 물감에 파레트, 붓도 여러 종류. 유화 특유의 기름 냄새가 번졌다. 리츠가 가장 애용하는 자리에 의자배치까지 끝낸 뒤 가장 시선이 닿기 편한 장소에 앉은 마오가 리츠를 불렀다. 리츠, 준비 다 됐어. 짧은 부름에 리츠가 눈을 반짝 뜨더니 곧장 자리에 앉았다. 붓을 잡고, 의자에 앉아있는 마오를 한 번 본 뒤 곧장 붓을 놀렸다. 순백의 캔버스에 금세 색채가 번져 올랐다.
처음에는 몇 번이고 끊임없이 마오에게 시선을 던지던 리츠가 느릿하게 캔버스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오가 힐긋 시계를 응시했다. 한 시간. 이 시간을 넘으면 얌전히 앉아있는 마오는 없어도 괜찮았다. 리츠가 빚어내는 형상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필요한 거 아니야? 어릴 적 그리 물었던 적 있었지만, 리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까, 비는 시간은 마 군 하고 싶은 걸 해. 한 시간이면 충분해. 마오는 리츠의 모델이었기에 다른 화가들은 어떤지 전혀 몰랐지만, 리츠가 그리 말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정해진 시간을 채운 마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화 냄새가 맴도는 작업실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이들과 한 약속이 있었으니 리츠와 함께 먹을 점심을 준비하고 외출 준비를 해야 했다. 마오의 걸음걸이가 조금 급했다.
리츠는 우아한 귀족 도련님 같은 얼굴과 달리 꽤나 편식을 했다. 못 먹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대한 안 먹으려 들었다. 최대한 조금 익힌 고기를 즐겼고 와인 종류를 좋아했다. 낮술은 안 된다는 마오의 철칙에 따라 해가 있는 시간에는 포도나 토마토 주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덜 익은 수준의 고기를 오래 씹어 먹는 것도 좋아했다. 덕분에 마오의 식성도 바짝 익히는 것보다는 살짝 익히는 쪽에 가까웠다. 리츠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생성된 식성이었다. 마오는 아침에 사 온 빵을 썰고 버터를 바르고 베이컨과 감자를 구웠다. 부엌에 고소하고 지글거리는 내음이 퍼졌다. 마오는 리츠를 위한 주스와 본인이 마실 커피까지 내린 뒤 작업실에 있는 리츠를 찾아보았다. 붓끝을 씹으며 캔버스를 노려보는 리츠가 보였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츠, 어디가 막혔어?”
“이 부분 색이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 지 고민 중.”
캔버스를 노려보다가 파레트를 한참 응시하는 리츠를 보며 마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곁에 머물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도 많고, 미술 상식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지만 결정적으로 마오는 화가가 아니었다. 리츠의 그림에 무언가 조언을 해 줄 수는 없었다. 마오의 눈에 리츠의 그림은 전부 아름다웠으니. 그렇기에 마오는 다정하게 리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제야 리츠가 파레트에서 시선을 때고 마오를 올려다보았다.
“점심 다 됐는데, 지금 먹을래? 아니면 넣어둘까?”
“마 군 오늘 나간다고 했었지?”
“응. 점심 먹고 나가야 해.”
“그럼 같이 가.”
리츠가 단박에 붓을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을 나서는 리츠를 마오는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자신의 뮤즈가 되어 달라며 손을 내밀었던 그 날 이후 리츠는 마오의 많은 것을 보장해주었고, 후원해주었고, 도와주었지만 마오의 시간만큼은 소유하고 싶어 했다. 무엇을 하던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상황에 처한 이사라 마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그런 리츠가 부담스러웠던 것도 같지만, 이제는 자신을 따라나서지 않는 리츠를 보면 그게 훨씬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이 리츠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게 될까 겁이 났다. 익숙해져 버리는 수준을 넘어 마오에게도 리츠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해진 결과였다. 마오가 잠깐 시선을 미완성인 그림으로 던졌다가,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점심식사는 언제나처럼 오순도순 했다. 바싹 구운 감자를 우물거리던 리츠가 손가락으로 포크를 돌리며 장난을 쳤다. 솜씨 좋게 하얀 손가락 사이를 오가는 포크를 보며 마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리츠. 마오가 타이르듯 부르는 목소리에 리츠가 턱을 괴었다.
“바로 애들을 보러 갈 거야?”
“아니. 성당에 들렸다가 가려고.”
마오의 말에 리츠가 짧게 미간을 좁혔다가 풀어냈다. 마오는 리츠가 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종종 성당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마오를 대단히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마오의 목소리에 감탄하고 칭찬해도 리츠는 마오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칭얼거렸다. 마 군은 나만 믿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왜 신을 믿고 그래. 흘리듯 불평하는 리츠의 목소리가 마오의 귀에만 언뜻 닿았다가 금방 사라졌다. 사실 리츠의 그림만 봐도 그랬다. 수많은 화가들이 한 번쯤은 그리는 소재를 리츠는 손대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도, 예수 그리스도도. 언젠가 딱 한 번 물었을 때 리츠는 아주 개구지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내가 그리는 것만큼 불경도 없을 걸.’
그 뒤로 마오도 리츠에게 이 소재를 꺼내지 않았다. 리츠도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으로 묻혀 버린 소재였다. 다만 성당이라는 이야기에 내심 못마땅함을 표현하는 리츠를 보며 미안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오늘은 뭐 할 거야?”
“글자랑 간단한 숫자 계산.”
마오가 바게트를 삼키며 대답했다. 길거리에서 자라 수많은 동생들을 데리고 있었던 마오는 기적적으로 리츠를 만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곳에는 마오와 똑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많았다. 마오는 그 아이들을 돕는 방법으로 교육을 택했다. 그렇기에 리츠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신뢰를 쌓아 올렸다. 지금도 거리에 나서면 마오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웃어주는 아이들이 많았다. 마오는 그에 크게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리츠는 그런 마오의 행동에 같은 보람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마오가 좋아하고 예쁘고 행복하게 웃어주니 리츠도 좋아했다. 간단한 원리였다.
“글씨는 리츠가 더 잘 쓰니까, 애들한테 예시로 보여주게 종이에 알파벳 좀 써 줘.”
“나 엄청 비싼 인력인데, 부려먹는 거야, 마 군?”
“아니지. 도와달라는 거잖아. 부탁할테니까, 응?”
“흐음... 뭐, 마 군이 원한다면야......”
리츠가 대충 근처에 있는 종이를 끌어와 깃펜으로 휘갈겼다. 마오도 오래 글씨 연습을 해서 단정하게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리츠만큼 귀족적인 글씨체는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종이를 채운 알파벳들을 보며 마오가 짧게 감탄했다. 대단하다, 리츠. 마오의 말에 리츠가 수줍은 듯 웃었다. 리츠는 마오가 무심코 하는 칭찬에 약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순수한 감탄을 좋아했다. 금세 의기양양해져서 조금 더 칭찬해 달라고 어리광을 부려 오기는 했지만.
점심식사를 끝내고 제대로 정장을 갖춘 뒤 두 사람은 집에서 나왔다. 거리는 한산했다. 11월 중순, 초겨울이 되면서 다들 집을 잘 나서지 않았다. 날이 추운 탓이었다. 툭 하면 눈이 내리기도 했다. 길이 쉽게 더러워지니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면 나오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오늘의 하늘도 구름 가득 낀 흐린 하늘이었다.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 번 내리친 리츠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눈이 곱게 접혔다.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이 기분 좋아보였다.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잠자는 것을 즐기는 리츠는 추운 날씨를 좋아하지 않아서 툭 하면 이불 속에 파고들어버렸지만, 볕이 들지 않는 구름 낀 날씨는 좋아했다. 파란 하늘 아래의 리츠는 정말 아름다운데도 해가 하늘에 떠 있으면 어지간해서 집 밖에 한 발도 내딛지 않아서 가끔은 아쉽기도 했다.
리츠와 마오의 걸음 속도는 거의 같았다. 평소 리츠가 조금 더 느긋하고 마오가 조금 더 급했지만 둘 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맞췄다. 먼저 말해뒀던 것처럼 성당으로 향하는 길을 밟던 도중 리츠가 문득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형한테 편지가 왔었어.”
“그 사쿠마 씨?”
마오가 짧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름은 많이 들었다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리츠가 많이 좋아하는 형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다. 아주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도. 리츠와 퍽 닮았다고 했고, 미술상으로써 명성도 드높았는데 리츠는 마오를 그와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 마오는 오랫동안 리츠의 뮤즈이자 모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건 마치 제 보물을 숨기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태도와 닮아 있었다. 레이는 마오를 만나게 해 주지 않으려는 리츠의 모습을 보고 그저 귀엽다 웃어 넘겼다고, 리츠에게 들은 적 있었지만. 마오가 가만히 리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리츠는 옅은 호수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이 저번에 맡겼던 그림은 다 팔았다고, 값을 좋게 받았대.”
“그래? 잘 됐네.”
“받은 돈은 나 준다는데 내일은 레스토랑이나 갈래, 마 군?”
이거 데이트 신청 같은 거야. 리츠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보기 좋게 어여삐 휘어지는 눈매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마오가 덜컥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스스로에게 당황하여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붉은 귓가는 절대 추위 탓은 아니었다. 리츠의 입가에 조금 더 미소가 번졌다. 작게 위아래로 끄덕여지는 고개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물들어버린 귀도 목덜미도 가리고 있었다. 살짝 시선을 맞추고 쑥스러운 듯 웃는 녹안을 보며 리츠도 환히 웃었다.
성당, 그 다음은 아이들이 있는 낡은 집.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는 마오를 리츠는 저 멀리에서 겨우 바라만 보았다. 성당 안으로 발도 들이지 않았다. 아직 어린 리츠는 성당 안에서까지 자유롭게 행동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퍽 성스러워 보이는 마오를 한참 응시할 뿐이었다. 마오는 자신에게 리츠를 내려주었다며 신을 꽤 신실하게 믿었다. 그 말을 들은 리츠는 조금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신에게 그를 빼앗길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생각도 없었다. 영원은 독이다. 자신을 원망하는 마오같은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이 끝나도 다음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고운 꽃 색 머리카락도 예쁜 나뭇잎 색 눈도 시야에 새기듯 응시하던 리츠가 문득 작게 웃었다. 기도를 끝낸 마오가 뒤돌아 리츠를 보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성당을 빠져나와 리츠의 옆에 서는 마오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리츠가 푹 빠진 미소를 길게 그렸다. 애정 짙은 미소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오는 정말로 선생님 같았다. 리츠는 낡은 집에 만들어진 교실 뒤편에서 마오만 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오를 위해 들였던 가정교사에게 리츠도 같은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리츠는 이미 레이에게 모든 것을 학습한 뒤였다. 열심히 배우는 마오가 귀여워서 같이 앉아 지루한 수업을 들었었지만. 마 군 선생님한테 배웠더라면 나도 성실한 학생이었을 텐데. 아닌가, 훨씬 불성실한 학생이었을지도? 리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글자를 쓰고 숫자를 더하고 빼는 마오의 표정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선생님, 하고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즐거워보였다. 아이들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않고 교육의 중요성도 그닥 실감하지 못하는 리츠는 잘 모르는 감정이었다. 저런 표정은 나랑 있을 때만 보여주면 좋을 텐데. 지팡이에 턱을 괴고 리츠가 길게 비음을 흘렸다. 하지만 욕심을 부려서 미움 받는 쪽이 훨씬 무서우니까 속박할 수는 없었다. 마오가 행복한 것이 좋았다. 예쁘게 웃어주는 쪽이 좋았다.
아. 리츠가 짧게 감탄을 흘렸다.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글씨를 따라 쓰게 시킨 마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리츠와 눈을 마주했다. 색 고운 시선들이 얽히는 순간 곱게 피어나는 미소에 문득 숨을 삼켰다. 순진한 애정과 신뢰로 피어나는 색채가 눈이 부셨다. 리츠가 작게 손짓했다. 마오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리츠에게 다가왔다. 왜? 입모양으로 묻는 마오의 손을 붙잡았다. 망설임 없이 조금은 거칠고 펜을 잡은 굳은살이 남은 그 손바닥에 깊게 입 맞췄다. 마오의 몸이 바짝 굳었다. 깊게 한 번, 가볍게 두 번. 마무리의 짧은 키스로 작은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리츠가 화사하게 웃었다. 좋아해, 마 군. 입모양으로 벙긋거린 그 마음을 마오는 대번 알아들었다. 확 불이 번졌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글씨 연습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리츠를 응시했다. 키스 받은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던 마오가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끄러움에 살짝 고민하는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리츠가 뭐라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리츠에게 키스 받은 바로 그 손바닥에 짧게 입 맞췄다. 질끈 감은 눈이며 온통 붉은 꽃 색으로 물든 뺨이 짙었다. 덜그덕. 리츠가 순간 놓칠 뻔 한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작게 입이 벌어졌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저를 보는 리츠를 보며 마오가 쑥스럽게 시선을 피했다가, 입을 우물거렸다. 나도. 입모양으로 벙긋거려 작게 속삭인 답변에 리츠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좋아해. 펑 터질 듯 가득한 감정이 온 몸에 가득 들어찼다. 길게 흩어진 호흡이 유독 행복했다. 둘 모두 잔뜩 붉은 색이었다. 상대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