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라 마오'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18.09.22 [리츠마오] 올해도 생일 축하해
  2. 2017.03.28 [리츠마오] 봄
  3. 2017.03.11 [리츠마오] 그리움
  4. 2016.12.28 [리츠마오] 홍월
  5. 2016.12.11 [리츠마오] 질투
  6. 2016.12.03 [리츠마오] 청혼
  7. 2016.11.19 [리츠마오] 고백
  8. 2016.11.18 [리츠마오] 공백
  9. 2016.11.12 [리츠마오] 물들다
  10. 2016.11.05 [리츠마오] 목도리



 마 군, 나 졸려. 머리를 쓰다듬어 줘. 마 군의 품에 날 끌어안고 다정하게 토닥거려 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그 위에 키스해 줘. 내가 마 군에게만 허락한 특례니까, 마 군도 마음껏 그걸 사용해 줘. 나는 기꺼이 마 군의 사랑을 받으며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게 굴 자신이 있는 걸. 

 사쿠마 리츠는 본디 저가 납득할만한 상대라면 누구에게나 쉬이 어리광을 피우고 연약한 척 굴었다. 번거로운 일을 크게 즐기지 않아서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은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결국은 게으른 고양이 시늉을 하며 저 좋을 정도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리츠의 가드가 낮아지는 사람은 양손으로 꼽을 만큼 있었지만 (애초에 나이츠 멤버만 세더라도 한 손은 거의 다 채웠으니까.) 이 정도의 요구를 하는 대상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아예 리츠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 리츠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 그의 연인. 이사라 마오뿐이었다. 

 

 물론 리츠의 사랑은 공사가 다망하여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리츠는 베개에 머리를 박고 퉁명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눈매는 이미 토라진 기색이 역력하게 가늘어져 있었다. 마오는 오늘이 리츠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으나, 연인의 생일을 위해 본인의 일을 쉬어버릴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았다. 매일 휴일이라고는 없는 바쁜 아이돌 생활을 보내고 있는 마오는 오늘도 오전부터 밤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쁜 아이돌인 리츠가 저녁시간인 지금 한가롭게 바닥을 굴러다닐 수 있는 이유는 나이츠 멤버들의 배려 덕분이었지만.

 하지만 마 군이 없으면 내가 쉬는 이유가 없잖아. 마 군도 없는데. 리츠는 다시 한 번 입을 비죽였다. 마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아 투덜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 이리 꿍얼거리고 있어도, 실제로 마오가 집에 도착해 다녀왔다며 리츠를 끌어안아 준 순간 물에 넣은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릴 무게 없는 투정이었다. 


 리츠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 제 집의 한 쪽 벽면을 멀뚱히 응시했다. 이 방은 리츠가 마오와 함꼐 꾸린 두 사람만의 보물상자였다. 리츠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의미없이 긁어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덮은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렸다. 어차피 생일에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니, 마오가 돌아올 때까지 한숨 푹 잠들 생각이었다. 잠자는 공주님이 되어 새근새근 자고 있으면 왕자님이 멋지게 다가와 키스로 저를 깨워 줄 테니까. 

 마 군, 나 지금 자니까 깨울 때는 키스로 깨워 줘. 본격적으로 잠들어버리기 직전 리츠는 마오에게 짧은 메일을 첨부했다. 장난과 진심이 반쯤 섞인 메일이었다. 진짜로 키스해준다면 럭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마 군이 와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리츠는 시계를 한 번 보고, 마오가 이 메일을 확인하고 답장한 뒤 돌아올 시간까지 따져본 뒤 알람을 맞춰두었다. 그래도 고된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연인을 일어나서 반겨주고 싶었다. 어서 와, 마 군. 하고 저가 웃는다면 마오의 녹빛 눈동자에 행복이 들어차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까. 

 자고 일어나서 시선이 얽혔을 때 마 군이 짓는 표정도 좋아하지만~. 리츠가 키득키득 웃고 휴대전화를 제 머리맡에 내려놓고 이불 속으로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짧은 진동이 울렸다. 


 어라. 리츠는 눈을 둥글게 떴다가 삼 초 쯤 고민했다. 확인할까, 말까. 괜사리 잘 자리잡은 편한 자세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 군에게 온 답장이라면? 리츠는 세 번 눈을 깜박였다가 결국 팔을 뻗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그리고 은근히 발목을 잡아오던 귀찮음을 감수한 보람은 기꺼이 있었다. 딱 한 문장짜리 답장을 확인한 리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술 모양의 이모티콘이 두 개. 앞으로 이 분 뒤면 집에 갈 테니까, 이걸로 대체. 


 메일은 짧았고, 리츠는 대문까지 한걸음에 달려나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마 군! 청년의 표정이 순식간에 화사해졌다. 리츠. 한 쪽 손에 꽃다발을 든 청년은 조금 수줍은 듯 제 연인의 환대를 받았다. 아직 오늘은 9월 22일. 오늘의 주인공은 망설임없이 양 팔을 뻗어 제 연인을 품에 끌어안고, 이모티콘으로 대체될 수 없는 두 번의 키스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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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봄

2017. 3. 28. 00:48 from ENSTARS/NOVEL







 날이 좋았다. 리츠는 문득 눈을 떴다. 뺨에 닿는 바람이 따뜻하고 건조했다. 볕 잘 드는 양지에 드러눕고 싶다는 충동을 부채질하는 바람이었다. 소년은 그런 충동에 약했지만, 그만큼 의욕도 대단치 않게 식어버리고는 해서, 몇 번 손가락을 움찔거리다가 그대로 몸에 힘을 풀어버렸다. 그늘진 곳에서 설렁설렁 불어오는 바람도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수마가 어깨를 잔뜩 짓누르고 있었으니 그것을 떨치고 일어날 의욕도 없었다. 사계절 내내 그나지 의욕을 내지 않기는 했지만, 리츠는 유독 봄만 되면 지나치게 게을러지고는 했다. 

 어제도 그랬다. 나이츠 전원이 모이는 외부스케줄은 오롯하게 그의 왕이 저 자신의 이름으로 얻어 온 것이었다. 그와 같은 유닛의 동갑내기ㅡ동급생이었어야 했을 한 학년 선배ㅡ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하는 리츠를 보고 겨울 내내 겨울잠을 자다가 갑자기 봄을 타는 거라고 대놓고 쏘아붙이고는 했다. 그 평가에 리츠는 긍정도 부정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목울음 한 번 길게 흘리고 말았다. 왕은 그런 기사를 보며 크게 웃고는 달콤한 봄노래 한 곡 써서 쥐어줬다. 리츠는 달갑게 받았다.  


 리츠는 봄이 좋았다. 밖에서 꾸벅 잠들기 딱 좋은 기온 하며 한들한들 피어나는 꽃이며. 묘하게 들떠서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섞여들면 저를 들들 볶는 사람도 적어진다는 이유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마오가 언제 저를 찾을 지 모르니 리츠가 잠드는 장소는 늘 꽃과는 한 겹 떨어진 장소였다. 아직 잎도 나지 않은 마른 나무들 근처나, 늘푸른나무의 풀숲 어딘가. 리츠가 그런 곳에서 잠들고 있으면 마오는 늘 그를 찾아오고는 했다. 마치 지금처럼. 


 리츠는 저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설핏 눈을 떴다. 리츠, 일어났어? 눈이 맞자 물어오는 목소리는 투박하게 다정했다. 리츠는 적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어져라 하품이 기어나왔다. 그럭저럭 눈은 떠졌다만 여전히 피곤했다. 좀 더 잘래. 투정처럼 칭얼거림이 흘러나오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적어도 리츠에게는.


“더 자긴 무슨. 수업 끝났다고. 어서 가자.”

“저녁까지 자다 가면 안 돼?”


 내가 자는 동안 마 군은 무릎베개~. 리츠가 덧붙인 말에 마오의 표정이 대번 어이없어졌다. 봄의 학생회는 늘 바빴다. 1학년에는 막 학생회에 들어가서 바빴고 2학년은 새 학년이 들어오면서 변하는 일들이 많아 바빴고 3학년의 학생회장이 된 지금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작년의 에이치에게는 케이토라는 든든한 소꿉친구 부회장이 있었건만. 마오는 이런 걸 권고해주는 제 소꿉친구를 보며 아주 잠깐 심란해졌다. 틀림없이 잠들어있을 리츠를 데리러 오기 위해 급하게 일정을 처리한 삼십분 전의 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니 조금 더 심란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허나 리츠와 함께 자란 시간이 길었던 마오는 능숙하게 감정을 추스르고는 리츠를 끌어당겨 제대로 세웠다. 리츠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마오의 손길에 따라 제 다리로 섰다. 하암. 여전히 졸리기는 했다만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마오가 게으름을 피워줘서 따끈따끈한 무릎을 빌려줬더라면 더할나위없이 좋았겠지만, 뭐. 리츠는 마오의 어깨에 기대며 그 정도로 만족했다. 마오는 똑바로 서라며 투덜거렸지만. 


“요즘 날씨가 좋지, 마 군.”

“그야 봄이니까. 곧 꽃들도 만개할걸.”

“마 군에게 힘든 시기가 오네~.”


 능청 떨듯 덧붙인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마오는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끄응. 앓는 소리가 조금 새어나오기도 했다. 마오도 꽃은 좋아했다만 그것과 별개로 화분증은 그를 많이 괴롭게 했다. 약은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지만 별개의 문제였다. 낮잠 자기 편하다는 이유로 리츠가 봄을 좋아했다면 마오는 가을 즈음을 제일 좋아했다. 꽃이 지고 안정을 찾을 즈음의 계절. 겨울이 오기 직전의 평화. 마오는 저에게 기대어 걷는 리츠의 머리 위에 살짝 뺨을 기댔다. 붉은 눈동자가 도록 굴러 온기를 응시했다. 

 

 학생회장의 업무는 각오하고 있었다만 각오와 현실은 본디 늘 다른 법이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른 것처럼. 봄에는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려서 힘든 게 당연했다. 누군가에게 지친 티를 내지 못하는 그였으니, 어리광은 아주 찰나의 순간만 허락되었다. 이 순간만큼 리츠는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벗이자 연인이 되어주었다. 리츠는 손이 많이 가는 소꿉친구를 퍽 좋아했다. 리츠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 군이 원한다면 나도 무릎베개 해 줄 수 있으니까~.”

“......나 참. 내가 너도 아니고,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슬쩍 떨어지며 멋쩍게 웃어버리는 그 미소를 보며, 리츠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주제에 달갑다는 듯이 그렇게 웃어버리면 아무도 안 속는다고, 마 군. 덧붙일 말은 속으로면 살짝 삼켜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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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그리움

2017. 3. 11. 23:19 from ENSTARS/NOVEL




 마오는 어스름한 정신 너머로 잠에서 깨어났다. 요즈음 들어 유독 잠이 늘었다. 자도자도 피곤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드문 일이었다. 늘 적게 자고 성실하게 일했던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작게 하품한 청년은 제 눈가를 몇 번 부볐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이었다. 작은 하품 몇 번으로 애써 잠을 쫒아낸 마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옆에서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문득 입가에 곡선이 어렸다.

 리츠는 본디부터 야행성이었으니 새벽이 다가와 밤의 장막을 살짝 걷어낸 지금은 그가 잠들 시간이었다. 이미 반 이상 잠에 취해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강하게 같이 다시 잠들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달콤한 유혹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 칭얼거림에 훨씬 가까운 말들을 마오는 적당히 흘려 들었다. 여기서 오냐오냐했다가 누워버리면 하루를 꼼짝없이 날리게 될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니 오싹한 냉기가 슬금슬금 다가와 금새 달라붙었다. 한 번 팔을 쓸어내리며 마오가 짧게 어깨를 떨었다. 이제 한껏 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날이 쌀쌀했다. 그래도 제대로 해가 뜨면 볕이 따뜻해진게 티가 날 정도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리츠의 손을 잡고 꽃구경을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음, 물론 마오는 제대로 꽃구경을 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약을 제대로 챙겨먹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걷는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들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마오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벌써 봄이었다. 

 

 저번 겨울은 유독 혹독한 겨울이었다. 마오는 눈이 내리던 그 날들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워낙 괴로웠던 탓에 얇은 기억의 장막 한 겹을 덮어 쉬이 생각나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걸어 놓은 제약이었기에 마오는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저 봄이 왔다는 사실 하나에만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했다. 따뜻한 바람이 뺨에 닿으면 겨울이 끝났다는 사실에 행복해졌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마 군, 무슨 일 있어?”


 나른한 목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깨웠다. 마오는 대번 정신을 차렸다. 침대 위 이불 속에 쏙 들어가서는 얼굴만 빼꼼 내민 리츠와 시선이 마주쳤다. 반 쯤 감겨서 잠에 취한 얼굴로 나른하게 눈을 몇 번 깜박인 리츠는 늘어져라 하품했다. 졸린 기색이 역력했다. 얄쌍한 눈꼬리 끝에 자그마한 눈물방울을 매단 리츠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마 군, 같이 자자... 나 졸려... 응?”

“벌써 아침이야, 리츠.”

“어차피 할 일도 많이 없잖아...”


 그 말은 맞았다. 집안일과 소량의 서류작업을 제외하면 마오는 할 일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인 부지런함과 할 일의 유무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마오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탓에 말에 설득력이 떨어져버렸지만. 마오가 자연스럽게 리츠의 근처로 다가왔다. 침대 한 쪽이 움푹 퍼졌다. 마오가 걸터앉은 탓이었다.

 사실 케이토가 걱정이 많은 탓에 마오에게 그다지 일을 주지 않으려 들을 뿐, 마오 스스로는 본인이 몹시도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일을 더 받고 바쁘게 일해도 좋았다. 너무 한가하니 본인 스스로 적응을 못하고 있기도 했다. 겨울 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이제 봄의 초입이었고, 그는 괜찮았다. 옆에는 리츠까지 있었다. 몹시도 완벽했다. 나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온전하게 완벽했다.


 마오가 문득 손을 뻗었다. 리츠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마오의 손길에 리츠는 잠깐 눈을 떴다가 바로 감았다. 기분 좋다는 의미의 비음이 흘러나왔다. 마 군, 마 군. 어리광처럼 부르는 말은 온통 마오의 애칭 뿐이었다. 마오가 시선을 내려 제 연인을 응시했다. 


“마 군, 울지 마.”

“어?”


 리츠가 손을 뻗어 마오의 뺨을 천천히 닦아냈다. 마오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탁했다. 물기 젖은 그 사이로 보이는 검고 붉고 하얀 것들을 응시하며 마오가 이불자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수많은 장면들이 단 한 번의 깜박임 사이로 흘러 떨어졌다. 눈물에 섞여 사라졌다. 마지막 보았던 네 모습도, 가득하게 흐르던 피도, 그냥 잊으라며 속삭여주던 목소리도, 이별의 인사도. 마오는 기꺼이 기억의 베일 너머로 처박아 묻어버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넘겨 무시했다. 지금 제 앞의 사쿠마 리츠의 다정함에만 집중했다. 


 안 울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믿어주겠다는 양 웃어주는 리츠를 보며 마오는 애써 마주 웃었다. 소망은 기원을 낳고 기원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마오는 저가 만들어낸 기적을 한 줄기 희망처럼 부여잡고 있었다. 그게 썩은 동아줄인지 아닌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붙잡고 있다가 떨어지는 것도 비극적이겠지만, 잡지 못해 가라앉는 것도 분명 비극이었으니. 

 그러나 사랑만큼은. 그를 처음 잃었던 그 순간 자각했던 사랑만큼은 잊을 수 없어서 이사라 마오의 안에 분명 살아있었기 때문에. 리츠를 사랑한다는 걸 자각하여 피어난 마음만큼은 외면할 수가 없어서 마오의 겨울은 시한폭탄이었다. 언제 터져나와 상처를 입힐 지 모르는 폭탄. 훗날 반드시 마오를 망가뜨릴 괴물.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림자 너머의 사쿠마 리츠는 혀가 아리게 쓴 것을 애써 삼키며 기꺼이 제 사랑에게 웃어주었다. 그가 가짜로나마 저를 만들어 사랑해주고 있었으니, 리츠의 이름을 받은 그는 마오를 사랑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이사라 마오의 사랑만이 사쿠마 리츠의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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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홍월

2016. 12. 28. 00:14 from ENSTARS/NOVEL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이미 여러 번 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리츠는 못마땅한 얼굴로 마오의 뒷모습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낯선 유닛복을 몸에 걸친 마오는 거울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어색한지 몇 번이고 껄끄러이 복장을 살피던 마오가 몸을 돌려 리츠를 보았다. 답을 바라는 녹빛 눈동자는 어느 순간에도 사랑스러웠지만 리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라리. 그런 생각이 벼락처럼 불쑥 떠올랐다. 수십 번도 넘게 한 생각인데 질리지도 않았다. 차라리 나이츠의 유닛복을 입었더라면. 리츠는 또 한 번 그 생각을 하며 입을 땠다. 


“불편하지는 않아?”

“키류 선배가 만들어 주셨으니까. 불편한 부분은...”


 수예부는 아니지만 그의 실력은 이미 교내에 충분히 알려져 있었다. 머쓱한 미소로 제 감정을 표하는 마오를 보며 리츠는 속 꼬인 감정을 삼키고 또 삼켰다. 허나 사쿠마 리츠는 언제나처럼 이사라 마오의 앞에서 무언가 숨기는 것을 참으로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결국 다시 입이 비죽 나왔다. 불평으로 연인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으니 눌러 참았다. 질질 흐르는 것까지 정돈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붉은 눈동자가 느리게 전신을 쓸었다. 핀 없이 풀어진 머리카락은 하나로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전통복에 가까운 복장에 희고 긴 소매. 부드러운 털로 만들어진 장식이며 붉은 색 포인트 모두 마오와 잘 어울렸다. 유메노사키에서 손에 꼽히는 인기 유닛 홍월의 유닛복이었다. 그저 옷을 갈아입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오는 정식으로 유닛 이전을 했고, 무대에 서서 팬들의 앞에서 선보이기까지 했다. 명실상부 홍월의 소속이 되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어도 유메노사키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들이었기에 나쁜 말도 그리 듣지 않았다. 마오가 꽤 부드럽게 유닛에 녹아든 탓도 있었고. 그래, 객관적으로... 이사라 마오는 홍월에 제법 잘 어울렸다. 


 리더인 케이토는 본디부터 학생회에서 합을 맞췄던 사이였고 소마는 나이가 같은 데다가 올곧은 면이 있어 마오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키류와는 큰 인연이 없었지만 그는 본디 호인이었으니 후배를 푸대접할 사람이 아니었다. 트릭스타를 잊지 못해 미련이 남은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마오는 홍월에 남았다. 도리어 남기로 결정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홍월에서 제 지분을 만들었다. 그에 소마는 저도 분발하겠노라 외쳤고 케이토는 흡족해했으며 키류도 잘 해 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비췄다. 겉이던 속이던 홍월의 사이는 원만했다. 


 사쿠마 리츠는, 아쉬웠다. 트릭스타를 그토록 아끼는 마오가 웃는 게 좋아 마냥 바라보았더니 엣쨩이 저 좋을 대로 손을 쓴 것도 약이 올랐다. 홍차부에서 리츠가 심술을 부리는 건 이 탓이 컸다. 에이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귀찮은 선을 넘지 않는 리츠의 심술을 용인해주고 있었다. 킹의 암묵적인 배려와 비숍의 강한 어필로 미묘하게 폰 비슷한 것으로 들어와 있는 마코토를 볼 때마다 이 감정의 색이 짙어졌다. 저가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알았지만, 리츠는 언제나 마오에 관한 것을 참기 어려웠다. 


“마 군네 리더가 마 군 괴롭히는 거 아니야? 트릭스타랑 싸워서 꼴사납게 무너졌다고 심술이나 부린다던가.”

“하스미 선배가 그럴 리 없잖아, 리츠...... 그리고 그런 말 하지 마.”

“마 군한테는 나이츠 유닛복이 더 잘어울려.”

“한 번도 안 입어봤는데?”


 더군다나 색감 같은 걸 보면 나한테는 홍월이나 트릭스타 옷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여상하게 덧붙이는 말에 리츠가 잔뜩 뺨을 부풀렸다. 이런 점에서도 리츠는 대단히 못마땅스러웠다. 물론 그 전에도 마오는 과분한 업무를 소화해내고도 꿋꿋한 케이토를 제법 호의를 품고 있었지만 홍월에 들어가 더 가까이에서 보게 된 하스미 케이토는 이사라 마오가 존경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리츠가 토라져 조금만 투정부리려 해도 마오는 바로바로 차단해버리고는 했다. 

 저 입에서 케이토나 키류, 소마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못마땅했다. 물론 트릭스타도 마오의 관심을 너무 가져가는 것이 싫었지만 트릭스타야 모조리 동급생에다가 마오와 다른 반이었고, 가장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던 마코토는 상냥한 것인지 심약한 것인지 고민되는 성격인지라 리츠는 언제든지 그에게서 마오를 빼앗아 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홍월의 셋은 달랐다. 마오는 자신이 뒤늦게 합류한 처지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썩 좋은 방법으로 합류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는 의미였다. 어지간해서는 부름을 거절하지도 않았고 트릭스타에는 없던 선배들의 가르침도 고분고분하게 받았다. 새삼스러워진 저의 새로운 포지션에서 적응해나갔다. 덧붙여 셋은 하나같이 심약이라는 단어가 참 어울리지 않는 성격으로 3학년의 둘은 심리적인 면모로 찌를 구석도 거의 없이 안정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소마 역시도 무사의 집안에서 올곧게 자란 덕인지 정신적으로 강건했다.

 유닛끼리 만나는 일도 잦은데 리더인 케이토는 학생회 부회장까지 겸하고 있어서,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마오와 함께한다는 것도 불만거리였다. 나보다 마 군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잖아. 못난 말이라고 해도 리츠는 진심이었다. 매달려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 군. 내가 좋아, 홍월이 좋아?”

“무슨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다 있어...”


 마오는 대답을 피하며 둘밖에 없는 연습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아마 무의식이겠지만 조심하는 기색이 강했다. 마 군 바보. 리츠가 입을 비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잠이나 푹 자고 싶었다. 마오가 저에게만 신경써 줄 정도로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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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질투

2016. 12. 11. 00:10 from ENSTARS/NOVEL




 소년은 중학생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고등학생이었다. 

 고작 일 년의 차이였지만 그 틈새는 어마어마했다. 중학교에 남은 소년은 그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미 초등학생과 중학생으로 갈라졌던 시기를 한 번 경험해보아 이번에는 넉넉하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간과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어쩌면 다니고 있는 학교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평범한 일반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사라와는 달리 사쿠마는 유메노사키 학원으로 진학했다. 아이돌 양성학교. 조금씩 쇠퇴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 명성만큼은 견고한 이름을 떠올리며 이사라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황량한 겨울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이제 곧 졸업을 한다. 제 또래의 아이들은 고교 진학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사라는 허리를 굽히고 책상에 뺨을 댔다. 차가운 책상에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복잡한 감정을 담은 녹색 눈동자가 살짝 눈꺼풀 아래로 몸을 감췄다. 


 이사라는 단 한번도 아이돌을 꿈꾼 적 없었다. 객관적으로 춤도 노래도 일반인 치고는 수준급인 마오였기에 장기자랑에서는 환영받는 인사였고, 종종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반짝거리는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기는 했어도 아이돌이라는 대단한 직업을 욕심낸 적은 없었다. 동생이 생긴 뒤로 관심에서 한 발자국 멀어지게 된 어린 소년은 사람들의 많은 시선은 받지 않는 직업을 얻어 적당히 돈을 벌며 살고 싶었다. 선생님이라던가, 비서, 의사도 좋았다. 남을 치료하거나 도와주는 직업은 적성에 맞을 것 같았기에 중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쭉 고려하고 있던 직업이었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사라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턱을 괴었다. 칠판 한 편에 써진 진학상담이라는 글씨가 진하게 눈에 새겨졌다. 

 사실 이사라는 사쿠마가 유메노사키에 진학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종종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유메노사키 아이돌의 모습에 깊게 집중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노래도 잘 하는 사쿠마였기에 관심을 가져도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던 작년의 이맘때 사쿠마는 이사라에게 통보했다. 유메노사키 학원에 갈 거야, 하고. 이미 합격통지서까지 받아온 그는 유메노사키 이외의 학교에는 아예 시험조차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사라는 당혹스러웠다. 아이돌? 그가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고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이사라는 살짝 자괴감을 느꼈다. 오랜 소꿉친구로서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에 처음으로 금이 간 순간이었다. 그 작은 금으로 참 많은 것이 새어나갔다. 


 그 뒤로 사쿠마는 종종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다. 이사라가 직접 그의 초대를 받아 무대 위의 모습을 보러 찾아간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서 있던 사쿠마를 본 순간 이사라는 깨달았다. 그는 타고난 아이돌이었다. 시선을 휘어잡고 무대를 춤추며 다른 동료들과 함께 웃는 모습은 너무나도 낯선 얼굴이었다. 이사라는 제 바짓자락이 잔뜩 구겨지도록 움켜쥐었다. 몇 번이고 손으로 펴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남을 정도로 단단히. 

 동시에 그 날 이사라는 사쿠마의 유메노사키 진학의 이유를 알게 됬다. 사쿠마의 무대 다음다음 정도에 등장했던 아이돌. 검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사쿠마와 빼닮았으면서도 조금 더 위험하고 섹시한 분위기. 그의 이름은 레이였다. 이사라는 사쿠마 레이가 사쿠마 리츠의 형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을 알고 있었다. 얼굴을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레이가 유메노사키의 유명인이라는 것도 몰랐다. 사쿠마는 레이를 따라 유메노사키에 진학했다. 이사라는 그것을 배웠다. 이사라는 사쿠마와 저 사이의 거리를 새삼 실감했다. 참 까마득해보이는 거리가 아득했다. 


 이대로 너와 나 사이는 조금씩 멀어져서, 어른이 되면 한 때의 친구로 남는 걸까? 중학교 3학년의 이사라는 내내 그 물음을 속에 품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사쿠마는 이사라가 알고 있는 사쿠마로 돌아와 그의 무릎 위에서 어리광과 불평을 내뱉었지만, 그 입에서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 정보들조차 모조리 낯선 이야기였다. 드림패스, 팬서비스, 유닛, 작곡가, 리더, 셋쨩, 같은 유닛의 동료들. 모두 이사라와는 관계 없으면서도 사쿠마와는 깊은 관계가 있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졌다는 증거였다. 이사라는 그것을 쓸쓸하다고 여겼다. 아득한 미래의 그 어느 순간까지도 영원히 제일 가까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리라 생각했는데 그 확신마저도 흘러나가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지독한 쓴 맛 뿐이었다. 

 이사라는 회사원이나 선생님이 되려 했다. 가을부터 알아보던 학교도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일반계 고등학교였다. 평범한 삶. 곁에 사쿠마가 없는 삶. 이사라는 수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없는 세계에 살 각오를 다지는 데에는 꼬박 일 년이 걸렸다. 봄부터 겨울까지 사쿠마가 없는 미래를 그리기 위해 애를 썼다. 가까스로 사쿠마 없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세뇌시키고 납득시키는 데까지 네 개의 계절을 온전히 소모해야만 했다. 눈물과 우울함과 자괴로 젖은 밤이 수없이 많이 지나갔다.  

 사쿠마는 그것을 너무도 간단하게 망가뜨렸다. 마 군, 유메노사키에 올 거지? 저가 먼저 가져왔다며 진학시험 신청서를 손에 쥐어주며 웃는 사쿠마는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웠지만, 이사라는 화가 났다. 미래를 고민했던 과거도 우울했던 밤도 모두 그 말 아래서 가치를 잃었다. 이사라는 그에 분노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가 사쿠마를 따라갈거라 판단해버리는 것도 싫었다.

 이사라는 처음 사쿠마에게 화를 냈다. 사쿠마는 당혹에 젖어 어쩔 줄 몰라했다. 이사라가 화를 내는 이유도 잘 모르는 듯 보였다. 이사라도 그걸 알았다. 사실 저가 화를 내는 것이 나쁘다는 것도 알았다. 사쿠마는 그저 언제나처럼 이사라가 와 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딴에는 배려하여 신청서를 가져왔겠지. 이사라 혼자 아이돌이 되는 미래에 대번 겁을 먹어 멀리한 것 뿐이었다. 사실 유메노사키에 진학해도 성인이 되었을 때 아이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고려하지도 않은 미래로 길이 좁혀지는 게 무서웠고 그 길을 선택하는 이유가 오로지 사쿠마 하나 뿐이라는 점에서 스스로가 한심했다. 가장 문제는 사쿠마와 함께 있을 그 시간을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는 저 자신이었다. 그토록 고민하여 멀어지는 길을 납득했건만. 이사라는 제 자신이 싫어지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몸을 돌렸다. 마 군! 뒤에서 부르는 사쿠마의 목소리에 녹아든 수많은 감정을 그는 읽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자, 리츠. 다만 그는 상냥했기에 한 마디의 여지를 남겼다. 사쿠마의 집에서 뛰쳐나온 이사라는 그대로 제 방에 틀어박혔다. 속에 응어리진 많은 것들이 눈물로 녹아 떨어졌다. 이사라는 저가 우는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냥 눈물이 나왔다. 서러워서 이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음을 삼켰다. 그림자 진 날이었다. 


 이사라는 그 뒤로도 며칠동안 사쿠마에게 연락을 끊었다. 사쿠마도 먼저 이사라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이사라에게 미움받을까 극도로 행동을 조심하는 게 이사라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미안했다. 먼저 사과하고 싶었건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한 여전히 고민하고 있던 탓이 컸다. 이사라는 제 앞에 놓인 길을 응시했다. 그가 내내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던 평범한 길인지, 아니면 사쿠마를 따라 걸을 아이돌의 길인지. 전자는 평화로웠으나 사쿠마가 없었고 후자는 두려웠으나 사쿠마가 있었다. 이사라는 제 미래를 놓고 정해야 할 길을 이런 식으로 고민하는 것이 기가 찼다. 저가 얼마나 사쿠마를 좋아하는지만 수없이 깨닫은 날이었다. 

 그 날 새벽 사쿠마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초대였다. 유메노사키 S1.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는 최고 드림패스에 사쿠마도 유닛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꼭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은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언제나처럼 느긋한 말투나 말을 대신하던 이모티콘은 없었다. 딱딱한 문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사라는 꼭 가겠다는 답장을 남겼다. 이사라는 이 드림패스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마지막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소년이 눈을 감았다. 


 그 날은 눈이 왔다. 매우 추웠다. 이사라는 자켓과 목도리로 저를 둘둘 감고도 몸을 떨었다. 하얀 입김이 사방에 번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몹시 많았다. 이사라는 아이돌을 보러 온 팬들의 열기를 경외시하며 바라보았다. 신기하기도 했다. 저 중 몇은 사쿠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추운 날씨를 이기고 여기까지 왔다. 이사라는 뽀득하게 밟히는 눈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사쿠마가 참가하는 무대가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 몸을 움츠렸다. 발끝부터 얼고 있었다. 

 사쿠마의 유닛은 중간하고도 조금 뒤편에 차례가 배정되어 있었다. 이사라는 무덤덤하게 아이돌들의 무대를 응시했다. 인기 유닛과 그렇지 않은 유닛의 차이는 이사라도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팬들의 비명의 차이가 달랐다. 날씨가 험한 탓에 일반인들보다는 특정 유닛의 팬의 비율이 높았다. 인기 유닛은 그럴 이유가 있다고 이사라는 생각했다. 무대 수준이 달랐다. 노래도 춤도 이사라보다 못한 사람도 꽤 자주 눈에 띄었다. 마음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제 자신을 너무 높게 치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다. 사쿠마 하나를 보러 왔으니 이사라는 내내 사쿠마만 무대에 서기를 기다렸다. 코며 귀가 얼얼했다. 이사라도 종종 무대를 즐기기도 했다. 이름을 아는 사람으로는 레이가 무대에 섰을 때, 이름을 모른는 사람으로는 이츠키나 히비키라는 이름의 사람이 무대에 섰을 때는 즐거웠다. 혹은 감탄했다. 대단한 사람들도 있구나. 그리 생각했다. 대단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를 그는 무대 밑에서 응시했다.


 그리고 등장했다. 사쿠마의 모습은 보이는 순간 시선을 빼앗앗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이사라는 사쿠마와 그의 유닛을 보러 온 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쿠마는 무대 위에서 이사라를 보고 있었다. 대번 눈치챘다. 시선이 얽혔다. 붉은 눈동자가 조금 불안함을 담아 이사라를 보았다가, 곧 천천히 휘어졌다. 똑같이 불안함을 담고 있는 이사라를 위로하듯 다정한 시선이었다. 추위를 타는 이사라의 얼굴을 살짝 걱정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이사라는 어이가 없었다. 두껍지 않은 무대의상을 입고 눈까지 오는 무대 위에 서 있는게 누군데. 춥기야 사쿠마가 훨씬 추울 터였다. 이사라는 사쿠마를 걱정했다. 사쿠마의 옆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은발의 수려한 미인이었다. 살짝 미간을 좁히고 무어라 말을 하는 그와 평온하게 대꾸하는 사쿠마 사이로 주황 머리카락의 소년이 둘의 어깨를 두르며 뛰어들었다. 친근함이 묻은 행동이었다. 무어라 말하며 웃은 그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이사라와 닮고도 다른 녹색 눈동자가 짐승처럼 날카로워지는 모습에 이사라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이름만 알던 사쿠마의 동료들이 바로 구분되었다. 잔소리쟁이라 사쿠마가 불평하던 세나가 은발의 소년이었고, 리더이자 작곡가라던 소년이 주황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사쿠마의 리더가 마이크를 쥐고 입을 열었다. 팬들을 고양시키는 말을 몇 마디 내뱉고 그 다음 세나에게 순서를 돌렸다가, 마지막은 사쿠마의 차례였다. 최선을 다할 거니까, 다들 잘 봐줘. 그리 말하며 사쿠마는 웃었지만, 말끝의 시선에 분명 이사라를 담았다. 이사라는 표정을 굳히고 무대를 응시했다. 곧 반주가 주변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사라는, 저의 시선이 몹시도 주관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사쿠마의 무대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을 매혹시키는 사쿠마는 평소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아이돌의 모습이었다. 처음 보았던 여름의 무대보다 훌쩍 성장해 있었다. 조금은 격한 춤을 추면서 황홀하게 노래를 부른다. 저 혼자의 생각일지도 몰랐지만 이사라는 지금의 무대가 가장 완벽하게 보였다. 사쿠마는 무대 위에서도 종종 이사라를 응시했다. 홍옥의 눈동자가 말을 걸고 있었다. 보고 있어, 마 군? 이사라는 알았다. 지금 이것은 사쿠마의 진심이었다. 그는 이사라를 부르고 있었다. 같이 와 줘. 나랑 같은 길을 걸어 줘. 노래로 그는 애원하고 있었다. 함께 무대 위에 서 있는 세나와 츠키나가는 그것을 눈치챘지만 침묵해주었다. 이사라는 하염없이 사쿠마를 응시하고 또 응시했다. 어쩐지 그는 다시 한 번 울고싶었다. 이름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아. 

 사쿠마가 넘어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무대의 열기에 녹아 고인 물 탓이었다. 조금 큰 소리가 났고, 주변이 웅성거렸다. 이사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선이 하릴없이 떨렸다. 사쿠마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춤을 추며 제 파트의 노래를 불렀다. 그의 동료들 모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었고, 웅성거림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뒷사람의 원성에 이사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사라의 눈에는 보였다. 조금 창백한 사쿠마의 얼굴이며 작게 떨리는 손끝이. 티나지 않게 절고 있는 다리가. 이사라와 같은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의 두 동료들 뿐인 듯 보였다. 몇 번이고 시선을 사쿠마에게 던지며 신경쓰는 게 보였다. 이사라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쿠마는 꿋꿋하게 노래했다. 무대에서 내려갈 때까지 그는 버텼다. 그들의 차례가 끝나고 그는 안심하고 무대 뒤에서 그의 동료들에게 몸을 기댔다. 사쿠마를 받아주는 세나와 츠키나가의 뒷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다음 아이돌의 등장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았다. 이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과 염려와 은근한 질투가 뒤섞인 제 자신이 추했다. 


 이사라는 곧장 사쿠마의 집으로 향했다. 1시간 가량을 기다리고 나서야 사쿠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선이 마주치마자 그는 물었다. 

“봤어, 마 군?”

“......응.”

 모두 보았다. 사쿠마가 제법 열심히 아이돌 활동을 하는 것도. 꿋꿋하게 제 길을 걷는 것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그는 아이돌로 살아갈 자기 자신을 연마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끊임없이 이사라를 원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나. 이제 아이돌이네, 마 군.”

“그렇더라.”

“열심히 하는 건 귀찮지만, 셋쨩이나 츳쨩을 따라가고 있어.”

“응.”

“지금의 유메노사키는, 조금...... 험하지만.”

 사쿠마가 눈을 내리깔았다. 잠깐 망설이던 그는 말을 붙였다. 

“나는 마 군이, 함께 있어주면 좋겠어.”

 그건 사쿠마의 마지막 청이었다. 이미 한 번 이사라에게 거절당했던 사쿠마가 낸 용기였다. 이사라와 멀어지기 싫다는 손 내밈이었다. 이사라는 물끄러미 사쿠마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멀어보였던 거리는 어디 갔을까.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 두 발자국이었다. 사쿠마가 먼저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제 거리는 한 발자국. 이사라는 고개를 들었다. 사쿠마의 얼굴이 보였다. 곱디 고운 얼굴은 저번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간절한 그 눈은 어찌나 예쁘게 빛나는지. 이사라는 설핏 웃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많은 고민은 가치를 잃고 녹아내려버렸다. 이번 일 년의 고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곁에 있고 싶고, 함께 길을 걸으며 닮은 미래를 꿈꾸고 싶다는 욕심이 한없이 부풀었다. 가득, 또 한가득. 

 이사라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조심스럽게 뻗은 손끝이 다정하게 맞닿았다.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한 번도 아이돌을 꿈꾼 적 없어.”

“응.”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무서워.”

“생각보다, 별 거 아니더라.”

 사쿠마가 손을 올려 이사라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토닥임이 도닥도닥 이어졌다. 

“그런데 말이야, 나 혼자 평범한 길을 걸으려는 것도 무섭더라고.”

 이사라의 목소리에 미미한 웃음기가 섞였다. 

“리츠가 없는 길을 혼자 걷는 건... 무섭잖아.”

 손가락이 얽혔다. 단단히 서로를 맞잡았다. 온기가 닿자 힘이 빠졌다. 안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같이 있어줄거지?”

“마 군만 괜찮다면 평생이라도.”

“그거 좋네...”

 이사라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어설프게 웃는 시선이 다정한 걸 알았다. 그래서 사쿠마도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거리는 없었다. 한없이 가까웠다. 이사라가 물끄러미 사쿠마의 눈을 보았다. 그 안에 담긴 애정을 읽었다. 

“마 군은 고작 중학생이고, 나는 겨우 고등학생이잖아.”

 사쿠마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아직은, 많이 고민하지 말자.”

 뺨에 손이 닿았다. 이사라가 사쿠마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평소보다 높은 체온이 따뜻했다. 

“응. 그럴게.”

 이사라가 웃었다.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소년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작게 휘어졌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감겼다. 


 리츠가 마오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의 첫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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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청혼

2016. 12. 3. 23:00 from ENSTARS/NOVEL




 마을은 작고 한적했다.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아 흔히 시골 촌구석이라 폄하받고 있는 곳이었지만, 있을 것은 다 있고 평온하게 살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곳이 싫은 사람은 진작 떠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전체 인원이 오십을 가까스로 채우는 그곳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안면이 있으며, 친분도 두터웠고, 덕분에 비밀을 숨기기도 어려운 장소였다. 그러니 그런 마을에 고급스럽게 잘 차려입은 도련님이 방문했다는 사실은, 그가 마을입구에 발을 디딘지 딱 삼십분만에 모든 마을주민에게 퍼진 소식이었다.

 어리거나 젊거나 늙은 시선이 똑 닮은 호기심을 담고 마을의 유일한 서점을 향했다. 마을에 딱 넷 있는 젊은 청년 중 하나가 운영하고 있는 작은 서점이었다. 큰 도시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애인이 있는 청년이라 마을 처녀들이 눈물만 삼키는 상대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래요? 누군가가 호기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지. 다른 누군가가 답했다. 아주 잘 생겼던데. 미약한 감탄이 섞여 있었다. 되게 예쁘다. 어린 아이의 속삭임이 작게 터져나왔다. 지나가는 척 은근슬쩍 서점을 기웃거리며 사람들은 목이 빠져라 서점 창문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안에 들어서자마자 커튼을 쳐서 안이 보이지 않는 게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그 붉은 머리 청년, 대체 누구래요? 마을 모두가 호기심에 차서 소근거렸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하게 모든 화제의 중심에 서 있게 되 버린 붉은 머리의 청년은 머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편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시선을 도통 숨기기 어려웠다. 말끔한 도련님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었건만, 이 사람에게만큼은 유독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꾸며 웃어야 하는 사람였건만 그런 입장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불편한 건 당연했다. 후배의 입장으로 선배의 연인과 단 둘이 만나는 상황이라니. 

 스오우 츠카사는 정말 진심으로 이 자리가 어색했다. 얼음장보다 굳은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츠카사와 비슷하게 지금 상황을 머쓱해하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츠카사는 용기를 냈다. 


“제가 갑작스럽게 visit하여... 음, 실례를 끼친 듯 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 그. 부디 존칭은 그만둬주세요. 편히 말씀해주시길.”


 츠카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사쿠마 리츠의 바로 그 이사라 마오에게 듣는 존칭이라니 온몸에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스 쨩, 나의 마 군에게 건방지게 대하면...... 알지? 리츠의 가느다란 시선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랑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 군에게 굴면 막내의 엉덩이를 때려 줄 거야. 작은 미소와 함께 건내진 말은 어조만큼은 참 다정했다. 리츠는 매우 게으른 것을 제외하면 꽤나 좋은 선배였지만, 한 번 화가 나면 인정사정이 없었다. 츠카사는 이제껏 리츠가 화내는 것을 딱 한 번 보았다. 그리고 그의 분노를 공포 랭킹 순위권에 올렸다. 진심으로 화가 난 왕님 바로 다음으로 무서웠다. 

 리츠는 언제나 마오의 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고 있거나 일을 하지 않는 리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9할이 이사라 마오였다. 리츠에게 이사라 마오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막내인데다가 조금 고지식해서 과하게 부당하지 않은 명령이라면 선배라는 입장에서 시키는 말에 쉽게 수긍하고, 불만을 가져도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츠카사는 제일 떠넘기기 쉬운 상대였기에 츠카사는 마오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이었다. 츠카사는 마오의 집에 있는 검은 바탕에 하얀 고양이가 그려진 머그컵이 사쿠마 리츠 전용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정말 원치 않은 지식이었다. 


“저기, 그래서... 여기엔 무슨 일이시죠? ...일이야?”


 마오가 어색하게 덧붙였다.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츠카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츠카사는 그런 마오를 이해했다. 수도 왕궁 기사단 훈련실에 누워 느긋하게 자고 있을 리츠의 모습을 떠올리며 츠카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저가 하지 않아도 되는 추가업무에 한참 시달리다가 여기까지 와야 했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했다. 사실 조금 많이. 왜 하필 저냐는 질문에 스 쨩이 제일 좋은 가문이라서~. 그리고 막내잖아? 하며 나른히 웃던 리츠의 얼굴도 떠올렸다. 아직도 검술로 리츠를 이길 수 없어 하극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억울했다. 

 자연스럽게 츠카사의 얼굴에 심통이 묻었다. 생각에 잠겼다가 뾰루퉁해져버린 도련님을 보며 마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츠카사가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반듯한 서류였다. 


“이게 뭐에요? ...뭐야?”

“이곳에 sign 부탁드립니다.”

“사인? 왜?”

“이사라 씨를 스오우 가문의 가신으로 넣는 마지막 절차입니다.”


 평민에게 작위를 주는 제일 간편하고 빠른 방법이었다. 물론 엄청난 서류작업을 거쳐야 하고, 3대 이상의 전통을 가진 가주와 가주 후계자만 쓸 수 있는 방법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왕의 동의가 필요한다는 치명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바로 그 왕부터 간단하게 사인해서 던져줬다. 리츠의 부탁 한마디에 레오는 되묻지도 않고 제 앞으로 올라온 서류에 승인 도장을 찍었다. 그 모든 서류를 작성해 올려야만 했던 츠카사는 다시 한 번 더 억울해졌다. 기사단 막내의 표정에 약간 울망함이 섞였다. 아주 조금 서럽기도 했다. 


“스오우 공작가? 아니 내가 거기에 왜......?”


 마오는 얼이 빠져 되물었다. 왕국에 딱 하나뿐인 공작가 이름이 대체 왜 여기서 나오는 것인지 그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눈앞의 앳된 청년이 스오우의 이름을 손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 신분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리츠가 손님이 찾아갈 거라고 미리 연락을 해 주기는 했지만, 일하고 있는 직장의 후배라고만 써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거 이 마을에서 살던 사쿠마 리츠가 레이의 사정에 따라 이사하게 되면서 수도로 적을 옮긴 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되어버렸는지 마오는 몰랐으니까. 그가 순수히 능력만으로 작위를 받아 단 네 명뿐인 근위기사단의 참모로 일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시골이라 기사의 이름까지 흘러들어오지도 않았다. 쉽게 읽히는 암시를 끝없이 던져주었지만, 이사라 마오의 기억에 남은 사쿠마 리츠의 흔적이 너무 컸다. 어린 시절 작고 여렸던 사쿠마 리츠의 흔적. 다 큰 뒤에도 몇 번이나 만나서 그가 이미 건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사와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뒤 리츠는 적당히 포기했다. 나중에 현실을 보면 되겠지. 간단한 결론이었다.

 다만 귀족과 평민은 결혼하기 까다로웠다. 주변의 시선은 딱히 신경쓰지 않는 리츠였지만, 근위기사라는 그의 입장상 리츠의 불명예는 왕의 불명예와도 직결되는 과제였다. 그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기에, 리츠는 마오도 귀족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방법을 조사하고 안심했다. 생각보다 쉬웠다. 그 날로 리츠는 츠카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전혀 모르는 스오우 츠카사는 조금 더 어이가 없어졌다. 당장이라도 밖에 세워진 애마를 타고 수도로 달려가 훈련장에서 자고 있을 그에게 리츠 선배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신 겁니까를 외치고 싶어졌다. 조금 뺨이 붉어진 츠카사가 바닥을 한참 노려보다가, 시선을 올려 마오와 눈을 맞췄다. 어린시절부터 받은 교육의 결과였다. 보라색 눈동자가 오묘하게 빛났다. 


“리츠 선배가, 15년 전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아.”


 마오의 뺨이 화끈 붉어졌다. 츠카사는 마오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안심했다. 제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었다. 선배에게 명령과 부탁을 구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선사받은 츠카사는 리츠에게 물었었다. 왜 그를 귀족으로 만드려는 겁니까? 후배의 물음에 검은 머리카락의 선배는 오묘하게 웃었다. 그 요요한 눈웃음에 츠카사는 바짝 몸을 굳히고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휘어지는 붉은 눈동자 끝무리에 애정이 흘러내렸다. 마 군이랑 결혼할 거라서. 간단한 대답이었다. 동성이라는 문제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선선대 왕이 바꾼 국법은 이제 조금씩 생활에 녹아가고 있었다. propose는 하셨습니까? 츠카사의 물음에 리츠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물론, 15년 전에. 

 그 애들 약속으로 괜찮냐고 열 번도 넘게 물었고, 그 때마다 리츠는 걱정할 필요 없다며 일갈했다. 말을 꺼내기 직전까지도 불안했건만 이번에도 리츠의 장담은 맞는 모양이었다. 복숭아빛으로 물든 마오의 뺨이 꽤 사랑스러웠다.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복잡하게 사방으로 향하는 녹색 시선을 보며 츠카사가 슬쩍 웃었다. 그는 츠카사가 존경하는 선배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기꺼이 존중해야 마땅했다. 이제껏 했던 낯선 서류작업이며 선배의 부려먹음에 토라져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막내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는 그가 저에게 부탁해올정도로 선배는 이 사람을 좋아했다. 청년의 몸가짐이 한층 정중해졌다. 쑥스러움에 빠져있는 마오는 그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라도 좋으니, 선배께서 이사라 씨를 수도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escort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츠카사가 손을 내밀었다. 붉어진 얼굴로 벽을 한참 노려보던 마오가─츠카사는 입속말로 바보 리츠, 후배에게 뭘 시킨 거냐고. 하고 중얼거리는 마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정중하게 못 들은 척 했다─천천히 츠카사의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츠카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색 고운 하늘 아래 붉은 머리카락이 작게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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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고백

2016. 11. 19. 23:00 from ENSTARS/NOVEL

먼 미래 설정





 마오는 저택을 청소하고 있었다. 워낙 커다란 집인 탓에 몇 번이고 쓸고 닦아도 먼지가 나오는 게 저택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이 집에 살게 된 지도 상당히 오래됬지만, 정작 집주인이 챙기지 않는 탓에 집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건 모두 마오의 역할이었다. 리츠는 할 필요가 없다고 일갈하기는 했지만 역사 있는 저택이 먼지 속에서 삭아가는 걸 보는 쪽이 속이 상했다. 복도의 장식물은 모두 골동품이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들을 마른걸레로 조심스럽게 닦아낸 마오가 리츠의 방문을 열었다. 리츠는 여전히 침대 속이었다. 


“리츠, 일어나! 아침을 넘어서 지금 점심때라고.”

“으으으......”


 싫어... 꾸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은 이제 너무 익숙해진 것이었다. 마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설임없이 이불덩이를 흔드는 손길에 리츠가 몇 번이고 더 신음성을 내뱉었다. 심술쟁이... 골이 난 목소리에도 마오는 꿋꿋했다. 리츠! 단호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리츠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눈과 시선이 얽혔다. 마오의 입가에 별 수 없다는 미소가 걸렸다. 


“점심 먹자. 오늘은 나가봐야 한다며?”

“응...... 일이 있어서.”


 일찍 올 거지만. 리츠가 눈을 비비며 마오에게 엉겨붙었다. 온기가 곧장 닿자 마오가 반사적으로 리츠를 끌어안았다.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참으로 익숙한 것이었다. 리츠가 마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몇 번이고 리츠의 등을 도닥여주던 마오가 곧 리츠를 때어냈다. 이제 밥 먹자.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묻는 마오의 모습을 보며 리츠가 살짝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식사는 간단했다. 리츠도 마오도 거창한 식사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마오는 물만 홀짝이는 수준이었다. 입안에서 물을 굴리는 마오는 생각에 잠긴 기색이었다. 리츠는 마오의 식사량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마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컵을 내려놓았다. 턱을 괴고 저를 바라보는 마오를 보며 리츠가 표정을 반듯하게 폈다. 곧 눈매를 상냥하게 휘었다. 그 안에 맻힌 감정을 보지 못하며 마오가 물었다. 


“언제쯤 올 것 같아?”

“아마 한 시간... 하고도 반 정도?”

“알았어.”


 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 토마토 한 개를 집어먹는 것으로 저도 식사를 끝낸 리츠가 걸려있던 자켓을 입었다. 문가에서 마오가 리츠를 배웅했다. 다녀 와, 리츠.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똑같은 답례가 돌아왔다.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다녀올게, 마오.





 리츠가 집을 나서자마자 마오가 몸을 돌렸다. 조금 급한 걸음으로 서재에 들어간 마오가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을 돌돌 말았다. 네모난 문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청년이 힘을 줘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 하나 없는 문은 꽤 손쉽게 열렸다. 마오는 물끄러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응시했다. 며칠 전 발견한 비밀의 문이었다. 기억도 없던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 살았지만 처음 보는 문이었다. 내내 리츠가 집에 있었기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처음 본 순간부터 소름이 돋고 기분이 나빴다. 리츠에게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몰랐지만 마오는 계속 이 안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몇 번이고 망설이던 마오가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안쪽에서는 미묘한 냄새가 났다. 약품 냄새에 정체모를 무언가들. 소름이 돋았다. 불안하게 제 팔을 쓸어내린 마오가 계속 걸었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떨치기 어려웠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걸음소리만 어지럽게 울렸다. 계단이 끝났다. 마오가 마지막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보이는 광경은 그렇게까지 경이롭지 않았다. 마오는 천천히 시야를 채웠다. 벽 한 쪽 면이 사진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언뜻 보아도 마오의 사진들이었다. 다만 몹시도 낡아있었다. 마오는 물끄러미 그것을 응시했다. 너무나 오래되어 삭아가는 사진을 약품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릿하게 깨달았다. 장담컨대 마오는 그 사진이 찍힐 무렵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고개를 돌리자 수많은 인간 형태가 보였다. 언뜻 시신으로 착각했던 그것들은 모조리 인형이었다. 잘 만든 인형. 한 눈에 착각할 정도로 잘 만들어졌지만 결국 조금만 집중해보아도 인형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마오가 천천히 그것들에게 다가갔다. 하나, 둘... 눈대중으로 세어도 대충 열 구는 가뿐히 넘었다. 스물, 아니면 서른? 마오가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무기질한 녹색 눈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모조리 같은 외형이었다. 붉은 머리, 녹색 눈. 인형들에게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소리없이 침묵하던 마오가 천천히 손목을 들어 제 체향을 맡았다. 



“결국 이번에도 들어와 버렸네.”


 담담한 목소리였다. 마오가 고개를 돌렸다.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리츠가 보였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짐작하고 있던 얼굴에 마오가 시선을 내렸다. 어두운 방 안과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미슷한 것을 한참 노려본 마오가 시선을 들었다. 리츠는 슬퍼 보였다. 얼핏 비참한 것도 같았다. 단언컨대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오가 옅게 미간을 좁혔다. 


“왜 모른 척 해주지 않았어? 마오.”

“미안, 그럴 수 없었어.”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었는데.”

“그러게.”


 하지만 나는 벌써 알아버렸는걸. 마오가 인형들을 응시했다가, 사진들을 보았다. 사쿠마 리츠가 보물처럼 고이 간직해놓은 흔적들을 보았다.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을 보았다. 만들어내고 싶은 것을 보았다. 마오가 미소지었다. 곤란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의, 애정 가득한 미소였다. 사진 속의 청년이 가장 많이 짓고있는 표정과 매우 흡사한. 어쩌면 똑같은. 


“내 차례는 끝이네, 리츠.”

“응. 이제 잘 시간이야.”

“리츠.”


 마오는 천천히 다가오는 리츠를 응시했다. 마오의 바로 앞에서 리츠가 멈추자 마오가 손을 뻗어 그 손을 맞잡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리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오는 그 표정의 의미를 읽었지만 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오는 계속 웃는 얼굴로 마지막을 고했다. 기억나지 않는, 어쩌면 탄생부터 품었을 감정을 고백했다. 


“사랑해, 리츠.”


 인형의 생이 끝났다. 마오였던 인형이 그대로 뒤로 넘어지는 것을 리츠는 방치했다. 인형이 나뒹구는 소리만 방을 막막하게 채웠다. 조금 따뜻했던 손이 그대로 인형의 것으로 바뀌는 감각이 생생했다. 몇 번이고 제 손을 매만지던 리츠가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서른 여섯번째의 마오는 제일 이사라 마오와 닮아있었다. 마지막에 속삭인 말조차 어쩜 이리 닮았을까. 어쩌면 더 오래 살아주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보기좋게 기대를 배신당한 상태였다. 


 리츠가 손을 뻗었다. 이제껏 만든 인형들은 마법으로 만들어놓은 혼이 빠져나가자마자 한 곳에 모아 전시하여 방치했지만 이번의 마오는 제대로 시신으로 처리해주고 싶었다. 저에게 사랑한다 말해준 혼에게 대한 예우였다. 하얀 손이 인형의 이마에 닿았다. 매끈하고 차가운 이마였다. 


“이번 장난 끝.”


 인형이 부서져 먼지처럼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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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공백

2016. 11. 18. 22:41 from ENSTARS/NOVEL




 거리는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사람의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사라 마오는 사쿠마 리츠의 현관 대문에 기대어 멍하니 회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가 어깨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작게 내뱉는 숨결은 희게 물들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발갛게 얼기 시작하는 뺨이며 손끝을 천천히 매만지던 마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거리의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걸음소리였다. 자박자박 다가와 저를 응시하는 리츠를 보며 마오는 작게 웃었다. 눈썹을 한껏 내리고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난처한 미소였다.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의미가 가득 담긴 미소. 그 표정을 한없이 응시하던 리츠의 표정이 문득 일그러졌다. 든든하게 옷을 챙겨입은 리츠와는 달리 마오의 옷차림은 꽤나 가벼웠다.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조금 급해진 걸음으로 다가온 리츠가 곧장 마오의 뺨에 손을 얹었다. 싸늘했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 군.”

“리츠가 나를 데리러 올 것 같아서.”

“마 군은 가끔 바보같아.”


 고집쟁이. 마 군, 바보. 완전 바보. 투정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차마 막지 못해 흘러내리는 애정을 알고 있어서, 마오는 그저 곱게 웃기만 했다. 녹빛 눈동자가 꼼꼼하게 리츠의 얼굴을 훑었다. 하얀 얼굴, 붉은 눈동자. 살짝 위로 치켜올라간 눈매. 어여쁜 이목구비 모두 기억 속의 리츠와 똑같았다. 하나도 다르지 않은 사쿠마 리츠 본인이었다. 마오가 손을 들어 제 뺨을 짚은 리츠의 손을 감쌌다. 닿아 있는 리츠의 체온이 뜨거웠다. 얼어있는 뺨을 녹여줄 수 있을 정도로. 마오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얼굴을 직시한 리츠는 마오에게 붙잡인 제 손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잡아 내렸다. 한껏 가까워진 두 사람의 사이에는 이제 한 뼘의 틈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 군.”

“리츠가 보고 싶어서.”

“조금 늦게 만난다고 해서 마 군이 날 잊을 일도 없다는 걸 아는데.”


 그리고 잊어도 용서했을 거야. 상냥하게 덧붙여지는 말에 마오가 리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리츠는 조금 미간을 좁혔다가 물었다. 얼마나 기다렸어? 마오가 대답했다. 계절 두 개 정도.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제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리츠의 손길을 받으며 마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리츠.”

“응, 마 군.”

“그 때... 리츠의 손을 못 잡아줘서 미안해.”

“괜찮아.”


 내가 너무 서두른 것도... 미안해. 괜찮아, 이제는... 전부 용서해. 리츠가 속삭였다. 네가 쥐어주는 면죄부는 어쩜 이리 달콤한지. 마오는 조금 섧게 웃었다. 한 발자국 떨어졌다. 틈이 생기자 마주 볼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몇 분이나 한참을 응시했다. 리츠의 시선은 여전히 슬픈 기색이었다. 선 고운 눈매 끝에 감정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었다. 마오는 떨어지지 않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에게도 그 감정이 붙어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리츠가 눈을 감았다. 손을 내밀었다. 


“가자, 마 군.”

“응.”

“길이 엄청 멀 거야.”

“상관 없어.”


 마오가 환히 웃었다. 리츠가 내민 손을 붙잡아 텅 빈 거리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머리에 어깨에 닿았다가, 쌓이지 않고 떨어져버리는 눈송이들을 보며 두 사람이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닿아있는 네 체온만이 따뜻했다. 같은 세상에 함께 있었다. 네가 없는 세상에 내가 있기 너무도 힘겨웠다. 결국,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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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물들다

2016. 11. 12. 01:12 from ENSTARS/NOVEL

지인분 생일 선물로 작성한 글을 허락 하에 업로드합니다!

-






 미술상 사쿠마 레이는, 매년 초 그의 동생에게서 한 폭의 그림을 받곤 했다. 하얀 캔버스 속에 유려하게 그려진 젊고 생기 넘치는 사람.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림 속의 그는 조금씩 자라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로 시작하여, 오랫동안 소년이었고, 지금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형제이기에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눈, 빛을 표현한 붓칠 하나조차 사랑이 묻어 있었다. 이 그림은 그의 소중한 남동생이 집중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향이 공기를 기묘하게 맴돌았다. 훌륭한 작품이었다. 레이는 올 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그림 속의 청년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내며 그를 위해 비워놓은 벽의 빈자리를 채워 넣었다. 한 해의 시작이었다.

 



*

 




 젊고 재능 있는 유능한 화가. 거기에 덧붙여 외형마저 아름다운 화가는 주목받기 마련이었다. 사쿠마 리츠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미술상 중 톱으로 손꼽히는 사쿠마 레이의 하나뿐인 혈육이라는 점까지 합쳐져 리츠는 그 나이 또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화가였다. 미술계의 평가도 좋았고, 몇 번의 전시회도 성황리에 끝났다. 마치 백 년은 더 산 것처럼 연륜이 필요한 여러 가지 기법을 폭넓게 사용하는 그가 가장 잘 그리는 그림은 물감이 겹겹이 칠해진 밀도 높은 그림이었다. 수채보다는 유화에 능했고, 자연경관이나 풍경보다는 사람을 그리는 것을 즐겼고, 주의 깊은 관찰로 나오는 섬세한 표정묘사는 일품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라고 해야 하나, 고집이 있다고 해야 하나.’


평론가 중 누군가는 간단히 평했다.


‘편식이 심해.’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그의 그림을 딱 한 번만 둘러본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사쿠마 리츠는 종종 거리의 사람들이나 자화상, 제 혈육을 그리기도 했지만 늘 함께하는 모델은 언제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쿠마 리츠의 뮤즈였다. 시간의 흐름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사람. 수천 점이 넘는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 명의 소년. 거리에서 화가 본인이 발견해 데려온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성도 없는 거리의 아이였다. 조각상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들고양이같은 녹색 눈동자와 날렵한 몸매가 매력적이었다. 예술가 한 명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끔은 본인의 얼굴에 대고 무례한 소리를 하는 자도 있었다.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그리시지요. 출신도 모르는 더러운 자를... 리츠는 그 내려다보는 시선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미술상 형을 생각하여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런 인간들을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마 군의 가치도 모르는 바보들이야. 집에 돌아와 이불에서 뒹굴거리며 젊은 화가는 그리 평했다. 잠시 꾸물거리다가 저의 모델을 품에 끌어안았다. 운동을 즐기지 않아 얇게 말랐지만 부드러운 리츠와는 달리 단단하고 건강한 몸이었다. 동시에 몹시 따뜻했다. 리츠는 그 체온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 굳어있던 표정이 나른하게 풀렸다.


“걱정 마, 리츠. 신경 안 쓰니까.”

“응. 착하다, 마 군.”


 쓰다듬어줄까? 아니면 예뻐해 줄까? 아이 다루듯 어르는 목소리에 마오가 엷게 미간을 좁혔다. 마오가 리츠보다 어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 역시도 성인의 나이가 되었건만, 리츠는 가끔 마오를 처음 만났던 일곱 살 배기 어린아이처럼 대할 때가 있었다.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불평하는 마오를 보며 리츠가 슬쩍 미소 지었다. 이런 식으로 어린 아이 취급을 하면 마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마 마오는 리츠와 본인의 실제 나이 차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이 그 안에 묻혀있는데. 물론 말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또한 리츠는 제대로 마오를 어른으로 보고 있었다. 아이 취급을 하고 있었다면 이런 감정을 품을 일은 당연히 없었을 테니까. 리츠의 입가에 남몰래 감정이 묻은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문득 검지손가락이 마오의 얼굴선을 가만히 훑었다. 담백하게 쓸어내려지는 손길에 마오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리츠에게 고정시켰다. 몇 번 눈을 깜박인 리츠의 시선이 조금 가라앉았다. 장미색에서 루비색으로 변하는 차이였다. 장난꾸러기에 응석쟁이 어린아이에서 일을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그 손길의 기저에 깔린 것은 애정이었다. 마오의 얼굴에서 목선을 타고 몸으로 흘러내리는 손길에 마오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가 곧게 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그의 모델이자 뮤즈로 일했다. 감정이 절제된 손길정도는 별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마오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저도 리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조금 근육이 붙은 마오의 팔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리츠는 아름다웠다. 사실 나 대신 자화상을 몇 백 점 그리는 쪽이 더 잘 팔릴 것 같은데. 마오는 여러 번 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마오도 잘 생긴 미청년에 속했지만 리츠는 그야말로 명화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마오가 화가이고 리츠를 모델로 착각하는 사람도 적잖았다. 그럴 때마다 리츠는 점잖게 오류를 고쳐주었지만, 뒤에서는 마오에게 투덜거리고는 했다. 마 군의 아름다움도 모르다니, 바보 아냐? 그런 식으로.


“마 군, 그림 그릴래. 준비 해 줘.”

“지금 당장? 알았어.”


 리츠의 시선이 마오의 얼굴에 꽂혔다. 리츠는 꼼꼼히 마오를 살피다가 마지막은 꼭 눈을 응시했다. 언젠가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리츠는 간단히 답했다. 마오의 외모는 언제나 최고로 아름다우니 그 순간에 빛나는 녹빛의 색채를 보고 그림을 결정한다고. 오늘의 색은 그릴만한 가치가 느껴진 모양이었다. 정작 마오 본인은 모르는 차이였지만 리츠는 기민하게 사소한 것을 잡아내고는 했다. 화가의 직감일지도 몰랐다. 그림으로 완성된 화폭 속의 이사라 마오를 보면 그제서야 마오는 느즈막히 깨닫는 것이었다. 이 때, 이런 감정을 가졌고 리츠에게는 이렇게 보였구나. 하고. 리츠의 그림 속의 마오는 주로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수많은 얼굴을 보여줬지만 리츠는 행복에 잠긴 이사라 마오를 특히 좋아했다. 마 군은 언제나 예쁘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지만 사소한 행동이 다르다는 걸 리츠는 알고 있을까. 분노보다는 기쁨을 좋아했고, 슬픔보다는 즐거워하는 마오를 좋아했다. 그건 굉장히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서, 마오는 가끔 리츠의 그림을 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 사실을 리츠는 아마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영 몰랐으면 했다.

 

 눈을 감은 리츠가 이미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처음에는 잠드는 거 아니냐고 부던히 의심했던─눈을 감고 이불에 얼굴을 묻는 것을 보며 마오가 캔버스를 꺼내고 물감을 준비했다. 이미지를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대로 오래 두면 실제로 잠들어버리니 서둘러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렸고, 그러면 한동안 토라져버리니까. 처음에는 낯선 준비에 쩔쩔맸지만 지금은 눈 감고도 해낼 수 있었다. 자주 사용하는 물감에 파레트, 붓도 여러 종류. 유화 특유의 기름 냄새가 번졌다. 리츠가 가장 애용하는 자리에 의자배치까지 끝낸 뒤 가장 시선이 닿기 편한 장소에 앉은 마오가 리츠를 불렀다. 리츠, 준비 다 됐어. 짧은 부름에 리츠가 눈을 반짝 뜨더니 곧장 자리에 앉았다. 붓을 잡고, 의자에 앉아있는 마오를 한 번 본 뒤 곧장 붓을 놀렸다. 순백의 캔버스에 금세 색채가 번져 올랐다.


처음에는 몇 번이고 끊임없이 마오에게 시선을 던지던 리츠가 느릿하게 캔버스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오가 힐긋 시계를 응시했다. 한 시간. 이 시간을 넘으면 얌전히 앉아있는 마오는 없어도 괜찮았다. 리츠가 빚어내는 형상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필요한 거 아니야? 어릴 적 그리 물었던 적 있었지만, 리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까, 비는 시간은 마 군 하고 싶은 걸 해. 한 시간이면 충분해. 마오는 리츠의 모델이었기에 다른 화가들은 어떤지 전혀 몰랐지만, 리츠가 그리 말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정해진 시간을 채운 마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화 냄새가 맴도는 작업실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이들과 한 약속이 있었으니 리츠와 함께 먹을 점심을 준비하고 외출 준비를 해야 했다. 마오의 걸음걸이가 조금 급했다.

 


 리츠는 우아한 귀족 도련님 같은 얼굴과 달리 꽤나 편식을 했다. 못 먹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대한 안 먹으려 들었다. 최대한 조금 익힌 고기를 즐겼고 와인 종류를 좋아했다. 낮술은 안 된다는 마오의 철칙에 따라 해가 있는 시간에는 포도나 토마토 주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덜 익은 수준의 고기를 오래 씹어 먹는 것도 좋아했다. 덕분에 마오의 식성도 바짝 익히는 것보다는 살짝 익히는 쪽에 가까웠다. 리츠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생성된 식성이었다. 마오는 아침에 사 온 빵을 썰고 버터를 바르고 베이컨과 감자를 구웠다. 부엌에 고소하고 지글거리는 내음이 퍼졌다. 마오는 리츠를 위한 주스와 본인이 마실 커피까지 내린 뒤 작업실에 있는 리츠를 찾아보았다. 붓끝을 씹으며 캔버스를 노려보는 리츠가 보였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츠, 어디가 막혔어?”

“이 부분 색이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 지 고민 중.”


 캔버스를 노려보다가 파레트를 한참 응시하는 리츠를 보며 마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곁에 머물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도 많고, 미술 상식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지만 결정적으로 마오는 화가가 아니었다. 리츠의 그림에 무언가 조언을 해 줄 수는 없었다. 마오의 눈에 리츠의 그림은 전부 아름다웠으니. 그렇기에 마오는 다정하게 리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제야 리츠가 파레트에서 시선을 때고 마오를 올려다보았다.


“점심 다 됐는데, 지금 먹을래? 아니면 넣어둘까?”

“마 군 오늘 나간다고 했었지?”

“응. 점심 먹고 나가야 해.”

“그럼 같이 가.”


 리츠가 단박에 붓을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을 나서는 리츠를 마오는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자신의 뮤즈가 되어 달라며 손을 내밀었던 그 날 이후 리츠는 마오의 많은 것을 보장해주었고, 후원해주었고, 도와주었지만 마오의 시간만큼은 소유하고 싶어 했다. 무엇을 하던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상황에 처한 이사라 마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그런 리츠가 부담스러웠던 것도 같지만, 이제는 자신을 따라나서지 않는 리츠를 보면 그게 훨씬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이 리츠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게 될까 겁이 났다. 익숙해져 버리는 수준을 넘어 마오에게도 리츠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해진 결과였다. 마오가 잠깐 시선을 미완성인 그림으로 던졌다가,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점심식사는 언제나처럼 오순도순 했다. 바싹 구운 감자를 우물거리던 리츠가 손가락으로 포크를 돌리며 장난을 쳤다. 솜씨 좋게 하얀 손가락 사이를 오가는 포크를 보며 마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리츠. 마오가 타이르듯 부르는 목소리에 리츠가 턱을 괴었다.


 “바로 애들을 보러 갈 거야?”

 “아니. 성당에 들렸다가 가려고.”


마오의 말에 리츠가 짧게 미간을 좁혔다가 풀어냈다. 마오는 리츠가 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종종 성당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마오를 대단히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마오의 목소리에 감탄하고 칭찬해도 리츠는 마오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칭얼거렸다. 마 군은 나만 믿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왜 신을 믿고 그래. 흘리듯 불평하는 리츠의 목소리가 마오의 귀에만 언뜻 닿았다가 금방 사라졌다. 사실 리츠의 그림만 봐도 그랬다. 수많은 화가들이 한 번쯤은 그리는 소재를 리츠는 손대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도, 예수 그리스도도. 언젠가 딱 한 번 물었을 때 리츠는 아주 개구지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내가 그리는 것만큼 불경도 없을 걸.’


그 뒤로 마오도 리츠에게 이 소재를 꺼내지 않았다. 리츠도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으로 묻혀 버린 소재였다. 다만 성당이라는 이야기에 내심 못마땅함을 표현하는 리츠를 보며 미안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오늘은 뭐 할 거야?”

“글자랑 간단한 숫자 계산.”


 마오가 바게트를 삼키며 대답했다. 길거리에서 자라 수많은 동생들을 데리고 있었던 마오는 기적적으로 리츠를 만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곳에는 마오와 똑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많았다. 마오는 그 아이들을 돕는 방법으로 교육을 택했다. 그렇기에 리츠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신뢰를 쌓아 올렸다. 지금도 거리에 나서면 마오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웃어주는 아이들이 많았다. 마오는 그에 크게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리츠는 그런 마오의 행동에 같은 보람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마오가 좋아하고 예쁘고 행복하게 웃어주니 리츠도 좋아했다. 간단한 원리였다.


“글씨는 리츠가 더 잘 쓰니까, 애들한테 예시로 보여주게 종이에 알파벳 좀 써 줘.”

“나 엄청 비싼 인력인데, 부려먹는 거야, 마 군?”

“아니지. 도와달라는 거잖아. 부탁할테니까, 응?”

“흐음... 뭐, 마 군이 원한다면야......”


 리츠가 대충 근처에 있는 종이를 끌어와 깃펜으로 휘갈겼다. 마오도 오래 글씨 연습을 해서 단정하게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리츠만큼 귀족적인 글씨체는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종이를 채운 알파벳들을 보며 마오가 짧게 감탄했다. 대단하다, 리츠. 마오의 말에 리츠가 수줍은 듯 웃었다. 리츠는 마오가 무심코 하는 칭찬에 약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순수한 감탄을 좋아했다. 금세 의기양양해져서 조금 더 칭찬해 달라고 어리광을 부려 오기는 했지만.



 점심식사를 끝내고 제대로 정장을 갖춘 뒤 두 사람은 집에서 나왔다. 거리는 한산했다. 11월 중순, 초겨울이 되면서 다들 집을 잘 나서지 않았다. 날이 추운 탓이었다. 툭 하면 눈이 내리기도 했다. 길이 쉽게 더러워지니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면 나오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오늘의 하늘도 구름 가득 낀 흐린 하늘이었다.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 번 내리친 리츠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눈이 곱게 접혔다.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이 기분 좋아보였다.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잠자는 것을 즐기는 리츠는 추운 날씨를 좋아하지 않아서 툭 하면 이불 속에 파고들어버렸지만, 볕이 들지 않는 구름 낀 날씨는 좋아했다. 파란 하늘 아래의 리츠는 정말 아름다운데도 해가 하늘에 떠 있으면 어지간해서 집 밖에 한 발도 내딛지 않아서 가끔은 아쉽기도 했다.


리츠와 마오의 걸음 속도는 거의 같았다. 평소 리츠가 조금 더 느긋하고 마오가 조금 더 급했지만 둘 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맞췄다. 먼저 말해뒀던 것처럼 성당으로 향하는 길을 밟던 도중 리츠가 문득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형한테 편지가 왔었어.”

“그 사쿠마 씨?”


 마오가 짧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름은 많이 들었다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리츠가 많이 좋아하는 형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다. 아주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도. 리츠와 퍽 닮았다고 했고, 미술상으로써 명성도 드높았는데 리츠는 마오를 그와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 마오는 오랫동안 리츠의 뮤즈이자 모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건 마치 제 보물을 숨기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태도와 닮아 있었다. 레이는 마오를 만나게 해 주지 않으려는 리츠의 모습을 보고 그저 귀엽다 웃어 넘겼다고, 리츠에게 들은 적 있었지만. 마오가 가만히 리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리츠는 옅은 호수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이 저번에 맡겼던 그림은 다 팔았다고, 값을 좋게 받았대.”

“그래? 잘 됐네.”

“받은 돈은 나 준다는데 내일은 레스토랑이나 갈래, 마 군?”


 이거 데이트 신청 같은 거야. 리츠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보기 좋게 어여삐 휘어지는 눈매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마오가 덜컥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스스로에게 당황하여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붉은 귓가는 절대 추위 탓은 아니었다. 리츠의 입가에 조금 더 미소가 번졌다. 작게 위아래로 끄덕여지는 고개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물들어버린 귀도 목덜미도 가리고 있었다. 살짝 시선을 맞추고 쑥스러운 듯 웃는 녹안을 보며 리츠도 환히 웃었다.

 


 성당, 그 다음은 아이들이 있는 낡은 집.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는 마오를 리츠는 저 멀리에서 겨우 바라만 보았다. 성당 안으로 발도 들이지 않았다. 아직 어린 리츠는 성당 안에서까지 자유롭게 행동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퍽 성스러워 보이는 마오를 한참 응시할 뿐이었다. 마오는 자신에게 리츠를 내려주었다며 신을 꽤 신실하게 믿었다. 그 말을 들은 리츠는 조금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신에게 그를 빼앗길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생각도 없었다. 영원은 독이다. 자신을 원망하는 마오같은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이 끝나도 다음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고운 꽃 색 머리카락도 예쁜 나뭇잎 색 눈도 시야에 새기듯 응시하던 리츠가 문득 작게 웃었다. 기도를 끝낸 마오가 뒤돌아 리츠를 보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성당을 빠져나와 리츠의 옆에 서는 마오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리츠가 푹 빠진 미소를 길게 그렸다. 애정 짙은 미소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오는 정말로 선생님 같았다. 리츠는 낡은 집에 만들어진 교실 뒤편에서 마오만 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오를 위해 들였던 가정교사에게 리츠도 같은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리츠는 이미 레이에게 모든 것을 학습한 뒤였다. 열심히 배우는 마오가 귀여워서 같이 앉아 지루한 수업을 들었었지만. 마 군 선생님한테 배웠더라면 나도 성실한 학생이었을 텐데. 아닌가, 훨씬 불성실한 학생이었을지도? 리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글자를 쓰고 숫자를 더하고 빼는 마오의 표정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선생님, 하고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즐거워보였다. 아이들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않고 교육의 중요성도 그닥 실감하지 못하는 리츠는 잘 모르는 감정이었다. 저런 표정은 나랑 있을 때만 보여주면 좋을 텐데. 지팡이에 턱을 괴고 리츠가 길게 비음을 흘렸다. 하지만 욕심을 부려서 미움 받는 쪽이 훨씬 무서우니까 속박할 수는 없었다. 마오가 행복한 것이 좋았다. 예쁘게 웃어주는 쪽이 좋았다.


 아. 리츠가 짧게 감탄을 흘렸다.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글씨를 따라 쓰게 시킨 마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리츠와 눈을 마주했다. 색 고운 시선들이 얽히는 순간 곱게 피어나는 미소에 문득 숨을 삼켰다. 순진한 애정과 신뢰로 피어나는 색채가 눈이 부셨다. 리츠가 작게 손짓했다. 마오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리츠에게 다가왔다. 왜? 입모양으로 묻는 마오의 손을 붙잡았다. 망설임 없이 조금은 거칠고 펜을 잡은 굳은살이 남은 그 손바닥에 깊게 입 맞췄다. 마오의 몸이 바짝 굳었다. 깊게 한 번, 가볍게 두 번. 마무리의 짧은 키스로 작은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리츠가 화사하게 웃었다. 좋아해, 마 군. 입모양으로 벙긋거린 그 마음을 마오는 대번 알아들었다. 확 불이 번졌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글씨 연습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리츠를 응시했다. 키스 받은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던 마오가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끄러움에 살짝 고민하는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리츠가 뭐라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리츠에게 키스 받은 바로 그 손바닥에 짧게 입 맞췄다. 질끈 감은 눈이며 온통 붉은 꽃 색으로 물든 뺨이 짙었다. 덜그덕. 리츠가 순간 놓칠 뻔 한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작게 입이 벌어졌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저를 보는 리츠를 보며 마오가 쑥스럽게 시선을 피했다가, 입을 우물거렸다. 나도. 입모양으로 벙긋거려 작게 속삭인 답변에 리츠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좋아해. 펑 터질 듯 가득한 감정이 온 몸에 가득 들어찼다. 길게 흩어진 호흡이 유독 행복했다. 둘 모두 잔뜩 붉은 색이었다. 상대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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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목도리

2016. 11. 5. 23:10 from ENSTARS/NOVEL



 붉은 털실을 오밀조밀 덧대고 엮어서 만든 두툼한 목도리 하나. 지금보다 생존자가 많았을 때 목숨을 걸고 들어갔던 백화점에서 문득 눈에 띄어 집어왔던 물건이었다. 한여름이었던 그 때는 괜히 음식 하나라도 더 집어올 것을 손 하나를 낭비했던 걸까 고민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과거의 탁월한 선택에 찬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초겨울 이사라 마오의 몸에 둘러져 온기를 주는 건 그게 고작이었으니까. 그것마저도 사치에 가까웠다. 다들 부족한 여름옷을 모으고 끌어안아 덮어 살고 있었으니까. 이사라 마오가 과거 그 목도리를 사수하기 위해 몇 번의 음식을 포기했기에 지금의 목도리가 온전하게 그의 소유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마오는 그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누가 그것을 핑계로 시비를 걸어올 지 몰라 경계를 놓을 수 없어서 지나치게 피곤하기도 했다. 살아있는 입도 적었지만 그만큼 물자도 턱없이 부족했고, 겨울이라는 혹독한 계절 속에서 살아남기에 지금의 상황은 과하게 피폐했으니. 방비벽 안쪽 사람들 사이의 규칙에 따르면 싸움은 무엇보다도 엄격하게 금지되는 문제였지만, 누군가를 상하게 하고 물자를 훔쳐오는 일은 그만큼이나 빈번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눈감아버리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상대를 그만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전투원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의미였음으로. 그렇게 다친 사람은 열에 아홉은 죽었지만. 


 아직은 초겨울이니 낮의 햇볕에 충분히 몸이 녹지만,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오면 어떻게 되려나. 마오는 불편한 표정으로 방위벽 바깥을 노려보았다. 손에 닿은 붉은 목도리가 은근히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파란 하늘은 쪽빛 곱게 물 든 것처럼 아름다웠는데 그 아래의 세상은 핏빛 물이 들어있었다. 마물이라고 통칭하는 생명체가 등장한 것이 올 해 늦봄. 세계 절반을 집어삼킨 건 초여름이었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각 나라나 지역마다 움직이는 마물들은 제각각 다르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섬나라인 일본에 내려앉은 괴물은 좀비였다. 숫자가 많고 전염성이 높았다. 백신은 당연히 없었다. 좀비 자체는 마물들 사이에서도 급이 낮은 마물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땅에 발을 디딘 좀비는 이성은 있었다. 물려서 전염된 휴먼 베이스 좀비들은 이성이 없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물었다. 지인의, 사랑하는 사람의 좀비가 자신을 물어뜯으려 하는 것을 사람들은 많이 막지 못했다. 희생은 거대했다. 


 방벽으로 보호받는 구역은 이 나라에 기껏해야 세 구역 정도. 저 먼 홋카이도와 그나마 가까운 오사카. 마오가 살고 있는 도쿄까지 세 곳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온전히 좀비의 나라가 되었다. 황폐한 땅 너머로 썩어버린 몸을 질질 끌고 다니는 괴물들이 나다녔다. 마오는 바깥을 돌아다니는 전투원이 되기에는 부족했지만 방비벽 내부에서 정보를 관리하고 사람들을 보살피는 정부 비슷한 기관에는 소속되기에 충분했다. 아이돌이었던 과거 역시도 그에 한몫했으리라. 그만큼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었으니. 가족들은 모두 방비벽 바깥에서 돌아다녔고, 살아남은 친구들도 몇 되지 않았다. 스바루와 호쿠토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능력을 인정받는 전투원이었고, 마코토는 저와 같은 정부 아래의 방송 연락통 아래에 있었다. 같은 클레스의 유즈루는 토리와 오사카 방비벽 안쪽에 히메미야와 함께 생존을 확인했고, 회장과 부회장 역시도 그 쪽에. 아라시는 한 명을 제외한 나이츠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이곳의 전투원이었고, 미카와 코가는 행방불명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행방불명은 암묵적인 죽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 역시도. 

 사쿠마 리츠 역시도 행방불명이었다. 


 살아 있을거야. 마오는 가끔 그렇게 말했다. 호쿠토나 나이츠의 선배들과 만날 때만 내뱉는 말이었다. 특히 코가와 친했던 스바루나 마코토 앞에서는 못 하는 말이었다. 코가 역시도 리츠와 똑같이 행방불명되었으니. 하루에도 최소 몇십명씩 사람이 죽어나갔다. 바깥에 나가서 물자를 챙겨오려다가 죽었고, 가끔 방비벽을 뚫고 들어오는 좀비를 죽이기 위해 죽었고, 아주 가끔 하늘을 나는 하급 마물에게 잡혀가 죽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비참한 희망은 혼자 품고 있는 게 미덕이었다. 생존에 관련된 희망은 가장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마오도 그것을 알았다. 다만 아이돌이라는 이름이 부질없어진 지금까지도 리더라는 인식이 남은 호쿠토나, 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나이츠의 멤버들에게는 유독 빗장이 누그러졌다. 생각을 공유하고 작은 불꽃에 장작이라도 조금 더 던져주고 싶다는 생각 탓이었다. 가장 어린 츠카사는, 리츠의 이름만 들어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서 말할 수 없었지만. 


 릿쨩. 마오가 고개를 숙였다. 붉은 목도리를 집어온 이유도 알았다. 눈에 띄었던 이유는 붉은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츠의 눈처럼 고운 붉은 색을 두고 갈 수 없어 집어왔었다.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마오는 절망적인 그리움에 잠겼다. 보고싶었는데 볼 수 없었다.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세계가 망가지고 사람들의 비명이 연무곡처럼 퍼졌던 그곳은 전파조차 터지지 않았다. 스케줄로 떨어져있었으니 서로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살아있어주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방비벽 안으로 들어왔던 순간까지도 그곳에 리츠가 있기를 기도했다. 우연히 나이츠의 멤버였던 아라시와 눈이 마주친 순간 리츠에 대해 알 수 있을것이라는 사실에 기뻐했고, 그는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나이츠 모두 있는 그곳에 리츠 홀로 없었다. 

 마지막까지 리츠와 함께 있었다던 레오가 말했었다. 릿츠는...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낮게 떠진 녹빛 눈동자에 선득하게 비쳤다가 사라진 감정이 무엇인지 마오는 몰랐다. 다만 타오르는 분노 하나만을 읽었다. 어떠한 방법으로 기사를 잃은 왕은 분노하고 있었다. 릿츠는 살아 있어. 그 목소리에 담긴 확신이 너무도 분명해서, 마오는 절박하게 그를 믿었다. 그 뒤 레오는 다시는 리츠의 마지막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릿쨩, 어디 있어? 마오는 아무 건물 벽에 바짝 붙어앉았다. 등에 닿는 냉기가 서늘했다. 밤이 오고 있었다. 마물이 기운을 얻는 시간. 이 밤 안에 또 몇이 죽어나갈까 자조적인 계산을 해 보았다. 동물 형태의 하급 마물들이 언제 방비벽 안에 들어올 지 모르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안전하다는 걸 알았지만 의욕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지쳤으리라. 


 릿쨩... 릿쨩. 어리광처럼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유독 달았다. 오래 부르지 못한 이름이었다.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부르지 않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릿쨩, 살아있지? 불신이 깔린 물음에 마오는 조금 더 비참해졌다. 처음에는 살아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흐렸다. 어쩌면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주 들고 있었다. 괴로웠다. 리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조금씩 익숙해진다는 사실이 제일 괴로웠다. 


 보고싶어. 릿쨩, 보고싶어. 살아있다면 빨리 와 줘. 응? 릿쨩... 애원처럼 이어지는 소리가 노래처럼 들렸다.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텅 빈 거리에서 가로등 불 하나 켜지지 않는 거리는 어둠이 삼킨 것처럼 오싹한 감상을 남겼다. 그 안에 파묻혀 마오는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죽었다면 찾아와 주기를. 살았다면 더더욱 찾아와주기를 빌면서. 빌고, 또 빌고. 이름을 불러서 그를 불렀다. 찾아올 수 있도록. 그 목소리가 등불이 되어 안내해주도록 끊임없이 호칭했다. 

 그 앞에 까만 구두가 가볍게 설 수 있도록. 


“마 군.”


 제일 먼저 검은 구두, 반듯하게 다려진 검은 바지, 검은 자켓 안에 하얀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 보석으로 장식된 넥타이핀. 달처럼 희고 부드러운 선의 예쁜 얼굴. 붉은 눈동자, 밤하늘 색 머리카락. 참 현실감 없었다. 지저분한 이 세계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참 깨끗하고, 고운 차림새였다. 피아노를 치는 손이 다가와 마오의 뺨을 감쌌다. 전부 보였다. 닿으니 적당히 서늘한 체온도 닿았다. 


“마 군.”


 제대로 부르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가 태풍 속의 풀잎처럼 연약하게 흔들렸다. 벌어졌다가, 다물어졌다가, 말을 삼킨 마오가 리츠를 붙잡았다. 손에 잡혔다. 가짜? 그렇게 말하기에는 리츠의 눈 속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붉은 눈동자에 모든 감정이 쏟아져내렸다. 리츠의 모습을 한 생명체에게 날을 세우기에 이사라 마오는 그를 너무 오래 기다렸다. 너무 오래 보고 싶었다.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위협적인 생명체에게는 제일 먼저 경계를 해야 할 터인데, 마오는 이곳의 규칙을 모두 무시하고 리츠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죽어도 좋았다. 드디어 리츠가 와 주었으니. 


“마 군. 마 군이 나를 불러줬잖아. 이름 불러줘, 응?”

“......”

“마~ 군~.”


 안 불러 주는 거야? 응? 마 군~. 칭얼거리는 듯 보채는 목소리가 너무 그리워서 마오는 눈물을 삼켰다. 네가 여기 있었다. 사쿠마 리츠가 여기 있었다. 이제는 꿈이어도 환상이어도 마물이어도 좋았다. 자신을 사랑해주고 시선에도 행동에도 애정이 묻어나는 리츠를 볼 수 있었으니 괜찮았다. 


“릿쨩......”

“응, 마 군.”


 리츠가 대답했다. 겨우 대답해줬다. 마오가 리츠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만나도 여전히 곱고 깨끗한 그에게 흉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엉망진창에 눈물로 젖어 있을 터이니. 


“살아 있었는데, 왜 일찍 안 왔어......”

“미안, 나오기가 힘들었어.”

“어디 있었어.......”

“혈족이 있는 장소. 우리가 너무 인간에게 우호적이라 갈등이 조금 있었거든......”


 웃기게도, 그동안 참았던 피도 제공해주고 수면패턴도 맞춰준 덕분에 형도 나도 본래 힘이 돌아와버렸지만. 리츠는 그 말까지는 섯부르게 내뱉지 않았다. 덕분에 다 뒤집고 권력을 아예 찬탈하느라 마오를 찾아오는 게 늦어버렸다. 붉은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났다. 혀끝으로 훑은 송곳니 끝이 유독 날카로웠다. 리츠가 마오에게 뺨을 부볐다. 마오가 그리워했던 만큼 리츠도 그리웠다. 피 향이 차단되는 먼 곳에 있었으니 마오의 생존을 확신할 수 없어서 미치는 줄 알았었다. 저택에서 나와 숨을 크게 마셨을 때 가장 먼저 마오의 향을 맡고 어찌나 안도했던지. 리츠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나랑 같이 가자, 마 군.”

“응?”

“인간 전부는 무리지만, 마 군이랑. 나이츠의 동료들이랑... 그래, 마 군이 소중히 여기는 몇 명 정도는 괜찮아.”


 내가 돌봐줄게. 내 이름 아래에 있자. 다정하게 속삭여주는 목소리에 마오는 순간 의문을 품었다. 그 말은, 마치. 마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마치...... 품에서 마오를 떨어뜨린 리츠가 다정히 웃었다. 마치, 그 역시도 마물인 것처럼 들려서. 부드러운 미소 너머로 보이는 송곳니가 반짝였다. 그런 것처럼 들려서......


“나랑 같이 살자, 마 군.”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응시했다. 어둠이 깔린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한 번 리츠의 얼굴을 보았다. 오래 기다렸던 사랑하는 사람. 이 피폐한 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부 소속인 마오가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의무가 마오의 발목을 잡았다. 


“......응, 그러자.”


 그렇지만. 길게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뜬 마오가 그 손을 맞잡았다. 그렇지만, 곁에 있고싶었다. 함께 가 달라는 말이, 소중한 사람들도 함께 같이 살자는 말이 마냥 기뻤다. 이사라 마오가 지쳐 있다는 증거였다. 저를 움켜쥐어주는 리츠의 모든 것이 기쁘기만 해서, 마오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젖은 뺨에 다시 눈물 한 방울 떨어졌다. 리츠의 손길에 금방 지워질 젖은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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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