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게 외로웠다. 사와무라는 이제 막 소년에서 어른이 되려고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원하지 않았던 성장통은 가혹하리만치 강렬하게 찾아온 불청객이었고, 사와무라는 별 수 없이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부정하기도 많이 부정했었다. 하지만 사와무라의 성정은 결국 그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웃었다. 고민걱정 하나 없는 것 같은 밝은 미소는 사와무라에게서 손꼽히는 장점 중 하나였다. 사와무라는 자신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다. 특히 누군가가, 자신의 웃는 얼굴을 사랑스럽노라고. 솔직하지 않은 그 사람이 드물게 솔직하게 말해줬었으니까. 더더욱 그랬다.
아침이었다. 새벽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샌 사와무라는 해가 뜨는 것을 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이도의 아침은 일렀고,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 해가 뜬다면 모두가 일어날 시간이었다. 물론 오늘은 드물게 쉬는 날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들 자율연습을 꾸준히 참여하는 성실한 야구소년들이었으니까. 사와무라는 조금 개구진 표정으로 웃었다. 발끝으로 땅을 조금 긁기도 했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제 코밑을 비비며 기대어린 모습을 감추질 못하던 사와무라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그 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예민하게 귀에 집중했다. 조금 낮고, 자박자박. 거기에 제일 먼저 불펜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손에 꼽힐 정도였다. 아침햇살을 반사하는 황금색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그리고 결국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며, 사와무라가 활짝 웃었다.
“미유키!!”
다행이다, 미유키가 제일 먼저 왔어! 곧장 그에게 뛰어가 바로 앞에 선 사와무라가 손을 뻗었다. 유령이라도 본 듯 어리벙벙한 표정의 미유키를 보며 짓궂게 웃는 것 역시도 잊지 않았다.
“사탕 주십쇼, 미유키!”
트, 트릭? 오어... 뭐더라. 암튼 그거! 웃으며 외치는 사와무라를, 미유키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몇 번이나 제 눈을 깜박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미유키의 손을 사와무라가 맞잡았다. 손이 잡히는 순간 미유키가 살짝 몸을 떨었다. 그 손을 이끌어 제 뺨에 가져다댄 사와무라가 곱게 눈을 접었다. 특유의 활기참을 잠시 접어두고, 드물게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미유키? 사탕 주지 않으면 장난칠 검다?”
“..,언제부터 사탕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푸딩이면 더 좋죠.”
그치만 사탕도 싫어하진 않슴다?! 절 그렇게 모름까, 미유키 카즈야!! 큰 소리로 소리치면서도 사와무라의 손은 미유키에게 닿아있었다. 미유키의 손끝이 조금 움직였다. 느릿하게 사와무라의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몇 번 눈을 깜박이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미유키가 잠시 입을 벙긋였다. 소리로 구현되어 나오지는 못한 무언의 말들이 그 안에서 부서졌다. 완성되지 못한 말들을 차마 뱉어내지는 못하고, 미유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여러가지 감정들을 소리치고 있는 그 눈이 대신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한 달... 만이네.”
“음, 그렇죠?”
“고작, 한 달.”
겨우 짧게 한 문장을 뱉어내는 미유키의 말에, 사와무라가 단박에 긍정으로 답해주었다. 그래, 고작 한 달 만이었다. 아주 길고, 그보다 더 짧은 한달이었다. 사와무라가 슬쩍 개구지게 웃었다. 그렇게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줄 정도로 긴 한달이었다. 사와무라에게는.
“왜... 지금 보이는 거야?”
“오늘이니까?”
미유키의 그 말이 이제서야, 라는 원망이 섞인 말이라는 걸 알았다. 사와무라가 조금 즐겁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이 할로윈이라는 거 암까?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온다는 날, 뭐 그런 거. 사와무라의 말에 미유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 변화의 의미를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모른 척했다. 그에게 한 달은 정말로, 정말로, 아주 긴 한 달이었으니까. 성장통을 겪고 그것을 이겨낼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고양이마냥 치켜올라간 황금색 눈을 곱게 접고, 사와무라가 웃었다.
“사탕 줘요, 미유키.”
“...사탕같은거 가지고 다닐 리가 없잖아.”
“그럼 장난을 받으십쇼.”
무슨 장난을 칠 건데? 미유키가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 말에 사와무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뭘 하든 안 통할 것 같으니까 제 멋대로 굴 검다. 공이나 받아주십쇼!”
맘껏!! 아주 온종일 던질거니까!! 신나게 소리치며 사와무라가 손에 들린 글러브를 흔들었다. 미유키가 느릿하게 글러브를 보았다가, 제 손의 미트를 보았다. 그리고 사와무라를 보았다가, 보았고, 또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예전에는 해주지도 않던 흔쾌한 허락이었다.
각자 그들이 서야 할 자리에 가서 섰다. 미유키가 미트를 대고, 사와무라가 공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글러브 너머의 황금색 눈이 노을처럼 불타올랐다. 그것 역시도 아주 오래 전에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유키는 자신을 향해 공을 던지는 사와무라를 조금 멍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글러브가 있는 곳으로 정확하게, 변칙 폼과 지저분한 공. 변한 것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좋은 소리를 내며 미트로 빨려들어오는 공을 잡으며, 미유키는 아주 잠깐 사와무라와 눈을 마주쳤다. 시선이 얽히는 순간 사와무라가 기분좋게 웃었다.
문득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미유키가 미트 속에 들어온 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정말 찰나의 시간 사와무라에게서 눈을 땐 것에 불과했다. 그 공을 쥐어서 나이스 볼, 하고 사와무라에게 돌려주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글러브 하나만 놓여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미유키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펜은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라고는 미유키가 유일했다. 허. 미유키가 짧게 숨을 뱉었다. 천천히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표정은 형편없이 구겨져있었다. 마치 꿈이라고 꾼 것 같았다. 아니면 환상이라도 보았을까. 하지만 그 전부가 꿈이라고 한다면... 제 미트 속에 얌전히 자리잡은 공 하나만이 현실을 이어주는 작은 끈이었다.
좀 더 크게 칭찬해주십쇼!! 사와무라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미유키는 자신보다 18. 44m 거리에 떨어져 서 있는 후배를 바라보며, 잠시 멋쩍게 미소지었다. 물론 포수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잠시 자신의 미트 속에 들어온 공을 바라보던 미유키는 그것을 사와무라에게 던졌다. 가뿐히 그것을 받아낸 사와무라가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며, 미유키는 다시 포구자세를 취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현재의 공 주고받기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공을 받을 때마다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합니다.」
공을 받을 떄마다 울려오는, 이 목소리를 듣고있다보면.
세상에는 개성이라는 것이 있다. 과거 흔히 소설책같은 곳에서 나오고는 했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된 지 오래인 능력들이었다. 개인마다 개성은 모두 달랐고, 그 중 세이도 야구부 소속 미유키 카즈야가 가지고 있는 개성은 사이코메트리였다. 물건을 만지거나 사람과 접촉하는 것으로 그 과거와, 기억과, 얽혀낸 생각들을 읽어내는 극히 드물게 발현되는 능력. 미유키는 개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능력자였고,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태어날 적부터 지니고 있던 개성이었기에 이제는 멋대로 흘러들어오는 기억을 잊어버리는 데에도 능숙해졌고, 타인의 기억과 생각을 읽는 것에 무덤덤해진 지 오래였지만 이 목소리만큼은 미유키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처음 들었던 그 순간부터, 익숙해질만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미유키는 투수가 자신에게 공을 던져주는 것이 좋았다. 포수라는 포지션은 미유키가 독점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더군다가 공을 던질때의 투수의 생각이란 기본적으로 단 하나. 미트에 던져넣는다는 생각이 제일 뚜렷하기 때문에 다른 잡생각이 끼어있는 경우가 적기도 했다. 그건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생각을 읽어버리는 미유키를 한결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기에 미유키는 자신이 받은 공에 다른 생각이 많이 담겨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미유키가 지금 상황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그가 상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명확했다.
“사와무라, 늘 말하지만... 너 너무 잘 들려.”
“큽, 시끄럽슴다!! 멋대로 듣지 마십쇼!!”
그걸 조절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지... 미유키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버럭버럭 소리치는 사와무라를 보며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사와무라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이해했지만, 이쪽도 꽤나 머쓱했다. 개성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항력의 부분이 존재했기 때문에, 능력의 주인인 미유키도 강하게 품은 감정은 도무지 무시할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과하게 잘 들렸기 때문에.
야구공 하나에 품은 감정은 강하고, 선명하고, 그리고... 눈부셔서. 미유키는 문득 제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의 감정을 알게 된 것은 사와무라가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미유키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것도 그와 비슷한 때였다. 아니, 사실.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곧 좋아할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사와무라의 공을 받을때마다, 정말 올곧은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그 어떤 것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오롯함이었다.
「좋아합니다.」
「좋아해요.」
「미유키도, 미유키의 미트도.」
「전부 좋아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온 미유키였는데도 그 목소리를 듣다보면 쑥쓰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그나마 시합 중에는 시합의 승리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린다는 점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불펜에만 들어와서 공을 받게 된다면 어김없이 목소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손끝이 간질간질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야구에 제대로 집중하기 위해 입안의 여린살을 몇 번이고 깨물수밖에 없었다.
미유키가 익숙하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여유로운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능숙한 웃음이었다.
“도대체 언제 나한테 고백할건데?”
이 질문도 벌써 몇 번째 던진 질문이었더라. 대답은 늘 정해져있었다. 사와무라의 목덜미까지 전부 발갛게 달아올랐다. 고양이처럼 뾰족해진 눈이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쩔쩔맸다.
“조금 더...! 좀 더 있다가... 이익, 기다리십쇼!!”
그럼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라. 처음 설레는 심정을 감추며 미유키가 물었을 때부터 변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미유키는 밖으로 나와 기숙사 복도를 걸었다. 제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 표정이 조금은 흐렸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본 것은 늘어진 빨랫감이었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던 미유키는 문득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그 시선의 끝에 잡힌 것은 유니폼의 뒷면이었다. 18번이 달려있는 유니폼. 사와무라의 것이었다. 미유키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개성을 욕심대로 써 본 적이 아예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미유키는 나름 제 기준에 맞게 능력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은, 그 기준에서 조금 삐끗하는 정도였다.
망설이기는 했지만, 결국 결단은 빨랐다. 미유키는 유니폼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그 안에 잠들어있던 기억들이 쏟아져내려왔다.
「에이준 군, 고백하지 않을거야? 미유키 선배,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던데...」
「시선, 자주 있고.」
「그! 그야! 좀, 그렇지, 만!」
「안하는 이유라도 있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 속에 세 명의 1학년이 비춰졌다. 세탁기 앞에 옹기종기 나란히 서 있는 세 사람 중 사와무라의 표정이 특히 엉망이었다. 당황해서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미유키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나야 당연히 하고 싶지만, 그게...」
「그게?」
「그 앞에만 서면, 엉망이 되어버려서.」
사와무라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크러뜨렸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시선을 피해버리는 모양새가, 쑥쓰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대로 미유키 앞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심장이 단련되면.」
「......」
「그 때 할거야.」
아아, 그래. 코미나토의 표정에 적당함이 서렸다. 후루야는 대충 돌아가는 빨래로 시선을 돌렸다. 반 쯤 괜히 들은 것 같다는 표정도 묻어났다. 물은 사람들 치고는 굉장히 무성의한 태도였지만, 사와무라는 그에 조금 안도한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와무라를 보는 것을 끝으로, 미유키가 유니폼에서 천천히 손을 때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그에 얼굴을 묻었다.
(http://milkyway0218.tistory.com/130)에 조금 이어지는 글... 로 쓰려다가 썰로 전환한 것. 짧음...
너구리, 개과, 야행성. 이런 정보같은건 다 필요없고... 멸종위기등급, 관심필요.
그래, 데리고 나온 내 잘못이지! 아주 관심을 얼마나 퍼줘야 만족할건데?!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뒤를 졸졸 쫒아다니며 속으로 버럭버럭 소리쳤다. 물론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리고 실제도로 신인것같은 미유키는 모조리 듣고 있을 테지만, 들으라고 불평하는 것이었으니까 신경쓰지 않았다. 뒤통수가 따끔따끔할텐데 돌아보지도 않느냐, 미유키 카즈야! 사와무라가 속으로 소리쳤지만, 앞서 걷는 미유키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완전히 인간의 모습을 할 수는 없지만, 귀나 꼬리. 하나 정도는 숨길 수 있다는 소식을 느즈막히 전한 미유키는 곧장 너구리 꼬리를 숨겨버렸다. 물론 그 특유의 쫑긋한 귀는 여전히 머리 위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걸 모자로 꽁꽁 숨겨놓은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뒤를 열심히 쫒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같이 나가자고 한 쪽은 저쪽이면서 왜 이리 주변을 잘 아는 기분이지? 사와무라는 못마땅하게 미유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유키가 유연하게 몸을 트는 것과 동시에 그 몸이 순식간에 수축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너구리의 모습이 된 미유키가 부드럽게 사와무라의 어깨에 올라탔다.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뭠까?! 사와무라가 속으로 소리쳤다. 쉿, 조용히 해.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사와무라의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미유키가 발을 미끄러뜨려 사와무라의 품 속으로 위치를 옮겼다. 반사적으로 사와무라가 그 몸을 받아들었다. 품 속에 끌어안은 온기가 따끈따끈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고쳐 안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잘은 모르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제 신상에도 좋을 것 같다는 본능이 앞섰다. 서둘러, 사와무라. 미유키가 사와무라의 본능을 조금 더 부채질 해 주었다.
“신이라면서.”
“미안.”
“신인데.”
“미안해.”
“신 님이시면서.”
“미안해, 에이준.”
“다른 말 없슴까?”
“좋아합니다.”
“진짜 신기함다.”
“익숙해질때도 되지 않았어?”
“신기한건 신기한검다.”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보들보들한 동물 귀는 그야말로 사랑스러움의 극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걸 달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다 보면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잘 생긴 사람한테 이런 귀여운 거 달려 있으면 반칙 아닌가. 사와무라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고스란히 미유키에게 전해들렸다. 미유키의 뺨이 은근히 붉어졌다.
블루님(@algk168)께 받은 리퀘! 연령반전 + 신입사원 미유키와 휘둘리는 직속선배 에이준이었는데... 과연 잘 표현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머쓱
늦어서 죄송합니다! 리퀘 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짜증나!!”
“목소리 좀 줄여줘, 에이준 군.”
주변에 민폐인걸. 그리 말하며 방긋 웃는 하루이치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사와무라의 성량이 줄어들었다. 하루이치도 후루야도 좋은 친구이자 동료였지만, 가끔 보이는 하루이치의 일면은 사와무라마저도 무서웠으니까. 과연 하루오. 역시 하루단지. 꿍얼거리며 술잔을 입에 대는 사와무라를 보며, 하루이치나 후루야도 은근한 시선을 교환했다.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커서 주변에 민폐일까 신경썼던 것뿐이지,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당혹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일 때문이 아니라 후배의 일 때문에 일 주일이 넘도록 야근을 해야만 했다면 화나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루이치는 담백하게 인정했다. 같은 부서가 아니라서 사와무라에게 편중된 소식만 전해듣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건너건너 전해들었던 말들과 조합하여 진실에 가까운 사실을 도출해내면 사와무라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들은 소문에 따르면, 이번에 에이준 군 직속 후배는 꽤 유능하다고 했는데?”
“그래! 그게 바로 분노 포인트야, 하룻치!”
사와무라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동시에 하루이치가 테이블 밑으로 사와무라의 다리를 후려쳤다. 에이준 군, 실례라니까. 통증을 호소하는 정강이를 부여잡고 울면서도, 사와무라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일도 잘 하면서 왜 자꾸 야근거리를 물어오냐고! 더군다가 꼭 나를 끌어들여!!”
“너를?”
“내가 싫다고 하려고만 하면 ‘설마 직속선배가 몸을 빼시는 건 아니시죠?’ 라던가, ‘이제 막 들어온 후배애게 전부 맡기시다니, 그래도 되시려나?’ 라던가! 거기에 꼭 ‘사와무라 선배’ 붙이는 거... 헉, 설마! 이때까지 나, 그렇게 놀림받은 건가?!”
그걸 이제 깨달았어?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상냥함을 발휘하기는 했었지만, 차마 시선까지는 관리하지 못한지라 그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사와무라에게 닿은 모양이었다. 곧장 우는 소리를 내뱉은 사와무라가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빌어먹을 미유키 카즈야... 못된 후배같으니...!”
“으음, 그렇네...”
차마 변호를 못해주겠네. 하루이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와무라의 휴대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짧은 소리. 메일이었다.
“...양반은 못 되네, 이 인간... 이 시간에 회사에 오라고? 제길, 퇴근 좀 하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사와무라의 뒷모습을 보며, 하루이치가 물었다. 가려고? 술을 마신 탓인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사와무라는 소리쳤다. 어쩔 수 없으니까!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사와무라를 보며, 하루이치와 후루야는 술을 홀짝였다. 턱을 괴고 곰곰히 생각에 빠졌던 후루야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루이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유능한데... 왜 야근을 해?”
“뭐, 그야... 내 짐작이지만...”
에이준 군이랑 최대한 오래 있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루이치가 살짝 웃었다. 물론, 그런 의미로 전혀 서투른 사와무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쭈꾸님(@nonoha0101)께 받은 리퀘! 티나게 짝사랑하는 에이준... 이었는데... 원하시는 건 이런게 아니었을 것 같다는 기분이 강하게 드는군요 늦은것도 그렇고 죄송합니다...(머쓱
미유키는 은근히 제 옆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금방 정면으로 돌리기는 했다만. 앞을 보았던 시선은 다시 슬금슬금 옆을 향했다. 뒤쪽에서 이쪽을 보는 시선이 가히 뜨거웠다. 차마 뒤를 돌아보기 겁날 지경이었던지라 옆만 곁눈질하다 다시 시선을 돌리고는 있었다만, 뒷통수가 얼얼할 정도의 시선이 찌릿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받고 있는 장본인으로써 그 효과를 고스란히 느끼며 미유키는 멋쩍게 뒷목을 매만졌다. 이제는 슬슬 민망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감정을 숨기는 것에 서툰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터였고, 틀림없이 제 뒤에 있을 저 소년도 그 중 한 명. 물론 투수에게 있어서 별로 좋은 것은 아니었다만, 한 사람 개인으로 따지자면 꽤 매력으로 다가올만한 구석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 지금 그 부분은 미유키에게 커다란 곤란함으로 다가와주고 있었다. 그 감정이 하도 솔직했던 탓에, 다름아닌 미유키마저 그 감정을 깨닫게 된 탓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꽤나 이르게.
감정의 이름은 사랑. 대상은 미유키 자기 자신. 문제가 있다면 본인이 무자각이라는 점일까.
정작 짝사랑을 시작해버린 사람 본인은 그 감정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랑받고 있는 쪽이 그 감정을 먼저 깨달아 버렸다. 미유키는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뭠까? 미유키 선배. 어울리지 않게 한숨이나 쉬고!”
“누구 덕분에 머리가 아파서 말이지.”
남을 실컷 고민시키고 있는 주제에 팔자 좋단 말이야, 너?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으며, 미유키는 짓궂게 웃었다. 사와무라의 머리를 꾹꾹 눌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락바락 반박하는 사와무라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지만, 미유키는 한숨만 나왔다. 언제나 적극적인 것은 사와무라의 장기나 마찬가지였고,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는 감정이어도 그건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간질간질한 감정은 그야말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시선도 시선이지만 태도 역시도 그랬다. 본인이 자각이 없는 탓에 딱히 드러내놓는 것은 없었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묘한.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조금씩 알아채고 있을 정도의 태도였다. 쿠라모치 정도라면 벌써 알아챘겠지.
“미유키 선배, 단거 싫다면서요? 이거 먹겠슴까?”
선배한테 드리겠슴다! 그리 말하면서 건내주는 것은 달지 않은 캔음료여서, 미유키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 표정이며, 조금 인상을 찡그리는 그 모습까지도 온전히 품은 것은 이쪽을 향한 애정이어서, 어쩐지 이쪽까지도 옮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전염되고 있었다.
미유키가 가볍게 손짓했다. 사와무라의 표정이 단박에 부루퉁해졌다. 못마땅하다는 기분이 고스란히 쓰여있는 얼굴이었지만, 미유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수려하게 웃는 얼굴의 미소가 좀 더 짙어질 뿐이었다. 백날 천날 불만을 표현해봤자 상대가 들어줄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와무라는 한 번 입을 비죽였다가, 미유키에게 조금 다가왔다. 대여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위치였다.
“뭠까?무슨 문제 있슴까?”
“글쎄? 좀 더 가까이 와 봐.”
미유키의 말에 사와무라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두세 발자국 정도의 거리가 남았다. 사와무라의 표정에 언뜻 의아함이 스쳐지나갔다. 장난스럽게 싱글벙글 웃는 미유키는 불안함만 안겨주었다만, 그래도 딱히 헛말은 하지 않는 미유키였다. 무슨 일 있나? 아니면 투구 문제?! 다음 시합 선발 문제인가?! 사와무라의 머릿속에 몽실몽실 별별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울상 비스무리한 이상한 표정이 되는 사와무라를 보며, 미유키가 눈을 둥글게 떴다가 곧장 웃었다. 사와무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조금만 더. 더 가까이.”
“얼마나 가까이 오라는 소리임까... 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 발자국. 미유키가 남은 걸음을 성큼 다가왔다. 바짝 붙은 거리가 과하게 가까왔다. 사와무라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 심장에 과하게 나쁜 잘생긴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바로 눈 앞에. 그러니까, 너무, 가까운 거리에.
짧게 닿고, 떨어졌다.
“...?!”
“응, 이제 볼일 끝.” “?!!”
이, 이, 이 무슨!! 무슨 짓꺼리임까, 미유키 카즈야!! 단박에 멱살을 쥐어 올리는 표정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이, 이. 무슨, 이! 차마 다 이어지지 못하는 말이 토막토막 잘려 삼켜졌다. 뜨거워 견딜수가 없었다.
(+) 덤
“동생 군, 선배로써 미션 하나 주지. 저 죽일놈들한테 가서 여기 보는 눈 있다는 말 좀 하고 와.”
사와무라는 언제나처럼 같은 소리를 하는 미유키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이 남자는 질리지도 않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을 보며 미유키는 씩 웃었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반응이었다. 그에 사와무라는 그 고양이눈을 새초롬하게 드리우며 그를 흘겨보았다. 옆구리에 손을 얹고 허리를 쭉 펴는 모양새가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제 몸매를 조금 자각해주고 지금보다 더 조심해주면 좋겠는데. 미유키는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사와무라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어느 새 능청스러운 표정이 그 얼굴에 걸려있었다.
“벌써 이 나를 몇 번째나 차는 건지 알아?”
“대체 몇 번이나 장난질을 할 검까?”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모습 역시도 이제는 익숙한 것이었기에, 미유키는 조금 허탈한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으쓱하는 그 모습에 사와무라는 홀랑 몸을 돌려 자리를 비웠다. 뛰어가는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유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뒷목을 쓸어내리는 손끝이 차가웠다.
***
쿠라모치는 조금, 아니 많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흘겨보는 시선에 한심함 외에 뭐가 들어있을까. 동정심? 별로 달갑지는 않은 감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반박마저도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미유키가 고개를 숙였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커피잔을 입에 대는 미유키를 보며 쿠라모치는 혀를 찼다.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대는 모양새가 본격적이었다.
“그러게, 말을 그것밖에 못하냐?”
“그럼 그 외에 무슨 말을 해?”
사와무라를 향해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모조리 진심이었다. 비록 상대에게 진심으로 닿지 않은 것이 좀 문제긴 했다만. 미유키가 포수로써 투수를 기운나게 만드는 말솜씨가 뛰어나다고 해 봤자, 이런 쪽으로 언변이 능숙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었다. 도리어 한참 서툰 쪽에 가까웠다. 얼마나 절망적이면 쿠라모치 자신을 불러 이런 상담이나 할까. 쿠라모치는 미유키의 꼴을 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꽤나 예뻐하던 후배를 주기에, 제 악우는 참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하는 꼴을 보고있자니 이제는 불쌍해서라도 그러려니 싶은 심정이었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에게 반한 게 고등학교 이 학년. 지금같은 청혼을 시작한게 삼 학년. 그리고 지금 사와무라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 년. 그 동안 사이의 진전이 이토록이나 없을 수 있다는 게 참 우스울 지경이었다. 뭐, 어떻게 사이가 더 좋아지던 아예 망하던 하나는 되야 할 거 아니야. 쿠라모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타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유키가 그 딴에 나름 노력을 하고는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결과가 안 나오잖아, 결과가. 쿠라모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유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벨소리가 울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왜! 말을 그렇게 하냐고!”
“진정해, 에이준 군...”
하루이치는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사와무라가 진짜로 진정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와무라 역시도 별로 진정할 생각이 없었다. 까맣게 탄 속을 식히기 위해 냉수를 들이킨 사와무라는 곧 팔짱을 끼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위쪽으로 뾰족하게 치켜올라간 눈매며, 앙다문 입술이 아무리 봐도 제대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루이치는 솔직히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보다 늦은 감도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에 감춰진 눈이 한숨을 담았다. 여러가지 의미로 피곤했다.
“왜 자꾸 어울리지도 않는 장난질을!! 더군다나 그, 그, 그. 그런 단어까지 쓰면서!!”
“결혼?”
“그래, 그거!”
붉은빛으로 달아오른 양 볼을 잔뜩 부풀리는 모양새가 꽤 사랑스럽기는 했지만, 몇 년 동안이나 그녀를 보아 온 하루이치의 입장에선 언제나와 같은 불평불만일 뿐이었다. 한 손가락으로 안 꼽힐 정도로 오랜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와무라를 보던 하루이치는 턱을 괴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눈치가 빠른 것은 코미나토 형제의 공통점 중 하나였고, 하루이치 역시도 미유키와 사와무라 사이의 감정선을 눈치챈 지 몇 년이었다. 둘 다 참 요령없기가 어쩜 그리 똑같은지. 몇 년이 지나도 도무지 관계의 진전이 없는 것에 헛웃음을 지은 것도 얼마더라. 두 사람이 제대로 마주보기를 기다리고 있기는 했었지만 이젠 슬슬 답답하기까지 했다. 오기로라도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젠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루이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분홍빛 머리카락 사이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그러려면 정확한 대답을 들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에이준 군, 미유키 선배를 좋아하는 거지?”
“읏. 무, 뭐 그런 걸 묻고 그래, 하룻치!!”
“아니야?”
아니, 아닌 건 아니고... 맞는데...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리는 사와무라를 보며 하루이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미유키 선배가 결혼해 달라는 게 싫어?”
“아냐!! 그건 아냐!!”
격한 부정이었다. 이번에도 하루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사와무라의 얼굴이 보였다.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에는 남자들 등을 후려쳐도 될 만큼 씩씩한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사와무라의 성별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는 하루이치였지만, 연애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사와무라가 여자아이라는 걸 실감하곤 했다.
“미유키는 계속 장난질만 하니까!! 평소에 맨날 놀리기만 하면서...!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결혼은 무슨! 능글능글 웃는 얼굴로!!”
“그럼 장난이 아니면 괜찮은 거야?”
“그거야...”
만약 그렇다면... 꾹 다물어진 입매며 손가락으로 제 머리카락을 꼬는 모양새가 퍽 수줍었다. 그리고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하루이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리둥절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와무라를 보며 걱정 말라며 웃어주기도 했다.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하루이치는 바깥으로 나왔다. 저와 오랫동안 키스톤 콤비를 맞추고 있는 쿠라모치에게서 또 미유키의 바보짓 들으러 간다는 연락을 받은 게 몇 시간 전이었으니, 아마 지금도 그곳에 있을 터였다. 휴대전화를 꺼내들며 하루이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풉, 컥.”
콜록콜록. 미유키는 그대로 흉하게 뿜을 뻔 한 커피를 억지로 삼켰다. 목구멍에서 쓴맛이 났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하루이치가 내뱉은 말은 과하게 핵심이었다. 형과 비교했을 때 유순하고 상냥한 성격은 잠시 접어두었는지, 이리보고 저리봐도 료스케를 꼭 닮은 가차없는 말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에이준 군에게 고백을 하세요.”
미유키 선배가 진심이던 아니던 결국 장난으로 받아들여지는 청혼 말고. 뭐든 좋으니까 진지하게. 그리 말하는 표정이 단호했다. 미유키가 고개를 숙였다. 사와무라와 대화하는 것조차 언제나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결혼해 달라는 말도 버릇처럼 내뱉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고백했다가 너무 두근거려서 그 앞에서 기절하면 어쩌지? 하루이치나 쿠라모치가 들었다간 얻어맞을지도 모를 생각이었다.
미유키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몇 년 전부터 늘 주머니 속에 넣어두던 것이 이번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뭉툭한 상자 안에는 은색의 반지가 들어있을 터였다. 미유키의 표정에 쑥쓰러움이 올라왔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래, 해라. 이젠 답답해서 못 봐주겠다.”
“뭐든 해 보시라구요. 뭐든.”
에이준 군은 골목 너머 카페에 있으니까 가 보세요. 뭐든 제대로 안 끝내고 오면 죽는다, 진짜. 푸념 듣는 데에 충분히 지친 두 사람이 그대로 미유키를 집에서 쫒아냈다. 물론, 미유키의 집이었지만 그건 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유키의 옷차림이 썩 차려입은 옷이 아닌 편한 옷이라는 것도 신경쓸 바 아니었다. 그렇게 미유키는 제 집에서 쫒겨났다. 있는 것이라고는 주머니에 있는 반지와 손에 들린 휴대전화 뿐이었다. 쾅 닫힌 문이 오늘 반드시 뭔가를 끝마치라는 의지를 드러내주었다. 걸쇠 잠기는 소리에, 미유키는 결국 몸을 돌렸다. 그의 수중에 집열쇠도 없었다.
***
“사와무라.”
“미유키?!”
하루이치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남기고 떠난지 사십분 남짓. 등장한 사람은 하루이치가 아니라 미유키였다. 사와무라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려다가, 다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동시에 오늘의 제 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만나는 사람이 하루이치였던지라 별로 신경쓰지도 않은 외모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엄처 신경쓰였다. 어쩔 줄 몰라하는 사와무라를 앞에 두고, 미유키도 머릿속에 터지기 직전이었다. 몇 번이고 머뭇거리며 바보처럼 서 있던 미유키가, 곧 사와무라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올려다보았다.
“사와무라.”
“무, 뭠까?”
“사와무라 에이준 씨.”
미유키의 표정이 진지했다. 지금 제 모습이 어떻든, 여기가 어디든, 결국 시작한 원인이 어떻든. 결국 지금 미유키가 해야 하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그리고 더 이상 물러설수도 없었다. 미유키의 표정에 긴장이 어렸다. 사와무라의 표정에도 똑같은 긴장이 들어찼다.
“좋아합니다.”
“......”
“좋아합니다. 결혼해주세요.”
제 삶의 배터리로, 계속 옆에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미남으로 이름높은 포수가 고백했다. 사랑스러운 외모의 투수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게, 얼굴을 붉혔다.
코미나토 료스케는 강한 남자다. 세이도 야구부 그 누구도 이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키는 크지 않아도 배짱이며 담력은 어지간한 녀석들을 모조리 걷어찰 정도였다. 1, 2학년들에게 제일 두려운 선배이자, 그만큼 존경받는 선배인 료스케는 눈치 역시도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 예리한 눈매에 걸린 사람은 세이도 야구부의 새 주장이었다.
가을대회를 끝마치고 3학년들은 정말 졸업만 남았을 시기. 료스케는 특유의 웃는상 그대로 미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온전히 관찰의 의미를 담은 시선은 그 주인이 료스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포의 시선이 되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천하의 미유키라도 신경쓰일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몇 번이고 머뭇거리던 미유키는 결국 물어볼수밖에 없었다.
“저한테 할 말 있으신가요?”
“혹시 요즘 연애해?”
미유키는 지금 이 순간 뭔가 먹거나 마시고 있었다면 그대로 추한 꼴을 보였을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지. 숨을 들이키거나 어깨 움찔하지 않았겠지? 미유키는 정말 진심으로 걱정했다. 다행히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찰나의 순간 표정에 드러난 당혹스러움은 숨기지 못했다. 료스케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상대는 사와무라?”
“......”
미유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알고 묻는 걸까, 떠보는 걸까?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무서운 점이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미유키의 모습에서 료스케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모조리 뜯어낸 것 같았지만 말이다.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이미 대답은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유키는 새삼스럽게 료스케가 참 무서운 사람이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선배와 계속 콤비를 짜온 제 악우를 다시 보았다. 어떻게 잘 해냈구나, 너.
자신을 올려다보는 료스케를 보며, 미유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알고 계셨나요?”
“아니? 그냥 찔러봤어.”
요즘 분위기가 기분나쁘게 물렁하길래. 진짜 연애중이었네?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은 미형의 얼굴과 겹쳐져 꽤나 화사했지만, 미유키의 눈에는 악마의 미소나 다를 바 없었다. 진짜 심술궂다. 성격 나쁘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나도 다른 애들한테 이래 보이나? 새삼 감탄하며─동시에 스스로의 행동을 성찰하며─미유키는 눈을 깜박였다. 이 상황에는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런 미유키를 비웃으며 료스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볼일이 끝났으니 더 이상 일 없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더 물렁해지면 안될것 같아서.”
“...네에, 감사합니다...”
이런 것에서 감사해야 되는 게 맞는 걸까. 선배로써 배려해주신거니까 감사해야 하는 거겠지? 미유키는 속으로 고민하면서도 입으로는 착실하게 감사인사를 내보냈다. 후배로써 살아온 시간이 만들어준 본능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료스케를 적당히 배웅한 미유키는 자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들킨 상대가 상대인지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들켰다는 생각이 드니 곤란한 것은 사실이었다. 료스케가 입이 싼 성격도 아니니 일단은 다행이었지만...
인상을 찡그리고 고민하는 사이에 문득 소음이 가까워졌다. 문이 벌컥 열리자 들어오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사와무라였다. 고민하고 있는 제 심정과는 전혀 관계도 없다는 듯이 상쾌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있자니, 고민하는 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미유키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손짓했다. 사와무라, 이리 와 봐.
“뭠까? 할 말 있슴까?”
“있었는데, 됐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의 손을 맞잡았다. 투수 특유의 손을 붙잡자 곧장 손가락 사이로 깍지껴 잡아오는 온기가 있었다. 시선을 드니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와무라의 모습이 보였다. 손은 단단히 맞잡고 있으면서도, 온 몸으로 의아함을 표출해내는 제 연인을 보며, 미유키는 그냥 웃어줄 뿐이었다. 그래, 괜찮아.
미유키는 초조한 심정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시간은 거의 다 되어갔지만,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유독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마 약속한 사람 탓이 아닐까. 미유키는 어울리지도 않게 나름 차려입은 옷차림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이상하게 시선이 집중되는 기분이었지만 착각이려니 싶었다. 등에 닿은 벽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머리가 좀 식는 기분이었다. 미유키는 약속이 잡힌 순간부터 이상한 제 태도를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도 알고 있었기에 좀 낯부끄럽기도 했다.
지난 겨울의 졸업식날, 유독 눈에 밟히던 선배가 있었다. 같은 야구부에 투수. 거기에 에이스 넘버를 달고 있던 사람. 그렇기에 포수였던 미유키가 선배들 중 가장 많은 대화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직접 세 본 것이 아니니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만. 아무튼 미유키와는 달리 사교성 좋은 성격에, 밝고 씩씩하고. 후배인 미유키의 말조차도 잘 새겨들어주는 선배였다. 가끔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는 했었다만, 말 그대로 가끔이었으니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고.
좋은 선배였고, 미유키도 그 성격으로 따지면 꽤나 잘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은 있었다. 선배가 야구부에 소속되어 있던 내내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사랑을 자각한 때가 바로 선배의 졸업식 날.
아니, 자각이라는 말을 조금 틀린 말일지도 몰랐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래, 새삼 반한 것에 가까웠다. 아니면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억눌러놓았던 감정이 터져나온 것일지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반하게 된 것만큼은 확실했다. 미유키는 2학년이었고, 그 무렵 3학년으로 올라갈 시기였으니 졸업하는 선배들을 보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만 정말이지 유독 눈에 밟혔고, 그랬기에 계속 곁에 있었고, 그 웃는 얼굴이. 정말이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래, 내년에도 코시엔을 차지하라 등을 두드려주는 그 웃는 얼굴에 결국 반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하필이면 졸업한 선배에게 반했다는 것은 험난한 짝사랑의 시작을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나기는 커녕 메일을 주고받는 것조차 힘들었다. 미유키는 주장이었고, 주전 포수이기까지도 했다. 미유키 뿐만 아니라 그쪽 역시도 새로운 사회에서 눈코뜰 새 없이 바쁘기까지 했다. 그마나 합당한 이유로 메일을 보낼 수 있을 순간은 시합에서 이겼을 때였다. 그 때 한두 통 주고받는 메일마저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날은 두 번 있으려나. 미유키는 비어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어쩌다 오프날이 겹친 것을 알게 되자 그 쪽에서 먼저 살 것이 있으니 나오지 않겠느냐 제안해주었고, 미유키는 속으로 감사하며 그 제안을 받았다. 혼자 설레발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미유키는 저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찾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 특유의 큰 목소리며,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도 앳된 얼굴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미유키는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그 이름을 불렀다.
어제 썼던 이쪽(http://milkyway0218.tistory.com/117)의 연성에 이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 내용입니다.
언제나처럼 캐붕주의.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감사합니다 umu)
미유키 카즈야(3학년, 포수)는, 남들이 들으면 의외라고 할 지도 모르겠으나 고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었다. 물론 그 잘생긴 외모며 야구실력에서 오는 명성 따위로 인기는 많았고, 발렌타인 데이같은 이벤트성 날에는 책상에 초콜릿이 쌓여있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손꼽을 정도로 적다는 의미였다. 그건 미유키가 온전히 야구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온 탓도 있었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던데다가, 어릴 적에는 또래보다 작았던 탓도 있었다. 물론 가장 뒷쪽보다는 앞의 두 쪽의 이유가 훨씬 컸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삶이었건만. 미유키는 제 시선을 애써 추스르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사와무라를 보고 있는 제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게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속에서 은근한 열불이 치솟기도 했다. 아니, 내가 왜. 딱 그런 심정이었다.
고백과 거리가 먼 삶이었다고는 해도 용기있는 소녀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고, 미유키도 그런 것을 완전히 받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주일 전에 들었던 그 고백만큼 황당한 것도 없었다. 자판기 앞, 제 몫을 사러 나온 미유키와 쿠라모치의 심부름을 나왔던 사와무라. 자판기가 많은 것도 아니니 그 앞에서 마주친것은 딱히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 서로 더 나눌 대화도 없었고. 제 것만 뽑아 돌아가려는 미유키의 등에 대고, 사와무라가 한 마디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좋아함다, 미유키 선배.’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마자 미유키는 어딘가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연습 중이 아니라 홀로 제 방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벽에 이마를 대었을 터였다. 이런 기분도 벌써 몇 번째 일이었다. 딱 한 마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달라붙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을 떨쳐낼 수 없는 이유로 또 하나를 꼽자면, 지금 상황이 아닐까.
고백을 받았을 때, 그 뒤에는 이어지는 말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귀어 달라거나, 뭐 그런 것들. 미유키도 그런 말을 기다렸었다. 딱 잘라 거절을 하던, 생각을 더 해보겠다는 말을 하던 그 다음의 순서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사와무라는 그 한 마디만 던진 채 미유키를 뒤로 하고 홀랑 5호실로 떠나버렸고, 미유키만 혼자 남아 그 말에 대해 계속 곱씹고 있는 형상이었다. 좋아한다. 좋아합니다.
계속 고민만 하는 것도 답답하여 사와무라를 붙잡았던 것도 일 주일 전의 일이었다. 사와무라의 행동에 변화가 없어서,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심정도 없지는 않았다. 차라리 환청이었다던가 하는 쪽이 훨씬 편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기대도 사와무라가 보기 좋게 부숴버렸었지만.
‘네, 그런 말 했었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 방에 박살냈었지.
‘...? 내가 미유키 선배를 좋아하는 거랑 선배가 뭔 상관임까?’
이래서 바보란! 미유키는 제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리며 사와무라를 노려보았다. 정작 미유키를 고민에 빠뜨린 장본인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사와무라를 보는 미유키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도 있었다. 미유키는 고개를 돌렸다가 문득 자신을 보고 있는 코미나토와 눈이 마주쳤다. 졸업한 형이 아닌 동생 쪽. 움찔 어깨를 떠는 모습이 아무래도 처음부터 전부 본 것 같은 모양새였던지라, 미유키는 멋쩍게 웃어버릴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코미나토의 표정이 유독 곤란해보였던 이유를, 미유키는 그 날 저녁 깨달을 수 있었다. 듣게 된 목소리는 우연이었다.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뒤따르는 우렁찬 목소리. 코미나토와 사와무라의 대화소리였다.
“에이준 군, 오늘 미유키 선배가 꽤 노려보던데...”
“미유키 선배가? 왜지? 나 뭐 잘못한 거 있던가, 하룻치?”
“아니, 일단 그...”
고백에 대한 것부터가 문제이지 않을까? 코미나토의 목소리에 미유키는 무심코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민망해졌다. 코미나토도 알고 있었나. 그러고보니 이제껏 사와무라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자 이제는 불안해졌다. 사와무라의 성격이며 태도로 보아... 이제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지 걱정해야 되는건가? 미유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에이준 군. 고백을 했다고 하면 대답은 들었어?”
“무슨 대답?”
“뭐... 승낙이라던가, 거절이라던가. 그래서 사귄다던가, 마음정리를 한다던가...?”
미유키는 정말 진심으로 코미나토를 향해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사와무라와 후루야를 잘 다뤄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기 짝이 없었건만, 경기에서 잘 쳐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건만, 지금은 정말 기특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거! 미유키는 정말 진심으로 사와무라에게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쩌다보니 이런 식으로 듣게 되었지만. 선배이자 주장이 되어서 후배들 말을 엿듣고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미유키는 들려올 대답에 집중했다.
“에이, 무슨 대답을 들어!”
“아니, 들어야지.”
들려오는 바보같은 말에 순간 울컥할뻔한 미유키는 곧장 이어진 코미나토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료 상을 닮아서인지, 저 핏줄의 천성인지 단칼에 할 말은 똑바로 하는 저 성격에 감사했다.
“으음... 그치만 그냥 내가 좋아한다고 미유키 선배에게 말한 것에 불과하잖아? 사귄다느니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고, 바라지도 않았고... 미유키 쪽이 어떻든 그냥 내 쪽에서 계속 좋아하면 되는 거고... 끄응, 하룻치. 너무 어려운 건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거야!”
“에이준 군, 너무 단순해.”
가벼운 타박을 건내기는 했지만 동시에 코미나토는 적당히 상황을 깨닫고 정리한 모양이었다.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그 영향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와무라의 말을 듣던 미유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저 야구 바보는 사귈수도 있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은 채로, 그냥 말 그대로 미유키에게 말만 해 둔 것이었다. 좋아하노라고. 연애는 한 톨도 머릿속에 넣어두지 않은 일방적인 밀어붙임이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들으며 미유키는 소리없이 미간을 찡그렸다. 투수가 이기주의자인 것은 포수인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예외의 일 아니겠는가. 사랑이라는 것은, 물론 미유키 카즈야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굉장히 우습기는 하다만,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어찌 되던 두 사람이 연관된 일인데. 더군다나 짝사랑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내뱉은 고백이라면 더더욱.
물론 그 순간에는 거절할 생각이었기는 하지만, 아니 그보다 왜 사귈 생각이 없어? 내가 뭐 어디가 모자라서. 아니아니, 일단 고백해온 쪽은 그쪽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