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귀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게 스스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귀 뿐만 아니라 얼굴이며 목덜미까지 화끈거렸다. 상대가 귀엽다는 듯 제 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더더욱 그랬다. 카나타 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라는 말로 시작하는 온갖 항의가 가슴에 맴돌았다가 입천장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에 고스란히 녹아내렸다. 안 그래도 꽉 감고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진짜 치사해. 정말 치사하다. 제일 큰 문제는 그 치사한 카나타 군에게 도통 이길 수 없는 저 자신이다. 아니면 이길 마음도 들지 않는 이 감정이거나.
진짜 불공평해. 좋아하면 지는 거라는 말은 카오루도 알고 있다지만, 카나타 군도 나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카나타 군은 나한테 이기기만 하는 거야. 그 어처구니없는 불공정에 카오루는 답잖게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었다. 치사해. 카나타 군은 치사해. 저 좋을대로 마음껏 카오루의 입안을 잔뜩 헤집다가 마지막으로 쪽 소리내어 떨어지는 입술에 카오루는 그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얼굴이 익은 문어마냥 따끈하고 말랑해져 있다는 사실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카오루, 귀여운 얼굴이네요~.”
“카나타 군은 왜 이렇게 멀쩡한 거야…….”
우리 방금 키스했는데, 나는 지금도 심장이 터져서 쓰러질 것 같은데 같이 키스한 카나타 군은 왜 그렇게 깔끔한 얼굴로 방실방실 웃고 있는거야. 키스하는 내내 느꼈던 불공평함이 다시 솟구쳤다. 붉어진 얼굴을 아직 수습도 채 못했으면서 선 고운 눈썹이 잔뜩 좁혀지고 뾰로통하게 뺨이 부어올랐다. 삐죽삐죽 성게마냥 불만을 표시하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는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다처럼 웃었다.
저 자신이 아무리 불평을 말해봤자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는 연인을 보며, 카오루는 다시 한 번 입을 삐죽였다. 카나타는 분명 자신이 첫 번째 연인이었고 카오루도 키스는 카나타가 처음이었다. 둘 다 상대에게 첫 키스를 바쳤고 그 때는 분명 둘 다 엇비슷하게 뻣뻣했던 것 같은데, 카나타는 대체 뭘 어디서 어떻게 한 것인지 키스할 때마다 쑥쑥 실력이 늘더니 지금은 입맞춤 하나로 카오루를 새빨갛게 만들만큼 능숙해졌다. 카오루는 지금도 입술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정말 치사했다.
키스할 때마다 목석처럼 굳어져서는 구명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카나타의 등이나 옷자락을 잡는 것밖에 못하는 카오루에 비해 카나타는 조금씩 카오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늘의 키스도 귀라던가 허리라던가 분명 만졌다. 죽을만큼 부끄러운 것과 별개로 카나타가 생각보다 손이 빠르다는 걸 카오루는 매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다지 싫지 않다는 것도. 이러다가 어느 날 카나타가 키스하다 넘어뜨리면 홀랑 넘어가버릴지도 몰랐다. 아직 둘이서 그런 쪽 이야기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기는 하지만 어쩐지, 아니, 나 이렇게 쉬운 남자가 아닌데! 아니, 아닌가? 생각해보면 카나타 군에게는 매번 쉬웠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아 진짜!
몇 번이고 삐죽거리다가 저 혼자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골이 난 듯, 부끄러운 듯 어쩔 줄 모르는 연인을 앞에 두고 카나타는 꽃처럼 곱게 웃었다. 제 연인은 어떤 표정도 참 잘 생겼다는 소감도 속으로 몰래 남겼다. 도록 눈을 굴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한 카나타가 살짝 몸을 움직였다.
“카오루~.”
“응?”
쪽. 물처럼 다가온 카나타가 다시 한 번 카오루에게 가볍게 뽀뽀했다. 매끈한 뺨이 따끈따끈했다. 카오루가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을 보며 카나타가 살랑살랑 연인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늦장 부리면 지각해 버릴 거에요.”
“어? 어……. 으, 응. 그렇긴 한데.”
“후후. 또 놀러와요.”
아니, 난 이제 이 수족관, 이 방에만 들어오면 카나타 군이랑 한 키스가 생각나서 곤란할 지경이라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이렇게 이 백 퍼센트 사적으로 써도 돼? 묻고 싶은 질문이 턱끝까지 올라왔으나 카오루는 참아냈다. 제 손을 잡고 능숙하게 길을 찾아 나가는 카나타의 뒤를 쫒으며 카오루는 잠시 주변을 장식한 수조를 흘려보았다.
둘 다 아이돌을 하고 있는 만큼 두 사람의 데이트는 무척 은밀하고, 바깥에 내보일 수 없는 종류였다. 그나마 학창시절부터 친구로 유명했기 때문에 손도 못 잡고 너무 가까이 붙을 수는 없어도 단 둘이서 놀러라도 나올 수 있는 거지, 오랫동안 친구 아니었으면 혹시 모를 안전을 위해 무조건 둘 사이에 누군가 끼워서 나왔어야 할 뻔했다. 카나타 친구인 레이라던가, 카오루 친구인 치아키라던가. 누가 끼든 힘들 뻔 했으니 계속 친구라고 공언해둬서 다행이라고 카오루는 몰래 생각한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의 취향상 주로 가는 곳은 바다였지만, 바다에 간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해양생물부 부원인 소마가 생각나거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놀리고 싶어지는 귀여운 후배가 보고싶어져서 소마나, 같은 서클인 시노부며 세나까지 부르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보니 제대로 된 ‘데이트’ 가 하고 싶어질 때는 도리어 수족관에 왔다.
카나타가 경영하는 이 수족관에서는 CCTV가 없거나 관계자 외, 혹은 카나타 외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있다보니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어린 시절 추억도 있고, 학창 시절 같이 이곳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도 있으니 여러가지로 소중하긴 한데 이런, 이런 식으로……. 여기서…….
카오루는 카나타에게 붙잡히지 않은 쪽 손으로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 출구고, 밖으로 나가면 다시 말끔한 얼굴의 아이돌 하카제 카오루가 되어서 친구인 신카이 카나타와 거리와 간격을 지키며 표정을 관리해야 하는데. 그러니 이제 그만 좀 생각해야 하는데…….
입안 살을 아프지 않게 자근자근 씹으며 카오루가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아이돌, 나는 아이돌이다.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할 수는 없어. 팬들이 사랑해주니까. 터질 것 같은 심장도 제 입술이며 뺨에 닿았다 떨어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르르 휘어지는 상냥한 눈도 모두 꽁꽁 싸매서 제 안 구석에 잘 보관해둬야 했다.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카오루는 가까스로 제 페이스를 회복했다. 나가는 문을 앞에 두고, 단단히 맞잡고 있던 손이 아쉽게 떨어졌다. 미련 가득한 손길로 손바닥을 한 번 쓸었다가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간지러운 온기에 카오루는 한 번 어깨를 움츠렸다가 펴며 웃었다. 이럴 때의 카나타는 귀여웠다. 돌아가야 한다고 머리로 아는 것과 별개로 영 돌아가고 싶지 않은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연인의 시선을 느끼며 카오루는 모르는 척 먼저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동조해서 망설여버리면, 또 키스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키스받으면 다시 빠르게 수습해 낼 자신이 없었다. 분명 늦어버릴거다.
문을 열자 에어컨과 수조 특유의 냉기로 서늘했던 공기가 빠지고 열에 데워진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우왓, 더워. 이제 여름이네. 무심코 중얼거리며 손으로 볕을 가린 카오루가 몇 걸음 앞서 걸었다.
“카나타 군은 이제 잡지 촬영하러 가야 하지? 시간 맞춰서 갈 수 있겠어?”
“멀지 않답니다. 괜찮아요~.”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카나타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하고, 카오루는 기숙사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물론 카오루도 날짜가 바뀌기 직전 즘에는 또 유닛 스케줄이 있었다. 유닛 컨셉이 컨셉이다보니 카오루는 심야 방송이 제법 있었다. 카나타는 반대로 해가 떠 있을 무렵 스케줄이 많았고. 오늘처럼 쉬는 시간이 딱 맞는 법은 드물었다. 인기 아이돌이란 그런 법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힐긋거리며 카오루나 카나타를 보는 사람이 늘고 있으니 아쉽더라도 손 한 번 잡을 수 없다. 멋지게 그려진 아이돌의 완벽한 미소 속에 아쉬움을 곱게 접어 넣으며 카오루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나중에 또 봐, 카나타 군. 카나타도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찬가지로 곱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카오루.
***
“오! 체리네요, 맛있겠다~.”
“란 군이랑 유우타 군 몫도 사 놨어. 씻어서 먹어.”
“야호~!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신이 나서 통통 튀는 발랄한 주황색 머리카락을 응시하며 카오루도 조금 즐겁게 웃었다. 저 쌍둥이는 대화하는 상대를 즐겁게 하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귀엽기도 하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카오루는 조금 멋쩍어지기까지 했다. 기숙사에 들어오는 길에 본 과일가게에서 체리를 보고 맛있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카오루의 목적은 좀 더 다른 곳에 있었다. 같은 방 유우타와 나기사에게는 낯부끄러워 절대 말 못 할 이유지만. 바구니에 두어 주먹 넘게 담긴 체리를 열정 어린 눈으로 응시하던 카오루가 그대로 꼭지가 달린 체리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살살 씹어 달콤한 과육은 삼켜 먹고, 카오루는 그대로 체리 꼭지를 혀로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카오루는 지고만 있는 게 싫었다. 저도 자존심이 있는데, 최소한 능숙하게 카나타와 키스하고 싶지 않겠냐 말이다. 이래뵈도 배덕의 아이콘 UNDEAD의 양대간판인데! 닳고 닳은 섹시한 이미지로 팔리고 있는데! 물론 아이돌이니 실제로는 아니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지만! 어디 가서 쪽팔리고 낯뜨거워 말도 못 할 일이었다. 정말 최소한, 카나타의 혀가 들어오면 저도 거기에 제대로 응해주고 싶었다. 허나 문제가 있다면 키스를 잘 하는 방법 같은 걸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최선의 연습은 실전이라는 말도 있지만 카나타랑 키스만 하면 떨려 죽겠는데 연습이고 뭐고, 정신이 쏙 빠져 버리니 카나타와의 키스는 제외. 카나타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키스는 애초에 고려할 가치도 없으니 제외하고, 그러다보면 풍물로 들은 우스갯소리라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혀로 이 체리 꼭지를 매듭 지을 수 있으면 된다고 하던데……. 카오루는 혀 끝에 닿는 체리 꼭지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지만, 이걸 어떻게 매듭을 지으라는 건지. 몇 번이고 헤매도 혀만 아프고 딱히 묶이지는 않았다. 몇 번 실패하고 나니 오기가 솟았다. 하카제 카오루는 본디 뭐든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요령이 좋고 센스도 있다. 지금은 영 영뚱한 곳에 기운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하나, 둘, 셋……. 몇 번이고 실패하다가 가까스로 매듭다운 매듭을 묶은 게 여덟 번 째 체리였다. 한 번 성공하면 그 이후는 쉬웠다. 요령을 깨친 카오루는 금새 체리 꼭지를 뚝딱 묶어냈다.
……이건 이제 할 수 있겠는데, 그래서 키스랑 이거랑 요령이 비슷한 건가? 이런 식으로…… 하면 되나? 느즈막히 연습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 낸 카오루가 심각한 표정으로 묶은 체리 꼭지들을 내려다보았다. 연습이 된 것 같냐고 물어보면 애매하다는 답밖에 줄 수가 없었다. 일단 혀를 움직일 수는 있겠는데, 카나타랑 키스 중에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한 번, 그리고 이렇게 하면 카나타가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만큼 카나타를 그렇게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면 또 한 번 고개를 기울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성공은 했는데 의문만 남은 연습이었다. 몇 번 고개를 갸웃갸웃 좌우로 기웃거린 카오루가 곧 남은 체리들을 정리하고 묶은 꼭지들을 버린 뒤 침대로 가 앉았다.
끄으응. 아무것도 모르고 즐겁게 제 몫의 체리를 씻어 와서는 냠냠 먹기 시작한 유우타를 턱 괴고 쳐다보며 카오루는 전혀 딴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야 카나타 군이랑 키스를 잘 하지. 카나타 군은 왜 능숙해져서 나한테 이런 부끄러운 고민을 하게 만드는 거야. 카나타 군은 어디서 키스 배워 왔어. 나는 여전히 적응을 못 하고 있는데 카나타 군은 괜찮아? 나랑 키스하는 거 좋아? 내가 이렇게 굴고 있는데도? 카나타 군은, 카나타 군은……. 머릿속이 푸르고 녹빛으로 꽉 차서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이것도 다 카나타 군 때문이야. 책임을 제 연인에게 밀어버리며 카오루가 몇 번 고개를 흔들었다. 감히 인기 아이돌의 머리를 개인 한 명으로 꽉 채워 버리다니, 카나타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몇 번이고 제 안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카나타를 쫒아내려 노력했다가 실패한 카오루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상상하니 보고 싶다. 우스운 일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진짜 중증이다. 이상하다, 사귀기 전엔 안 이랬건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카오루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한계를 모르고 부풀어 오르는 풍선 같았다.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지 카오루 본인도 모르는 풍선. 제대로 된 첫 연애라 그런 건가? 아니면 아이돌이라? 하루 24시간 내내 같이 있을 수 없어서? 그도 아니면 들키면 안 된다는 위기감? 그런 거에 불타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고민해도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걸 다 차치하고, 그냥 카나타가 웃고만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행복하고 들떴다. 잔잔하게 파도치는 해안가에서 느긋하게 누워 있을 때와 비슷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언제나, 언제나. 신카이 카나타만 줄 수 있는 감정. 웃는 얼굴로 타인을 웃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을 아이돌이라고 한다지만, 카오루도 팬들을 미소짓게 만들 수 있지만. 역시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주는 감정은 역시 달랐다.
그냥……, 카나타 군이라면 뭐든 괜찮다고. 전혀 멋있지도 않고 평소 이미지를 와장창 깨 먹는 행동거지라고 해도 카나타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는 이 감정. 카오루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카나타를 사랑했다. 그와 입을 맞출 때면 그 거대한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펑 터질 것처럼 들썩거렸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얼어버렸다.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정직하게 몸으로 드러나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는 파업을 해 버렸다. 키스에 익숙해지지 않는 건 그 탓도 컸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나머지 얼어버리는 탓.
팬, 아니 팬이 아닌 사람들이 가득 찬 거대한 돔 무대에 혼자 서는 일이 생기더라도 제대로 무대를 진행하며 그 사람들을 제 팬으로 만들어버릴 배짱이 있는 하카제 카오루가!
큰일 났네. 정의하고 나니까 천 배쯤 부끄러운데……. 카오루가 양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카나타의 생각을 이렇게나 하고 나니 또 카나타를 만나고 싶어졌다는 점이었다. 만나서, 또 키스하고 싶었다. 연습한 보람도 없이 또 뚝딱거릴 확률이 높다지만 그래도. 그래도…….
진짜 낯 부끄러워서 죽겠다. 아이돌로서 팬에게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표정을 베개에 파묻어 숨겨버리며, 카오루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반짝거리는 금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새빨갰다. 카나타에게 키스받았던 몇 시간 전과 똑같이.
***
카나타는 이불 속에 완전히 파묻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고 몸을 웅크렸다. 같은 방을 쓰는 히요리나 린네가 언젠가 지나가듯 한 번쯤 카나타에게 그러면 덥지 않느냐 물어봤지만, 카나타는 고집스럽게 이불 속에서 라디오를 듣는 행동거지를 고집했다. 당연히 더워서 당장이라도 차가운 물에 풍덩 들어가고 싶을 정도지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 전체적으로 어두워지고, 무엇보다 라디오의 소리가 잘 들리는데다가 주변의 소음이 한결 차단되고, 라디오를 들으며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장점들을 고려하자면, 놀랍게도 카나타는 더운 것조차 감수할 수 있었다. 히요리나 린네가 그다지 나쁜 룸메이트는 아니었지만─뭐, 제 세계를 뚜렷하게 구성하는 카나타 기준으로 나쁜 룸메이트가 되기도 힘들겠다만─카나타도 제 연인의 라디오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순간 정도는 오롯하게 혼자 있고 싶었다. 연인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표정 같은 건, 연인에게만 보여주고 싶지 않은가.
UNDEAD의 이미지답게 느즈막한 밤, 22시에 시작하는 하카제 카오루의 한 시간짜리 라디오는 카나타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귀엽고 성실한 연인이 최선을 다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지 않은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종종 카오루가 저에게 말하는 기분이 들어서, 가끔 제 옆에 없는 카오루가 절실하게 보고 싶어지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지만 카나타는 과감하게 감수하고 있었다. 이 라디오는 생방송이 아닌 녹화방송이기 때문에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을 때에는 전화를 걸어버리기도 하면서.
평소보다 조금 더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카오루가 첫 번째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성실하나 욕심 있는 청자답게 사연보다는 카오루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카나타가 살짝 눈을 감았을 때, 문득 주변이 살짝 어수선해졌다. 이불 속에 쏙 들어찬 카나타의 귀까지 들어오는 깨끗한 노크 소리 세 번. 밤이 늦었는데 손님이라니, 극히 드문 일이었다. 방에 있던 다른 두 사람도 딱히 기다리던 손님은 아니었던 듯, 한 텀 늦게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
앗. 이불 바깥 소식에 관심을 끄고 카오루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던 카나타의 귀에 새로운 카오루의 목소리가 얇게 겹쳐졌다. 손님의 목소리는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히요리와 린네에게 사과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를 들으며 카나타가 라디오를 끄고 이불을 헤쳤다. 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힌 건 카나타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쏙 내민 순간과 거의 동시였다. 카오루. 진짜 카오루였다.
“카나타 군에게 잠깐 볼일이 있어서. 미안, 카나타 군. 잠깐 나와줄 수 있어?”
“저 말인가요? 괜찮긴 하지만…….”
카나타가 버둥버둥 우선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카오루, 분명 날짜 바뀔 때 쯤 스케줄이 있다고 헀었는데. 힐긋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시각이 22시에서 대략 15분 정도 지났으니, 이동시간까지 고려하면 삼십 분 내에 카오루는 기숙사에서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볼일? 낮에 데이트 할 때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거리면서도 카나타는 망설임없이 카오루에게 다가갔다. 살짝 땀에 젖어 달라붙은 카나타의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정리해주며 카오루가 카나타를 데리고 방 바깥으로 나왔다.
ES의 기숙사에서는 사람 없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카나타의 방에도 린네와 히요리가 있고, 카오루의 방에도 란과 유우타가 있고. 기숙사 건물에도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카오루는 어떤 요령인지, 인적 드문 계단에서도 CCTV에 찍히지 않을 사각을 잘도 찾아냈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오는 길에 한 명도 마주치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CCTV의 사각을 잘 찾아내는 건, 카오루가 유메노사키 시절 아이돌을 하면서도 은근슬쩍 신경쓰며 행동했었으니 의외랄 것도 아니었지만.
“카오루, 바쁘지 않나요~? 갑자기 할 말이 생긴 건가요?”
“한 20분쯤은 시간 남았으니까 괜찮아.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래도…….”
바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더라도 아이돌 중에 제 기척 죽이는 게 특기인지 뭔지 잘도 은밀하게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카오루는 카나타와의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카나타의 뺨이 불만으로 막 빵빵하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할 때 쯤이 되어서야 카오루는 만족하고 카나타와 시선을 맞췄다.
“일하러 가기 전에 카나타 군이 보고 싶어서 불렀어.”
“…….”
정말 별 일이었다. 부끄럼쟁이 카오루가 이런 발언이라니. 심지어 일정이 안 맞아서 한 달이고 못 만났던 때도 아니고, 당장 오늘 데이트를 했는데! 쌓일 뻔 했던 카나타의 불만이 마법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기쁨과 약간의 수줍음이 한가득 채웠다. 그리고 자갈처럼 굴러온 작은 걱정도. 혹시 이 반나절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게 아닐까. 기쁘지만 순진하게 기뻐해도 괜찮을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나타를 앞에 두고, 카오루도 잠시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너와 키스하는 연습을 하다가 너를 향한 감정이 너무 부풀어 올라서 촬영 전에 직접 보고 싶어졌다, 따위의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둘 다 서로의 생각에 잠긴 탓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건 카오루였다. 일단 시간에 쫒기는 사람은 그였으니까. 살짝 손을 뻗어 연인의 손가락에 살짝 제 것을 엮어낸 카오루가, 최대한 노력하였으나 그래도 쑥스러움을 영 이기지는 못한 표정으로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 표정이 더없이 사랑스러워서 카나타는 속입술을 깨물었다가 행복하게 웃었다. 둘 다 남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카오루가 와 줘서, 카오루의 라디오를 못 들었어요.”
“다음에 들어 줘. 끝나면 바로 홈페이지에 방영본이 올라오니까.”
“실시간으로 듣고 싶었는데.”
“실물 하카제 카오루는 싫었어?”
싫을 리 없잖아요. 두런두런 이어지는 대화와 동시에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반듯한 이마가 툭, 닿았다. 동그랗게 이마로 전해지는 온기와 코가 맞닿는 거리. 가까이에서 보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그 속에 저 자신이 실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까지 고스란히 보였다.
“만나러 와 줘서 기뻐요, 카오루.”
“……응.”
아, 키스한다. 카오루는 무심코 그리 생각했다. 그냥, 그냥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느리게 눈을 감았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무척 순간적인 떠오름이었으나, 키스하는 카나타의 얼굴이 궁금했다.
쪽, 입술이 닿았다. 카나타의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빤히 카오루를 보고 있었다. 쪽쪽, 닿았다가 떨어지고 또 닿았다가 떨어지고. 가볍게 몇 번이고 봄비처럼 키스해오는 카나타의 세례를 받던 카오루가 살짝 허리를 뒤로 뺐다.
“……왜 눈 안 감고 그래.”
“키스받는 카오루가 귀여우니까요~.”
“그런 치사한 말 하지 마…….”
부끄러움은 왜 늘 저의 몫인지. 카오루가 잔뜩 눈썹을 늘어뜨렸다. 젠장. 역시 카나타는 너무 치사했다. 이때까지 키스했을 때도 카나타는 카오루가 긴장으로 얼어서 파르르 떠는 꼴을 모두 보고 있었단 말인가. 정말 치사했다. 허나 불공평한 상대에게 조금이나마 공평해지기 위해 카오루는 부글부글 다시 끓기 시작하는 감정을 품에 안고 또 한 걸음 다가섰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조급함도 그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이번엔 눈 감아.”
속삭이며 입술을 붙여오는 연인의 말에, 카나타는 순순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