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 BL~ GL~ 다 섞여있는 좋아하는 커플링 단문 길이도 자유 잡다함 주의
01. 요네키토
야, 슈지. 큰일났다. 나 좋아하는 애가 생긴 것 같아.
요네야 요스케는 마치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그런 말을 했다. 그리고 친구의 얼떨떨한 사랑고백을 듣게 된 미와 슈지는 그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옮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껌벅였다. 순간적으로 '큰일났다' 는 문장과 '좋아하는 아이' 사이의 연관점을 즉각적으로 찾지 못한 탓이었다. 개인 랭크전밖에 모르는 어린애같은 구석이 있는 요네야가 사랑이라니, 무척이나 어색하긴 하지만 그도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지 않은가. 좋아하는 아이 하나쯤은 생겨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보더에 재직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랑보다 일을 선택할 것 같은 구석이 있다만 그렇다고 해서 연애 금지인 조직도 아니고...... 지나가는 대원을 잘 잡고 캐물으면 남모를 사랑을 품에 안고 있는 대원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왜 큰 일인데?"
"아니 그게,"
제 부족한 설명을 그제야 깨달은 요네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린 그의 표정이 다채롭게 순서대로 변화하는 모습을 미와는 조금 신기하게 구경했다. 곤란한데, 아니 그렇지만 말은 해야, 아 근데...... 쪽팔린데. 표정에 그렇게 써 있다. 요네야가 저토록 선명하게 표정을 바꾸는 것은 의외로 꽤 드문 일인지라, 미와는 퍽 재미있기까지 했다. 그래서 귓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요네야가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 모양새를 너그럽게 기다려주었다. 자존심과 수줍음과 고민 사이 어드메에서 요네야는 한참을 해메는 모양이었다.
"그게 말이지, 슈지."
"응."
한참 고민하던 요네야가 마음을 정한 표정으로 미와를 응시했다.
"나, 아무래도 키토라한테 반해버린 것 같은데. 나 어쩌냐."
미와는 3초쯤 이 키토라가 누구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약간 요네야의 심각함이 옮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키토라가 아라시야마 부대, 키토라 아이?"
"......엉."
눈이 높다고 해야할지, 꿈이 크다고 해야할지. 미와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친구의 의리로 삼켜줬다. 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아라시야마 부대 소속 대원들은 하나같이 보더의 절벽 위의 꽃 아니던가. 가장 가볍고 말랑해보이는 사토리조차도 자신이 홍보부대라는 날카로운 인식이 박혀있어 그들이 생각치도 않는 부분에서 조심하거나 피하는 구석이 있었다. 헌데 그중에서도 제일 원칙적인, 그리고 막내인 키토라라니. 나쁜 상대는 아니겠지만 미묘한 반응을 돌려줄 수 밖에 없는 상대였다. 애초에 홍보부대인데 연애라는 걸 할 수는 있나? 미와는 의문에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보더 대원들은 모르지만, 그들에게만 해당될 암묵적 규칙이 백 개쯤 있다고 해도 수긍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 아이돌보다 빡빡하게 지내고 있을텐데. 뭐, 대장이 아라시야마인 이상 대원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 응원하면 응원했지 안된다고 할 것 같지 않으니, 일단 그 부분은 넘겨두기로 하고 미와는 다른 것을 고민했다.
키토라. 키토라인가...... 팔짱을 낀 미와가 잠시 생각했다. 요네야는 고등학생이고 키토라는 중학생이지만 고작해야 두 살 차이. 내년에 키토라가 진학하면 같은 고등학생이 되니까 큰 문제는 없을 터다. 외형, 키토라 쪽이 훨씬 미인이지만 제 대원이자 친구인 사람의 입장으로 보면 요네야도 못나지 않았으니 됐다. 미와는 기울어진 저울로 열심히 균형을 쟀다. 성격. 연애를 한다면 요네야가 키토라를 잘 받아주니 나름 균형은 맞을 듯 한데...... 문제는 여기였다. 미와는 이마를 짚고 요네야를 보았다.
"앞으로 어쩌고 싶은데?"
"그야...... 기왕이면 연애?"
".......널 좋아하게 만들 방법은?"
"도와주십쇼, 슈지 님."
그걸 모르니 이걸 말했지. 요네야는 미와의 어깨를 든든히 잡았다. 친구 좋은 게 뭐란 말인가. 미와는 대번 부담스러워졌다. 네이버 사냥만 목표로 삼고 달리던 삭막한 인생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분홍색에 미와는 체할 것 같았다. 제 분홍이 아니고 친구의 분홍이라 겨우 참아줄 수 있었다. 빈말로도 미와와 키토라는 친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둘 사이를 묘사하는 제일 적절한 단어는 직장동료 정도였다. 아니면 아는 사이.) 그런 미와조차도 키토라의 성정을 대충 알았다. 네이버를 생각하는 사상을 전부 제치고 순수하게 성격만 따져보면 미묘한 부분에서 미와를 조금 닮은 구석도 있었다. 조금 까칠하고, 하지만 소중하게 여길 건 제대로 소중하게 여긴다. 신뢰할 수 있는 선배에게는 정중한 편이다. 배짱도 있고 실력도 있...... 아니, 이건 전투 관련으로 넘어가잖아. 미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가 뜨며 요네야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었다.
"이거 비밀이야?"
"어...... 고민 중?"
"미와 부대나 이즈미 불러서 다 같이 상의하기 부담스러워?"
"으으음~."
저 혼자만으로 안 된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애초에 일 대 다수가 훨씬 더 승률이 높다는 건 보더의 기본 전략 중 하나였다. 네이버가 관련되면 머리가 뜨거워지기는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미와는 냉정하고 유능한 A급 부대 대장이었다. 그는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연애 소식에 다른 놈들이 도움이 될거라고는 사실 그다지 확신이 안 들었으나 이즈미는 사토리랑 친했고, 미와 부대를 부른다면 자연스럽게 포함되는 제 오퍼레이터 츠키미 씨는 믿을 만 했다. 보더는 가로선, 즉 동갑내기끼리 친하게 지내는 구석이 있었고 츠키미 씨는 아라시야마와 동갑인데다가 입대시기도 비슷하니까. 즉, 이리저리 찔러 볼 가장 유력한 구석이라는 소리다.
고민을 끝낸 요네야가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미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무척이나 사적인 이유였다만, 미와 부대 대장의 이름으로 전 대원에게 귀환명령을 내릴 순간이었다.
02. 무라>콘<쿠니
타치카와 케이와 쿠루마 타츠야는 곤란한 시선을 공유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고 (보더에서 기본적으로 동갑내기란, 우선 친구가 되기 아주 좋은 조건과 거진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자비로운 쿠루마는 타치카와의 허술한 부분까지 대단하다고 진심어린 칭찬을 할 수 있는 배포가 있었다. 둘은 꽤 좋은 친구였다. 그러니까, 음. 이런 황당한 부분으로 이런 갈등답지도 않은 감정적 곤란함을 겪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엇다. 별 수 없는 사랑의 작대기 속에 아주 관계없으나 아주 곤란한 제 3자가 되어버린 두 사람은 참으로 머쓱한 시선을 열심히 공유했다. 주변에서 안타깝다는 듯이 보는 동갑내기 놈들의 시선은 덤이었다.
이 덜 큰 꼬맹이들이 어울리지도 않게 사랑과 전쟁 같은 걸 찍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타치카와는 맥주를 한 잔 들이켰다. 대장인 저들조차 사랑과 관련 없는 건전한 삶을 살고 있건만 아직 열 여덟 살 먹은 고등학생들이 무척 곤란한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타치카와가 턱을 괴고 테이블에 과자를 하나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이게 그. 콘 쨩이라면,"
"응."
타치카와가 이번에는 아몬드를 하나 들어 과자 옆에 내려놓았다.
"무라카미가 얘를 좋아한다고?"
"응, 아마도......"
보더에서 대장이 대원을 보는 분석은 대체로 정답이기 마련이었다. 쿠루마라면 더더욱. 무라카미가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숙한 녀석도 아니니 아마도 무라카미는 정말로 제 부대 오퍼레이터에게 연분홍빛 풋사랑을 하고 있으리라. 타치카와는 골치가 아파서 얼굴을 감쌌다. 물론 타치카와가 두 살이나 어린 오퍼레이터에게 발칙한 마음을 품어서 곤란한 건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얼마든지 뻔뻔하게 나갔으리라. 허나 그에게는 그보다 백 배 쯤 곤란한 이유가 있었다. 타치카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두 번째 아몬드를 들어 과자의 빈 쪽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우리 쿠니치카도 얘를 좋아하거든."
"응......"
타치카와가 부대실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이름이 바로 이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여자아이들끼리의 우정이겠거니 여겼으나 이젠 안다. 아니었다. 쿠니치카는 진심으로 콘을 좋아했다. 고등학생이 품을 수 있는 따뜻하긴 한데 가끔 데일 것 같은 발칙함과 욕심이 가득 섞인 사랑이었다. 타치카와는 무라카미보다 쿠니치카 쪽이 머릿속으로 굴려 본 생각이 더 불건전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헐렁하고 여유로워보여도 그녀 역시 A급 1위 부대의 딱 하나뿐인 오퍼레이터. 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게이머이기도 한 그녀는 진심으로 온몸을 던져 전심전력으로 콘 유카에게 어택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잘 안 통했지만.
쿠루마 역시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귀여운 오퍼레이터를 향한 귀여운 부대원의 사랑이 귀여워 응원하고 도와줄 수 있으면 살짝 도와주라고 친구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얘기를 꺼낸 것 뿐인데 설마 이런 예상치 못한 곳에 부대원을 향한 사랑의 라이벌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쿠니치카 씨도 참 좋은 아이인데. 하지만 스즈나리 제 1 부대의 대장인 쿠루마는 당연히 무라카미의 편이었다. 타치카와는 당연히 쿠니치카의 편이었고. 두 사람은 잠시 머리를 붙잡았다.
"......어이, 니들이 지금 우리를 동정어린 눈으로 볼 때야? 니노미야 너는 이누카이한테 전화라도 해서 라이벌 추가 주문 들어오는 거 아닌지라도 물어봐야 한다고."
"뭣,"
그리고 못마땅한 불만 섞인 조언에 열 여덟 살 대원을 데리고 있는 또 다른 스무 살 대장이 어깨를 굳혔다. 급히 니노미야가 휴대전화로 연락을 넣는 모습을 보며 열 여덟 살 대원이 없는 카코와 츠츠미는 조금 여유롭게 흥미로운 관계성을 응시했다. 저들도 모르는 사이 두 살 아래에서 재미있는 삼각관계가 만들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콘은 카코 부대에도 들어올 수 있는 인재라서 카코도 잘 알고 있었다. 귀엽고 똑부러진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무라카미와 쿠니치카. 보더에서도 굴지의 어태커와 손꼽히는 오퍼레이터의 마음을 모조리 빼앗아가다니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쿠루마의 말을 들어보면 본인은 본인이 뭘 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츠츠미 군은 누구 편?"
"음, 무라카미 쪽일까."
"나는 쿠니치카 쪽 편을 들어볼건데."
쿠니치카 역시 훌륭한 K다. 무척 귀엽다는 뜻이다. 카코가 빙긋 웃으며 머리를 맞대고 한숨을 쉬는 두 동갑내기들에게 새로 채운 맥주잔을 내밀었다. 니노미야가 위로인지 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삼각관계에 새롭게 한 축으로 포함될 사람은 현재 열 여덟 살 중에는 없다는 이누카이의 전언을 건내주는 것과 동시였다.
3. 후유<토마
사랑에 빠지는 건 순간이다. 그리고 감정 하나 참 오래 간다. 열 여덟 살 대장에게 사랑에 빠진 토마 이사미는 이제 내년이면 그 시절 대장과 동갑이 된다. 십 년의 짝사랑은 참 길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후유시마를 좋아했다. 처음엔 대장이 미성년자의 마음을 받아 줄 리 없다는 걸 알아서 참았다. 그 다음은 대장으로서 대원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걸 알아서 참았고, 그 뒤로는 관계가 무너질 게 싫어서 참았다. 그가 토마를 토마와 똑같은 감정으로 좋아해주지 않을 걸 알아서 참았다. 그는 스나이퍼고, 맞지 않을 총알은 쏘고싶지 않았다. 어떻게 쏴도 빗나갈 게 느껴지는데 쏠 수는 없었다. 겁쟁이같다고 놀림받아도 할 말이 없었으나 처음 겪는 뜨거운 감정 앞에 사람은 누구나 나약해지기 마련이었다. 토마조차 그랬다. 무엇보다 후유시마를 잃는 게 무서웠다. 착하구나, 토마. 그리 다정하게 불러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잃어버리면 방향 모를 분노가 치밀어오를 것 같았다. 그는 참고, 참고, 침묵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다. 물론 시간만 허비한 건 아니었다. 보더에서 최고로 우수한 스나이퍼답게. 상대를 쏘아 꿰뚫어 맞출 수 있을 모든 준비를 하면서.
대장, 이제 내년이면 나는 내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대장이랑 동갑이 돼. 나는 이제 어리지 않고, 십 년 동안 보더에서 구르면서 경험도 많이 쌓았어. 이 마음은 집념도 아니야. 나는 분명 대장을 좋아해. 이제 대장은 내 대장이 아니지만. 대장이 마흔 살이 되어도 좋아. 오십이고 육십이고 되어도 좋을 거야. 스물 아홉과 열 여덟은 대장이 절대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마흔과 스물 아홉 정도면 크게 차이도 없잖아. 싫다면 조금 더 기다릴게. 마흔 하나와 서른이면 덜 부담스럽겠어? 당신이 넘어와 준다면 얼마든지 기다릴거야. 언젠가 반드시, 반드시 마지막에 나한테 넘어와서 끝까지 곁에 있기만 하면 돼.
응? 후유시마 씨.
04. 이즈오사
이즈미는 오사무의 등에 달라붙어,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상태로 어깨에 목을 묻고 있는 걸 좋아했다. 품에 가득 들어차는 연인의 조금 마르고 살짝 단단해질 기미가 보이는 몸뚱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행복했다. 달짝지근한 살내음이나 달달한 향수 냄새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냥 상대가 미쿠모 오사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즈미 코헤이는 만족했다. 바짝 몸에 힘을 주고 혹여 무게라도 실을까 긴장하던 연인이 저에게 몸을 기대고 꼼질꼼질 오래 안겨있어도 편할 자세로 고치는 모양새를 보고있자면 더더욱 그랬다.
05. 진아라
만나기 전부터 알았다.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 될 거라는 걸.
만난 직후에 알았다. 이 사람한테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는 걸.
하지만 앎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은 언제나 많은 것을 먼저 아는 사람이었지만, 대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흐름대로 흘러갔다. 특히 감정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눈으로 보았던 것과 실제 일어나는 것의 차이가 커서, 미리 수많은 스포일러를 당했으면서도 진은 별 수 없이 그 순간 감정이 흔들렸다. 이건 좋아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있었고,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이런 느낌이 드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여겨지는 순간도 있었으나 반전은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 유이치는 아라시야마 쥰에게 제 마음을 줬다. 사이드 이펙트로 보았던 것보다 백 배는 아름답고 천 배 쯤 멋진 사람에게 별 수 없이 사랑에 빠졌다.
아라시야마를 어떻게 이기겠어. 진은 일찌감치 단념했다. 사랑에서 먼저 반한 사람이 진다고 한다면 진은 시작하기도 전에 졌다. 구 보더 시절부터 어태커로 일했으며 A급 1위 타치카와와 라이벌로 맞서던 진은 지는 걸 싫어하고, 질 것 같으면 판에서 발을 빼버리는 성격 나쁜 승부사였으나 사랑 앞에서는 하릴없이 나약해졌다. 들어간 줄도 모르고 들어간 판에서 싸울 거라고는 상상해보지 않던 상대를 만나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졌다. 두 말 할 것 없이 진 유이치의 완패였다. 두 손 두 발 다 든 그는 제 종잇장같은 나약함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사랑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진은 아라시야마의 앞에서 약해지는 것조차 좋아졌다. 강하지 않은 제 자신이 좋아진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이어지는 산책은 진이 아라시야마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제안은 아라시야마가 해 줬지만 말이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뒤 일정에 보더밖에 적혀있지 않는 진의 생활패턴은 몹시 불규칙해졌다. 잠드는 시간도 일어나는 시간도 들쑥날쑥. 덕분에 일정한 시간에 타마코마에서 보내는 식사마저 들쑥날쑥 엉망이 되기 시작하자 소중한 친구의 건강을 걱정한 아라시야마가 진의 생활 습관을 고착시키기 위해 건낸 일시적인 제안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 아침 일찍 강아지 코로의 산책을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 시간에 일어나야 했고, 산책을 돌아다니다 보면 배가 고프니 아침을 먹었으니까. 최소 한 끼의 식사와 한 시간 이상의 운동. 진으로서는 마음은 고맙지만 일찍 일어나기 힘들어 거절하고 싶어지는 제안이었다. 허나 제안해 준 상대가 누구도 아닌 아라시야마이지 않은가. 좋아하는 아라시야마와 단 둘만 보낼 수 있는 고정시간이란 놓치기 힘든 달짝지근한 먹이였다. 결국 큰 맘 먹고 진은 아라시야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매일매일 이어지는 습관으로 박아넣었다. 진의 건강을 위한 단발적인 약속은 어느 새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암묵적 규칙이 되었다. 문앞에서 기다리다보면, 아라시야마가 문, 가끔은 창문을 열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진! 하고 새벽 공기를 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진은 이제 알았다.
덕분에 요즘 코로가 내 얼굴을 산책이라고 인식한 것 같단 말이지. 진은 천천히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끔 볼일이 있어 새벽이 아니라 낮이나 저녁에도 아라시야마를 보기 위해 종종 찾아갈 때가 있다만, 그 때마다 코로는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붕붕 휘두르며 온 집을 뛰어다녀 진은 가끔 무척 민망해졌다. 매일 산책할 때만 보는 얼굴이라고 인식하다보니, 이 얼굴을 보면 산책을 나간다고 기억해버린 것 같았다. 아라시야마의 작은 가족이 자신을 반가워하는 건 좋은 일이었다만, 그리고 그렇게 흥분한 코로를 보고 기쁜 듯 머쓱한 듯 웃으며 시간이 괜찮다면 같이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는 아라시야마는 사랑스러웠지만.
산책 말고 조금 더 발전한 사이가 되고 싶은데. 기왕이면 코로의 산책이라는 목적이 없어도 빈 시간에 만나도 되는 사이가 좋겠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사이가 좋다. 진은 무릎을 세우고 웅크려 앉아 무릎에 제 뺨을 대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는 세상 많은 일을 스포일러 당하며 살아가고 있으나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으니 고르기 힘들어 고민하게 되었다. 뭘 선택하더라도 아라시야마가 자신을 싫어하는 미래는 없다. 그런 기쁘고 비겁한 결과를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진은 무엇이 최선일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느라 종종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타치카와와 싸워서 지는 것처럼. 타치카와에게 베였을 때는 화나고 억울하고 열이 받는다면, 아라시야마와 연관된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아라시야마가 먼저 다가와줘서, 부끄럽고 기쁘고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래, 이번 선택지마저 아라시야마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서, 진은 좀 더 몸을 웅크리고 깊게 심호흡했다. 각오를 다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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