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카제 카오루'에 해당되는 글 3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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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7.03.08 [카나카오] 음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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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카오] 폭설

2017. 12. 19. 23:38 from ENSTARS/NOVEL

* 페이트AU

-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벌써 며칠 째 내리는 눈이지만 요 몇 시간은 드물게 폭설이었다. 청년은 물끄러미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짙게 낀 하늘은 어두운 회색이었다. 흰 눈마저 어두컴컴하게 보일 정도로 흐린 공기를 가만히 내다보던 청년은 불만스럽게 미간을 한 번 좁혔다가 반듯하게 펴냈다. 말끔한 얼굴의 청년은 거리에 나가면 추위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수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광등 빛 아래에서도 자랑스러울 만큼 예쁘게 빛나는 긴 머리카락에 섬세하게 빚어진 이목구비. 다양한 색으로 곱게 빛나는 눈동자. 선 짙은 육체가 아름다운 청년은 눈만 내리는 하늘을 질리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눈을 크게 즐기지는 않았지만 이 커다랗고 화려하기만 하고 황폐하여 실속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집에서 유일하게 봐 줄 만한 것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에 더더욱 하늘하늘 땅을 장식하는 하얀 얼음조각에 집중할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잠깐 떼었다가 다시 굳게 붙인 뒤, 청년은 인기척을 향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몇 시간만이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마스터.”

“있다고 하면 있다고 할까......”


 상대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가 표정을 굳혔다. 청년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마스터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스터는 찬찬히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는 저가 소환한 서번트의 저런 표정을 처음 보았으니까. 소환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경박하고, 말을 잘 했으며, 비록 하필 저를 소환한 게 남자나며 투덜거리기는 했어도 마스터에게 서글서글했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마스터, 레이가 심려 깊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고? 아처 군.”

“그다지...... 마스터가 신경 쓸 건 없어.”

“거짓말 하지 말게나. 본 건 얼마 안 됐지만 아처 군의 이런 상태가 평소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네.”


 라이더인가? 레이는 정확하게 제 서번트의 이상원인을 짚어냈다. 아처가 약하게 미간을 좁혔다. 단 한 번으로 짚어낼 정도로 본인이 쉽게 행동했다는 게 불쾌했다. 제 행동거지가 알기 쉬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더군다나 상대는 아처가 인정한 마스터였다. 감정을 응어리처럼 품고 있기에 적당하지 않은 상대. 그는 곧 한숨을 쉬는 것으로 항복을 알렸다. 고개가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레이는 서번트를 따라 시선을 다시 창밖의 눈 오는 풍경으로 돌렸다. 이 눈이 내리기 전, 이 저택으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맞붙었던 서번트와 그 마스터의 모습이 순서대로 레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스터 모리사와 치아키와 그 서번트 라이더. 황금으로 만든 돌고래를 타고 파도와 함께 돌격하는 라이더의 진명을 짐작해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둘 다 딱히 진명을 숨기려는 의지가 강하지 않아보였다.) 레이는 자신의 아처와 상대의 라이더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지었던 표정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는데 말이지. 레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만약 성배전쟁의 서번트로 리츠가 소환되어 제 앞에 서면 저가 그런 표정을 지을까. 그 정도로 아처는 처참한 얼굴로 절박하게 저를 보았다. 본능적으로 선택한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 레이가 객관적으로 꽤 우위에 서 있던 상황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짧은 소강을 만들어낸 건 아처가 제 정신을 추스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처는 레이의 기대대로 빠른 시간 내에 혼란을 수습해냈다. 다만 그 이후에 찾아온 짙은 자괴감을 느리게 소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라이더와 아처 군은 비슷한 시대의 영웅이었던가?”

“알고 있으면서 질문으로 묻는 형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그럼 정말 모르는 것을 묻지. 어떤 사이였는가?”


 마스터의 질문에 서번트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아득한 과거. 전승은 전해져 내려오지만 둘의 뚜렷한 관계를 알기는 어려웠다. 다른 나라에 살던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단 둘 외에 아무도 모르는 시대였다. 애초에 그와 라이더의 관계는 전승으로조차 전해내려오지 않는 묻혀진 과거였다. 아처는 잠시 고민하듯 레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을 해 줄까, 말까. 아처가 창가에 조금 더 다가갔다.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고 흰 숨을 뱉으며 그는 제 마스터에게 진실을 고했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에......”

“......”

“눈송이만큼 하고 싶은 말이 생기던 사람.”


 내가 이 성배전쟁에 참여한 이유.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사람. 내가 전성기를 지금으로 선택한 이유. 어떤 답을 원해, 마스터? 전부 한 사람이야. 아처의 표정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라이더를── 신카이 카나타를 위해 소원을 빌기 위해 성배전쟁에 참여했다. 헌데 같은 전쟁 다른 클래스로 소환된 게 바로 그 장본인이라니. 희극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레이의 소원을 위해서라도 아처는, 하카제 카오루는 이 전쟁에서 유일한 승자가 될 마음을 굳힌 뒤였다. 보구까지 사용할 정도라면 카나타 역시도 카오루와 흡사한 결론을 내린 상태일 터. 그들 본인이 아니라 마스터를 위해서라도 둘은 싸워야만 했다. 


 카오루가 깊게 숨을 뱉었다. 창문이 뽀얗게 변했다가 천천히 바깥풍경을 투영했다. 눈은 깊이 높게 쌓이고 있었다. 흙을 덮는 눈처럼 이 감정도 아예 덮어버릴 수 있다면 편할 텐데 말이지. 그는 쓰게 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비참한 감정과는 별개로 냉정하게 행동할 자신은 있었다. 저를 도와줄 마스터도 있었으니, 연인에게 겨눌 각오도 되어 있었다. 비록 그 활을 쏜 뒤의 저 자신이 어떻게 될 지는 본인도 잘 몰랐지만. 










-


세이버 / 아처 / 랜서 / 라이더 / 캐스터 / 어새신 / 버서커 순서대로

레오 / 카오루 / 스바루 / 카나타 / 나츠메 / 나즈나 / 쿠로 그리고 마스터는

세나 / 레이 / 호쿠토 / 치아키 / 소라 / 토모야 / 케이토... 같은 느낌으로 상상한... 

슈랑 미카 에이치랑 와타루 마마랑 안즈는 다른 성배전쟁에서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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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타는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잔뜩 어두운 표정에 지나치게 우울해진 모습은 평소의 유하고 부드러운, 물 흘러가는 것처럼 웃는 얼굴의 카나타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틀림없이 천장에는 환하게 형광등이 반짝이고 있었다만 카나타가 틀어박힌 연습실 구석만 그림자가 지는 착각이 들었다. 심지어 컴컴한 기운이 꾸물꾸물 넓어지는 착각까지. 그런 카나타와 같은 유닛이라는 이유로 한 연습실에 있게 되어버린 유성대의 1학년들은 카나타의 반대쪽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울상이 된 미도리와 완전히 질린 표정의 테토라, 조금 겁에 질린 시노부는 소리없이 시선만으로도 대화를 나눴다. 입이라도 잘못 열었다가 상황을 악화시킬까 두려워 짧은 시간에 시선 대화라는 기술을 익혀버린 셋은 잔뜩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세 사람은 차라리 불처럼 타오르는 치아키가 간절히 그리울 정도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습에 조금 늦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슬슬 올 때도 되었는데...... 셋은 3초에 한 번씩 시계를 힐긋거렸다. 번갈아서 시계를 쳐다봐도 변하는 게 없으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빨리 좀 오십쇼, 대장! 어서 와 주시오, 대장공~! 모리사와 선배...... 속으로 그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답례라도 하는 걸까. 치아키는 마치 히어로처럼 연습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모두들! 아하하하, 다들 착하게 연습하고 있었나?”

“어서 오십쇼, 대장!!”

“보고 싶었소이다, 대장공~!!”

“선배......!”


 음? 치아키는 평소와 다른 열렬한 환영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가슴 뜨겁게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막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려는 순간 셋에게 붙잡혀 어두운 기운 앞에 섰다. 음?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유성 레드는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우는 물음표와 함께 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한 리더를 제일 앞세우고 세 사람은 열심히 항변했다. 어서 신카이 선배 좀 어떻게 해 주십쇼! 무, 무섭소이다! 화이팅......

 동료들의 뜨거운 응원을 뒤로 하고 강제로 기운 없는 카나타의 앞에 밀려 서게 된 치아키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카나타의 분위기가 워낙 우울하여 후배들이 겁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 유성대 3학년들은 제 권위를 내세우는 편이 아니니까, 가끔은 이런 식으로 반향이 오고는 했다. 카나타는 본디 존재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기도 했고. 치아키는 곤란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저기, 카나타? 무슨 일 있는 건가?”

“......”


 카나타는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 몸을 더 동그랗게 웅크렸다. 암묵적으로 보내는 거부의사에 치아키는 머리를 굴렸다. 카나타가 이토록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았다. 치아키가 딱히 짚이는 일이 없다는 건 유성대와 관련된 일은 아니라는 소리였고, 언데드와의 합동 라이브를 위해 방금 만나고 온 레이에게도 특별히 언질은 없었으니 기인 친구들 문제도 아닌 것 같은데. 잠깐 앓는 소리를 흘린 치아키는 반쯤 확신하며 물었다. 


“하카제와 관련된 일인가?”


 카나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떠진 연한 녹빛 눈을 보며 치아키는 씩 웃었다. 제대로 짚은 모양이었다. 치아키는 오늘 수업에 나왔던 카오루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카오루는 카나타보다 감정을 잘 갈무리하는 사람이었기에 (덧붙여서, 치아키에게는 카오루보다 카나타의 표정이 더 읽기 쉬운 점도 있었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카나타? 하카제와 싸우기라도 했나?”

“......치아키이~!”


 허어엉. 치아키이. 카나타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더니, 곧 숨길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카오루가 저를 싫어하면 어떻게 해요. 눈물을 뚝 떨군 카나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참고 참던 서러움이 터져나오기라도 한 것 같은 눈물에 치아키는 카나타가 우울하게 있던 방금보다 훨씬 더 당황했다. 카, 카나타. 울지 마라. 하카제가 널 싫어할 리 없다. 쩔쩔매며 달래는 치아키의 옆으로 후배들도 옹기종기 모여서 열심히 카나타에게 위로의 말을 건냈다. 물론 카나타가 왜 우는지 몰라 저가 잘못했다며 영문모를 사과나 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의 눈물로 넷이 완전히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삶아지는 상황을 겨우 벗어난 건 카나타가 가까스로 눈물을 그친 뒤였다. 조금 훌쩍이고 있기는 했지만 뺨의 물기를 닦아내고 진정한 카나타는 방금보다 썩 차분해져 있었다. 그러한 카나타를 앞에 두고 넷은 완전히 긴장해 있었지만. 말 조심하십쇼, 대장. 테토라는 치아키에게 잔뜩 눈치를 줬다. 울리면 안 돼...... 미도리는 우울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흐아아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소. 시노부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치아키는 다시 한 번 총대를 맸다. 


“음, 카나타. 오늘의 하카제는 평소처럼 보였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도 괜찮은가?”

“카오루한테 차였어요...... 카오루가 저한테 화를 냈어요, 치아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하카제가? 찼다고? 아니, 화를 냈다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카제가 카나타를 거절해? 치아키의 상식으로는 영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하카제는 가볍고 경박해보이기 쉽지만, 그가 얼마나 진지해질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카나타를 좋아하는지 치아키는 잘 알고 있었다. 카나타의 이야기를 하는 카오루가 얼마나 부드럽게 웃는지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치아키의 앞에서 카나타가 최대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울먹임과 서러움과 걱정 사이를 마구 비집고 튀어나오는 상황설명을 치아키는 최대한 간추리고 정리하려 노력했다. 유성대 대장의 입에서 간단한 한줄설명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음이 얼기 시작한 추운 날씨였는데 해변으로 데이트를 갔다가 하카제가 말리는 것도 듣지 못하고 물장구를 치는 바람에 하카제에게 혼이 났다는 건가?”


 카나타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엉. 어떻게 해요, 치아키. 다시 완연히 울상이 되어버린 카나타를 앞에 두고 유성대 네 사람은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신카이 선배가 잘못한 건 같슴다... 이를 어쩌면 좋소. 으, 으음......! 치아키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카오루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건 결국 이런 의미였구나 싶었다. 카오루도 좀 토라지기는 했겠지만 본격적으로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이를 어쩐다 고민하기 시작한 유성대들 사이로 미도리가 살짝 손을 들어 물었다. 


“그, 그럼 차였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그건, 그으. 며칠 전에 카오루랑 다음에 같이 가자고 수족관 티켓을 줬는데, 반성 끝내고 다시 신청하라면서 돌려받아 버렸어요......”


 이걸 어떻게 하죠. 카나타는 품에서 깨끗한 수족관 티켓 두 개를 꺼냈다. 데이트를 이런 식으로 거절당한 건 처음이었기에, 카나타는 다시 한 번 풀이 죽었다. 카오루는 늘 카나타에게 지나치게 물렀다. 물론 그에게 화가 난 순간까지도 그랬다. 테토라는 입가를 가지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제 착각이 아니라면 화해하고 사과할 찬스까지 아예 손에 쥐어준 것 같슴다. 시노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럼 그거 들고 정말 잘못했다고 빌면 되는 것 아니오? 미도리가 생각했다. 와아...... 치아키가 호쾌하게 웃었다. 모든 고민이 사라진, 악의 수장을 물리친 정의의 히어로같은 미소였다. 


“그걸 들고 다시 하카제에게 데이트 해 달라고 말하면 되겠군! 아하하핫, 다음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하면서 같이 가 달라고 다시 부탁하면 된다, 카나타!”

“그럴까요......?”

“그럼! 걱정하지 마라, 카나타! 하카제는 너를 정말 좋아하니까.”


 카오루가, 저를...... 카나타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발갛게 색 물든 뺨은 울어서 부은 탓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사랑으로 행복해져버린 카나타의 등을 떠밀며 치아키와 테토라, 미도리와 시노부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소소한 사랑싸움이었다. 나머지는 카오루가 잘 해 줄 터였다. 넷은 그리 믿으며 카나타를 그에게 보냈다. 고마워요. 방긋 웃고는 카오루가 있을 곳으로 바쁘게 뛰어가는 유성 블루의 뒷모습을 보며 네 사람은 잠시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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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밤

2017. 7. 6. 23:57 from ENSTARS/NOVEL





 카오루는 막 자정이 넘어가려는 시간을 보며 뻐근한 목을 풀었다. 오늘 하루도 피곤했다. 레이의 생활 패턴에 맞추다보면 자연스럽게 밤 스케줄이 늘어나기 마련이었지만, 낮부터 밤까지 일하는 빡빡한 일정은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체력적으로 조금 한계라고 해야 할까. 내내 신경써야 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카오루는 불이 켜져 있는 집을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열쇠는 옷 주머니에 당연히 들어있었지만, 집에 사람이 있는 듯 보이니 자연스럽게 벨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대문이 열리는 건 사랑스러웠다. 카오루의 입가에 무심코 미소가 걸렸다. 잔잔하게 휘어지는 곡선이었다. 


"카오루, 왔어요?"

"다녀왔어, 카나타 군."


 현관으로 들어서며 카오루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카나타가 허리에 손을 감아 왔다. 입술이 가볍게 쪽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술에 한 번, 뺨에 또 한 번. 시선을 얽고는 다시 한 번. 현관에서 쪽쪽거리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카오루가 카나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그는 조금 낮게 웃었다. 카나타는 오늘 이른 스케줄을 끝낸 뒤 내내 집에 있던 모양이었다. 안으로 발을 들이니 대번 기온이 서늘했다. 물고기들의 수온 문제도 있으니 에어컨을 잔뜩 틀어 둔 모양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서 고생한 건 카오루였으니, 그 인공적인 서늘함이 싫지 않았다. 도리어 기분 좋은 미소가 나왔다. 


 일단 옷을 벗고 씻은 뒤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온 카오루는 소파에 앉은 카나타가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았다. 카나타 군? 뭐 해? 그가 만지는 인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둥그런 몸체며 빵빵한 솜, 동글동글한 눈이 귀여운 돌고래 인형. 팬들에게 받은 조공품처럼 보였다. 해양생물이기는 하지만 카나타 군은 심해생물을 쪽을 더 좋아하지 않던가? 약간 괴상하게 생긴 것들. 카오루가 무심코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카나타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까마득한 바다의 에메랄드 색을 한껏 담은 연두색 눈이 즐거움을 담아 함뿍 휘어졌다. 곡선을 그리는 눈꼬리로 애정이 몽글몽글 굴러떨어질 것 같은 달큰한 미소였다. 한 입 베어물면 꿀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카나타가 인형이 입을 쪽 맞췄다. 에? 카오루가 무심코 소리를 내기도 전에 카나타의 키스를 받은 인형이 카오루의 입술에 꾸욱 눌렸다. 으움? 카오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형으로 간접키스를 날린 카나타는 마냥 행복한 듯 헤실헤실 웃었다.


"카오루 충전인거에요~. 오늘 하루 종일 못 만났으니까."

"아... ...하하하......"


 충전이 심장에 나빠. 카오루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몇 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지나치게 귀엽게 굴다가도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섹시해지기까지 한다. 정말 사람 심장 건강에 나쁜 남자다. 나한테만 이렇게 굴어주면 소원이 없겠는데, 가끔 카메라 렌즈에서도 이러니까 문제지. 카오루는 카나타가 안겨 준 인형을 내려놓고는 팔을 넓게 뻗었다. 


"그 정도로 충전되는 거야?"

"어......"

"나 여기 있는데."


 카나타 군. 은근한 목소리에 카나타가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저를 향해 똑바로 팔을 뻗고는 웃으며 기다리는 카오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곤란해요, 카오루...... 말끝을 늘이면서도 카나타가 카오루를 덥석 끌어안았다. 막 씻고 나온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몸은 따뜻했다. 카나타는 그 목덜미에 몇 번 입술을 대었다 때며 행복해했다. 그 몸에서 풍기는 체향이 카나타의 것과 몹시 흡사했다. 지독하게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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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이번

2017. 4. 7. 00:20 from ENSTARS/NOVEL



  카나타는 창 안쪽으로 보이는 광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머리 위로 잘게 뿌려지는 분수대의 물길은 이미 의식 저편에 날아간 뒤였다. 화사한 황금색 머리카락, 수려한 이목구비, 경박하게 꾸미고 있는 연한 눈동자, 하얀 피부. 선 고운 모양새며 발갛게 보기 좋은 혈색에 조금은 제멋대로 입은 교복차림 하나하나 놓치는 것 없이 집요했다. 물빛의 눈동자가 옷자락이라도 잡고 매달리는 꼬마아이마냥 그의 뒤꽁무니를 쫒았다. 클래스메이트인 치아키며 세나와 대화하는 게 즐거운 모양인지, 곤란한 표정도 지었다가 머쓱하게 웃기도 하는 그 다채로운 얼굴표정이 사랑스러웠다. 길게 단숨을 뱉으며 카나타가 분수대의 차가운 돌에 뺨을 대었다. 물기로 넉넉하게 체온이 빼앗겼다. 


 서른 여섯번째 너도 사랑스럽다. 

 카나타는 짧게 숨을 삼켰다. 서른 여섯번째 겪는 삼학년의 봄이었다. 그와는 반이 갈렸지만 친구들과는 한 반. 아직 2학년 A반에 전학생이 들어오지 않은 이른 시기였다. 앞으로 쏟아질 수많은 일들이 별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는 느리게 참잠했다. 시간을 돌리는 그 사이사이 수많은 변수들이 끼어들며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조금이라도 기억에 잠기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첫 번째의 과거였다. 시간을 돌린 이유, 너와 사랑을 했던 시간. 겨울, 졸업하기 전에 이별한 시간. 



 신카이 카나타는 사람이 아니었다. 흔히 인어라고 불리는 물에 사는 종족. 신비와 마법이 사라지며 인간의 세상에 발을 디딘 그는 인간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시간을 되돌렸다. 그가 제 곁을 떠나는 것도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길고 긴 삶을 사는 동안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고작 삼 년이라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끝없이 피부를 물에 적셔야 겨우겨우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건 카나타에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카오루가 살아서, 자신을 본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저를 사랑해주지는... 않지만요. 카나타가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돌이 닿는 뺨이 서늘하니 얼얼했다. 가장 첫 번째의 카오루는 카나타를 사랑했다. 시선에서, 태도에서, 어조에서 모두 티가 났다. 카나타 군,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는 꿈에서 들어도 가슴 저릿하게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오롯하게 첫 번째 기억 속의 하카제 카오루였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나고 몇 번이고 그를 사랑했지만 카오루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잘 있어, 카나타 군. 또 보자. 안녕. 겨울날 전해진 이별. 담백하게 떨어지는 손길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모두 분명하게 애정이 빛나고는 있었다만, 카나타와 같은 색은 아니었다. 깔끔한 친애. 우정. 살아있다는 그마저도 감사했지만 처음과 꼭 같지 않은 감정 탓에 늘 되돌아왔다. 3학년의 봄. 처음 사랑을 시작했던 그 무렵. 


 이번의 카오루는 처음의 카오루와 가장 많이 닮아있었다. 가끔 다정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유독 달았다. 이번이라면 사랑해줄까요. 나를 좋아해줄까...... 의문을 품으며 카나타는 얕은 분수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뽀그르르 올라오는 물거품이 보글보글 위로 터져올랐다. 좋아한다, 아니다, 좋아한다, 아니다. 물 소리만 요란했다. 


“카나타 군!”


 아, 그리고 그 너머의 너. 카나타는 저를 건져올리는 카오루를 보았다. 물 속에서도 선연하게 보이는 황금빛 어른거리는 빛무리 너머로 카오루가 있었다. 당혹스러운 듯 미간을 좁히고는 걱정스럽게 저를 보는 모습에 부끄러울 정도로 기뻤다. 서른 여섯번째로 보는 봄의 네가 상냥했다. 드문 일이었다.


“카오루~.”

“빠져서 위험한 줄 알았잖아. 위험하니까 고개 정도는 내밀고 헤엄쳐달라고.”


 깜짝 놀랐네. 실없는 일이었다는 양 한숨을 내쉬며 머쓱하게 웃는 얼굴에 카나타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수대에 뛰어들어 젖은 옷을 그제야 짜내며 불평하는 모습까지도 좋기만 했다. 카오루, 카오루. 수백번의 밤과 수백번의 낮을 지나 서른번이 넘는 봄을 돌아 만난 이번의 카오루. 

 좋아해요. 좋아해주세요.

 차마 건낼 수 없는 말을 마음 속 깊이 삼키며, 카나타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는 늘 그렇듯 다시 사랑을 시작했으니, 이제 사랑받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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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음악실

2017. 3. 8. 21:34 from ENSTARS/NOVEL





 유메노사키 학원은 아이돌 육성학교로, 학년이 올라갈때마다 자퇴하는 수많은 학생들 덕분에 저학년에 비해 고학년의 숫자가 훨씬 적은 장소였다. 무사히 진학하는 자는 소수, 그 중에서 졸업하는 자는 소수, 그 안에서 진짜 아이돌이 되어 성공하는 자들은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극소수. 하카제 카오루는 그 중 첫 번째 관문을 넘고 3학년까지 진학을 성공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비록 뺀질뺀질하고 수업은 밥먹듯이 빠지며 여자아이들만 좋아하고 불성실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사람이었지만─그리고 그 중 대부분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그럼에도 그는 빛나는 재능과 눈부신 외모를 바탕으로 자신이 서 있을법한 입지 하나쯤은 너끈히 만들어냈다. 

 그런 카오루에게 있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교실 몇 개의 예비 열쇠를 손에 넣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메노사키 학원의 크기에 비해 아이돌 학부의 학생 자체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고학년은 더더욱 그랬다. 사용하지 않아 잠기게 된 교실도 몇 군데나 있었다. 카오루 그는 남자따위 질색이라고 말하는 것에 비해 태도가 둥근 편이라 동급생들에게 그럭저럭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던 탓에 여러 뒷구멍을 통해 은밀하게 열쇠를 몇 개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카오루는 그 중에서 서쪽 현관 3층 복도 끝에 있는 음악실을 가장 좋아했다.


 사용하지 않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교실은 개중에 가장 깨끗하고, 창문에 달린 커튼이 하얀 색이었다. 볕이 잘 안 들지만 노을이 지는 모습이 눈이 부시게 고왔다. 음이 약간 엇나가서 조율이 필요해진 피아노나 살짝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책상과 의자들도 나쁘지 않았다. 카오루가 자주 드나들며 종종 환기도 시킨 탓에 교실은 썩 멀끔해진 상태였다. 적어도 숨쉬면서 먼지 먹을 걱정은 없었다. 창가에 가깝게 닿은 자리에 걸터앉으며 카오루가 크게 몸을 폈다. 여자아이들을 만나러 다니며 즐겁게 사는 것도 좋았지만 종종 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누구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카오루는 이곳에 왔다. 


 문득 그는 낡은 교탁 위에 놓여진 화병을 응시했다. 카오루가 전세라도 낸 마냥 쓰고 있는 교실이었기에 조금씩 치워나가는 것 역시도 그였다. 즉 교실의 사소한 변화는 모조리 잡아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3학년 A반 본인 교실은 그렇게 못 하고 있었다만. 여하튼 그가 어제 깨끗하게 씻어 놓은 병에는 꽃이 두어 송이 장식되어 있었다. 카오루의 손길이 닿은 건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행동을 할 법한 사람을 추려보았다. 이 유메노사키 학원에 꽃이랑 어울리는 사람이야 무척 많았다만, 그것과 별개로 꽃과 친근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같은 유닛의 세 사람? 허어. 모조리 제외. 그 중 한가롭게 원예를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클래스의 사람들. 음, 그나마 이츠키나 텐쇼인. 세나라면 그럭저럭 꽃을 얻어왔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텐쇼인이라면 카오루가 이 교실을 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그의 짓일 확률이 제일 높다고 여겨졌다. 물론 그가 이 교실에 들어와서 화병을 채워놓을 이유도 없고 그렇게 행동했다고 상상해봐도 대단히도 징그럽다만...... 카오루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따지면 꽃이 장식되어져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누구지. 의문은 금방 풀렸다. 카오루는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카나타와 단박에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히자마자 곱게 곡선을 그리는 눈매가 꽃잎보다 여리게 말랑했다. 


“역시 여기 있었군요? 카오루~.”

“분수대에서 바로 여기로 온 거야? 다 젖었잖아, 카나타 군.”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곧장 사물함을 뒤져 마른 수건을 두어 장 꺼내왔다. 카나타를 위해 가져 온 것들이었다. 하카제 카오루가 이 교실을 좋아하는 이유 중 마지막 하나는, 이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분수대를 한참이고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이 교실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아는 건 알면서 눈감아주는 학생회장 텐쇼인 에이치와 학교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삼기인 사쿠마 레이를 제외하면 카나타 뿐이었다. 하카제 카오루의 하나뿐인 연인인 그, 단 한 사람뿐.


 드나들때마다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휴대전화도 잘 안 가지고 다니면서 카나타는 카오루가 이 교실을 왔을 때마다 귀신처럼 정확하게 찾아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카오루가 카나타의 젖은 머리를 털어주며 익숙한 타박을 늘어놓았다. 카나타는 듣는 건지 아닌건지, 방긋 웃기만 했다. 무어, 진작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당장 감기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카나타를 말려놓은 뒤에야 카오루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무 의자에 앉아 책상에 턱을 괸 카오루가 문득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 화병의 꽃, 채워놓은 건 카나타 군이야?”

“네에. 어제 우연히 받을 기회가 있었거든요...”


 카오루랑 닮아서, 아주 예쁘길래. 여기에 빈 꽃병도 있는 걸 알았고요. 카나타는 바다만큼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저 프리지아 꽃다발은 같은 오기인 후배인 나츠메에게 받았고, 그 나츠메는 같은 유닛의 선배인 츠무기에게 받았고, 그는 미카의 알바를 도와주다가 남은 꽃들을 보상으로 받았다고. 사람 손을 많이 탄 꽃인것에 비해 색이 곱고 상한 곳이 없었다. 곱게곱게 건내진 모양이었다. 카나타가 저를 위해 신경 써 주었다는 증거를 눈앞에 둔 카오루의 입가가 자연스럽게 물렁해졌다. 상냥한 미소를 그리는 연인을 보며 카나타의 얼굴에도 한껏 풀어진 곡선이 새겨졌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건 비밀이에요.”


 카오루의 곁에 바짝 다가 앉은 카나타가 은근히 웃었다. 카오루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곳에서 분수대가 한눈에 보이는 만큼 분수대에서도 이곳이 한눈에 보였다. 교실 창문을 가리는 하얀 커튼 너머로 어른어른 사람 그림자가 맴돌면 카나타는 대번 이곳으로 왔다. 가끔 허탕을 칠 때도 있었지만 열에 아홉은 제대로 카오루가 있었다. 텅 빈 음악실에서 은근히 기다렸다는 양 눈이 마주치면 대번 기쁜 표정을 지어버리는 게 귀여웠다. 애써 표정을 숨기고는 웃는 얼굴은 심장이 빠듯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진실이었으니까 카오루는 몰라주는 게 좋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적당히 수긍해서 납득하는 카오루가 귀여웠으니까. 카나타는 언제나 제 연인에게 심술궂고 무른 사람이었으니, 이번에도 그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대신 그 뺨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소리내서 떨어지자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눈이 맞았다.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무르듯이, 카오루도 카나타에게 지나치게 물렀다. 얽혀진 시선 사이로 전해지는 목소리가 다정한 척 은근한 요구를 담고 있었다. 카오루가 무심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카나타가 커튼을 쥐었다. 넓게 펼쳐져 얇게 가려진 천 한 장 너머로 입술이 닿았다. 첫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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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동화

2017. 2. 21. 18:37 from ENSTARS/NOVEL




 약 3개월 전, 하카제 카오루는 해변을 걷다가 상처입고 쓰러진 인어를 발견했다. 남자를 싫어하던 소년은 남자 인어를 주워 치료해줬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낯선 세계를 배우게 된 인어와 낯선 생명체와 교류하게 된 인간은 수많은 갈등을 겪었고, 그만큼 마음 고생을 했었다. 끝내 소년은 바다로 돌아가기 직전인 인어를 붙잡아 사랑을 고백했다. 동화라기에는 조금 구질구질하고 많이 힘든 이야기였지만, 결말만큼은 분명 아름다웠다. 달 비추는 밤바다를 뒤로 하고 저에게 키스하는 인어의 모습을 카오루는 결코 잊을 수 없을 터였다. 음, 분명 해피엔딩. 그 이후로 이어질 이야기는, 분명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심각하게 분홍색의.



 키스는 입술에 한 번, 이마에 두 번. 뺨에 몇 번이고 쪽쪽거렸다가 콧잔등에 한 번.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입술에. 허리를 끌어안고 카오루의 얼굴에 온통 입술을 찍어대는 카나타는 행복해 보였다. 키스받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언제나 느끼는 감상이었지만, 심장을 토할 것 같았고. 카오루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대번 시선을 저 멀리로 피했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트를 뿅뿅 날리고 있는 카나타의 얼굴을 마주 보기 머쓱했다. 심장에 좀 안 좋은 광경이기도 했다. 

 카나타는 제 시선을 피하는 연인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인어는 독점욕이 강했다. 조금 고개를 숙여 목덜미를 쪽쪽이기 시작하자 카오루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목덜미며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으, 카나타 군. 시선을 맞추며 띄엄띄엄 뱉어내는 목소리에 카나타가 대번 환하게 웃었다. 만개하는 꽃보다 어여쁜 얼굴을 보며 카오루는 입술을 꾹 붙였다. 하고 싶은 말도 삼킬 정도의 위력이었다. 과연 인어. 마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심장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카오루, 카오루.”


 카나타는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늘 그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입술이 붙지 않고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카오루, 하고 부르는 소리를 카오루는 매우 좋아했다. 그의 목소리는 늘 지나치게 다정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를 황홀하게 만들 정도로 달았다. 혀끝을 자근자근 물던 카오루가 곧 답했다.


“......왜, 카나타 군?”

“우리 바다에 갈까요?”

“벌써 저녁인데. 바다에 다녀 오기에는 너무 늦지 않겠어?”

“음, 그런가요?”

 

 카나타는 조금 아쉽게 답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는 건 카오루에 대한 배려였다. 더 치근거리는 대신 카나타는 카오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체온이 조금 더 바싹 붙었다. 목덜미에 이마가 닿았다. 체온 나누는 어린 짐승처럼 가까이 붙자 숨소리 드나드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카오루는 침묵했다. 그의 맥박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 전해지는 심장 뛰는 소리가 기꺼웠다. 격동적으로 시작하게 된 두 사람의 사랑은 놀라우리만치 평화로웠다. 다만 사랑만이 넘쳐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어린 인어였고, 그는 그보다 더 어린 인간이었다. 두 사람의 삶은 하늘과 바다만큼 달랐다. 자그마한 교차점 하나로 이어진 세계는 사랑스러운 만큼 불편한 것도 많았다. 사랑은 두 사람의 세상에 적응해가는 이유이자 결과였다. 카오루는 카나타와 침묵으로 체온을 나누는 지금같은 시간을 좋아했다. 시계 초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우주에 둘만 남은 것처럼 고요한 시간.


 카오루, 카오루. 침묵을 가르고 두 번 부르는 목소리에 조용히 답했다. 카나타는 덧붙이는 말 대신 키스했다. 입술 닿았다가 떨어지며 나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미약한 웃음소리가 그 뒤에 섞여들어가고, 자그마한 대화가 엉겼다. 행복하게 끝난 동화는 평화롭고 잔잔한 바다처럼 온유했다. 거친 파도 한 자락 불지 않는 아름답고 잔잔한 바다. 


 시선이 끈질기게 달았다. 도무지 상대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붙박이장처럼 바라보는 모양새가 내심 마음 한구석을 흔흔하게 만들었다. 카오루는 카나타의 목덜미에 흔적처럼 돋아나있는 에메랄드 색 비늘 위에 입술을 댔다. 카나타가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가, 크게 끌어안았다. 간지러워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웃음소리도 흘렸다. 인어인 그는 체온이 낮았지만, 카오루와 닿은 순간만큼은 인간만큼이나 뜨거워졌다. 카오루는 따끈하게 열이 오른 체온을 좋아했다. 귓가가 붉었다.

 카오루가 온전한 인간이듯 카나타는 온전한 인어였고, 바다에 살던 그는 바다의 규칙에 익숙했다. 카오루가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없어 그의 세계에 살 수 없기에 카나타가 카오루의 세계에 올라왔으니 카오루는 카나타에게 최선의 배려를 주고 싶었다. 카나타는 자신의 세계를 등지고 카오루의 곁을 선택해주었으니까. 사랑이 희생 위에 세워져있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으나, 카오루는 카나타의 일에 지나치게 시야가 좁아졌다. 독점욕 강한 인어는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저에게 신경써주는 연인은 사랑스러웠으므로. 


 카나타가 카오루의 손을 쥐어 자신의 다리 위에 얹었다. 인어의 다리는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만들어졌다. 길고 아름다운 인어의 꼬리가 아니라 인간과 꼭 같은 다리는 카오루를 향한 사랑의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카오루의 뺨이 미약하게 붉어졌다. 내심을 들켜 쑥쓰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귀여운 카오루. 늘 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며 카나타가 그 뺨에 입맞췄다. 카오루가 눈을 감았다. 숨결이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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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의 아이돌은 바쁘다. 


 실시간으로 정상급 아이돌 위치에 발을 디디고 있는 카오루는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쉴 시간 따위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특집으로 진행되는 예능은 며칠 전 이미 녹화를 끝냈지만 다른 멤버들과 함께 예정된 팬미팅과 악수회가 있었고 그 뒤에는 빠듯하게 다음 주 방영될 프로그램 녹화에 참여했다가 삼십 분 겨우 쉬고 타야 할 비행기를 위해 공항으로 달려야 할 처지였다. 아이돌에게는 크리스마스는 휴일도 아닌 거지. 카오루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지어 연인과 달콤한 시간을 보낼 짬도 없었다. 짬은 커녕 얼굴 보는 것도 사흘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카오루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프로그램 녹화가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공항으로 가는 자동차에서 카나타에게 영상통화를 거는 게 전부일 확률이 아주아주 높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정점급 아이돌은 아쉬움을 삼켰다. 이제 와 새삼 그러기에는 작년도 재작년도 카오루와 카나타는 일에 치여 아주 소소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연말과 연인의 날이라는 이름은 몇 년째 열렬하게 연애중인 두 사람을 묘하게 들뜨는 상태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키스 한 번 나누지 못하는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렇다고 키스해달라며 칭얼대기에는 부끄러웠다. 좀 심각하게. 학창 시절에는 어떻게 젊은 패기에 말했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한 글자만 내뱉어도 혀끝을 깨물만큼 부끄러웠다.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줍어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직접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보다 훨씬 부끄러운 말들도 수줍은 요청도 수십번이나 주고받은 사이였지만 이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양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덮었던 카오루가 붉어진 뺨을 열심히 수습했다. 


 메이크업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손부채질하여 얼굴을 수습해낸 카오루는 금방 말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카오루가 얼굴을 식힌 것과 스텝이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하카제 씨, 시작합니다! 부름에 카오루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팬들과 가까이서 교류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아까의 설렘과는 다른 의미로 들뜨는 것을 느끼며 카오루가 걸음을 서둘렀다. 




 팬미팅도 악수회도 그 뒤에 있던 방송 녹화까지도 별 문제 없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드문드문 예상치 못한 소소한 사고는 일어났지만 별 문제 없이 덮을 수 있는 작은 사고에 불과했다. 카오루에게만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녹화가 끝난 시간이었다. 중간중간 생겼던 NG들로 지연된 시간이 쌓여 카오루의 짧았던 쉬는시간마저 증발시켜버렸다. 아니, 공항 가는 차가 막히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아쉽기는 했다. 카나타 군이랑 만날 시간은 진짜 없네. 사탕을 본 개미때처럼 슬금슬금 기어오는 감정들을 카오루는 애써 떨쳐냈다. 


 차 안에서 카나타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만, 벤은 심하게 흔들렸다. 속도를 과하게 내는 탓이었다. 사고 나면 큰일 난다고? 보험 들어놨어? 카오루는 손잡이를 꽉 잡고 농담처럼 진담을 걸었다. 미안, 급해서! 운전하는 매니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차가 다시 한 번 크게 위아래로 덜컹거렸다. 카오루는 죽기 싫어 손잡이에서 손을 놓을수가 없었다. 수속을 밟는 절차가 있으니 전화할 짬 하나 없을까. 애써 자위하며 카오루가 창 밖을 슬쩍 보았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찾기도 힘들었지만, 어둠 앉은 밤에 빛나는 차의 불빛도 하나의 일루미네이션이 되어 반짝였다. 크리스마스라는 날짜적 특성 탓일지도 몰랐다. 감상에 잠기다니, 나도 설마 늙었나? 카오루는 상상하기 싫은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창 때의 아이돌이었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것도 웃겼다. 


 도착하자마자 티켓팅을 하고 입국절차를 밟고 급하게 이동하는 속도는 빨랐다. 카오루도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이번 비행기를 놓치면 곤란했다. 스케줄이 크게 틀어지는 것은 카오루도 바라지 않았다. 다행히 늦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막 비행기 탑승로까지 걸어온 카오루는 화면에 떠 있는 대기 표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의 준비로 10분정도 대기 시간이 생긴 모양이었다. 의자 하나에 앉으며 카오루가 그제야 좀 숨을 골랐다. 너무 급하게 움직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연락하면 받으려나. 카오루가 엄지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쓸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스텝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카오루에게 크게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구석으로 슬쩍 빠져 전화를 걸면 받을까. 지금 카나타 군 스케줄이 어디지? 카오루는 고민했다. 걸었는데 받지 않으면 그것도 조금 아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걸지 않는 쪽이 훨씬 후회될 것 같아서, 카오루는 이미 외운 번호를 화면에 찍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은 언데드의 신곡이었다. 첫 반주가 한 마디 울리기도 전에 뒤에서 진동이 울렸다. 카오루가 문득 뒤돌았다. 


“카나타 군?”

“카오루~.”


 카나타가 쓰고 있던 썬글라스를 살짝 끌어내렸다. 작은 틈새 사이로 보이는 에메랄드 색 눈동자가 반갑게 휘어졌다. 아니, 정말로 카나타 군? 카오루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여기에? 온통 의문을 보이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턱을 괴었다. 상냥하게 고아지는 얼굴은 고스란히 제 연인의 것이었다. 주변을 살짝 둘러본 카나타가 조심스럽게 카오루의 손을 잡았다. 은밀하고 따뜻했다. 


“새 스케줄이 생겨서, 홋카이도로 간답니다.”

“지금? 아, 그래서 비행기로?”

“네. 저는 국내선이에요. 30분 뒤에 타야 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카오루가 와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반갑게 웃는 얼굴이 유독 들떠 보이는 건 그 탓인 것 같았다. 카오루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기쁘게 웃었다. 연인과의 만남에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예상치 못했기에 훨씬 기꺼웠다. 사소하게나마 산타의 선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사람이 슬쩍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다른 사람의 눈에 쉬이 띄지 않을 곳으로 숨은 연인이 마주 웃었다. 둘 다 곧 비행기가 뜨는 처지이니 오래 숨을 수는 없었지만, 짧은 틈새로도 충분했다. 


 시선이 얽혔다. 잔뜩 휘어져있는 색채가 뒤섞여 애정의 빛을 그렸다. 카나타가 고개 숙여 카오루의 입술에 제 것을 부볐다. 몇 번이고 노크하듯 쪼아내리던 입맞춤이 금새 농밀해졌다. 호흡 삼키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뺨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손끝이 저릿해지는 순간이 좋았다. 몇 번 헤매던 카오루의 손이 카나타의 옷자락을 잔뜩 구겼다. 체온은 떨어지는 구석 없이 밀착해 있었다. 키스하면서 둘이 떨어지는 순간은 한 쪽의 호흡이 한계에 다다는 순간 뿐이었다. 카오루가 먼저 떨어졌다. 더 멀어지는 게 아쉬워 카나타가 반듯한 이마를 맞댔다.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숨 고르는 소리가 열기에 섞였다. 카나타는 카오루의 귓가마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사랑스러웠다. 


“나 갈 시간 아니야?”

“아마 맞을 거에요.”

“찾으러 왔다가 카나타 군을 보면 곤란한데.”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완곡한 말이었다. 이해는 했지만 아쉬움에 작게 입을 비죽였다.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카오루에게 짧게 키스하는 카나타의 모습에 카오루가 짙게 웃었다. 저도 아쉬웠다만 연인이 표현해주는 감정이 기꺼워 가벼이 녹아내렸다. 카오루가 카나타의 뺨에 입맞췄다. 


“신년에 집에서 보자, 카나타 군.”

“도착하면 전화해요, 카오루.”


 카오루의 짧은 입맞춤에 카나타가 답례처럼 카오루의 양 뺨에 입맞췄다. 시선이 맞고 다정하게 휘어졌다. 짧게 맞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조금 부푼 입술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카오루가 몸을 돌렸다. 저를 찾는 부름에 답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산타의 선물이 끝나고 이제 다시 모두의 아이돌이 될 시간이었다.

 얼굴, 이상하지 않겠지? 기내에 탑승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며 가방에 넣어뒀던 여권을 꺼낸 카오루가 손등으로 뺨을 꾹 눌렀다. 여전히 따끈따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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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너는 바다 위에 뜬 하나의 별.

 그리고 나는 심해에 가라앉은 부서진 유리 조각이었다. 



 심해의 이름을 가진 소년은 의외로 제 감정 숨기는 것을 잘 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을 많은 것을 숨기기에 퍽 용이했다. 바다 속에 가라앉아 세상을 보고 싶었다. 물로 가득찬 공간은 숨을 쉬기 편했다. 아가미로 호흡하며 소년은 깊게 가라앉고 싶었다. 오래오래 어두운 그 안에 잠겨 있던 소년에게 빛 한 줄기가 뻗어졌다. 자신에게 다가온 빛을 따라 손을 뻗은 소년은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다. 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별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별. 황금빛 별. 멀고 손이 닿지 않는 아름다운 너. 소년은 별에게 사랑에 빠졌다. 목이 아프고 아파도 개의치 않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해변으로 걸어나와 만나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는 별과 닮아 있었다. 

 그는 신카이 카나타의 가장 아름다운 별이었다.


 카나타 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았다. 카나타가 먼저 부르기 시작한 이름에 카오루도 결국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사실이 마냥 기뻤다.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좋았고, 부르면 꼭 눈을 보아준다는 점이 좋았다. 고집을 부리면 별 수 없이 져 준다는 것도 좋았고, 알게 모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는 점이 좋았고, 그 나잇대 소년처럼 장난기 어린 말투도 좋았고, 결국 하카제 카오루에게 신카이 카나타라는 사람이 특별하다는 점이 좋았다. 

 전부 좋아했다. 


 카나타가 그에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었다면 카오루가 그에게 품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친애? 우정? 카나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카오루는 카나타를 특별하게 여겼고, 그렇기에 카나타를 잃고 싶지 않아했다. 손을 잡고 몸을 기대오는 카나타를 카오루는 거절하지 않았다. 받아주지 않았지만 밀어내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저 카나타의 성격이라고 보아 넘겨준 것일지도 몰랐다. 조금 과할 때가 있었지만 친구로서의 스킨십으로 이해할 수 있을 선을 넘지 않았으니까. 카나타는 충분히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는 여기까지. 그만큼에 만족했다. 키스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친구로 볼 수 있을 정도로만 다정하게. 카오루가 다른 사람에게는 해주지 않는 것을 받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그런 관계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건방진 맹신이었다. 카나타는 온유하게 생각했던 스스로를 잠시 비웃었다. 그 관계에 만족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하카제 카오루에게 다른 특별한 사람이 없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전제가 무너지는 순간 카나타의 내부에 숨막히도록 욕심이 밀려 차올랐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울한 감정이었다. 

 있지 카나타 군,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뺨을 붉히며 속삭이는 말은 카나타의 많은 것을 무너뜨렸다. 귓가에 와르르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나타는 멍하니 카오루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 곱다. 사랑에 빠진 카오루는 상상했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고왔다. 사랑스러웠다. 귀여운 카오루. 카나타는 심장을 꽉 움켜쥐는 통증을 억지로 참았다. 


 카나타 군에게만 말해주는 거니까. 뺨을 긁적이며 말하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는 울컥 차오르는 충동을 쓰게 삼켰다. 하늘에 떠 있는 너를 끌어내리고 싶었다. 심해에 가둬 품에 끌어안고 싶었다. 내 안의 어둠 속에서 빛나주는 심해의 별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끔찍한 이기심이었다. 너를 상처입힐 감정에 소름이 끼쳤다. 


 축하해요, 카오루. 잘 되기를... 응원, 할게요.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지만 어떻게든 감춰 넘겼다. 고마워. 그리 웃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는 쉴 새 없이 짠 물을 삼켰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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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감기

2016. 12. 4. 22:01 from ENSTARS/NOVEL



 열병에 걸렸다. 증상은 감기와 몹시 흡사했다. 심장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설레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종종 언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병이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한 눈에 사랑에 빠졌다. 하카제 카오루는 쉽게 타인에게 호감을 주었지만, 결코 제 마음을 순순히 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그만한 인내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보기보다 고집이 있고, 상냥하고 정에 약했지만 솔직하지 못했다. 별사탕처럼 작고 물렁한 심술이 말 속에 들어가 진심을 감췄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꽤 길게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하카제 카오루는 결국 강해진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첫사랑에 걸려 버렸다. 


 신카이 카나타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는 하카제 카오루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카오루는 처음 빠진 사랑에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다. 가장 기본적인 시선부터가 관리하기 힘들었다. 좋아해, 좋아해. 온통 속삭이는 색소 연한 회색 눈동자가 엷게 반짝였다. 앓고 있는 것은 첫사랑이었지만 카오루는 타인과 애정을 교류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그 상대를 신카이 카나타로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상상조차 잘 떠오르지 않았다. 


 덕분에 선택한 방법은 꽤나 극단적이었다. 열병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먼저 열병의 원인과 이어지는 것. 어쩌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깊게 사로잡히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게 아니라면 효력은 미미했지만 사랑을 쫒는 약을 사 먹거나, 다른 방법으로는 멀리 떨어지는 것.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카오루는 믿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도 돌아가신 뒤 오래 만나지 못하니 많은 것을 잊게 되어버렸으니. 그러니 카나타도 보지 않고 만나지 않는다면 금방 잊혀질것이라고. 열병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신카이 카나타에게 향하는 걸음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사실 만나지 않는 것은 꽤 쉬웠다. 카오루와 카나타는 같은 반도, 같은 유닛도 아니었다. 고작 부활동으로 엮인 관계에 불과했다. 카오루는 본디 부활동에 충실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다시 불성실하게 참가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한 학년 낮은 후배는 틀림없이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겠지만, 그 정도야 손쉽게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해양생물부는 물론이고 분수대로 가는 발걸음마저 완전히 끊어버렸다. 하카제 카오루의 일상에서 신카이 카나타의 자리를 완전히 비워버렸다. 

 

 그러니 남은 것은 카오루의 마음 속에 남은 카나타뿐이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카오루는 고민했다. 몸의 내성이 일을 하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약을 먹어야 할까. 카오루는 약국 앞에서 고민했다. 사랑을 쫒아주는 약을 사서 먹을까. 그럼 이 감정은 깨끗하게 지워지겠지? 카오루는 작은 기대를 가졌다. 일시적으로 지워져도 금방 감정을 피워내주는 바람에 약은 그닥 뛰어난 효과가 없었지만, 그 일시적인 효과마저 간절했던 수많은 사람 덕분에 약은 언제나 인기기 많았다. 결국 약국에 들어가 약을 한 통 산 카오루는 그 날 저녁 식후 30분 뒤에 물과 함께 알약을 삼켰다. 위로 함께 들어가 사르르 녹은 약은 하카제 카오루 속에 남은 사랑을 지워버렸다. 온갖 달콤하고 맵고 뜨거운 것은 녹아버리고, 남은 것은 담백한 것 뿐이었다. 카오루는 안심했다. 


 열병에서 벗어난 뒤에도 카나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위험했다. 감정은 피어나는 것. 사랑의 약은 내성이 금방 붙었다. 또한 감정은 너무도 금방 자랐다. 카오루는 카나타에 대한 모든 감정을 지웠지만, 카나타를 보면 감정이 자랄 것이 무서웠다. 다음도 또 다음도. 신카이 카나타는 너무 금방 카오루에게 침입했다. 다시 앓을 것이 두려워 카오루는 카나타를 외면했다. 그에게 가는 걸음은 여전히 뚝 끊은 채였다. 

 


 다만 그가 모르고 있던 것이 있다면, 신카이 카나타의 감정이었다. 카나타는 갑작스럽게 제 앞에서 모습을 감춘 카오루에게 화가 났다. 그가 학교에 꼬박꼬박 등교를 한다는 소식 정도는 유닛의 멤버인 치아키에게 모조리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어떤 얼굴로 웃는지. 카나타의 동료인 치아키는 카오루의 친구였고, 그만큼 많은 것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카나타와의 연결고리를 모조리 끊어버린 카오루는 즐거워보였다. 카나타는 그게 화가 났다. 저 혼자 카오루가 보고싶어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카오루는 전혀 카나타를 소중히 여겨주지 않는 것 같았다. 카나타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는 마이페이스였지만, 행동력만큼은 있었다. 분수대에서 빠져나온 물빛 청년은 망설임없이 옆반의 문을 열어젖혔다. 


 

 하카제 카오루는 숨을 삼켰다. 에메랄드 바다 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조금 화가 나고, 하지만 만났다는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맑은 색 눈동자가 단단히 카오루를 얽어잡았다. 사라졌던 감정이 몽글몽글 다시 피어났다. 오래 막아두었던 반향이라도 되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와 사람의 모든 것을 사로잡아버린 감정에 카오루는 조금 울상이 되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열병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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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우산

2016. 11. 27. 23:03 from ENSTARS/NOVEL




 해양생물부 부실은 언제나 적당히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오루는 잘 몰랐지만, 카나타의 말에 따르면 민감한 해양생물들을 여러 종 키운다고 했었다. 여름에는 풍족한 에어컨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겨울에는 아무리 추워도 일정 온도 이상으로 기온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덕분에 작년에도 제작년에도 카오루는 날씨가 추워지면 자연스럽게 해양생물부실에 가는 걸음을 줄였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이기는 했지만 추우니 낮잠도 자기 힘들고 타자를 치는 손가락도 얼었다. 그럴 바에야 여자아이들과 카페에 가는 쪽이 훨씬 편했다. 

 덕분에 겨울이 되면 카나타와 만나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카오루의 얼굴도 잊어버리겠어요...☆ 2학년 겨울 무렵 조금 서운하다는 듯 속삭이는 카나타의 목소리에 양심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과 큰일나니 분수대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덧붙이고 금방 잊어버린 일이었지만. 


 그랬었는데. 하카제 카오루는 턱을 괴고 어렸던 제 자신을 떠올렸다. 1학년과 2학년은 그토록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어찌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잠깐 찾아온 자괴감에 카오루가 살짝 몸을 떨자, 어찌 눈치챘는지 카나타가 바로 그를 돌아보았다. 연한 녹빛의 눈동자가 살짝 걱정을 담았다. 


“많이 춥나요, 카오루?”

“어? 아냐아냐. 괜찮으니까.”


 카오루가 곧장 손사래쳤다. 하던 거 해. 괜찮아. 어색하게 웃으며 권유하는 카오루의 모습에 카나타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미련 남는 시선으로 카오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카나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시 수조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카나타의 뒷모습을 보며 카오루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몰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입장이니 괜히 제 발이 저렸다. 


 귀엽고 어여쁜 얼굴에 비해 유성대 3학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단단한 등이었다. 카오루의 시선이 천천히 팔뚝으로 넘어갔다가, 타고 내려와 허리에 머물렀다. 마이를 벗고 와이셔츠를 걷어올렸기에 보이는 근육이 붙은 팔과 어렴풋한 허리 라인을 응시하던 카오루는 급히 찾아온 부끄러움에 시선을 올렸다. 진짜 죽고 싶다. 유성대 후배의 말버릇을 제 것처럼 읊으며 카오루가 카나타의 동그란 뒤통수를 뚫어저라 응시했다. 바다색 머리카락, 그 안에 감춰진 하얀 귀랑 반듯한 목덜미. 뺨이 화끈거렸다. 추은 기온이고 뭐고 온통 뜨거웠다. 


 더 이상 보았다가 카나타가 고개라도 돌렸다가는 앞뒤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리거나 문밖으로 탈주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야 할 것 같아서, 카오루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 시린 손으로 뺨을 꾹꾹 누르자 조금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까지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흐리던 하늘은 이제 거의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검은 구름 사이로 하얀 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며 카오루가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첫눈이었다. 


“카나타 군, 눈 와.”

“어라, 정말이네요. 첫 눈이에요...☆”


 카오루의 말에 시선을 돌린 카나타가 창문을 가득 채운 하얀 얼음가루에 방긋 웃었다. 예쁘다고 감탄하며 창문을 열어 손을 뻗는 카나타의 모습에 카오루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혹시 모를 몇 걸음의 유예를 남기고 카오루가 걸음을 멈췄다. 장난스럽게 눈을 휘어 시선을 감추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눈이 오니까 정말로 분수도 얼겠네. 한동안은 물놀이 못 하겠다, 카나타 군.”

“그렇네요...... 푸카, 푸카......”


 카나타의 머리에 쫑긋 솟아있던 더듬이가 힘없이 내려왔다. 눈의 기쁨에 그저 젖어있던 카나타가 차가운 현실을 마주해버리고 작게 입을 비죽였다. 혹시 몰라 카오루가 몇 마디 더 덧붙였다. 물도 없을 테니까 정말 들어가면 안 돼. 걱정에 물들어 옷소매를 붙잡고 단단히 주의를 주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굉장히 건강했으나, 겨울에 교복차림의 물놀이는 단단한 감기로도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카나타의 얌전한 긍정에 카오루는 조금 안심하며 소매를 놓았다.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꽤 격렬한 시작이었다. 이번 겨울인 꽤 호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하얗게 물들어가는 교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오루가 물었다. 


“수조 정리는 얼마나 남았어?”

“얼마 안 남았어요. 곧 끝난답니다.”

“도와줄까? 어서 끝내고 더 추워지기 전에 집에 가자.”

“혼자서 괜찮답니다. 서두를게요.”


 카나타 군, 우산 있어? 아니요~. 눈 맞아서 감기 들면 어떻게 해. 같이 쓰고 가자. 좋아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카나타가 수조로 다가갔다. 움직이는 손이 조금 급해졌다는 것을 카오루는 대번 눈치챌 수 있었다. 소파 위에 주저앉아 다리를 모은 카오루는 그 사이에 제 얼굴을 박았다. 목소리 떨리지 않았지.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겠지? 카오루가 제 말을 되짚어보며 입술을 자근자근 물었다.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았고, 친구에게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몇 번이고 생각해보며 카오루가 열심히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괜찮았어. 괜찮아. 


 고개를 들어 카나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잠깐 고개를 움직일 때 보이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시선에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카오루가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삼켰다. 이제 졸업이 코 앞이건만 자각해버린 마음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내내 모르던가, 알 거면 빨리 알던가. 애매하게 이게 뭐람. 진짜 웃겨. 소년은 종종 수조에 머리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수조가 아니면 분수대. 그것도 아니라면 교실 벽. 사람 마음은 짐작할수도 없는 변덕쟁이라는 것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한다고 고백할 용기가 있었으면 진작 마음을 자각했겠지.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담담함이 있다면 평생 몰랐겠지. 회색의 자리에 앉아있는 카오루가 푸른 색만 한참을 응시했다. 정리를 끝낸 카나타가 몸을 돌려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올렸던 소매를 내리고 마이를 입은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 가요, 카오루.”

“응.”


 소파에서 일어난 카오루가 걸쳐두었던 제 목도리를 둘둘 둘렀다. 목을 완전히 가리고 코끝까지 꼼꼼히 감춘 카오루가 슬쩍 카나타를 응시했다. 눈이 흩날리는 겨울에 카나타는 고작 동복차림이 전부였다. 춥겠다, 카나타 군.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카오루가 제 모자를 카나타에게 깊게 눌러씌웠다. 선명한 붉은 색 털모자에 카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처럼 웃었다. 고마워요. 감사의 목소리에 카오루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목도리로 감춰진 피부가 화끈한 기분이었다. 가자, 카나타 군. 한 손으로 우산을 단단히 잡고, 카오루가 재촉했다. 다른 한 손을 내밀 자격은, 아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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