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작고 한적했다.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아 흔히 시골 촌구석이라 폄하받고 있는 곳이었지만, 있을 것은 다 있고 평온하게 살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곳이 싫은 사람은 진작 떠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전체 인원이 오십을 가까스로 채우는 그곳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안면이 있으며, 친분도 두터웠고, 덕분에 비밀을 숨기기도 어려운 장소였다. 그러니 그런 마을에 고급스럽게 잘 차려입은 도련님이 방문했다는 사실은, 그가 마을입구에 발을 디딘지 딱 삼십분만에 모든 마을주민에게 퍼진 소식이었다.
어리거나 젊거나 늙은 시선이 똑 닮은 호기심을 담고 마을의 유일한 서점을 향했다. 마을에 딱 넷 있는 젊은 청년 중 하나가 운영하고 있는 작은 서점이었다. 큰 도시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애인이 있는 청년이라 마을 처녀들이 눈물만 삼키는 상대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래요? 누군가가 호기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지. 다른 누군가가 답했다. 아주 잘 생겼던데. 미약한 감탄이 섞여 있었다. 되게 예쁘다. 어린 아이의 속삭임이 작게 터져나왔다. 지나가는 척 은근슬쩍 서점을 기웃거리며 사람들은 목이 빠져라 서점 창문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안에 들어서자마자 커튼을 쳐서 안이 보이지 않는 게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그 붉은 머리 청년, 대체 누구래요? 마을 모두가 호기심에 차서 소근거렸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하게 모든 화제의 중심에 서 있게 되 버린 붉은 머리의 청년은 머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편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시선을 도통 숨기기 어려웠다. 말끔한 도련님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었건만, 이 사람에게만큼은 유독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꾸며 웃어야 하는 사람였건만 그런 입장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불편한 건 당연했다. 후배의 입장으로 선배의 연인과 단 둘이 만나는 상황이라니.
스오우 츠카사는 정말 진심으로 이 자리가 어색했다. 얼음장보다 굳은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츠카사와 비슷하게 지금 상황을 머쓱해하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츠카사는 용기를 냈다.
“제가 갑작스럽게 visit하여... 음, 실례를 끼친 듯 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 그. 부디 존칭은 그만둬주세요. 편히 말씀해주시길.”
츠카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사쿠마 리츠의 바로 그 이사라 마오에게 듣는 존칭이라니 온몸에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스 쨩, 나의 마 군에게 건방지게 대하면...... 알지? 리츠의 가느다란 시선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랑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 군에게 굴면 막내의 엉덩이를 때려 줄 거야. 작은 미소와 함께 건내진 말은 어조만큼은 참 다정했다. 리츠는 매우 게으른 것을 제외하면 꽤나 좋은 선배였지만, 한 번 화가 나면 인정사정이 없었다. 츠카사는 이제껏 리츠가 화내는 것을 딱 한 번 보았다. 그리고 그의 분노를 공포 랭킹 순위권에 올렸다. 진심으로 화가 난 왕님 바로 다음으로 무서웠다.
리츠는 언제나 마오의 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고 있거나 일을 하지 않는 리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9할이 이사라 마오였다. 리츠에게 이사라 마오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막내인데다가 조금 고지식해서 과하게 부당하지 않은 명령이라면 선배라는 입장에서 시키는 말에 쉽게 수긍하고, 불만을 가져도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츠카사는 제일 떠넘기기 쉬운 상대였기에 츠카사는 마오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이었다. 츠카사는 마오의 집에 있는 검은 바탕에 하얀 고양이가 그려진 머그컵이 사쿠마 리츠 전용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정말 원치 않은 지식이었다.
“저기, 그래서... 여기엔 무슨 일이시죠? ...일이야?”
마오가 어색하게 덧붙였다.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츠카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츠카사는 그런 마오를 이해했다. 수도 왕궁 기사단 훈련실에 누워 느긋하게 자고 있을 리츠의 모습을 떠올리며 츠카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저가 하지 않아도 되는 추가업무에 한참 시달리다가 여기까지 와야 했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했다. 사실 조금 많이. 왜 하필 저냐는 질문에 스 쨩이 제일 좋은 가문이라서~. 그리고 막내잖아? 하며 나른히 웃던 리츠의 얼굴도 떠올렸다. 아직도 검술로 리츠를 이길 수 없어 하극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억울했다.
자연스럽게 츠카사의 얼굴에 심통이 묻었다. 생각에 잠겼다가 뾰루퉁해져버린 도련님을 보며 마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츠카사가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반듯한 서류였다.
“이게 뭐에요? ...뭐야?”
“이곳에 sign 부탁드립니다.”
“사인? 왜?”
“이사라 씨를 스오우 가문의 가신으로 넣는 마지막 절차입니다.”
평민에게 작위를 주는 제일 간편하고 빠른 방법이었다. 물론 엄청난 서류작업을 거쳐야 하고, 3대 이상의 전통을 가진 가주와 가주 후계자만 쓸 수 있는 방법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왕의 동의가 필요한다는 치명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바로 그 왕부터 간단하게 사인해서 던져줬다. 리츠의 부탁 한마디에 레오는 되묻지도 않고 제 앞으로 올라온 서류에 승인 도장을 찍었다. 그 모든 서류를 작성해 올려야만 했던 츠카사는 다시 한 번 더 억울해졌다. 기사단 막내의 표정에 약간 울망함이 섞였다. 아주 조금 서럽기도 했다.
“스오우 공작가? 아니 내가 거기에 왜......?”
마오는 얼이 빠져 되물었다. 왕국에 딱 하나뿐인 공작가 이름이 대체 왜 여기서 나오는 것인지 그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눈앞의 앳된 청년이 스오우의 이름을 손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 신분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리츠가 손님이 찾아갈 거라고 미리 연락을 해 주기는 했지만, 일하고 있는 직장의 후배라고만 써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거 이 마을에서 살던 사쿠마 리츠가 레이의 사정에 따라 이사하게 되면서 수도로 적을 옮긴 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되어버렸는지 마오는 몰랐으니까. 그가 순수히 능력만으로 작위를 받아 단 네 명뿐인 근위기사단의 참모로 일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시골이라 기사의 이름까지 흘러들어오지도 않았다. 쉽게 읽히는 암시를 끝없이 던져주었지만, 이사라 마오의 기억에 남은 사쿠마 리츠의 흔적이 너무 컸다. 어린 시절 작고 여렸던 사쿠마 리츠의 흔적. 다 큰 뒤에도 몇 번이나 만나서 그가 이미 건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사와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뒤 리츠는 적당히 포기했다. 나중에 현실을 보면 되겠지. 간단한 결론이었다.
다만 귀족과 평민은 결혼하기 까다로웠다. 주변의 시선은 딱히 신경쓰지 않는 리츠였지만, 근위기사라는 그의 입장상 리츠의 불명예는 왕의 불명예와도 직결되는 과제였다. 그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기에, 리츠는 마오도 귀족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방법을 조사하고 안심했다. 생각보다 쉬웠다. 그 날로 리츠는 츠카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전혀 모르는 스오우 츠카사는 조금 더 어이가 없어졌다. 당장이라도 밖에 세워진 애마를 타고 수도로 달려가 훈련장에서 자고 있을 그에게 리츠 선배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신 겁니까를 외치고 싶어졌다. 조금 뺨이 붉어진 츠카사가 바닥을 한참 노려보다가, 시선을 올려 마오와 눈을 맞췄다. 어린시절부터 받은 교육의 결과였다. 보라색 눈동자가 오묘하게 빛났다.
“리츠 선배가, 15년 전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아.”
마오의 뺨이 화끈 붉어졌다. 츠카사는 마오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안심했다. 제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었다. 선배에게 명령과 부탁을 구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선사받은 츠카사는 리츠에게 물었었다. 왜 그를 귀족으로 만드려는 겁니까? 후배의 물음에 검은 머리카락의 선배는 오묘하게 웃었다. 그 요요한 눈웃음에 츠카사는 바짝 몸을 굳히고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휘어지는 붉은 눈동자 끝무리에 애정이 흘러내렸다. 마 군이랑 결혼할 거라서. 간단한 대답이었다. 동성이라는 문제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선선대 왕이 바꾼 국법은 이제 조금씩 생활에 녹아가고 있었다. propose는 하셨습니까? 츠카사의 물음에 리츠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물론, 15년 전에.
그 애들 약속으로 괜찮냐고 열 번도 넘게 물었고, 그 때마다 리츠는 걱정할 필요 없다며 일갈했다. 말을 꺼내기 직전까지도 불안했건만 이번에도 리츠의 장담은 맞는 모양이었다. 복숭아빛으로 물든 마오의 뺨이 꽤 사랑스러웠다.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복잡하게 사방으로 향하는 녹색 시선을 보며 츠카사가 슬쩍 웃었다. 그는 츠카사가 존경하는 선배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기꺼이 존중해야 마땅했다. 이제껏 했던 낯선 서류작업이며 선배의 부려먹음에 토라져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막내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는 그가 저에게 부탁해올정도로 선배는 이 사람을 좋아했다. 청년의 몸가짐이 한층 정중해졌다. 쑥스러움에 빠져있는 마오는 그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라도 좋으니, 선배께서 이사라 씨를 수도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escort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츠카사가 손을 내밀었다. 붉어진 얼굴로 벽을 한참 노려보던 마오가─츠카사는 입속말로 바보 리츠, 후배에게 뭘 시킨 거냐고. 하고 중얼거리는 마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정중하게 못 들은 척 했다─천천히 츠카사의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츠카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색 고운 하늘 아래 붉은 머리카락이 작게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