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에 걸렸다. 증상은 감기와 몹시 흡사했다. 심장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설레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종종 언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병이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한 눈에 사랑에 빠졌다. 하카제 카오루는 쉽게 타인에게 호감을 주었지만, 결코 제 마음을 순순히 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그만한 인내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보기보다 고집이 있고, 상냥하고 정에 약했지만 솔직하지 못했다. 별사탕처럼 작고 물렁한 심술이 말 속에 들어가 진심을 감췄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꽤 길게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하카제 카오루는 결국 강해진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첫사랑에 걸려 버렸다.
신카이 카나타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는 하카제 카오루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카오루는 처음 빠진 사랑에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다. 가장 기본적인 시선부터가 관리하기 힘들었다. 좋아해, 좋아해. 온통 속삭이는 색소 연한 회색 눈동자가 엷게 반짝였다. 앓고 있는 것은 첫사랑이었지만 카오루는 타인과 애정을 교류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그 상대를 신카이 카나타로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상상조차 잘 떠오르지 않았다.
덕분에 선택한 방법은 꽤나 극단적이었다. 열병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먼저 열병의 원인과 이어지는 것. 어쩌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깊게 사로잡히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게 아니라면 효력은 미미했지만 사랑을 쫒는 약을 사 먹거나, 다른 방법으로는 멀리 떨어지는 것.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카오루는 믿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도 돌아가신 뒤 오래 만나지 못하니 많은 것을 잊게 되어버렸으니. 그러니 카나타도 보지 않고 만나지 않는다면 금방 잊혀질것이라고. 열병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신카이 카나타에게 향하는 걸음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사실 만나지 않는 것은 꽤 쉬웠다. 카오루와 카나타는 같은 반도, 같은 유닛도 아니었다. 고작 부활동으로 엮인 관계에 불과했다. 카오루는 본디 부활동에 충실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다시 불성실하게 참가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한 학년 낮은 후배는 틀림없이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겠지만, 그 정도야 손쉽게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해양생물부는 물론이고 분수대로 가는 발걸음마저 완전히 끊어버렸다. 하카제 카오루의 일상에서 신카이 카나타의 자리를 완전히 비워버렸다.
그러니 남은 것은 카오루의 마음 속에 남은 카나타뿐이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카오루는 고민했다. 몸의 내성이 일을 하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약을 먹어야 할까. 카오루는 약국 앞에서 고민했다. 사랑을 쫒아주는 약을 사서 먹을까. 그럼 이 감정은 깨끗하게 지워지겠지? 카오루는 작은 기대를 가졌다. 일시적으로 지워져도 금방 감정을 피워내주는 바람에 약은 그닥 뛰어난 효과가 없었지만, 그 일시적인 효과마저 간절했던 수많은 사람 덕분에 약은 언제나 인기기 많았다. 결국 약국에 들어가 약을 한 통 산 카오루는 그 날 저녁 식후 30분 뒤에 물과 함께 알약을 삼켰다. 위로 함께 들어가 사르르 녹은 약은 하카제 카오루 속에 남은 사랑을 지워버렸다. 온갖 달콤하고 맵고 뜨거운 것은 녹아버리고, 남은 것은 담백한 것 뿐이었다. 카오루는 안심했다.
열병에서 벗어난 뒤에도 카나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위험했다. 감정은 피어나는 것. 사랑의 약은 내성이 금방 붙었다. 또한 감정은 너무도 금방 자랐다. 카오루는 카나타에 대한 모든 감정을 지웠지만, 카나타를 보면 감정이 자랄 것이 무서웠다. 다음도 또 다음도. 신카이 카나타는 너무 금방 카오루에게 침입했다. 다시 앓을 것이 두려워 카오루는 카나타를 외면했다. 그에게 가는 걸음은 여전히 뚝 끊은 채였다.
다만 그가 모르고 있던 것이 있다면, 신카이 카나타의 감정이었다. 카나타는 갑작스럽게 제 앞에서 모습을 감춘 카오루에게 화가 났다. 그가 학교에 꼬박꼬박 등교를 한다는 소식 정도는 유닛의 멤버인 치아키에게 모조리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어떤 얼굴로 웃는지. 카나타의 동료인 치아키는 카오루의 친구였고, 그만큼 많은 것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카나타와의 연결고리를 모조리 끊어버린 카오루는 즐거워보였다. 카나타는 그게 화가 났다. 저 혼자 카오루가 보고싶어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카오루는 전혀 카나타를 소중히 여겨주지 않는 것 같았다. 카나타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는 마이페이스였지만, 행동력만큼은 있었다. 분수대에서 빠져나온 물빛 청년은 망설임없이 옆반의 문을 열어젖혔다.
하카제 카오루는 숨을 삼켰다. 에메랄드 바다 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조금 화가 나고, 하지만 만났다는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맑은 색 눈동자가 단단히 카오루를 얽어잡았다. 사라졌던 감정이 몽글몽글 다시 피어났다. 오래 막아두었던 반향이라도 되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와 사람의 모든 것을 사로잡아버린 감정에 카오루는 조금 울상이 되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열병에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