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카오] 우산

2016. 11. 27. 23:03 from ENSTARS/NOVEL




 해양생물부 부실은 언제나 적당히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오루는 잘 몰랐지만, 카나타의 말에 따르면 민감한 해양생물들을 여러 종 키운다고 했었다. 여름에는 풍족한 에어컨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겨울에는 아무리 추워도 일정 온도 이상으로 기온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덕분에 작년에도 제작년에도 카오루는 날씨가 추워지면 자연스럽게 해양생물부실에 가는 걸음을 줄였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이기는 했지만 추우니 낮잠도 자기 힘들고 타자를 치는 손가락도 얼었다. 그럴 바에야 여자아이들과 카페에 가는 쪽이 훨씬 편했다. 

 덕분에 겨울이 되면 카나타와 만나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카오루의 얼굴도 잊어버리겠어요...☆ 2학년 겨울 무렵 조금 서운하다는 듯 속삭이는 카나타의 목소리에 양심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과 큰일나니 분수대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덧붙이고 금방 잊어버린 일이었지만. 


 그랬었는데. 하카제 카오루는 턱을 괴고 어렸던 제 자신을 떠올렸다. 1학년과 2학년은 그토록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어찌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잠깐 찾아온 자괴감에 카오루가 살짝 몸을 떨자, 어찌 눈치챘는지 카나타가 바로 그를 돌아보았다. 연한 녹빛의 눈동자가 살짝 걱정을 담았다. 


“많이 춥나요, 카오루?”

“어? 아냐아냐. 괜찮으니까.”


 카오루가 곧장 손사래쳤다. 하던 거 해. 괜찮아. 어색하게 웃으며 권유하는 카오루의 모습에 카나타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미련 남는 시선으로 카오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카나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시 수조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카나타의 뒷모습을 보며 카오루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몰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입장이니 괜히 제 발이 저렸다. 


 귀엽고 어여쁜 얼굴에 비해 유성대 3학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단단한 등이었다. 카오루의 시선이 천천히 팔뚝으로 넘어갔다가, 타고 내려와 허리에 머물렀다. 마이를 벗고 와이셔츠를 걷어올렸기에 보이는 근육이 붙은 팔과 어렴풋한 허리 라인을 응시하던 카오루는 급히 찾아온 부끄러움에 시선을 올렸다. 진짜 죽고 싶다. 유성대 후배의 말버릇을 제 것처럼 읊으며 카오루가 카나타의 동그란 뒤통수를 뚫어저라 응시했다. 바다색 머리카락, 그 안에 감춰진 하얀 귀랑 반듯한 목덜미. 뺨이 화끈거렸다. 추은 기온이고 뭐고 온통 뜨거웠다. 


 더 이상 보았다가 카나타가 고개라도 돌렸다가는 앞뒤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리거나 문밖으로 탈주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야 할 것 같아서, 카오루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 시린 손으로 뺨을 꾹꾹 누르자 조금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까지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흐리던 하늘은 이제 거의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검은 구름 사이로 하얀 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며 카오루가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첫눈이었다. 


“카나타 군, 눈 와.”

“어라, 정말이네요. 첫 눈이에요...☆”


 카오루의 말에 시선을 돌린 카나타가 창문을 가득 채운 하얀 얼음가루에 방긋 웃었다. 예쁘다고 감탄하며 창문을 열어 손을 뻗는 카나타의 모습에 카오루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혹시 모를 몇 걸음의 유예를 남기고 카오루가 걸음을 멈췄다. 장난스럽게 눈을 휘어 시선을 감추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눈이 오니까 정말로 분수도 얼겠네. 한동안은 물놀이 못 하겠다, 카나타 군.”

“그렇네요...... 푸카, 푸카......”


 카나타의 머리에 쫑긋 솟아있던 더듬이가 힘없이 내려왔다. 눈의 기쁨에 그저 젖어있던 카나타가 차가운 현실을 마주해버리고 작게 입을 비죽였다. 혹시 몰라 카오루가 몇 마디 더 덧붙였다. 물도 없을 테니까 정말 들어가면 안 돼. 걱정에 물들어 옷소매를 붙잡고 단단히 주의를 주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굉장히 건강했으나, 겨울에 교복차림의 물놀이는 단단한 감기로도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카나타의 얌전한 긍정에 카오루는 조금 안심하며 소매를 놓았다.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꽤 격렬한 시작이었다. 이번 겨울인 꽤 호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하얗게 물들어가는 교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오루가 물었다. 


“수조 정리는 얼마나 남았어?”

“얼마 안 남았어요. 곧 끝난답니다.”

“도와줄까? 어서 끝내고 더 추워지기 전에 집에 가자.”

“혼자서 괜찮답니다. 서두를게요.”


 카나타 군, 우산 있어? 아니요~. 눈 맞아서 감기 들면 어떻게 해. 같이 쓰고 가자. 좋아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카나타가 수조로 다가갔다. 움직이는 손이 조금 급해졌다는 것을 카오루는 대번 눈치챌 수 있었다. 소파 위에 주저앉아 다리를 모은 카오루는 그 사이에 제 얼굴을 박았다. 목소리 떨리지 않았지.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겠지? 카오루가 제 말을 되짚어보며 입술을 자근자근 물었다.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았고, 친구에게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몇 번이고 생각해보며 카오루가 열심히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괜찮았어. 괜찮아. 


 고개를 들어 카나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잠깐 고개를 움직일 때 보이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시선에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카오루가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삼켰다. 이제 졸업이 코 앞이건만 자각해버린 마음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내내 모르던가, 알 거면 빨리 알던가. 애매하게 이게 뭐람. 진짜 웃겨. 소년은 종종 수조에 머리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수조가 아니면 분수대. 그것도 아니라면 교실 벽. 사람 마음은 짐작할수도 없는 변덕쟁이라는 것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한다고 고백할 용기가 있었으면 진작 마음을 자각했겠지.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담담함이 있다면 평생 몰랐겠지. 회색의 자리에 앉아있는 카오루가 푸른 색만 한참을 응시했다. 정리를 끝낸 카나타가 몸을 돌려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올렸던 소매를 내리고 마이를 입은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 가요, 카오루.”

“응.”


 소파에서 일어난 카오루가 걸쳐두었던 제 목도리를 둘둘 둘렀다. 목을 완전히 가리고 코끝까지 꼼꼼히 감춘 카오루가 슬쩍 카나타를 응시했다. 눈이 흩날리는 겨울에 카나타는 고작 동복차림이 전부였다. 춥겠다, 카나타 군.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카오루가 제 모자를 카나타에게 깊게 눌러씌웠다. 선명한 붉은 색 털모자에 카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처럼 웃었다. 고마워요. 감사의 목소리에 카오루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목도리로 감춰진 피부가 화끈한 기분이었다. 가자, 카나타 군. 한 손으로 우산을 단단히 잡고, 카오루가 재촉했다. 다른 한 손을 내밀 자격은, 아직 없었다. 



'ENSTARS >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나카오] 감기  (0) 2016.12.04
[리츠마오] 청혼  (0) 2016.12.03
[3A] 탈주  (0) 2016.11.20
[카나카오] 축제  (0) 2016.11.20
[카나카오] 수조  (0) 2016.11.20
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