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는 어스름한 정신 너머로 잠에서 깨어났다. 요즈음 들어 유독 잠이 늘었다. 자도자도 피곤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드문 일이었다. 늘 적게 자고 성실하게 일했던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작게 하품한 청년은 제 눈가를 몇 번 부볐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이었다. 작은 하품 몇 번으로 애써 잠을 쫒아낸 마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옆에서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문득 입가에 곡선이 어렸다.
리츠는 본디부터 야행성이었으니 새벽이 다가와 밤의 장막을 살짝 걷어낸 지금은 그가 잠들 시간이었다. 이미 반 이상 잠에 취해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강하게 같이 다시 잠들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달콤한 유혹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 칭얼거림에 훨씬 가까운 말들을 마오는 적당히 흘려 들었다. 여기서 오냐오냐했다가 누워버리면 하루를 꼼짝없이 날리게 될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니 오싹한 냉기가 슬금슬금 다가와 금새 달라붙었다. 한 번 팔을 쓸어내리며 마오가 짧게 어깨를 떨었다. 이제 한껏 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날이 쌀쌀했다. 그래도 제대로 해가 뜨면 볕이 따뜻해진게 티가 날 정도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리츠의 손을 잡고 꽃구경을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음, 물론 마오는 제대로 꽃구경을 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약을 제대로 챙겨먹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걷는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들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마오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벌써 봄이었다.
저번 겨울은 유독 혹독한 겨울이었다. 마오는 눈이 내리던 그 날들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워낙 괴로웠던 탓에 얇은 기억의 장막 한 겹을 덮어 쉬이 생각나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걸어 놓은 제약이었기에 마오는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저 봄이 왔다는 사실 하나에만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했다. 따뜻한 바람이 뺨에 닿으면 겨울이 끝났다는 사실에 행복해졌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마 군, 무슨 일 있어?”
나른한 목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깨웠다. 마오는 대번 정신을 차렸다. 침대 위 이불 속에 쏙 들어가서는 얼굴만 빼꼼 내민 리츠와 시선이 마주쳤다. 반 쯤 감겨서 잠에 취한 얼굴로 나른하게 눈을 몇 번 깜박인 리츠는 늘어져라 하품했다. 졸린 기색이 역력했다. 얄쌍한 눈꼬리 끝에 자그마한 눈물방울을 매단 리츠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마 군, 같이 자자... 나 졸려... 응?”
“벌써 아침이야, 리츠.”
“어차피 할 일도 많이 없잖아...”
그 말은 맞았다. 집안일과 소량의 서류작업을 제외하면 마오는 할 일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인 부지런함과 할 일의 유무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마오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탓에 말에 설득력이 떨어져버렸지만. 마오가 자연스럽게 리츠의 근처로 다가왔다. 침대 한 쪽이 움푹 퍼졌다. 마오가 걸터앉은 탓이었다.
사실 케이토가 걱정이 많은 탓에 마오에게 그다지 일을 주지 않으려 들을 뿐, 마오 스스로는 본인이 몹시도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일을 더 받고 바쁘게 일해도 좋았다. 너무 한가하니 본인 스스로 적응을 못하고 있기도 했다. 겨울 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이제 봄의 초입이었고, 그는 괜찮았다. 옆에는 리츠까지 있었다. 몹시도 완벽했다. 나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온전하게 완벽했다.
마오가 문득 손을 뻗었다. 리츠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마오의 손길에 리츠는 잠깐 눈을 떴다가 바로 감았다. 기분 좋다는 의미의 비음이 흘러나왔다. 마 군, 마 군. 어리광처럼 부르는 말은 온통 마오의 애칭 뿐이었다. 마오가 시선을 내려 제 연인을 응시했다.
“마 군, 울지 마.”
“어?”
리츠가 손을 뻗어 마오의 뺨을 천천히 닦아냈다. 마오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탁했다. 물기 젖은 그 사이로 보이는 검고 붉고 하얀 것들을 응시하며 마오가 이불자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수많은 장면들이 단 한 번의 깜박임 사이로 흘러 떨어졌다. 눈물에 섞여 사라졌다. 마지막 보았던 네 모습도, 가득하게 흐르던 피도, 그냥 잊으라며 속삭여주던 목소리도, 이별의 인사도. 마오는 기꺼이 기억의 베일 너머로 처박아 묻어버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넘겨 무시했다. 지금 제 앞의 사쿠마 리츠의 다정함에만 집중했다.
안 울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믿어주겠다는 양 웃어주는 리츠를 보며 마오는 애써 마주 웃었다. 소망은 기원을 낳고 기원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마오는 저가 만들어낸 기적을 한 줄기 희망처럼 부여잡고 있었다. 그게 썩은 동아줄인지 아닌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붙잡고 있다가 떨어지는 것도 비극적이겠지만, 잡지 못해 가라앉는 것도 분명 비극이었으니.
그러나 사랑만큼은. 그를 처음 잃었던 그 순간 자각했던 사랑만큼은 잊을 수 없어서 이사라 마오의 안에 분명 살아있었기 때문에. 리츠를 사랑한다는 걸 자각하여 피어난 마음만큼은 외면할 수가 없어서 마오의 겨울은 시한폭탄이었다. 언제 터져나와 상처를 입힐 지 모르는 폭탄. 훗날 반드시 마오를 망가뜨릴 괴물.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림자 너머의 사쿠마 리츠는 혀가 아리게 쓴 것을 애써 삼키며 기꺼이 제 사랑에게 웃어주었다. 그가 가짜로나마 저를 만들어 사랑해주고 있었으니, 리츠의 이름을 받은 그는 마오를 사랑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이사라 마오의 사랑만이 사쿠마 리츠의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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