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라] 생일

2021. 4. 9. 23:54 from WORLD TRIGGER/NOVEL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느즈막한 아침, 생일날 눈을 뜬 진 유이치가 제일 먼저 생각한 문장이었다. 

 

  물론 꿈결처럼 생각했을 뿐, 실제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할 수 있으면 진작 했지. 진 유이치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에 감사 인사를 하며, 평소보다 조금 더 정성이 들어간 아침을 입에 넣으며 그런 회의적인 생각 따위나 했다. 그는 별써 몇 년 동안이나 아라시야마 쥰에게 제 마음을 뚝 떼어 아무도 모르게 건내준 상태다. 아라시야마를 좋아한다. 아마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평생 좋아할 예정이었다. 마음을 준만큼 돌려받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라시야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에게 특별한 사람은 피가 통하는 가족들 뿐이었다. 물론 친구인 이상 조금 더 특별할 수는 있겠지만......

  진은 턱을 괴고 맛있는 아침에 최대한 감흥을 가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씹었다. 생각하는 것이 우울하니 있던 맛도 달아나는 기분이었으나 아침을 해 주는 키자키에게 미안했으니, 진은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며 열심히 식사했다. 어떻게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자마자 감사인사를 하며 지부에서 나와버렸지만. 

 

  미래를 보는 능력은 수학이나 과학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진은 중고등학생 시절에 학업에 크게 흥미가 없는 학생이었지만─혹시 몰라 미리 변명하자면, 그에게는 성적보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불성실하게 듣던 거진 졸면서 듣던 수업 사이에서도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눈은 확률싸움이고, 진은 그 확률을 잘라내고 키워내며 좀 더 나은 미래로 밀고 나가는 일을 했었다. 허나 인간이 어떻게 컴퓨터처럼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을까. 일부분만 보이는 미래를 이리저리 기우고 꿰매어 맞추다보면 한두 땀 정도는 빠지기 마련이었다. 진은 그렇게 놓치는 미래에 눈물지을 때도 있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럴 모양이다. 지부 주변의 강가를 느긋하게 걸으며 진은 눈앞에 보이는 미래를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아라시야마가 저를 보며 기쁘게 웃고 있었다. 조금 발그레한 뺨이며 곱게 휘어지는 눈가가 예쁘다. 그는 속절없이 조금 행복해졌다. 꽤 확률이 높은 미래다. 아무래도 저가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직 본인도 모르겠다. 생일을 맞은 건 나니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아닐거고. 뭐지? 미리 7월에 가족들이랑 보내는 생일을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이라도 했나? 아니면...... 진은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제 눈에만 보이는 미래의 아라시야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튼 꽤 높은 확률로 저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올 생일은 꽤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다시 불쑥 가슴에서 속삭이는 욕망은 곱게 접어 모른 척 했다. 행복해질 때마다 욕망은 가끔 고개를 들어 진의 가슴에 작고 선명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며 속삭이고는 했다. 말했다가는? 진은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어떤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 몰라 표정을 굳히고 곤란해하는 아라시야마의 얼굴을. 심장을 쿡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대번 올라왔다. 욕망은 그 상상 하나에 대번 고요해지고는 했다. 오늘도 그랬다. 진은 다시 눈을 뜨고 행복하게 웃는 미래의 아라시야마를 응시했다. 괜찮아, 웃고 있어.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생일이라고 동네방네 알리지는 않았으나 몇 년이나 보더에 근무하고 있다보면 알음알음 개인정보는 알기 마련이었다. 구 보더 소속인 진은 더더욱 그랬다. 시노다 본부장이나 린도 지부장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물을 챙겨주던가 제자에게 진의 생일을 알려주는 일도 있었으니까. 몇 년 전부터 진의 생일은 쉬이 알려졌다는 말이다. 애초에 모르던 사람들도 당일이 되니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보가 빠르게 번지는 보더 내부에서 진의 생일 소식도 빠르게 퍼졌다. 기본적으로 호인들이 많은 보더에서 경사는 특히 발 달린 것보다 빠르게 도는 경향이 있었다. 보더를 걷고 있다보니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꽤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좋아하는 쌀과자나 작은 선물 따위도 몇 개나 받을 수 있었고.  

 

  웃는 얼굴로 기꺼이 축하를 받은 청년은 이동하던 도중 개인 랭크전 라운지에 앉았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B급, A급 대원들도 종종 볼 수 있는 이곳은 미래를 보기 좋은 곳이었다. 보아하니 동기들이 생일 파티를 준비해주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누구 부대실이지. 진은 미래 배경을 꼼꼼히 보려 애썼다. 좀 넓은 것 같은데. 역시 아라시야마 부대실인가? B급 부대실보다는 A급 부대실이 넓다. 동갑내기 대원들 중 가장 생일이 빠른 진인만큼 올해 첫 생일파티를 큼직하게 해준다면 역시 아라시야마 부대실이리라. 아직 연락이 없긴 한데 미리 가 있어야 하나, 아니면 타이밍이 맞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서 시간이나 떼울까. 근데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타치카와 씨한테 붙잡혀서 개인 랭크전을 오십 번은 하게 될 것 같은 미래가 있는데 말이지. 다른 곳에 있을까? 턱을 살살 쓸며 고민하던 시간이 너무 길었을까. 진은 제 어깨를 덥석 잡는 손길에 움찔 몸을 떨었다. 타치카와 씨가 벌써 왔나? 청년이 고개를 휙 돌렸다. 

 

"진! 생일 축하해!"
"아라시야마!"

  진을 붙잡은 사람은 아라시야마였다. 화창하게 웃으며 축하를 건내는 아라시야마를 보며 진은 순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도 제 사랑은 참 눈부셨다. 무심코 게슴츠레하게 변할 뻔한 눈매를 애써 평소처럼 가다듬으며 진도 웃었다. 

 

"고마워, 아라시야마."

"미래, 봤지?"
"음, 아마도? 파티?"
"응, 그거. 역시 진인 이상 서프라이즈는 글렀지만 그래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꼴사나우니까, 나는 시간벌기 담당이야."

 

  연락이 올 때까지 나랑 같이 여기 있자. 미래 보는 거 삼가기야. 아라시야마가 그리 말하며 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 타치카와 씨랑 오십 번 개인전하는 미래 없어졌다. 진은 사라진 미래의 한 갈래를 느끼며 아라시야마를 응시했다. 아라시야마에게 시간벌이로 진이랑 대화나 하라며 등을 밀어 준 친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막연하게 고마웠다. 

 

"선물 많이 받았네. 역시 진이야. 저녁은 지부에서 파티하려나?"
"음, 아마도. 그런 미래가 보이니까."
"저녁에도 먹을 것 같아서 일부러 케이크는 작은 걸로 골랐어. 아야츠지랑 키토라가 맛있다고 했던 가게니까 맛있을 거야."
"그래? 기대되네."
"우리 다 선물도 골라왔으니까. 나중에 케이크 먹으면서 뜯어봐. 기대해도 좋아."

 

  어떤 선물인지 어른어른 보이는 것도 같았으나 진은 애써 의식을 아라시야마에게 돌렸다. 당장 선물을 뜯어보고 놀라며 기뻐지는 감정의 파편 정도라도 진실되게 느끼고 싶었다. 물론 이미 다 안다고 하여 감정이 옅어지지는 않는다. 알면서도 행복해지는 순간은 분명 있다. 지금 제 친구들이 저를 위해 파티를 준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벌써 기뻐졌지만, 당장 아라시야마 부대실의 문을 여는 순간 이보다 몇 배는 더 기뻐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허나 서프라이즈는 서프라이즈로 기뻐하고 싶다는 마음 정도는 있지 않겠는가. 

  두 청년이 마주보고 웃었다. 아, 진은 문득 아라시야마의 얼굴 위로 아른거리는 웃는 얼굴을 보았다. 아침에 보았던 기쁘고 행복한 아라시야마다. 지금 이 순간인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저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지? 진은 짧게 고민했다. 머릿속에 답이 속삭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짧게 의심했다. 정말 이 말이 맞는 건가? 허나 삶과 함께 미래를 보아왔던 청년의 직감이 그렇다고 속삭였기에, 그는 불신과 기대, 불안을 동시에 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역시 아라시야마야. 고마워, 진짜 엄청 좋아해."

"나도 진이 좋아!"

 

  아하, 이래서 아침부터 그런 욕망이 어른거렸던 거구나. 아라시야마는 아침에 보았던 것과 꼭 같은 얼굴로 행복하게 웃어줬다. 진은 체념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찬스가 있을 줄이야. 솔직하지 못한 청년은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입에 담지 않지만, 직설적인 구석이 있는 아라시야마는 가족에게도 사랑한다는 진심 어린 말을 종종 하고는 했으니 좋아한다는 말에 크게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후쿠나 사호를 끌어안으며 하는 좋아해나 진에게 하는 좋아해나 대원들에게 하는 좋아해나, 심지어 애완견 코로에게 하는 좋아해나 뭐 다 큰 차이는 없겠지. 다행이다. 솔직한 욕망이 언어가 되어 나왔으나 아라시야마는 기쁘게 웃으며 받아줬다. 이런 겁쟁이같은 고백을 겁쟁이같은 방식으로 넘길 수 있다니. 진은 한숨을 쉬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에 기꺼이 안도하며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아, 카키자키한테서 연락왔다. 이제 오래, 진."

 

  아라시야마의 휴대전화가 두 번 울었다. 곧장 내용을 확인한 아라시야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진도 주섬주섬 내려놓았던 선물들을 챙겼다. 실망하는 것조차 우습다. 감히 좋아한다고 말하고 좋아한다고 답을 들을 수 있던 걸 기뻐해야 마땅하겠지. 생각을 떨쳐내며 그는 선물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라시야마 부대실에 분명 굴러다니는 종이봉투가 몇 개는 있을 테니 나중에 한 개 쯤 달라고 해야겠네. 그런 생각 따위를 하며 선물들을 하나하나 품에 안던 진은 문득 제 뺨을 당기는 손길에 속절없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아주 순식간에. 

 

  쪽. 놀라 커지지도 못한 눈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가까이 담겼다. 살풋 감은 눈과 긴 속눈썹과 하얀 피부가. 그리고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진...... 어? 

  진이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지금 무슨, 뭐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에러가 일어났다. 지직지직. 같은 광경을 반복은 하는데 인식을 못하며 멍하니 있자니, 진에게 키스한 아라시야마가 멋쩍게 웃었다. 뺨이 조금 붉다. 살짝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다. 지금 방금 무슨, 무슨 일이. 뭐야? 고장난 로봇처럼 눈만 껌벅이는 진의 품에서 선물을 절반 빼앗아 나눠 들으며 아라시야마가 조금 빠르게 속삭였다. 

 

"나도 좋아해, 진. 정말이야."

 

  그리고는 재빠르게 부대실 방향으로 가 버리는 아라시야마의 뒷모습을, 진이 멍하니 응시했다. 지금 아라시야마가 저에게 뭐라고 말했지? 방금 우리 입을 맞췄던가? 꿈이나 환상이 아니고? 진이 천천히 제 입술을 매만졌다. 여기에 닿았던가? 정말 닿았던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도 좋아해 진, 정말이야. 나도 좋아해, 진. 정말이야. 정말이야. 나도 좋아해. 

  ......엄청 좋아해. 

  나도 진이 좋아. 

  나도 좋아해, 진. 정말이야. 

  천천히 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들고 있던 선물들을 모조리 떨어뜨릴 뻔 했다. 이 겁쟁이같은 고백 속에 진심을 어떻게 알고. 아니, 지금 네가 나를. 뭐? 

 

"아라시야마! 잠깐만!!"

 

  몇 박자는 늦게 정신을 차린 진이 급하게 아라시야마의 뒤를 쫒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기다려 줘, 아라시야마. 너 지금 생일 선물로 나한테 뭘 줬는지 알아? 아니, 그거 정말 내가 받아도 돼? 너도 절반 나한테 줄 거야? 받으면 나도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당장이라도 붙잡아서 묻고 싶은 게 속에서 샘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진은 급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제 얼빠지고 못나빠진 얼굴을 수습할 여유도 없었다.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뒤에서도 훤하게 보이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아라시야마를 붙잡아 그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미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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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