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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1.27 [카나카오] 우산
  2. 2016.11.20 [3A] 탈주
  3. 2016.11.20 [카나카오] 축제
  4. 2016.11.20 [카나카오] 수조
  5. 2016.11.19 [리츠마오] 고백
  6. 2016.11.18 [리츠마오] 공백
  7. 2016.11.14 [로얄조] 꽃다발 1
  8. 2016.11.13 [카나카오] 동거
  9. 2016.11.12 [리츠마오] 물들다
  10. 2016.11.07 [knights] 다른 이야기

[카나카오] 우산

2016. 11. 27. 23:03 from ENSTARS/NOVEL




 해양생물부 부실은 언제나 적당히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오루는 잘 몰랐지만, 카나타의 말에 따르면 민감한 해양생물들을 여러 종 키운다고 했었다. 여름에는 풍족한 에어컨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겨울에는 아무리 추워도 일정 온도 이상으로 기온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덕분에 작년에도 제작년에도 카오루는 날씨가 추워지면 자연스럽게 해양생물부실에 가는 걸음을 줄였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이기는 했지만 추우니 낮잠도 자기 힘들고 타자를 치는 손가락도 얼었다. 그럴 바에야 여자아이들과 카페에 가는 쪽이 훨씬 편했다. 

 덕분에 겨울이 되면 카나타와 만나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카오루의 얼굴도 잊어버리겠어요...☆ 2학년 겨울 무렵 조금 서운하다는 듯 속삭이는 카나타의 목소리에 양심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과 큰일나니 분수대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덧붙이고 금방 잊어버린 일이었지만. 


 그랬었는데. 하카제 카오루는 턱을 괴고 어렸던 제 자신을 떠올렸다. 1학년과 2학년은 그토록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어찌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잠깐 찾아온 자괴감에 카오루가 살짝 몸을 떨자, 어찌 눈치챘는지 카나타가 바로 그를 돌아보았다. 연한 녹빛의 눈동자가 살짝 걱정을 담았다. 


“많이 춥나요, 카오루?”

“어? 아냐아냐. 괜찮으니까.”


 카오루가 곧장 손사래쳤다. 하던 거 해. 괜찮아. 어색하게 웃으며 권유하는 카오루의 모습에 카나타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미련 남는 시선으로 카오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카나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시 수조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카나타의 뒷모습을 보며 카오루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몰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입장이니 괜히 제 발이 저렸다. 


 귀엽고 어여쁜 얼굴에 비해 유성대 3학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단단한 등이었다. 카오루의 시선이 천천히 팔뚝으로 넘어갔다가, 타고 내려와 허리에 머물렀다. 마이를 벗고 와이셔츠를 걷어올렸기에 보이는 근육이 붙은 팔과 어렴풋한 허리 라인을 응시하던 카오루는 급히 찾아온 부끄러움에 시선을 올렸다. 진짜 죽고 싶다. 유성대 후배의 말버릇을 제 것처럼 읊으며 카오루가 카나타의 동그란 뒤통수를 뚫어저라 응시했다. 바다색 머리카락, 그 안에 감춰진 하얀 귀랑 반듯한 목덜미. 뺨이 화끈거렸다. 추은 기온이고 뭐고 온통 뜨거웠다. 


 더 이상 보았다가 카나타가 고개라도 돌렸다가는 앞뒤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리거나 문밖으로 탈주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야 할 것 같아서, 카오루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 시린 손으로 뺨을 꾹꾹 누르자 조금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까지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흐리던 하늘은 이제 거의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검은 구름 사이로 하얀 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며 카오루가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첫눈이었다. 


“카나타 군, 눈 와.”

“어라, 정말이네요. 첫 눈이에요...☆”


 카오루의 말에 시선을 돌린 카나타가 창문을 가득 채운 하얀 얼음가루에 방긋 웃었다. 예쁘다고 감탄하며 창문을 열어 손을 뻗는 카나타의 모습에 카오루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혹시 모를 몇 걸음의 유예를 남기고 카오루가 걸음을 멈췄다. 장난스럽게 눈을 휘어 시선을 감추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눈이 오니까 정말로 분수도 얼겠네. 한동안은 물놀이 못 하겠다, 카나타 군.”

“그렇네요...... 푸카, 푸카......”


 카나타의 머리에 쫑긋 솟아있던 더듬이가 힘없이 내려왔다. 눈의 기쁨에 그저 젖어있던 카나타가 차가운 현실을 마주해버리고 작게 입을 비죽였다. 혹시 몰라 카오루가 몇 마디 더 덧붙였다. 물도 없을 테니까 정말 들어가면 안 돼. 걱정에 물들어 옷소매를 붙잡고 단단히 주의를 주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굉장히 건강했으나, 겨울에 교복차림의 물놀이는 단단한 감기로도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카나타의 얌전한 긍정에 카오루는 조금 안심하며 소매를 놓았다.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꽤 격렬한 시작이었다. 이번 겨울인 꽤 호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하얗게 물들어가는 교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오루가 물었다. 


“수조 정리는 얼마나 남았어?”

“얼마 안 남았어요. 곧 끝난답니다.”

“도와줄까? 어서 끝내고 더 추워지기 전에 집에 가자.”

“혼자서 괜찮답니다. 서두를게요.”


 카나타 군, 우산 있어? 아니요~. 눈 맞아서 감기 들면 어떻게 해. 같이 쓰고 가자. 좋아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카나타가 수조로 다가갔다. 움직이는 손이 조금 급해졌다는 것을 카오루는 대번 눈치챌 수 있었다. 소파 위에 주저앉아 다리를 모은 카오루는 그 사이에 제 얼굴을 박았다. 목소리 떨리지 않았지.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겠지? 카오루가 제 말을 되짚어보며 입술을 자근자근 물었다.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았고, 친구에게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몇 번이고 생각해보며 카오루가 열심히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괜찮았어. 괜찮아. 


 고개를 들어 카나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잠깐 고개를 움직일 때 보이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시선에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카오루가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삼켰다. 이제 졸업이 코 앞이건만 자각해버린 마음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내내 모르던가, 알 거면 빨리 알던가. 애매하게 이게 뭐람. 진짜 웃겨. 소년은 종종 수조에 머리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수조가 아니면 분수대. 그것도 아니라면 교실 벽. 사람 마음은 짐작할수도 없는 변덕쟁이라는 것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한다고 고백할 용기가 있었으면 진작 마음을 자각했겠지.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담담함이 있다면 평생 몰랐겠지. 회색의 자리에 앉아있는 카오루가 푸른 색만 한참을 응시했다. 정리를 끝낸 카나타가 몸을 돌려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올렸던 소매를 내리고 마이를 입은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 가요, 카오루.”

“응.”


 소파에서 일어난 카오루가 걸쳐두었던 제 목도리를 둘둘 둘렀다. 목을 완전히 가리고 코끝까지 꼼꼼히 감춘 카오루가 슬쩍 카나타를 응시했다. 눈이 흩날리는 겨울에 카나타는 고작 동복차림이 전부였다. 춥겠다, 카나타 군.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카오루가 제 모자를 카나타에게 깊게 눌러씌웠다. 선명한 붉은 색 털모자에 카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처럼 웃었다. 고마워요. 감사의 목소리에 카오루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목도리로 감춰진 피부가 화끈한 기분이었다. 가자, 카나타 군. 한 손으로 우산을 단단히 잡고, 카오루가 재촉했다. 다른 한 손을 내밀 자격은, 아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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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A] 탈주

2016. 11. 20. 23:21 from ENSTARS/NOVEL




 1학년이 3학년 교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스오우 츠카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한 번 녹색 넥타이가 가득한 복도를 한 번 둘러본 츠카사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츠카사에게 은근한 시선이 여럿 향했다. 츠키나가 레오의 귀환 이후로 꽤 열렬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나이츠의 막내. 어지간한 3학년들보다 인기 있는 아이돌이었다. 향하는 시선은 상냥하기도 했지만 따갑기도 했다. 부담스럽습니다... 츠카사는 그나마 방과후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쉬는 시간이었더라면 이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시선을 받아야만 했을 터였다. 

 달갑지 않은 시선 속에 놓이니 원망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저를 이 상황에 처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완전 devil입니다 devil. 험담을 중얼거리며 츠카사가 3학년 A반 교실을 살짝 엿보았다. 교실은 반쯤 비어있었다. 은색 머리, 은색 머리... 츠카사의 시선이 바쁘게 교실 안을 훑었다. 그리고 미간 사이가 깊게 패였다. 어라? 없었다. 


 세나는 어디서든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유메노사키 학원에서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고, 모델 출신에, 나이츠의 선봉이자 임시리더이기까지 했다. 어디에 있어도 주목받는 존재였으니 길거리에서도 찾기 쉬운 사람이었다. 작은 교실에 사람 한 명 없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츠카사의 표정에 당혹이 떠올랐다. 오늘은 나이츠의 레슨 날이었다. 심지어 레오마저 스튜디오에 있는 것을 확인했건만, 설마 세나가 자리를 비울 줄이야! 츠카사는 기억을 급하게 뒤져보았다. 혹시 안 온다거나 다른 스케줄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던가 열심히 되짚어보았지만 그런 거 없었다. 츠카사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세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스오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앗... 하스미 선배.”


 츠카사와 눈이 마주친 건 세나와 같은 A반의 케이토였다. 에이치는 보이지 않았다. 케이토의 손에 들린 것이 서류인 것을 보니 학생회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제 몸가짐을 살핀 츠카사가 곧장 용무를 꺼냈다. 


“혹 세나 선배가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세나? 세나라면 하카제와 모리사와와 함께 나갔다.”

“예?”


 하카제에 모리사와. 순간 낯선 이름에 당황했던 츠카사가 두 번 눈을 깜박였다. 생각해보니 금방 상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언데드의 양대간판 중 하나인 하카제 카오루와 유성대의 리더인 모리사와 치아키. 하카제와는 아무런 관계성이 없었지만 모리사와의 이야기는 같은 반의 센고쿠에게 몇 번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 둘이 세나 선배와 친했던가? 제 클래스메이트들에 대해 자주 이야가하지 않는 세나의 성격 상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어디로 가셨는지 아십니까?”

“글쎄. 다만 작년에도 그 셋은 이맘때 자리를 비웠다.”


 뭔가 있겠지. 케이토가 은근히 셋을 비호했다. 케이토의 말을 들으며 츠카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오늘도 나이츠 전원이 모이는 건 실패인 모양이었다. 풀이 죽은 얼굴로 츠카사가 살짝 어깨를 내렸다. 내일은 꼭 세나에게 무슨 일이었냐며 꼬치꼬치 캐물어볼 의지를 다지며 츠카사가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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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카오] 축제

2016. 11. 20. 22:01 from ENSTARS/NOVEL




 비명에 가까운 환호가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카나타는 쓰고 있던 모자를 조금 더 깊게 눌러썼다. 눈에 띄는 바다색 머리카락은 이미 꼭꼭 숨겨둔 뒤였다. 무대에 모든 시선을 빼앗긴 팬들이 설마 알아차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조심하는 것은 언제나 옳은 일이라며 치아키가 말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카나타가 무대를 힐긋 응시했다. 언데드가 해산한 지 5년만에 레이와 카오루의 생일을 기념하여 열리게 된 특별 콘서트는 시작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네요. 카나타가 살짝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틀동안 열리는 콘서트는 거의 축제와 같았다. 유메노사키의 드림페스와 몹시도 유사한 형태였다. 노점이 있고 야외무대가 하나. 언데드 팬층의 연령층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오랜만에 열린 콘서트를 망치고 싶지 않은 팬들의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사고는 하나도 없었다. 무대에서 언데드가 노래할때의 환호성은 장난이 아니었다. 노점에서는 먹거리와 함께 여러 굿즈를 팔았다. 몇 개의 카오루의 사진을 새로 산 카나타는 인파에 휩쓸려 떠다니고 있었다. 무대 뒤쪽으로 가서 얼굴을 보여준다면 관계자 취급을 받아 출입할 수 있겠지만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가끔은 무대 위의 카오루를 보고 싶었다. 


 지금은 무대가 비어 있는 시간이지만 종종 언데드의 멤버들이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고는 했다. 카오루도 몇 번 그 황금빛 머리카락을 보여주었다. 조금 개구지게 눈매를 휘고 살짝 손을 흔드는 카오루는 귀여웠다. 종종 한참이고 사랑스럽다는 듯 팬들을 응시하다가 키스를 날리고 들어간 적도 있었다. 아이돌로서의 하카제 카오루였다. 언데드가 해산한 뒤 고심 끝에 노래의 길은 접고 모델쪽으로 들어서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카오루였지만 역시 아이돌인 카오루가 제일 반짝거렸다. 멋지네요, 카오루. 카나타는 속으로 그 말을 작게 품었다. 


 카나타는 살짝 무대 뒤를 응시했다. 지금은 이 쪽으로 나와 있었지만 카나타는 이 콘서트의 초대손님 중 하나였다. 언데드의 특별콘서트를 기념하여 우정출현해주는 아이돌 중 한 명. 카나타 역시도 언데드가 해산할 무렵 배우 쪽으로 진로를 빼면서 아이돌은 은퇴했기에 이번 콘서트가 주목받는 이유 중에는 카나타도 있었다. 연예계에는 있지만 아이돌은 은퇴한 전직 인기 아이돌이 대다수 이번 우정출현에 긍정을 표하며 등장했으니까. 


 신카이 카나타, 세나 이즈미, 모리사와 치아키, 히비키 와타루...... 다들 아이돌 자체는 은퇴했지만 배우며 모델, 연극 쪽으로 전향하여 절대적인 인기를 구사하는 존재들이었다. 카나타는 살짝 모자챙을 올렸다가 급하게 무대 뒤로 걸음을 옮겼다. 무대에 언데드가 등장하며 주변에 비명이 깔렸다. 이제 슬슬 카나타도 준비를 해야 할 차례였다. 

 

 신카이 씨, 서둘러주세요! 재촉하는 목소리에 카나타가 모자를 벗고 급한 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대기실에 들어가 의상을 급하게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진행하는 건 카나타에게도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카나타, 잘 보고 왔나요? 개구지게 웃는 오랜 벗의 말에 카나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틀어올린 와타루도 꽤 기대 어린 표정이었다. 간만에 서는 무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듯 싶었다. 


 무대의 바로 뒤, 카나타와 치아키의 등장순서를 기다리며 두 사람이 자리에 섰다. 꽤 긴장되는구나, 카나타!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내고 크게 웃는 치아키를 보며 카나타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살짝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나, 둘──,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며 눈앞에 펼쳐지는 응원봉들의 향연에 카나타가 크게 웃었다. 무대에 서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언데드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섞였다. 카나타가 고개를 돌리자 카오루가 있었다.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다가 시선이 맞자 환히 웃었다. 학생 시절부터 입었던 언데드의 유닛복을 입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해 노래하고 있는 카오루가 보였다. 땀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아, 예쁘다. 카나타가 환히 웃었다. 뺨이 열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붉었다. 



 마지막 소절이 끝나고 반주가 들렸다. 곧 2절로 들어가는 잠깐의 쉬는 텀 사이에 카오루는 뛰어다니며 추임새를 넣으며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무대 위의 카오루는 언제나 그랬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그런 카오루의 뒤를 졸졸 쫒아다니던 카나타가 문득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첫 소절은 카나타가 치아키와 함께 여는 곡이었다. 카나타가 카오루의 어깨를 짚었다. 카오루가 뒤돌아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입술이 뺨에 꾸욱 닿았다.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크게 눈을 뜨며 입을 쩍 벌리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개구지게 웃었다. 반주를 들으며 타이밍을 완벽하게 계산했었다. 제 파트에 들어선 노래의 시작을 끊으며 카나타가 크게 웃었다. 찡긋 윙크하는 카나타의 얼굴을 보며 뺨을 감싼 카오루가 언데드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그 다음으로 시작되는 카오루의 목소리는 떨림 하나 없이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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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카오] 수조

2016. 11. 20. 20:51 from ENSTARS/NOVEL





 기포 올라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파에 누워 깜박 잠들어있던 카나타는 물방울 터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방에는 푸른 조명과 켜진 텔레비전만 얼룩덜룩했다. 카나타는 자신이 출현했던 드라마가 화면에 비치는 것을 보다가 곧 텔레비전을 껐다. 화면의 소음이 사라지자 방 안에는 작게 참방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머리 한 쪽이 멍멍했다. 바다에 잠긴 것과 흡사한 압력이었다. 기묘한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 머리를 꾹꾹 눌렀던 카나타가 곧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벽 한쪽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수조로 시선을 돌렸다. 


 수조는 방을 한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했다.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저 수조와 겨우 놓인 소파와 텔레비전이 끝이었다. 비어있지만 꽉 찬 방이었다. 카나타가 턱을 괴고 수조 속의 생명체를 응시했다. 최대한 좋은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바다에서 퍼 온 모래를 깔고 해양 생물을 심어두는 등 여러가지로 노력했지만 수조 안이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협소한 공간이었다. 바닥에 바짝 가라앉은 인어는 우울해보였다. 안색은 언제나처럼 창백했다. 


“카오루, 배가 고픈 건가요?”

“......”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카오루는 조금 더 비참한 얼굴을 했다. 제 목에 걸려있는 쇠사슬을 움켜쥐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는 평소처럼 시선을 돌려버렸다. 붕대로 둘둘 묶인 카오루의 손바닥은 이미 한참 갈라지고 찢어져 있었다. 처음 수조 속에 들어왔을 때에는 맑았던 물이 붉게 얼룩질 정도로 격렬하게 반항했었다. 몇 번이고 수조를 타넘어 탈출하고 싶어했기에 별 수 없이 쇠사슬로 묶어둘수밖에 없었다. 그 때는 목이며 양 팔과 꼬리까지 단단히 속박했었지만, 지금은 많이 얌전해졌기에 목에만 남겨두었다. 카나타는 그 사실이 조금 기쁘기도 했다. 언젠가는 구속을 풀고도 얌전히 수조에 머무는 카오루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카오루는 수조에 들어가게 된 뒤로 한 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어의 목소리는 힘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인어의 힘을 사용하면 틀림없이 탈출해버릴 터였다. 수조에는 인어의 목소리를 훔치는 기능이 달려 있었다. 인어용으로 만들어진 수조에는 필수적인 기능이었다. 카나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조에 등을 기댔다. 수조의 파란 조명만 남은 방 안은 마치 만들어진 바다와 같았다. 카나타는 그 인조적인 공간 속에서 숨을 쉬었다. 


 바다를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받지는 못했다. 수영을 할 수도 없었고 물 속에 들어가면 늘 힘이 빠졌다. 체질적으로 거절당했다. 미련이 생겨버린 것은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날짜를 헤아리는 것이 의미없을 정도로 자주 해안가를 드나들던 카나타가 인어를 발견하게 된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다. 바다를 헤엄치다가 우아하게 뛰어올라 즐겁다는 듯 노래를 부르는 인어는 아름다웠다. 그 화려한 황금빛도 잘 짜인 비단같은 목소리도. 참으로 보석같은 인어였다. 카나타는 한눈에 인어에게 많은 것을 빼앗겼다. 


 친해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어는 경계심이 높았지만, 카나타는 생각보다 빠르게 인어와 친해졌다. 이름은 카오루. 바람의 이름을 받은 인어였다. 영리한 인어는 자기 종족의 생태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카나타는 그보다 빠르게 인어에 대한 모든 것을 학습했다. 인어의 사육 허가증을 받은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카오루와 친해지며 행복했다. 카나타에게 있어서 카오루는 곧 바다였다. 다만 그가 떠날 것이 무서웠다. 카오루가 바닷속으로 도망친다면 카나타는 평생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건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다. 


  좋아해, 카나타 군. 수줍은 얼굴로 인어가 자신에게 고백한 날 카나타는 인어를 사냥했다. 양 팔목에 흉한 멍자국이 남고 온 몸에 붉은 손자국이 찍혔다. 배신으로 얼룩진 인어는 수조 속에 가라앉아버렸다. 목소리를 빼앗기고 믿음 역시도 빼앗겼다. 첫 일주일은 내내 울기만 했다. 인어의 눈물이 진주가 되어 수조 바닥을 빼곡하게 채웠다. 진주가 쌓이는 소리가 바작거렸다. 카나타는 침묵했다. 카오루의 다른 순간을 조금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카나타 군. 텅 빈 시선을 든 카오루가 카나타와 시선을 맞췄다. 벙긋거리는 입모양이 뚜렷하게 카나타를 부르고 있었다. 카나타가 고개를 돌렸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어떤 말이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원망이라면 무시할 터이고 저주라면 눈감을 터이지만 카오루가 속삭이는 말은 텅 비어버린 다정함이었다. 카나타의 양심도 애정도 깊게 찌르는 다정함. 


 시선을 피해버리는 카나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오루가 제 팔을 깊게 깨물었다. 이미 한참 잇자국이 남고 상처가 남은 팔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몇 번이고 물어뜯었다. 통증이 올라오고 피가 터질때까지, 단단히. 표정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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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마오] 고백

2016. 11. 19. 23:00 from ENSTARS/NOVEL

먼 미래 설정





 마오는 저택을 청소하고 있었다. 워낙 커다란 집인 탓에 몇 번이고 쓸고 닦아도 먼지가 나오는 게 저택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이 집에 살게 된 지도 상당히 오래됬지만, 정작 집주인이 챙기지 않는 탓에 집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건 모두 마오의 역할이었다. 리츠는 할 필요가 없다고 일갈하기는 했지만 역사 있는 저택이 먼지 속에서 삭아가는 걸 보는 쪽이 속이 상했다. 복도의 장식물은 모두 골동품이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들을 마른걸레로 조심스럽게 닦아낸 마오가 리츠의 방문을 열었다. 리츠는 여전히 침대 속이었다. 


“리츠, 일어나! 아침을 넘어서 지금 점심때라고.”

“으으으......”


 싫어... 꾸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은 이제 너무 익숙해진 것이었다. 마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설임없이 이불덩이를 흔드는 손길에 리츠가 몇 번이고 더 신음성을 내뱉었다. 심술쟁이... 골이 난 목소리에도 마오는 꿋꿋했다. 리츠! 단호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리츠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눈과 시선이 얽혔다. 마오의 입가에 별 수 없다는 미소가 걸렸다. 


“점심 먹자. 오늘은 나가봐야 한다며?”

“응...... 일이 있어서.”


 일찍 올 거지만. 리츠가 눈을 비비며 마오에게 엉겨붙었다. 온기가 곧장 닿자 마오가 반사적으로 리츠를 끌어안았다.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참으로 익숙한 것이었다. 리츠가 마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몇 번이고 리츠의 등을 도닥여주던 마오가 곧 리츠를 때어냈다. 이제 밥 먹자.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묻는 마오의 모습을 보며 리츠가 살짝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식사는 간단했다. 리츠도 마오도 거창한 식사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마오는 물만 홀짝이는 수준이었다. 입안에서 물을 굴리는 마오는 생각에 잠긴 기색이었다. 리츠는 마오의 식사량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마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컵을 내려놓았다. 턱을 괴고 저를 바라보는 마오를 보며 리츠가 표정을 반듯하게 폈다. 곧 눈매를 상냥하게 휘었다. 그 안에 맻힌 감정을 보지 못하며 마오가 물었다. 


“언제쯤 올 것 같아?”

“아마 한 시간... 하고도 반 정도?”

“알았어.”


 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 토마토 한 개를 집어먹는 것으로 저도 식사를 끝낸 리츠가 걸려있던 자켓을 입었다. 문가에서 마오가 리츠를 배웅했다. 다녀 와, 리츠.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똑같은 답례가 돌아왔다.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다녀올게, 마오.





 리츠가 집을 나서자마자 마오가 몸을 돌렸다. 조금 급한 걸음으로 서재에 들어간 마오가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을 돌돌 말았다. 네모난 문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청년이 힘을 줘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 하나 없는 문은 꽤 손쉽게 열렸다. 마오는 물끄러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응시했다. 며칠 전 발견한 비밀의 문이었다. 기억도 없던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 살았지만 처음 보는 문이었다. 내내 리츠가 집에 있었기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처음 본 순간부터 소름이 돋고 기분이 나빴다. 리츠에게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몰랐지만 마오는 계속 이 안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몇 번이고 망설이던 마오가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안쪽에서는 미묘한 냄새가 났다. 약품 냄새에 정체모를 무언가들. 소름이 돋았다. 불안하게 제 팔을 쓸어내린 마오가 계속 걸었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떨치기 어려웠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걸음소리만 어지럽게 울렸다. 계단이 끝났다. 마오가 마지막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보이는 광경은 그렇게까지 경이롭지 않았다. 마오는 천천히 시야를 채웠다. 벽 한 쪽 면이 사진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언뜻 보아도 마오의 사진들이었다. 다만 몹시도 낡아있었다. 마오는 물끄러미 그것을 응시했다. 너무나 오래되어 삭아가는 사진을 약품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릿하게 깨달았다. 장담컨대 마오는 그 사진이 찍힐 무렵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고개를 돌리자 수많은 인간 형태가 보였다. 언뜻 시신으로 착각했던 그것들은 모조리 인형이었다. 잘 만든 인형. 한 눈에 착각할 정도로 잘 만들어졌지만 결국 조금만 집중해보아도 인형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마오가 천천히 그것들에게 다가갔다. 하나, 둘... 눈대중으로 세어도 대충 열 구는 가뿐히 넘었다. 스물, 아니면 서른? 마오가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무기질한 녹색 눈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모조리 같은 외형이었다. 붉은 머리, 녹색 눈. 인형들에게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소리없이 침묵하던 마오가 천천히 손목을 들어 제 체향을 맡았다. 



“결국 이번에도 들어와 버렸네.”


 담담한 목소리였다. 마오가 고개를 돌렸다.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리츠가 보였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짐작하고 있던 얼굴에 마오가 시선을 내렸다. 어두운 방 안과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미슷한 것을 한참 노려본 마오가 시선을 들었다. 리츠는 슬퍼 보였다. 얼핏 비참한 것도 같았다. 단언컨대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오가 옅게 미간을 좁혔다. 


“왜 모른 척 해주지 않았어? 마오.”

“미안, 그럴 수 없었어.”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었는데.”

“그러게.”


 하지만 나는 벌써 알아버렸는걸. 마오가 인형들을 응시했다가, 사진들을 보았다. 사쿠마 리츠가 보물처럼 고이 간직해놓은 흔적들을 보았다.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을 보았다. 만들어내고 싶은 것을 보았다. 마오가 미소지었다. 곤란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의, 애정 가득한 미소였다. 사진 속의 청년이 가장 많이 짓고있는 표정과 매우 흡사한. 어쩌면 똑같은. 


“내 차례는 끝이네, 리츠.”

“응. 이제 잘 시간이야.”

“리츠.”


 마오는 천천히 다가오는 리츠를 응시했다. 마오의 바로 앞에서 리츠가 멈추자 마오가 손을 뻗어 그 손을 맞잡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리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오는 그 표정의 의미를 읽었지만 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오는 계속 웃는 얼굴로 마지막을 고했다. 기억나지 않는, 어쩌면 탄생부터 품었을 감정을 고백했다. 


“사랑해, 리츠.”


 인형의 생이 끝났다. 마오였던 인형이 그대로 뒤로 넘어지는 것을 리츠는 방치했다. 인형이 나뒹구는 소리만 방을 막막하게 채웠다. 조금 따뜻했던 손이 그대로 인형의 것으로 바뀌는 감각이 생생했다. 몇 번이고 제 손을 매만지던 리츠가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서른 여섯번째의 마오는 제일 이사라 마오와 닮아있었다. 마지막에 속삭인 말조차 어쩜 이리 닮았을까. 어쩌면 더 오래 살아주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보기좋게 기대를 배신당한 상태였다. 


 리츠가 손을 뻗었다. 이제껏 만든 인형들은 마법으로 만들어놓은 혼이 빠져나가자마자 한 곳에 모아 전시하여 방치했지만 이번의 마오는 제대로 시신으로 처리해주고 싶었다. 저에게 사랑한다 말해준 혼에게 대한 예우였다. 하얀 손이 인형의 이마에 닿았다. 매끈하고 차가운 이마였다. 


“이번 장난 끝.”


 인형이 부서져 먼지처럼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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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마오] 공백

2016. 11. 18. 22:41 from ENSTARS/NOVEL




 거리는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사람의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사라 마오는 사쿠마 리츠의 현관 대문에 기대어 멍하니 회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가 어깨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작게 내뱉는 숨결은 희게 물들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발갛게 얼기 시작하는 뺨이며 손끝을 천천히 매만지던 마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거리의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걸음소리였다. 자박자박 다가와 저를 응시하는 리츠를 보며 마오는 작게 웃었다. 눈썹을 한껏 내리고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난처한 미소였다.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의미가 가득 담긴 미소. 그 표정을 한없이 응시하던 리츠의 표정이 문득 일그러졌다. 든든하게 옷을 챙겨입은 리츠와는 달리 마오의 옷차림은 꽤나 가벼웠다.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조금 급해진 걸음으로 다가온 리츠가 곧장 마오의 뺨에 손을 얹었다. 싸늘했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 군.”

“리츠가 나를 데리러 올 것 같아서.”

“마 군은 가끔 바보같아.”


 고집쟁이. 마 군, 바보. 완전 바보. 투정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차마 막지 못해 흘러내리는 애정을 알고 있어서, 마오는 그저 곱게 웃기만 했다. 녹빛 눈동자가 꼼꼼하게 리츠의 얼굴을 훑었다. 하얀 얼굴, 붉은 눈동자. 살짝 위로 치켜올라간 눈매. 어여쁜 이목구비 모두 기억 속의 리츠와 똑같았다. 하나도 다르지 않은 사쿠마 리츠 본인이었다. 마오가 손을 들어 제 뺨을 짚은 리츠의 손을 감쌌다. 닿아 있는 리츠의 체온이 뜨거웠다. 얼어있는 뺨을 녹여줄 수 있을 정도로. 마오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얼굴을 직시한 리츠는 마오에게 붙잡인 제 손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잡아 내렸다. 한껏 가까워진 두 사람의 사이에는 이제 한 뼘의 틈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 군.”

“리츠가 보고 싶어서.”

“조금 늦게 만난다고 해서 마 군이 날 잊을 일도 없다는 걸 아는데.”


 그리고 잊어도 용서했을 거야. 상냥하게 덧붙여지는 말에 마오가 리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리츠는 조금 미간을 좁혔다가 물었다. 얼마나 기다렸어? 마오가 대답했다. 계절 두 개 정도.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제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리츠의 손길을 받으며 마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리츠.”

“응, 마 군.”

“그 때... 리츠의 손을 못 잡아줘서 미안해.”

“괜찮아.”


 내가 너무 서두른 것도... 미안해. 괜찮아, 이제는... 전부 용서해. 리츠가 속삭였다. 네가 쥐어주는 면죄부는 어쩜 이리 달콤한지. 마오는 조금 섧게 웃었다. 한 발자국 떨어졌다. 틈이 생기자 마주 볼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몇 분이나 한참을 응시했다. 리츠의 시선은 여전히 슬픈 기색이었다. 선 고운 눈매 끝에 감정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었다. 마오는 떨어지지 않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에게도 그 감정이 붙어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리츠가 눈을 감았다. 손을 내밀었다. 


“가자, 마 군.”

“응.”

“길이 엄청 멀 거야.”

“상관 없어.”


 마오가 환히 웃었다. 리츠가 내민 손을 붙잡아 텅 빈 거리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머리에 어깨에 닿았다가, 쌓이지 않고 떨어져버리는 눈송이들을 보며 두 사람이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닿아있는 네 체온만이 따뜻했다. 같은 세상에 함께 있었다. 네가 없는 세상에 내가 있기 너무도 힘겨웠다. 결국,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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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로얄조] 꽃다발

2016. 11. 14. 00:35 from ENSTARS/NOVEL




 이사라 마오는 화분증이다. 그를 봄에 비유하는 수많은 팬들이 있었지만 봄은 이사라 마오가 가장 괴로워하는 계절이었다. 진짜 끔찍한 병이야. 마오는 종종 리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정말 진심이었다. 코가 다 헐고 눈도 간지러운데다가 긁을 수도 없었다. 숨도 쉬기 힘들었다. 정말 끔찍했다. 


 리츠는 그런 마오의 괴로움을 이해하지도 동조해주지도 못했지만 동정하고 안쓰러워 해 줄수는 있었다. 쉴 새 없이 재채기를 하며 눈물도 콧물도 줄줄 흘리는 마오는 정말 괴로워보였다. 2학년 B반에 소속된 이후로는 코가라는 동지도 생겼다. 마 군, 힘내. 고급 티슈를 마오의 손에 쥐어주면 마오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오는 꿋꿋하게 허세를 부리는 코가와는 달리 꼬박꼬박 일기예보를 챙겨보고 계절에 맞춰 약도 잘 챙겨먹었지만, 한두 달에 한 번 꼴로 이런 괴로움을 피하지 못하고는 했다. 코를 훌쩍인 마오는 오늘 달력에 엑스 표시를 쳐 놓을 거라고 이를 북북 갈았다. 


 그런 연유로, 이사라 마오는 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떠밀면 받아버리는 나쁜 습관 탓에 꽃다발을 주면 거절은 못했지만 언제나 한 손에 들고, 품에 끌어안는 일은 없었다. 꽃집도 최대한 멀리 돌아갔고, 꽃놀이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고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한숨을 푹푹 내쉬기도 했다. 따끈한 양지를 닮은 사람치고는 참 가혹한 일이었다. 리츠는 가끔 안쓰러움에 혀를 끌끌 찼다. 리츠는 꽃을 꽤 좋아했다. 집 뒷마당을 장미 정원으로 장식한 사람도 리츠였다. 앞마당을 꾸미지 않는 이유는 마오가 드나들기 힘들 것 같다는 이유 단 하나뿐이었다. 화려하게 핀 꽃을 꺾어 꽃다발처럼 장식하는 것도 즐겼다. 마오에게 줄 수는 없어 가끔 만드는 꽃다발을 바치는 건 주로 아라시였다. 제일 좋아해주니 리츠도 주는 보람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꽃다발을 만들어 가져온 날이었다. 요 며칠 나이츠의 업무로 손대지 못했더니 꽤 난잡하게 자라 있는 것을 정리하고 잘라 꽤 화려한 꽃뭉치가 완성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라시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었으나 나이츠의 스튜디오에는 세나와 왕님 둘 뿐이었다. 왕님이 있다니 드문 날이었고, 아라시와 츠카사가 없다니 역시 드문 날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은 육상부 후배와 연관된 일로 바빠 불참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츠카사는, 잘 모르지만 그에 휘말려 있다고. 스 쨩의 교우관계까지 참견하는 건 너무 과보호 아니야? 가방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둔 리츠가 소파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나도 몰라. 세나가 짜증스럽게 답했다. 


 결론적으로 오늘은 아라시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귀찮게 됬네. 리츠가 까칠한 소파 쿠션에 뺨을 비비며 생각했다. 안즈가 생각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프로듀서 아가씨는 늘 바빴다. 그리고 리츠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찾아 헤멜 정도로 부지런한 성격이 절대 못 됐다. 안 주고 말지... 리츠가 길게 하품했다. 


“왕님, 꽃 좋아해~?”

“꽃? 왜?”


 종이에 펜을 휘갈기다가 입 위에 얹고 잔뜩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을 반복하던 레오가 리츠의 물음에 돌아보았다. 개구진 녹빛 눈을 마주보며 리츠가 다시 한 번 나른하게 하품했다. 흠냐흠냐. 느긋한 잠소리를 흘리며 리츠가 방긋 웃었다. 


“좋아한다면 꽃다발 줘 버리게~? 왕님이 별로 안 좋아하면 루카쨩한테나 선물로 줘.”

“오옷, 우리 귀여운 루카땅과 꽃의 조합은 최고지! 앗, 그렇지만 안 팔리는 물건 떨이 하는것처럼 우리 루카땅에게 꽃을 맡기지 마! 와하하, 하지만 내 귀여운 기사가 선물을 준다면 고맙게 받겠어☆ 앗, 꽃과 함께 있는 릿츠라...! 괜찮잖아! 인스피레이션~!”


 저 좋을 대로 신나게 떠드는 왕님은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한 모습인지라 리츠는 대충 결론만 뽑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꽃을 받아준다는 의미였다. 가방을 뒤져 장미와 안개꽃이 화려하게 장식된 꽃다발을 꺼낸 리츠가 가볍게 그것을 레오에게 던졌다. 종이에 곡을 휘갈기다가도 요령좋게 그것을 받아낸 레오가 씩 웃었다. 깊게 휘어지는 눈이 보기 좋았다. 리츠가 입가에 옅게 미소를 그렸다. 언제나 여왕님께 바치던 꽃이었지만 왕에게 바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왕님 뒤에 있을 공주님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나름대로 훈훈한 분위기를 한 방에 박살낸 건 팔랑팔랑 패션잡지를 읽고 있던 세나였다. 바닥에 떨어진 안개꽃 머리와 장미 꽃잎 몇 개를 내려다보면 세나가 툭 말을 뱉었다. 뾰족한 가시를 닮은 목소리였다. 


“쿠마 군, 꽃 같은 걸 함부로 던지지 마. 꽃잎 떨어지잖아.”

“에에, 잘 던졌는걸~. 투덜이처럼 굴지 마, 셋쨩.”

“와하핫, 맞아! 투덜이처럼 굴지 마, 세나~.”


 세나의 가시에 상처받기에 레오와 리츠는 너무 많은 걸 세나와 함께 겪었다. 놀리듯 야유하는 왕과 참모를 보며 선봉장이자 역전의 용사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들고 있던 잡지를 돌돌 말아 왕과 참모의 머리를 마구 때려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딱 3분이었다. 레오는 저가 들고 있던 종이와 펜만 쥐고 잽싸게 몸을 피했고 리츠는 그냥 몸을 웅크려 조금 맞았다. 셋쨩 너무해~.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세나는 단단히 인상을 썼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험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가 너무해! 스튜디오 안에 브금으로 왕의 웃음소리가 깔리는 것을 들으며 리츠가 덮으려고 준비한 담요를 세나에게 덮어씌웠다. 어픕. 세나가 숨 막힌 소리를 흘렸다가 손으로 담요를 치웠다. 천 속에서 나온 건 아까보다 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지금 쿠마 군 해보자는 거지?! 2차전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에 레오가 신이 나서 참전했다. 오옷, 나랑도 놀아 줘~! 왕님은 조용히 해! 꼬집는 손길이 매웠다. 레오가 저가 쓰던 악보를 신나게 던졌다. 시야가 하얗게 어지러웠다. 

 나이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세 사람의, 심각하게 유치한 다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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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동거

2016. 11. 13. 21:59 from ENSTARS/NOVEL




“카오루~.”

“글쎄, 안 된다니까...!”


 제 옷을 부여잡고 칭얼거리는 카나타를 돌아보며 카오루가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카나타의 양 뺨은 이미 빵빵하게 차오른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카오루, 미워요! 하며 투정을 부릴 것 같은 얼굴을 보며 카오루는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한숨을 열심히 삼켰다. 누구는 싫어서 거절하는 줄 아나. 원망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카오루가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머리를 한 번 쓸어넘겼다. 


“모리사와 군 덕분에 유성대는 숙소 생활이 원칙이잖아?”

“그래도...! 치아키는 제가 잘 설득했으니까요.”

“아니, 너무 눈에 띈다고...”


 몇 년째 함께한 같은 유성대 멤버들과의 숙소생활을 그만두고 고등학교 친구라고 알려진 나랑 같이 산다니. 그게 커밍아웃이랑 뭐가 달라. 그런 식으로 인식되지 않아도 불화설밖에 더 생기겠어? 카오루가 열심히 카나타를 설득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다 맞는 말 뿐이었지만 카나타는 속이 상했다. 이성과 별개로 감정이 자꾸 마음 한구석을 푹푹 찔렀다. 그게 아파서 잔뜩 울상이 되었다. 카나타의 얼굴을 본 카오루도 영 속이 쓰린 표정이었다. 몇 번이고 발을 구르던 카나타가 카오루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카오루는 나랑 같이 살고 싶지 않나요?”

“......”


 그래, 문제는 바로 이 것이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신카이 카나타를 좋아했다. 아마도 평생 그를 좋아할 것 같았다. 그런 상대와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카오루도 당연하게 카나타와 함께 사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해 보았다. 입을 다물어버리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도 시선을 내렸다. 본인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카오루가 거절할 것도 생각은 했었다. 마음 아파서 깊게는 안 했었지만. 그는 카오루에게 함께 살자는 말이 듣고 싶을 뿐이었다. 진짜로 함께 산다면 더더욱 좋았고. 물론 그를 위해서 준비도 철저히 해 뒀다. 열심히 미래를 꿈꿨으니까. 


 카오루에게 괜히 민폐나 더 끼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카나타가 깊게 한숨을 뱉었다. 낮게 깔리는 한숨에 카오루가 어깨를 떨었다. 카나타의 머리 위에 있을 리 없는 고양이 귀가 축 늘어지는 환각마저 보일 정도였다. 잔뜩 풀이 죽어버린 카나타를 보며 카오루가 머쓱하게 뒷목을 매만졌다. 대중의 시선을 생각하여 흔쾌히 오케이를 외치지 못하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저 집을 샀어요.”

“응?”

“수조도 사고, 물고기 씨랑, 카오루가 좋아하는 소파랑, 둘이 잘 수 있는 침대도 샀어요.”

“어... 어?”

“방음 처리도 잘 해 놨고, 방비도 잘 했어요. 자물쇠도 많이 달린 집인데.”

“잠깐만. 잠깐, 잠깐만? 카나타 군 대체 언제?”

“카오루.”


 카나타가 카오루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메랄드 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잡힌 손으로 옮겨지는 미지근한 체온에 카오루의 표정이 점차 물들었다. 곤란함에 부끄러움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잔뜩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데 하카제 카오루는 신카이 카나타를 좋아했다. 당연히 카나타에게 아주 약했다. 간단한 공식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마음 속에서 울리는 경고음을 들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간절히 말했다. 


“저랑 같이 살아요, 카오루.”

“......”

“네?”


 카나타가 손에 쥐어주는 건 분명 집 열쇠였다. 카오루는 속으로 한탄했다. 언제부터 카나타 군 준비성이 이렇게 좋았지? 또 한탄했다. 나는 왜 이렇게 카나타 군에게 약하지? 수많은 갈등과 번뇌를 거치고 마지막으로 혼자 납득했다. 카나타 군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하카제 카오루에게 있어서 그만큼 마법의 말은 또 없었다. 


“이거 암묵적으로 우리 사귀어요, 하고 말하는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저희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하고 광고하는 거라고.”

“완전 멋지네요~.”

“인터넷에서도 엄청 떠들거고.”

“카오루가 인터넷 대신 저를 봐 주면 좋겠어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날 책임져야 해.”

“얼마든지...☆”


 하늘을 한 번 노려보고 땅을 한 번 노려본 카오루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그대로 제 두 손을 꼬옥 붙들고있는 카나타를 그대로 당겨 입을 맞췄다. 짧게 쪽 닿았다가 떨어지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드러운 곡선 속에 기쁨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럼 나랑 같이 살자, 카나타 군.”


 카나타가 팔을 뻗어 카오루를 끌어안았다. 뺨을 붙잡고 키스해오는 카나타에게 응하며 카오루도 결국 길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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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물들다

2016. 11. 12. 01:12 from ENSTARS/NOVEL

지인분 생일 선물로 작성한 글을 허락 하에 업로드합니다!

-






 미술상 사쿠마 레이는, 매년 초 그의 동생에게서 한 폭의 그림을 받곤 했다. 하얀 캔버스 속에 유려하게 그려진 젊고 생기 넘치는 사람.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림 속의 그는 조금씩 자라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로 시작하여, 오랫동안 소년이었고, 지금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형제이기에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눈, 빛을 표현한 붓칠 하나조차 사랑이 묻어 있었다. 이 그림은 그의 소중한 남동생이 집중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향이 공기를 기묘하게 맴돌았다. 훌륭한 작품이었다. 레이는 올 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그림 속의 청년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내며 그를 위해 비워놓은 벽의 빈자리를 채워 넣었다. 한 해의 시작이었다.

 



*

 




 젊고 재능 있는 유능한 화가. 거기에 덧붙여 외형마저 아름다운 화가는 주목받기 마련이었다. 사쿠마 리츠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미술상 중 톱으로 손꼽히는 사쿠마 레이의 하나뿐인 혈육이라는 점까지 합쳐져 리츠는 그 나이 또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화가였다. 미술계의 평가도 좋았고, 몇 번의 전시회도 성황리에 끝났다. 마치 백 년은 더 산 것처럼 연륜이 필요한 여러 가지 기법을 폭넓게 사용하는 그가 가장 잘 그리는 그림은 물감이 겹겹이 칠해진 밀도 높은 그림이었다. 수채보다는 유화에 능했고, 자연경관이나 풍경보다는 사람을 그리는 것을 즐겼고, 주의 깊은 관찰로 나오는 섬세한 표정묘사는 일품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라고 해야 하나, 고집이 있다고 해야 하나.’


평론가 중 누군가는 간단히 평했다.


‘편식이 심해.’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그의 그림을 딱 한 번만 둘러본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사쿠마 리츠는 종종 거리의 사람들이나 자화상, 제 혈육을 그리기도 했지만 늘 함께하는 모델은 언제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쿠마 리츠의 뮤즈였다. 시간의 흐름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사람. 수천 점이 넘는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 명의 소년. 거리에서 화가 본인이 발견해 데려온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성도 없는 거리의 아이였다. 조각상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들고양이같은 녹색 눈동자와 날렵한 몸매가 매력적이었다. 예술가 한 명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끔은 본인의 얼굴에 대고 무례한 소리를 하는 자도 있었다.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그리시지요. 출신도 모르는 더러운 자를... 리츠는 그 내려다보는 시선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미술상 형을 생각하여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런 인간들을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마 군의 가치도 모르는 바보들이야. 집에 돌아와 이불에서 뒹굴거리며 젊은 화가는 그리 평했다. 잠시 꾸물거리다가 저의 모델을 품에 끌어안았다. 운동을 즐기지 않아 얇게 말랐지만 부드러운 리츠와는 달리 단단하고 건강한 몸이었다. 동시에 몹시 따뜻했다. 리츠는 그 체온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 굳어있던 표정이 나른하게 풀렸다.


“걱정 마, 리츠. 신경 안 쓰니까.”

“응. 착하다, 마 군.”


 쓰다듬어줄까? 아니면 예뻐해 줄까? 아이 다루듯 어르는 목소리에 마오가 엷게 미간을 좁혔다. 마오가 리츠보다 어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 역시도 성인의 나이가 되었건만, 리츠는 가끔 마오를 처음 만났던 일곱 살 배기 어린아이처럼 대할 때가 있었다.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불평하는 마오를 보며 리츠가 슬쩍 미소 지었다. 이런 식으로 어린 아이 취급을 하면 마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마 마오는 리츠와 본인의 실제 나이 차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이 그 안에 묻혀있는데. 물론 말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또한 리츠는 제대로 마오를 어른으로 보고 있었다. 아이 취급을 하고 있었다면 이런 감정을 품을 일은 당연히 없었을 테니까. 리츠의 입가에 남몰래 감정이 묻은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문득 검지손가락이 마오의 얼굴선을 가만히 훑었다. 담백하게 쓸어내려지는 손길에 마오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리츠에게 고정시켰다. 몇 번 눈을 깜박인 리츠의 시선이 조금 가라앉았다. 장미색에서 루비색으로 변하는 차이였다. 장난꾸러기에 응석쟁이 어린아이에서 일을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그 손길의 기저에 깔린 것은 애정이었다. 마오의 얼굴에서 목선을 타고 몸으로 흘러내리는 손길에 마오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가 곧게 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그의 모델이자 뮤즈로 일했다. 감정이 절제된 손길정도는 별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마오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저도 리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조금 근육이 붙은 마오의 팔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리츠는 아름다웠다. 사실 나 대신 자화상을 몇 백 점 그리는 쪽이 더 잘 팔릴 것 같은데. 마오는 여러 번 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마오도 잘 생긴 미청년에 속했지만 리츠는 그야말로 명화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마오가 화가이고 리츠를 모델로 착각하는 사람도 적잖았다. 그럴 때마다 리츠는 점잖게 오류를 고쳐주었지만, 뒤에서는 마오에게 투덜거리고는 했다. 마 군의 아름다움도 모르다니, 바보 아냐? 그런 식으로.


“마 군, 그림 그릴래. 준비 해 줘.”

“지금 당장? 알았어.”


 리츠의 시선이 마오의 얼굴에 꽂혔다. 리츠는 꼼꼼히 마오를 살피다가 마지막은 꼭 눈을 응시했다. 언젠가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리츠는 간단히 답했다. 마오의 외모는 언제나 최고로 아름다우니 그 순간에 빛나는 녹빛의 색채를 보고 그림을 결정한다고. 오늘의 색은 그릴만한 가치가 느껴진 모양이었다. 정작 마오 본인은 모르는 차이였지만 리츠는 기민하게 사소한 것을 잡아내고는 했다. 화가의 직감일지도 몰랐다. 그림으로 완성된 화폭 속의 이사라 마오를 보면 그제서야 마오는 느즈막히 깨닫는 것이었다. 이 때, 이런 감정을 가졌고 리츠에게는 이렇게 보였구나. 하고. 리츠의 그림 속의 마오는 주로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수많은 얼굴을 보여줬지만 리츠는 행복에 잠긴 이사라 마오를 특히 좋아했다. 마 군은 언제나 예쁘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지만 사소한 행동이 다르다는 걸 리츠는 알고 있을까. 분노보다는 기쁨을 좋아했고, 슬픔보다는 즐거워하는 마오를 좋아했다. 그건 굉장히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서, 마오는 가끔 리츠의 그림을 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 사실을 리츠는 아마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영 몰랐으면 했다.

 

 눈을 감은 리츠가 이미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처음에는 잠드는 거 아니냐고 부던히 의심했던─눈을 감고 이불에 얼굴을 묻는 것을 보며 마오가 캔버스를 꺼내고 물감을 준비했다. 이미지를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대로 오래 두면 실제로 잠들어버리니 서둘러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렸고, 그러면 한동안 토라져버리니까. 처음에는 낯선 준비에 쩔쩔맸지만 지금은 눈 감고도 해낼 수 있었다. 자주 사용하는 물감에 파레트, 붓도 여러 종류. 유화 특유의 기름 냄새가 번졌다. 리츠가 가장 애용하는 자리에 의자배치까지 끝낸 뒤 가장 시선이 닿기 편한 장소에 앉은 마오가 리츠를 불렀다. 리츠, 준비 다 됐어. 짧은 부름에 리츠가 눈을 반짝 뜨더니 곧장 자리에 앉았다. 붓을 잡고, 의자에 앉아있는 마오를 한 번 본 뒤 곧장 붓을 놀렸다. 순백의 캔버스에 금세 색채가 번져 올랐다.


처음에는 몇 번이고 끊임없이 마오에게 시선을 던지던 리츠가 느릿하게 캔버스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오가 힐긋 시계를 응시했다. 한 시간. 이 시간을 넘으면 얌전히 앉아있는 마오는 없어도 괜찮았다. 리츠가 빚어내는 형상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필요한 거 아니야? 어릴 적 그리 물었던 적 있었지만, 리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까, 비는 시간은 마 군 하고 싶은 걸 해. 한 시간이면 충분해. 마오는 리츠의 모델이었기에 다른 화가들은 어떤지 전혀 몰랐지만, 리츠가 그리 말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정해진 시간을 채운 마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화 냄새가 맴도는 작업실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이들과 한 약속이 있었으니 리츠와 함께 먹을 점심을 준비하고 외출 준비를 해야 했다. 마오의 걸음걸이가 조금 급했다.

 


 리츠는 우아한 귀족 도련님 같은 얼굴과 달리 꽤나 편식을 했다. 못 먹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대한 안 먹으려 들었다. 최대한 조금 익힌 고기를 즐겼고 와인 종류를 좋아했다. 낮술은 안 된다는 마오의 철칙에 따라 해가 있는 시간에는 포도나 토마토 주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덜 익은 수준의 고기를 오래 씹어 먹는 것도 좋아했다. 덕분에 마오의 식성도 바짝 익히는 것보다는 살짝 익히는 쪽에 가까웠다. 리츠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생성된 식성이었다. 마오는 아침에 사 온 빵을 썰고 버터를 바르고 베이컨과 감자를 구웠다. 부엌에 고소하고 지글거리는 내음이 퍼졌다. 마오는 리츠를 위한 주스와 본인이 마실 커피까지 내린 뒤 작업실에 있는 리츠를 찾아보았다. 붓끝을 씹으며 캔버스를 노려보는 리츠가 보였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츠, 어디가 막혔어?”

“이 부분 색이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 지 고민 중.”


 캔버스를 노려보다가 파레트를 한참 응시하는 리츠를 보며 마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곁에 머물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도 많고, 미술 상식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지만 결정적으로 마오는 화가가 아니었다. 리츠의 그림에 무언가 조언을 해 줄 수는 없었다. 마오의 눈에 리츠의 그림은 전부 아름다웠으니. 그렇기에 마오는 다정하게 리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제야 리츠가 파레트에서 시선을 때고 마오를 올려다보았다.


“점심 다 됐는데, 지금 먹을래? 아니면 넣어둘까?”

“마 군 오늘 나간다고 했었지?”

“응. 점심 먹고 나가야 해.”

“그럼 같이 가.”


 리츠가 단박에 붓을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을 나서는 리츠를 마오는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자신의 뮤즈가 되어 달라며 손을 내밀었던 그 날 이후 리츠는 마오의 많은 것을 보장해주었고, 후원해주었고, 도와주었지만 마오의 시간만큼은 소유하고 싶어 했다. 무엇을 하던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상황에 처한 이사라 마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그런 리츠가 부담스러웠던 것도 같지만, 이제는 자신을 따라나서지 않는 리츠를 보면 그게 훨씬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이 리츠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게 될까 겁이 났다. 익숙해져 버리는 수준을 넘어 마오에게도 리츠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해진 결과였다. 마오가 잠깐 시선을 미완성인 그림으로 던졌다가,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점심식사는 언제나처럼 오순도순 했다. 바싹 구운 감자를 우물거리던 리츠가 손가락으로 포크를 돌리며 장난을 쳤다. 솜씨 좋게 하얀 손가락 사이를 오가는 포크를 보며 마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리츠. 마오가 타이르듯 부르는 목소리에 리츠가 턱을 괴었다.


 “바로 애들을 보러 갈 거야?”

 “아니. 성당에 들렸다가 가려고.”


마오의 말에 리츠가 짧게 미간을 좁혔다가 풀어냈다. 마오는 리츠가 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종종 성당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마오를 대단히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마오의 목소리에 감탄하고 칭찬해도 리츠는 마오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칭얼거렸다. 마 군은 나만 믿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왜 신을 믿고 그래. 흘리듯 불평하는 리츠의 목소리가 마오의 귀에만 언뜻 닿았다가 금방 사라졌다. 사실 리츠의 그림만 봐도 그랬다. 수많은 화가들이 한 번쯤은 그리는 소재를 리츠는 손대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도, 예수 그리스도도. 언젠가 딱 한 번 물었을 때 리츠는 아주 개구지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내가 그리는 것만큼 불경도 없을 걸.’


그 뒤로 마오도 리츠에게 이 소재를 꺼내지 않았다. 리츠도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으로 묻혀 버린 소재였다. 다만 성당이라는 이야기에 내심 못마땅함을 표현하는 리츠를 보며 미안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오늘은 뭐 할 거야?”

“글자랑 간단한 숫자 계산.”


 마오가 바게트를 삼키며 대답했다. 길거리에서 자라 수많은 동생들을 데리고 있었던 마오는 기적적으로 리츠를 만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곳에는 마오와 똑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많았다. 마오는 그 아이들을 돕는 방법으로 교육을 택했다. 그렇기에 리츠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신뢰를 쌓아 올렸다. 지금도 거리에 나서면 마오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웃어주는 아이들이 많았다. 마오는 그에 크게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리츠는 그런 마오의 행동에 같은 보람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마오가 좋아하고 예쁘고 행복하게 웃어주니 리츠도 좋아했다. 간단한 원리였다.


“글씨는 리츠가 더 잘 쓰니까, 애들한테 예시로 보여주게 종이에 알파벳 좀 써 줘.”

“나 엄청 비싼 인력인데, 부려먹는 거야, 마 군?”

“아니지. 도와달라는 거잖아. 부탁할테니까, 응?”

“흐음... 뭐, 마 군이 원한다면야......”


 리츠가 대충 근처에 있는 종이를 끌어와 깃펜으로 휘갈겼다. 마오도 오래 글씨 연습을 해서 단정하게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리츠만큼 귀족적인 글씨체는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종이를 채운 알파벳들을 보며 마오가 짧게 감탄했다. 대단하다, 리츠. 마오의 말에 리츠가 수줍은 듯 웃었다. 리츠는 마오가 무심코 하는 칭찬에 약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순수한 감탄을 좋아했다. 금세 의기양양해져서 조금 더 칭찬해 달라고 어리광을 부려 오기는 했지만.



 점심식사를 끝내고 제대로 정장을 갖춘 뒤 두 사람은 집에서 나왔다. 거리는 한산했다. 11월 중순, 초겨울이 되면서 다들 집을 잘 나서지 않았다. 날이 추운 탓이었다. 툭 하면 눈이 내리기도 했다. 길이 쉽게 더러워지니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면 나오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오늘의 하늘도 구름 가득 낀 흐린 하늘이었다.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 번 내리친 리츠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눈이 곱게 접혔다.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이 기분 좋아보였다.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잠자는 것을 즐기는 리츠는 추운 날씨를 좋아하지 않아서 툭 하면 이불 속에 파고들어버렸지만, 볕이 들지 않는 구름 낀 날씨는 좋아했다. 파란 하늘 아래의 리츠는 정말 아름다운데도 해가 하늘에 떠 있으면 어지간해서 집 밖에 한 발도 내딛지 않아서 가끔은 아쉽기도 했다.


리츠와 마오의 걸음 속도는 거의 같았다. 평소 리츠가 조금 더 느긋하고 마오가 조금 더 급했지만 둘 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맞췄다. 먼저 말해뒀던 것처럼 성당으로 향하는 길을 밟던 도중 리츠가 문득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형한테 편지가 왔었어.”

“그 사쿠마 씨?”


 마오가 짧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름은 많이 들었다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리츠가 많이 좋아하는 형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다. 아주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도. 리츠와 퍽 닮았다고 했고, 미술상으로써 명성도 드높았는데 리츠는 마오를 그와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 마오는 오랫동안 리츠의 뮤즈이자 모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건 마치 제 보물을 숨기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태도와 닮아 있었다. 레이는 마오를 만나게 해 주지 않으려는 리츠의 모습을 보고 그저 귀엽다 웃어 넘겼다고, 리츠에게 들은 적 있었지만. 마오가 가만히 리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리츠는 옅은 호수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이 저번에 맡겼던 그림은 다 팔았다고, 값을 좋게 받았대.”

“그래? 잘 됐네.”

“받은 돈은 나 준다는데 내일은 레스토랑이나 갈래, 마 군?”


 이거 데이트 신청 같은 거야. 리츠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보기 좋게 어여삐 휘어지는 눈매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마오가 덜컥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스스로에게 당황하여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붉은 귓가는 절대 추위 탓은 아니었다. 리츠의 입가에 조금 더 미소가 번졌다. 작게 위아래로 끄덕여지는 고개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물들어버린 귀도 목덜미도 가리고 있었다. 살짝 시선을 맞추고 쑥스러운 듯 웃는 녹안을 보며 리츠도 환히 웃었다.

 


 성당, 그 다음은 아이들이 있는 낡은 집.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는 마오를 리츠는 저 멀리에서 겨우 바라만 보았다. 성당 안으로 발도 들이지 않았다. 아직 어린 리츠는 성당 안에서까지 자유롭게 행동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퍽 성스러워 보이는 마오를 한참 응시할 뿐이었다. 마오는 자신에게 리츠를 내려주었다며 신을 꽤 신실하게 믿었다. 그 말을 들은 리츠는 조금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신에게 그를 빼앗길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생각도 없었다. 영원은 독이다. 자신을 원망하는 마오같은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번이 끝나도 다음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고운 꽃 색 머리카락도 예쁜 나뭇잎 색 눈도 시야에 새기듯 응시하던 리츠가 문득 작게 웃었다. 기도를 끝낸 마오가 뒤돌아 리츠를 보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성당을 빠져나와 리츠의 옆에 서는 마오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리츠가 푹 빠진 미소를 길게 그렸다. 애정 짙은 미소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오는 정말로 선생님 같았다. 리츠는 낡은 집에 만들어진 교실 뒤편에서 마오만 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오를 위해 들였던 가정교사에게 리츠도 같은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리츠는 이미 레이에게 모든 것을 학습한 뒤였다. 열심히 배우는 마오가 귀여워서 같이 앉아 지루한 수업을 들었었지만. 마 군 선생님한테 배웠더라면 나도 성실한 학생이었을 텐데. 아닌가, 훨씬 불성실한 학생이었을지도? 리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글자를 쓰고 숫자를 더하고 빼는 마오의 표정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선생님, 하고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즐거워보였다. 아이들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않고 교육의 중요성도 그닥 실감하지 못하는 리츠는 잘 모르는 감정이었다. 저런 표정은 나랑 있을 때만 보여주면 좋을 텐데. 지팡이에 턱을 괴고 리츠가 길게 비음을 흘렸다. 하지만 욕심을 부려서 미움 받는 쪽이 훨씬 무서우니까 속박할 수는 없었다. 마오가 행복한 것이 좋았다. 예쁘게 웃어주는 쪽이 좋았다.


 아. 리츠가 짧게 감탄을 흘렸다.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글씨를 따라 쓰게 시킨 마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리츠와 눈을 마주했다. 색 고운 시선들이 얽히는 순간 곱게 피어나는 미소에 문득 숨을 삼켰다. 순진한 애정과 신뢰로 피어나는 색채가 눈이 부셨다. 리츠가 작게 손짓했다. 마오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리츠에게 다가왔다. 왜? 입모양으로 묻는 마오의 손을 붙잡았다. 망설임 없이 조금은 거칠고 펜을 잡은 굳은살이 남은 그 손바닥에 깊게 입 맞췄다. 마오의 몸이 바짝 굳었다. 깊게 한 번, 가볍게 두 번. 마무리의 짧은 키스로 작은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리츠가 화사하게 웃었다. 좋아해, 마 군. 입모양으로 벙긋거린 그 마음을 마오는 대번 알아들었다. 확 불이 번졌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글씨 연습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리츠를 응시했다. 키스 받은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던 마오가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끄러움에 살짝 고민하는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리츠가 뭐라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리츠에게 키스 받은 바로 그 손바닥에 짧게 입 맞췄다. 질끈 감은 눈이며 온통 붉은 꽃 색으로 물든 뺨이 짙었다. 덜그덕. 리츠가 순간 놓칠 뻔 한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작게 입이 벌어졌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저를 보는 리츠를 보며 마오가 쑥스럽게 시선을 피했다가, 입을 우물거렸다. 나도. 입모양으로 벙긋거려 작게 속삭인 답변에 리츠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좋아해. 펑 터질 듯 가득한 감정이 온 몸에 가득 들어찼다. 길게 흩어진 호흡이 유독 행복했다. 둘 모두 잔뜩 붉은 색이었다. 상대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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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knights] 다른 이야기

2016. 11. 7. 00:30 from ENSTARS/NOVEL

[리츠마오] 목도리 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합니다. 리츠가 행방불명되었던 그 날의 이야기. 






 츠키나가 레오는 왕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비웃음 사기 딱 좋은 말일지도 몰랐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한없이 왕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검을 들고 자신의 기사들을 지키는 왕. 제일 선봉에 서는 사람. 이를 세우는 짐승. 젊은 사자. 한 번 나이츠를 포기한 경험이 있던 츠키나가는 자신의 유닛을 지키는 데에 특히 민감했다. 지킨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적으로 포함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킬 것이 있는 존재는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레오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일지도 몰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존재 모두의 위험을 인식했기에 현실과 이성의 어마어마한 괴리를 무시해버렸다. 가장 직관적으로, 본능에 충실했다. 그 상황에서 무기가 될 수 있을만한 것을 찾았다. 짚히는 것은 그닥 없었다. 결국 카메라 삼각대에서 카메라를 때어내고 다리를 모아 단단히 손에 쥐었다. 주머니에 비상용으로 손가락 두 마디 수준의 나이프는 있었지만,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되지 않기를 빌었다. 

 아비규환에 가까운 상황에서 다행인 것은 그들이 건물 내부, 그것도 윗층에 있었기에 일차적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고, 불행은 그렇기에 어디든 도망칠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좀비들은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했지만 몸에 인간의 기억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엘리베이터 쓰는 법 정도는 잊으라고! 레오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함께 있던 스태프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고 있었다. 귀가 쩌렁쩌렁 아팠다. 그 틈바구니에서 레오는 자신의 나이츠를 등 뒤에 숨기고 있었다. 아래로 도망칠수는 없으니 비상구를 통해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다가 물어뜯긴 사람은 그대로 적이 되었다. 비상구까지 가는 길의 가장 앞에서 달려드는 좀비의 머리를 박살낸 레오는 반 쯤 몽롱한 정신으로 서 있었다. 뇌까지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다. 기사들 하나하나의 표정같은 것은 당연히 볼 여유가 없었다. 


“리, leader. 이게 대체......”

“나도 몰라! 몰래카메라같은 팔자 좋은 것이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레오는 창문 아래로 보이는 광경에 침을 삼켰다. 제 등 뒤에 있는 기사들도 비슷한 광경을 본 듯 바짝 몸이 굳어 있었다. 머릿 속에 루카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아마 학교에 있을 터. 걱정이 심장을 옥죄었지만 지금 당장 달려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상구는 조용했다. 사람 비명소리와 뛰쳐올라가는 소리만 몇 개 섞여 있었다. 그들이 있던 층수가 6층. 옥상은 10층. 엘리베이터는 옥상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 조심한다면 무사히 끝에 다다를 수 있을 터였다. 비상용 헬기라도 뜨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옥상은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좀비가 쉽에 올라올 수 없는 공간. 레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파리하게 질린 저의 기사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레오의 표정이 그와 비슷하게 시퍼렇게 질렸다. 


“......릿츠는?”

“......”

“......”


 죽음같은 침묵이 내려왔다. 자욱하게 깔린 감정은 공포였다. 멍하니 세 사람을 바라보던 레오는 빠른 결단을 내렸다. 지금의 상황에서 망설임은 독이었다. 세 명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넋이 빠져있는 스오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 외였고, 나루는. 물론 신체능력은 나루가 뛰어날지도 몰랐고 상냥하고 어른스러운 성격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도 연하. 더군다나 내면은 여자아이였다. 끔찍한 경험은 최소화시켜주고 싶었다. 그 역시도 보호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끝내 마지막까지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하나밖에 없었다. 레오가 손에 들고 있던 삼각대 받침대를 던졌다. 끝에 묻어있는 좀비 살점이 끔찍한 현실감만 안겨주었다. 


“세나! 이거 받아. 혹시 모를 때, 부탁한다. 옥상으로 가! 구조를 기다려!”

“잠깐, 왕님 기다려. 어디 가려고?!”

“릿츠를 데리러! 데리고 갈 테니까 대피해 있어!”


 레오가 건내준 것을 세나가 꽉 움켜쥐었다. 자신이 넘겨받은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아라시가 반사적으로 레오의 어깨를 붙잡았다. 바깥은 위험했다. 리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지만 그 안에 뛰어들려는 레오의 모습은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리츠가 그곳에 있었다. 말리지도 떠밀지도 못하고 희게 굳어버린 아라시를 보며 레오가 한 번 웃었다. 제 어깨를 잡은 여왕의 손을 작게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나루! 금방 올테니까! 개구쟁이처럼 웃는 얼굴이 참 현실감 없게 밝았다. 


“이거라도 가지고 가, 왕님.”

“오. 땡큐, 세나! 이따 봐!”


 그런 레오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가장 잘 아는 건 세나였다.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인 츠키나가 레오. 위급상황에서 정신나간 천재 예술가의 면모를 접어둔 레오는 누구보다 불안한 주제에 믿음직스러웠다. 언제나 가장 앞에서 사람을 휘두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세나가 건낸 건 호신봉이었다. 어찌 품에 지니고 있던 모양이었다. 한 번 휘두르자 길게 뻗어져나온 호신봉의 끝에 손수건을 찢어 레오가 가지고 있던 잭나이프를 연결했다. 좀비들이 드글거리는 문 너머로 뛰어드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공포는 묻어있었지만, 그 안에 리츠가 있었다. 레오가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이유는 그 하나로 충분했다. 레오가 떠나자 세나도 움직였다. 나루 군, 카사 군. 가자. 두 사람을 위쪽 계단으로 떠밀었다. 가장 위험할 맨 뒤는 세나가 맡았다. 손에 쥔 것이 차갑고 무거웠다. 손에 찬 땀을 한 번 닦아내고 세나도 뛰기 시작했다. 위를 향하는 발소리가 메아리쳐서 얇게 겹쳐졌다. 우울한 하모니였다. 



 스튜디오는 처음 도망쳤을 때보다 엉망이었다. 물어뜯기는 사람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과 좀비가 어우러진 광경은 지옥도에 가까웠다. 아하하. 레오가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 광상곡과 장송곡이 어우려져 천둥처럼 소음을 뿜었다. 발걸음을 줄이고 사붓사붓 뛰는 움직임이 날랬다. 살아있다면 데려가고, 이미 죽었다면. 레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녹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광채였다. 


 좀비는 눈이 나쁘다. 레오가 깨달은 점이 몇 개 있었다. 시각도 후각도 형편없지만 청각이 뛰어났다. 소리를 내면 접근했고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면 상대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덤벼들었다. 규칙은 일정했다. 발걸음을 죽이고 레오는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좀비 두어마리의 머리를 꿰뚫기도 했다. 날에 묻은 뇌수의 흔적이 끔찍했다. 벌써 잭나이프의 날은 너덜너덜했다. 위험해. 레오는 어렵잖게 직감했다. 

 스튜디오는 꽤나 컸지만 리츠의 이름을 부르며 찾을수는 없었다. 릿츠, 어디야? 발걸음이 극히 조심스러웠다가, 우뚝 굳었다. 리츠는 좀비들 틈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누군가와 함께. 멀쩡히 대화를 하고 있었으나 좀비들은 습격하지 않았다. 리츠의 뒷모습에 불쾌한 기색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릿츠? 레오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그러니까, 안 간다고 했을텐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시는 지 눈치채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별개 아냐? 난 남을 거야. 멋대로 하던 말던, 나랑 내 주변인들에게 피해 끼치지 마.”

“연약해지셨군요, 사쿠마 님.”


 뭐? 되묻는 목소리가 짜증스러웠다. 더 이상 참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레오가 성큼 접근했다. 


“릿츠. 여기서 뭐 해?”

“왕님.”


 두 흑발이 레오를 돌아보았다. 요요한 적안은 썩 빼닮아있었다. 리츠 쪽이 훨씬 아름답게 생겼지만 언뜻 보면 혈육이라 생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닮아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었는데. 상대를 잠시 쓸어보던 레오가 리츠에게 고개를 돌렸다. 냉정한 녹안에 뺨에 묻은 핏자국까지 그의 분위기를 꽤 흉흉하게 만들고 있었다. 리츠가 조금 곤란한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레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리츠에게 말을 걸었다. 


“가자. 모두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응.”

“안 됩니다, 사쿠마 님.”


 붙잡아오는 하위 혈족을 리츠는 짜증스럽게 떨쳐냈다. 둘의 가치를 매기자면 당연히 눈 앞의 왕이 더 높았다. 왕에게 달라붙으려는 좀비들을 쫒아내며 리츠가 레오에게 가까이 붙었다. 나이츠의 다른 멤버들도, 무엇보다 여기 없는 마오가 걱정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오에게 가고 싶었다. 리츠가 드러내는 초조한 기색을 레오는 읽었고, 낯선 흡혈귀는 읽지 못했다. 레오가 리츠를 제 등 뒤로 넘겼다. 걱정에 차 있는 기사를 지키는 건 왕의 역할이었다. 기사가 흡혈귀이고 왕이 인간인 것은, 둘 사이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릿츠는 넘겨주지 못하겠는데?”

“설마 인간입니까?”


 흡혈귀가 황당한 기색을 드러냈다. 날카롭게 빛나는 송곳니를 레오도 보았다. 좀비가 등장한 세계에서 흡혈귀가 있다는 건 이상한 문제도 아니었다. 거기에 레오는 리츠가 흡혈귀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 그를 나이츠에 합류시킬 때부터 리츠는 왕에게 사실을 알리고 입단했으니. 다만 제 앞의 흡혈귀가 리츠의 자유를 속박하려드는 적이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손에 들고있던 호신봉을 상대에게 겨눴다. 좀비의 피와 살점이 묻은 잭나이프가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매섭게 빛나는 건 레오의 눈이었다. 

 이를 세우는 왕과 먹이라는 인식이 강한 인간이 달려드는 것을 응시하는 흡혈귀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리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랫동안 피를 빨지 않고 햇빛 아래에서 활동한 사쿠마 형제는 많이 약해졌다. 눈 앞의 흡혈귀는 리츠보다 한참은 급이 낮았지만, 그런 녀석조차도 레오의 안전을 보장하며 물어뜯을 자신이 없었다. 레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가 갈렸다. 결국 레오의 어깨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왕님. 괜찮아.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하아?”


 레오가 미간을 구겼다. 불만 가득한 녹색 눈을 차마 당당하게 마주보기 어려워, 리츠는 시선을 피했다가 겨우 다시 마주했다. 레오는 화가 난 기색이었다. 분노로 타오르는 붉은 녹빛은 리츠도 어려웠다. 이런 레오는 타인에게 영향력이 강하다. 특히 나이츠에게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금방 돌아올게. 해야 할 일... 이고.”

“릿츠. 넌 지금 나한테 자신의 기사를 넘기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

“......그냥, 기사가 잠시. 외도하는 걸 용서해 준다고 생각해 줘.”


 변명이었다. 자의보다는 타의로 떠나는 걸 리츠도 레오도 알았다. 여전히 분노의 기색이 지워지지 않는 레오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덧씌워졌다. 자신의 무력감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리츠가 제 옷자락을 쥐어뜯었다가, 끝내 한 마디 부탁했다.


“마 군을 조금 부탁해도 괜찮아?”

“그래.”

“스 쨩이라던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멀쩡하겠지?”

“당연히.”


 리츠가 웃었다. 그는 자신의 왕을 신뢰했다. 흡혈귀가 따르기로 결정한 왕이었다. 그에게라면 소중한 마 군의 안전도 아끼는 동료들의 안전도 맡길 수 있었다.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레오가 손을 뻗어 리츠의 뺨에 짚었다. 구겨진 표정이 마지막으로 담은 것은 결국 잠시 떠날 기사의 걱정이었다. 


“너야말로, 무사히! 늦지 않게 와라, 릿츠!”

“응.”

“너무 늦으면 다음 곡에서 릿츠 파트를 왕창 줄일거니까!”


 릿츠가 주는 인스피레이션의 분량이 적잖아! 투정같은 말을 하면서 표정은 여전히 왕이다. 리츠는 웃었다. 많은 감정을 품고, 무엇보다 무력감에 분노하고 있으면서도 레오는 리츠를 이해해주었다. 리츠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편하게 떠나도 괜찮도록 많은 것을 짊어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좀비가 점령해버린 이 나라에서 타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기에 리츠도 마지막은 웃기로 했다.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떠나는 흡혈귀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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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