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는 그 법칙을 맞추는 세 명의 왕이 있다.
처음은 물, 중심은 하늘, 끝은 땅.
그들을 각자 생명과 삶과 죽음이라 칭하니,
모두 인간에게 녹아들어가 우리의 곁에서 지금까지도 살아가고 있다......
*
유독 건조한 날이었다. 물론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은 터라 공기에 물기가 가득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닷가 근처인 터라 여기까지 오면 젖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는데. 카오루는 제 뺨에 닿는 따가운 느낌에 손끝으로 몇 번 눈가 아래를 눌러보았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은근한 불쾌함에 카오루가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언제나 좋아하는 바다였는데, 오늘따라 미묘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쩌면 하루종일 그를 괴롭혔던 불운 탓일지도 몰랐다. 카오루가 처음 눈을 떴던 이른 시간부터 지금까지 오늘은 손에 꼽힐 정도로 재수 없는 날이었다. 보고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지 않은 대화를 하고 겪고 싶지 않은 일까지 겪었다. 여성의 곁에서 즐거움을 주고받는 것보다 차라리 편안한 휴식을 원해서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이곳에 온 것인데, 바다까지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다니.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카오루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래도 다른 곳에 가서 또 별 일을 겪는 것보다는 여기 남아있는게 제일 낫겠다 싶어 카오루는 늘 앉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매끈한 바위에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있기는 했지만 표면이 아직 뜨끈뜨끈했다. 언제나 해 질 무렵에 와서 느끼지 못했는데, 그림자가 바위를 덮은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덥다. 늘 하는 생각을 또다시 하며 청년이 길게 늘어져 앉았다. 가볍게 눈을 깜박였다. 파란 바다와 그보다 조금 더 옅은 푸른색의 하늘을 보고 있다보면 천천히 넋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 기묘한 몽롱함을 카오루는 꽤 좋아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눈 앞의 색채에 빠져있으면 되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제안이 나오기 이전부터 이곳은 카오루만의 비밀장소였다. 매일 발걸음하게 된 것은 이제 한 달 조금 덜 되었지만.
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또 생각해버렸네.
역시 오늘 하루 되는 일이 없다며 카오루가 엷게 미간을 좁혔다. 약 삼 주 전부터 슬그머니 말이 나왔던 제안은 이제 확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에 반박할 마음이 아주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좋은 선택지가 없다는 말에는 카오루 본인도 동의하고 있었다. 덕분에 요즈음은 카오루가 아무리 밖으로 나다녀도 제재가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우스운 일이었다. 혹시 도망갈까 눈에는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으면서. 청년의 입가에 기묘한 비웃음이 걸린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
하늘과 바다뿐이던 시야에 불쑥 생명이 끼어들었다. 희고 푸른, 방금까지 보고 있던 풍경과 퍽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고스란히 뽑아 사람으로 빚었다면 꼭 이런 사람이리라. 첫 눈에 보아도 곱게 웃는 모습이 참 어여쁜 사내였다만, 언제나 이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던 카오루에게는 참 당황스러운 존재였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낯선 사람의 모습에 카오루는 찰나의 시간 고민했다. 경계 혹은 회피. 상대가 남자라는 점에서 선택의 폭은 퍽 좁았다.
“어, 그래. 안녕...?”
“만나서 「반가워」요. 쭉 말을 「걸고」 싶었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방긋 웃는 모양새가 진정으로 퍽 반가워보여서, 카오루는 진심으로 의문을 품었다. 하는 말을 보아하니 이 사내는 카오루가 이곳에 매일 걸음한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카오루는 이곳에 매일 왔던 몇 주 째. 아니, 그보다 더 전에 이곳을 발견하고 비밀장소로 삼아 종종 걸음하던 때부터 한 번도 이 자를 본 적 없었다. 애초에 탁 트인 해변이고, 나무 몇 그루 심어져있기는 하지만 그리 오래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이 결코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카오루가 인기척 하나 못 느낄 정도로 둔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의아함을 느끼는 카오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벙글 웃는 표정의 사내는 그대로 카오루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름」이 뭔가요?”
“하카제 카오루.”
제 이름을 입 밖에 내뱉은 뒤에야 문득 아차 싶었다. 딱히 말을 해 줄 생각도 없었고, 도리어 입장이나 상황만 따지자면 경계의 대상에 가까웠는데. 더군다나 이름을 말해주면 언제나 주변에 은근히 흐르는 분위기도 싫었다. 그런데 그 모든것을 무장해제시킬 정도로 상대의 분위기가 독특했다. 그에 전부 휘말려버린 기분이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문 카오루가 은근히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하얀 얼굴에는 변화 없이 느긋한 미소만 걸려있었다.
“「카오루」군요. 저는 「신카이 카나타」라고 해요.”
“신카이 군?”
“괜찮다면 「카나타」라고 불러주세요.”
“카나타 군.”
네. 그리 말하며 방긋 웃는 카나타의 표정이 유독 즐거워보여 카오루는 조금 멋쩍게 뒷목을 긁적였다. 경계하는 쪽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말랑말랑한 사람이었다. 온유하게 흐르는 분위기는 카오루가 좋아하는 바다를 닮아있어서, 은근히 누그러지는 구석도 있었다. 카오루는 그제야 제 앞에 주저앉은 카나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얇은 옷을 몇 겹이고 겹쳐입은데다가 걸치고 있는 장신구는 산호나 진주류. 신발은 신지 않은 맨발에 결정적으로 막 바다 속에서 빠져나온 마냥 온통 젖어있었다. 분위기 뿐만 아니라 하고 있는 차림새도 만만찮게 특이했다. 이걸 이제서야 발견한 스스로에게 어이없어하며 카오루가 눈을 껌벅였다. 그런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곱게 웃었다. 카오루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수려한 외형을 자랑하는 미남자였지만, 카나타는 그야말로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아름다운 존재에게는 누구나 약해지는 법이지. 카오루는 적당히 제 태도를 납득했다. 남자라는 점이 매우 안타깝기는 했지만 말이다.
“카오루가 줄곧 「보고」 있는 걸 저도 「보고있었」답니다... 그래서 「말」을 걸고 싶었어요.”
오늘은 유독 「일찍」 와 줬네요. 「기뻐」요...♪ 그리 말하는 카나타의 말을 들으며, 카오루는 일단 제일 궁금한 부분의 말꼬투리를 잡아보기로 했다.
“보고 있었다니, 어디서?”
카오루가 진심을 담아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카나타 정도의 사람이 숨어 사람을 지켜볼만한 곳은 없다시피했다. 모래색 눈을 깜박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하얀 손가락으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카오루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보이는 건 파란 바다뿐이었다.
청년이 잠깐 눈을 깜박였다. 바다잖아. 저기 어디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 텀 쉬고 난 뒤에야 카나타가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카오루가 눈을 둥글게 떴다.
“바다에서 보고 있었다는 거야?”
“네. 「바다」에서 보고 있었답니다...”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카오루의 표정이 일순 곤란함으로 물드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나타는 그저 걱정없는 얼굴로 곱게 웃었다.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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