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마오 조금.
그 외에는 노커플링으로 썼지만 보기에 따라 커플링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01. 스오우 츠카사
그저 종이를 쥐고, 반 쯤 농담삼아 허락한다는 말을 내뱉은 것 뿐이었다. 고작 그 한마디에 세상이 완전히 뒤집혀버릴 줄 알았더라면, 아예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외면해버렸을 터였다. 읽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시해버렸을 터였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을 뒤집기에는 너무 늦은 후회였다. 츠카사는 불안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이츠의 선배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의 위안이었지만, 동시에 선배들까지 휘말리게 해버렸다는 강력한 죄책감이 츠카사를 짓눌렀다. 소년의 표정이 엉망이 되었다.
그들과 같은 곳에 휘말린 사람은 꽤 되었다. 대략 스무 명 가까이 되어보이는 인원들의 면면은 다들 낯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그에 불안과 안심을 동시에 느끼며 츠카사는 어쩔 줄 몰라 절절맸다. 이런 상황에 여유로운 사람 쪽이 이상한 것일 터였다. 소년은 동시에 제가 주워 읽었던 종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아, 내용이 변해 있었다. 눈으로 그것을 훑어내린 소년의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곁에서 오만상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세나였다.
“뭐야? 카사군. 변한 거 있어?”
“네, 네... 네...”
“이리 줘 봐.”
그리고 낚아채가는 손길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지만 츠카사는 그것을 신경 쓸 정신도 남아있지 않았다. 패닉이 되어 파랗게 질려가는 후배를 다독인 것은 아라시였다. 천천히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에 매달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츠카사의 모습에 나이츠의 다른 멤버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츠카사는 나이츠의 이름에 어울리는 강단있는 후배였다. 그런 츠카사가 이렇게나 불안해하는 것을 보면 이곳이 적잖게 위험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또, 그런 위험한 곳에 선배들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이 죄악감이 되어 츠카사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 역시도. 셋의 시선이 세나에게 쏠렸다. 정확히는, 세나가 읽고 있는 작은 종이쪽지에.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작은 쪽지를 몇 번이고 읽어내린 세나가 곧 세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펼쳐주었다. 시선이 몰렸다.
척박한. 죽고 죽이는. 소원. 현재 11명. 종이쪽지에 빼곡하게 쓰여져있는 내용은 내용만 말하자면 단순했다. 이곳은 그들이 살고 있던 그곳과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암시하며,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단, 한 번 소원을 빌면 다음 사람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다. 즉 누군가 한 사람을 죽이고 이 세계에서 소원을 빌었다면 다른 사람이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두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지급되는 것은 총 한 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무기조차도 압도적으로 부족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소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죽여야 하는 사람이 11명. 종이쪽지를 찢으면 총이 나타나며 게임 참가였다. 이 무슨. 셋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각자의 생각이 빠르게 얽혔다. 그리고 그 중 제일 먼저 상황을 정리하고 마음을 굳힌건 그들의 왕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근처의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린 왕이 손을 내밀었다.
“세나, 그거 이리 줘.”
“왕님이 뭐 하려고?”
그리 말하면서도 세나가 순순히 레오에게 쪽지를 건냈다. 쪽지를 받아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던 레오가 시선을 돌려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감정에 눌려 반 쯤 울고 있는 어린 후배를 보며, 어린 기사를 보며 왕은 결단을 내렸다. 아름다운 음악을 자아내던 하얀 손가락이 망설임없이 종이를 찢었다. 잘 빠진 검은 철덩어리가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나이츠가 경악을 채 표하기도 전에, 총구가 근처에 있는 타인에게 향했다. 녹색 눈이 차게 굳었다.
02. 나루카미 아라시
이게 무슨 일이람. 아라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레슨이 있었던 터라 나이츠의 다섯이 모여있었고, 그 중 츠카사가 바닥에 놓여진 종이쪽지를 발견했었다. 다른 세계로 초대하고싶으니 허락해달라는 종이를 보며 츠카사가 별 생각 없이 허락한다는 말을 했고, 그 뒤로 이세계행. 나이츠의 멤버들과 함께 있을 때 온갖 기행이 일어나는 것은 그 일부 중 하나인 아라시에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 정도 스케일이면 적응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굉음에 가까운 총성이 들렸다. 한 번 총을 쏠 때마다 한 사람씩 쓰러졌다. 아라시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차라리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었다. 총을 쏘며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게 타인이라면 순수하게 공포에 질리거나 분노에 차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츠키나가 레오만 아니었더라면. 나이츠의 킹이 아니었다면.
무표정한 표정이었지만 일견 괴로워보인다고. 아니, 틀림없이 괴로워하고 있다고 아라시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패닉에 빠진 츠카사를 끌어안았다. 레오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세나나 리츠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았다. 아라시도, 글쎄. 츠카사를 달래면서 아라시 역시도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쉬이, 츠카사쨩. 괜찮단다... 말로는 달콤하게 어르고 있었지만, 아라시 스스로도 의문을 품었다. 정말로 괜찮은가? 확신할 수 없었다.
레오는 그가 찢어서 총을 받아냈던 것과 같은 종이쪽지를 들고 있는 사람 위주로 쏘아죽였다. 그리고 곧장 그것을 빼앗고는 했다. 그 몸놀림은 무대 위애서 춤을 추는 것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중간중간 반격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다들 겁에 질려있어 몸놀림이 둔했다. 레오 쪽이 더 빨랐다. 막 11명째의 이마를 쏘아버린 레오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나이츠를 바라보았다. 피 묻은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총을 쥐지 않은 쪽 손을 뻗어 츠카사를 가리켰다.
“스오를 우리가 있던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뭣, leader...?!”
아라시에게 끌어안겨 달램받던 츠카사가 고개를 쳐들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당혹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순식간에 형태를 감춰버린 츠카사의 빈 자리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멍하니 빈 품을 보던 아라시가 고개를 쳐들었다. 왕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아라시는 보았다. 진심으로 안도하여 풀어지는 레오의 표정을.
왕님. 아라시가 그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레오는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을 다시 죽이기 시작했다. 츠카사쨩은 이제 무사한데. 왕님, 어째서? 아라시는 진심으로 의문을 품었다. 레오가 절박해하고 있다는 것을 남은 나이츠는 모두 알고 있었다. 하나, 둘... 본능적으로 아라시는 남은 사람들과 레오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흔히 말하는 여자의 직감과 같은 종류의 육감이었다. 12명. 레오는 바로 다음 소원을 빌 생각이었다.
총알이 다 떨어지면 빼앗은 종이를 찢어 총을 불러오며, 레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조리 쏘았다. 남은 것은 피비린내와 화약냄새와 시체뿐이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나이츠가 전부였다. 레오가 그대로 몸을 숙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꼴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구역질하듯 입을 틀어막은 왕을 보며 기사들이 달려가 그 주변을 감쌌다. 왕님, 괜찮아~? 다친곳은 없어, 왕님?! 이... 완전 짜증나! 셋 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용서없이 왕에게 소리질렀다. 자신의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왕이 억지로 웃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손을 뻗어서, 한 명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너도 돌아가, 나루.”
“잠깐, 왕님?”
“우리도 곧 돌아갈 테니까 말이지? 왕과 기사들이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갈테니까! 길을 닦아놓고 있도록 해...♪”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아라시가 레오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하지만 덤덤한 표정의 왕이 내뱉는 것이 더 빨랐다.
“나루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줘.”
눈을 감았다 뜨니 다시 학교의 복도였다. 서서 꿈이라도 꾼 걸까. 황망하게 고개를 돌리니 저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츠카사와 눈이 마주쳤다. 주먹을 쥐었다 펴니 손에 끈적한 남의 피가 조금 묻어있었다. 왕의 옷자락을 잡았을때 묻은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퀸과 룩이 당혹을 교환했다. 그럼에도 반드시 무언가 행동해야만 했다.
03. 사쿠마 리츠
이 끔찍한 곳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더라. 리츠가 잠깐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빠졌다. 짧은 사색만으로도 수마가 다가와 리츠를 감쌌다. 안 돼, 지금 잠들면... 미간을 살짝 좁히며 그것을 떨쳐낸 리츠가 깊게 숨을 삼켰다. 이곳에 온 그 순간 판단하여 나이츠 이외의 사람들을 죽이고 츠카사와 아라시를 돌려보낸 왕의 선택은,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재적인 판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루에도 몇 명씩, 갈수록 빠르게 소원을 이루기 위해 죽여야 할 인간의 숫자가 늘었다. 끔찍했다. 셋 모두 편안하게 잠드는 시간조차 적었다. 리츠마저도 둘과 함께 있지 않다면 눈을 붙이기가 무서웠다. 선잠을 잤다가 깨는 횟수가 늘어있었다.
온 지 하루이틀이면 절반 이상이 죽어나가는 이곳에서 적어도 삼주일 넘게 살아남은 나이츠는 틀림없이 베테랑으로 통했다. 리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 몫의 총을 확인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정보가 여럿 있었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개인전을 지향했지만, 팀원 모두의 동의 아래에 팀전도 가능했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죽인 사람의 숫자는 개개인으로 계산되었지만, 팀이 되면 팀원들이 각자 죽인 숫자를 합쳐서 셈할 수 있었다. 물론 소원도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은데다가 팀원 모두의 동의 아래에 소원 하나를 이룬다는 이유 때문에 팀을 이루는 쪽은 꽤 소수였지만.
리츠는 이제 눈 감고도 다룰 줄 알게 된 소총을 확인했다. 머릿속에 울리는 카운트가 빠르게 올라가고있었다. 팀에 소속되면 머릿속에 울리듯이 느껴지는 그것은 팀이 죽인 사람의 숫자를 의미했다. 세나와 레오가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이제 곧 목표숫자에 도달했다. 그리고 아마 다음 이 세계를 탈출할 사람은, 리츠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미리 할 필요 없는 생각이었다.
풀숲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물 한 마리 살지 않는 이곳에 생명체라고는 인간 뿐이었다. 그리고 세나와 레오 외에는 모조리 적이겠지. 리츠가 다시 한 번 제 총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중얼거리는 목소리 역시도. 상상 이상으로 무방비했다. 아마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거겠지. 끌려올 때는 종이쪽지 근처의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오니까, 이 근처에 또 사람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환영이었다. 죽이는 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남는 것은 그저 마음에 남는 끈적한 피 뿐이었다.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타인과 대화하는 것은 아니고, 혼잣말의 일종 같았다. 이곳에 온 사람들의 절반 정도는 저 증상에 시달렸다. 중얼거리면서 상황을 정리하거나 현실을 부정하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 없지만, 문제는 다른 쪽이었다. 붉은 눈동자에 엷은 당황과 부정이 얽혔다. 그럴 리 없어. 그리 생각하면서도 더더욱 숨을 죽이고 목소리에 집중했다. 강하게 총을 움켜쥔 손이 작게 떨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
“틀림없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마 군?”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 상대의 신원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츠는 진심으로 울고 싶다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완전히 기척을 감추고 있던 나무 뒤에서 천천히 일어나 섰다. 붉은 눈동자가 탁하게 빛났다. 일견 비참함마저 맴도는 얼굴로, 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마주했다.
“마 군.”
“......리츠? 아니, 잠깐만. 왜 리츠가 여기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왜 마 군이 여기에...”
왜, 여기에. 이 비참하고 끔찍한 장소에. 리츠가 말꼬리를 흐렸다. 손에 쥐고 있는 총을 놓지 못하는 것은 이곳에 온 뒤 생기게 된 버릇이었다. 마오의 황망한 시선이 리츠의 지친 얼굴을 향했다가, 그가 쥐고 있는 총에게 향했다가, 다시 리츠의 얼굴로 향했다. 등골부터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리츠는 울 것 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왜 마 군이 여기에 있어?”
“마코토가 우연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리츠 너, 손에 그...”
“중요해! 무엇보다 중요하단 말이야!!”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고 결국 울음을 터트려버리는 리츠를 마오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츠? 당혹감 섞인 부름에 답하지도 못하고 리츠는 제 눈물도 닦지 못하며 울었다. 큰 소리를 내면 존재를 들켜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같은 공포 탓에 숨을 죽인 채 짠물을 몇 번이고 삼키고 삼키며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구슬프게 우는 리츠는 처음이었다. 마오가 다가가 리츠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품에 안았다. 끌어안아 등을 쓸어주는 손길은 너무 평소의 소꿉친구의 그것이었기에, 리츠는 더더욱 슬퍼졌다. 이런 거, 돌아가서 받고 싶었는데. 나쁜 꿈은 모두 끝난 현실에서 받고 싶었는데.
“왜... 왜 여기 있어, 마 군...”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람을 죽여야만 했다. 피폐한 곳이었다. 나이츠에서 했던 역할 그대로 리츠는 실전보다는 작전을 짜는 쪽이었다. 세나와 레오는 죽이고 빼앗은 무기도 몇 개씩 들고있지만 리츠는 고작 소총 하나뿐인 것도 그 탓이었다. 자기가 짠 작전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숨이 막히는 광경이었다. 죽이고 있는 세나와 레오가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로 가까스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오에게서는 아무런 혈향도 나지 않았으니까. 틀림없이 같은 인간의 피일텐데도 이곳에서 사람을 죽여 나는 혈향은 늘 구역질이 나서 잘 알 수 있었다. 마오 뿐만 아니라 트릭스타가 오게 됬다면 더더욱 상황은 최악이었다. 마오가 그들을 두고 가려 할 리 없으니까. 유우키 마코토가 있다면 세나에게도 치명적이었다. 트릭스타의 존재가 셋만 남은 나이츠에게 위협적이었다.
리츠가 총을 바닥에 떨구고 그대로 팔을 들어 마오의 등을 끌어안았다. 눈물젖은 뺨을 그 어깨에 묻었다. 곧, 곧 돌아갈 수 있었는데. 마 군이 있는 현실에 돌아갈 수 있었는데. 세나와 레오와 소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셋 다 암묵적으로 다음에 돌아갈 사람을 리츠로 정해놓고 있었다. 그건 나이와는 별개로 학년이 어린 탓일지도 몰랐고, 리츠가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고, 나이츠의 킹과 비숍이 나이트에게 주는 배려일지도 몰랐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곧 돌아갈 사람이 리츠라는 점이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서 츠카사와 아라시와 합류해 두 사람을 돌려낼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리츠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마 군이 이곳에 있다면. 이사라 마오가 이곳에 있다면.
“갈 수 없잖아...!”
두고 갈 수 없었다. 이 상냥한 소꿉친구가 이 세계에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상냥함이 독이 되어 마오의 목을 조를것을 안다. 두고 갈 수 없다. 그러나 돌아가야한다. 리츠는 울 수밖에 없었다. 세나와 레오가 자신을 보내주기 위해 각자 스물이 넘게 죽였다. 리츠도 벌써 열은 가까이 죽였다. 이 상황에서 이제 와 가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제 손에 죽은 사람들 탓에라도 그랬다. 두고 갈 수 없는 사람이 이곳에 있는데,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명확한 명제가 싫어서 리츠는 울었다. 제 소꿉친구의 품에 안겨 한참을 더 울 수밖에 없었다.
04. 세나 이즈미
빌어먹을. 세나는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등에 업은 온기가 갈수록 무거워지는 게 제 힘이 빠져서인지 상대의 힘이 빠져서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제발 전자이기를 소망하며 세나는 달음박질쳤다.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세나는 이미 이곳에서 일여년 가까이 살아남은 프로 중의 프로였다. 숫자와 책략에서 밀려 부상당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지리부터 그들이 더 익숙했다. 세나는 다시 한 번 레오를 고쳐 업었다.
떠날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을 떠나고, 남은 것은 레오와 세나뿐이었다. 이제 남은 인간의 숫자가 얼마 안 남았는데. 세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마 자신들이 빌 수 있는 소원이 마지막 소원일 터였다. 이제 그 이상의 인간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즉, 이건 마지막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의 기회였다. 세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소원은 하나 남았고 사람은 둘 남았다. 하나의 소원으로는 한 명의 사람만 넘길 수 있다고 반 년 전에 확인을 마쳤다. 어떻게 할 것이냐 세나는 레오에게 물었었고, 레오는 웃으며 방도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썩 믿음직스럽지는 못한 대답이었지만, 왕을 믿는 것밖에 답도 없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그 신뢰도 밑도 끝도 없이 밑바닥치는 기분이지만. 세나는 바닥에 점점이 떨어지는 붉은자국을 보며 진저리쳤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세나가 레오를 내려놓았다. 당연하지만 이곳에 부상을 치료할 방법같은 것도 없다. 그러게 왜 움직여서는! 완전 짜증나! 세나는 작게 불평을 내뱉었다. 큰 소리를 냈다가 위치라도 발견되면 재수없는 수준으로는 끝나지 않을 일이 일어날 터였다. 하지만 제 기사의 바늘같은 불평을 들으며 왕은 정신을 차렸다. 허리에서는 꿀럭꿀럭 피가 토해지고 있었다. 이곳에 온 뒤로 몇 천번이고 보고 또 보아 결국 무뎌진 광경이기는 하지만 그게 제 왕의 것이라는 점에서 끔찍했다. 세나가 오만상을 쓰며 레오를 노려보았다. 왕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마냥 예쁘게 웃었다.
“아하하, 아프다!”
“당연히 아프지! 조용히 해, 왕님!”
허리에 총을 맞았으면 당연히 후방으로 빠지는 게 상식 아니야? 왕님 바보야? 여기에 상처 치료 할 것 없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세나가 다다다 쏘아붙였다. 총을 맞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작 몇 놈 더 죽인다고 날뛰어서 저가 죽을 위기에 처한 레오가 못마땅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못마땅했다. 그런 세나의 모습을 보며 레오는 마냥 웃기만 했다.
하지만 웃는 얼굴에 비해 안색은 창백하다. 상처에 손을 얹고 있었지만 지혈은 커녕 손이 피에 물드는게 끔찍하기만 했다. 고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세나가 레오의 상처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왕님? 세나의 질문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은 질문이야, 세나! 사실 방법은 옛날부터 생각해뒀지!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왕 덕분에 고개들어 그 얼굴을 보았다. 웃고 있으나 녹색 눈이 싸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순간 이유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되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이 눈.
레오가 제 손에 들린 총을 내밀었다. 처음 종이를 찢어 만들어낸, 레오의 손에 가장 익은 총이었다. 몇 번이고 그를 구해주고 그보다 더 많이 죽인 총. 세나가 잠깐 그것을 내려다보고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왕님?”
“날 쏴라, 세나.”
왕님 정신 나갔어? 반사적으로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세나는 깨달았다. 저 눈.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총을 꺼내 사람을 처음 쏘았을 때의 눈이다. 그걸 눈치채는 순간 짙은 예감이 몰려왔다. 결국 세나가 지고 레오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것이라는 예감. 그럼에도 그것을 부정할수밖에 없어서, 세나가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헛소리 작작해.”
“농담 아니야, 세나! 네 말대로 이 몸상태면 못 살게 뻔하잖아? 부족한 숫자의 인간은 내가 채우고 왔어. 다행이지, 우하핫...! 이제 하나 남았다!”
그제야 세나는 나이츠의 킬카운트를 확인할 정신이 들었다. 999명. 언제 이렇게 찼지. 모르고 있었다. 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정신나간 왕은 허리에 총을 맞은 순간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인가. 그래서 일부러 숫자맞춰 죽이기 위해 날뛰었다? 그리고 지금 과다출혈로 사망직전? 지금 장난해? 짙은 우울과 고생으로 상했지만 그럼에도 빛이 나는 세나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그 정도 반응이야 당연히 예상하고 있던 레오는 그저 웃기만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호쾌한 미소였다. 허리에 울컥 또 피가 터졌다.
“세나, 나의 나이츠. 내가 선택한 내 비숍! 세나라면 잘 알고 있을텐데.”
“시끄러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왕님. 지혈에 방해니까.”
“이대로 있어봤자 상대에게 킬카운트 하나 높여주는 것 뿐이야.”
날 쏘고 소원을 빌어.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빌어라, 세나. 이건 명령이야. 칼보다 서걱하게 잘려나가는 말에 세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 오게 된 뒤 별별 생각을 다 했지만, 처음으로 생각했다.
정말 죽고 싶다고.
05. 츠키나가 레오
악몽을 꾸었다. 청년은 어스름하게 빛이 들어오는 커튼 사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베개 품에 그대로 얼굴을 처박았다. 몇 년 전의 꿈이었다. 제발 꿈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곳에서의 시간 이후 돌아와보니 고작 몇 달이 지나있었다. 차라리 그 정도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시간이 그대로 흘렀다가는 실종신고로는 안 끝나는 대사건이었을 터이니.
달력을 보고 나니 저가 왜 그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리는 조금씩 잊어가도 몸은 아직 잊기에 짧은 시간이었던지, 정확하게 시기를 짚고 있었다. 헛웃음을 그리며 달력에 표기된 날짜를 쓸어내린 청년이 옷을 차려입고 바깥으로 나섰다. 내리쬐는 볕이 뜨거웠다.
나이츠 멤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모이고 있을 터였다. 아마도 올해에 제일 먼저 도착한 건 자신인 모양인지, 암묵적 약속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년은 은방울꽃밭 앞에 주저앉아 길게 숨을 내뱉었다. 숨이 썼다. 마냥 곱기만 한 꽃이었지만 꽃씨를 심기 전 이 꽃밭 속에 깊고 또 깊게 무엇을 묻어놓았는지는 나이츠 외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꽃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니.
“왕님, 진짜 거지같지 않아?”
아무래도 거기서 죽으면 여기서도 잊혀지는 거더라고. 진짜 짜증나. 코에 닿는 향기에 코끝을 찡그리며 청년이 땅을 쓸었다. 유언은 짧았고 유품은 작고 무거웠다. 그가 죽여달라 내민 총 하나 말고 남긴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세계에 남은 츠키나가 레오의 흔적은 없었다. 같이 세계에 떨어졌던 나이츠의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그 무엇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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