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토모] 순간

2016. 8. 28. 21:29 from ENSTARS/NOVEL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그리고 비참에 사로잡히는 건 오래 간다. 마시로 토모야는 그 절절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어지는 숨소리 사이사이에 한탄이 담겨있었다. 내가 왜, 정말 미쳤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미약하게 헛웃음마저 삼켰다. 동경으로 시작해서 실망으로 끝났던 마음은 그래도 미운정으로 끝날 줄 알았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사랑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마음은 마시로 토모야의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있었다. 중학교 때 겪었던 풋풋한 첫사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사랑이었다.


 선배를 사랑하지 않는 후배를 연기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사랑하기 이전의 자신이 기억나지 않은 탓이었다. 히비키 와타루가 비범의 영역에 손이 닿은 인간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사실 어느 정도 이미 들통나 있을 거라고, 토모야는 예상하고 있었다. 가끔 저에게 향하는 시선이 그랬다. 평범하게 히비키 와타루를 사랑해버린 마시로 토모야에게 향하는 별 수 없는 체념, 미약한 동정. 대충 그런 감정들. 전혀 고맙지 않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어서 눈 감고 넘기는 것들이었다. 그 감정들이 가득 차서 토모야가 견디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고백을 하는 순간이 아닐까. 최악의 고백이 되겠지만. 토모야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뭐, Amazing!을 외치며 당장 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단 참는 수밖에 없었다. 히비키 나름의 배려라고 저 좋을 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어디야. 해탈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달기보다는 쓴맛에 가까운 사랑임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대체 뭘까. 토모야는 진심으로 저 자신의 마음이 궁금했다. 파고들어봤자 결론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었지만 매일 밤 침대에 누워서 궁리하고는 했다. 외형, 물론 아름다웠다. 무대에 선 그를 보고 유메노사키의 입학을 각오했을 정도로 수려한 미남자였다. 하지만 와타루에게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만 해도 토모야의 이성취향은 평범한 편이었고,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남자는 남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외형은, 그래. 사랑에 빠진 지금에서야 유혹적인 부분이었다. 성격? 세상에. 그 성격 탓에 사랑에 빠진다면 토모야는 진심으로 자신의 취향을 고민해보고 싶었다. 매일의 괴로움과 비명과 도주의 연속인 게 누구의 탓인데. 토모야는 성격을 떠올렸던 자신을 한 대 때려주었다. 뺨이 얼얼했다. 

 그럼 뭔데? 머릿 속의 토모야가 불평했다. 나도 모르지. 입 밖으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베개를 뒤짚어 얼굴을 덮었다. 숨이 막혔다. 그 가쁨을 기꺼이 받으며 토모야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는데도. 싫은 점으로 꼽히는 게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좋아했다. 사랑하고 있는 탓이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포기한 게 몇 가지 있었다. 히비키 와타루에게서 이기는 것은 그 중 하나였다. 그 전까지는 바락바락 기를 쓰고 와타루가 봐 준다는 조건 하에 가끔 이길 수도 있기는 했는데. 토모야는 속으로 불평을 꾹꾹 삼켰다. 와타루의 실망한 표정과 자존심을 저울질 해 볼 때, 종종 자존심이 지고는 했다. 그리고 패배한 자존심을 끌어안고 별 수 없이 와타루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밖에 없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웃는 얼굴을 보면 비참할 만큼 기분이 나아졌다. 


 와타루는 그런 토모야를 조금 심심해하는 기색이었지만. 토모야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히비키가 토모야에게 질려 멀어진다면 이 사랑을 포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시 원래대로의 마시로 토모야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아마도. 히비키 와타루를 사랑하는 마시로 토모야는 본인 스스로도 가끔 버리고 싶은 자신의 일면이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한심한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사랑에 빠진 이후 행복했던 순간들도 가슴 떨리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던 순간과 고민하고 괴로워한 순간들을 반대쪽 저울에 놓고 기울어짐을 확인해보면 후자가 압도적이었다. 다만 그에게 포기당한다는 그 사실 하나가 끔찍할만큼 싫을 뿐이었다. 


 엉망진창이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쓰게 한숨을 삼켰다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라빗츠의 세일즈 포인트인 귀여운 미소였다. 그래도 마시로 토모야는 놀랄만큼 잘 해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물론 눈치챈 것 같은 사람이 장본인인 히비키 와타루라는 점에서 좀 문제가 크긴 하지만, 그 부분을 생략하자면 그랬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되내었다. 침대에 바짝 붙은 책상 위에 푸른 표지의 대본이 놓여있었다. 여자 주연의 역할에 마시로 토모야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연극부에서 주연의 역할을 맡는 것은 주로 와타루와 호쿠토 두 사람이었다. 성별 구분없이 완벽하게 역할을 소화해내는 기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토모야는 조연 혹은 단역. 그것도 여성의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남성 역할은 그보다 더 능숙한 2, 3학년 다른 선배들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부터가 감지덕지였다. 1학년은 대부분 무대에 서지 못했다. 연기를 목표로 들어왔다고 해도 1학년은 뒤에서 무대장치를 맡았다. 애초에 올해 연극부 1학년은 손꼽히게 적기는 했지만.


 주역을 맡을만큼 실력을 키운 건 아니었다. 와타루의 기준은 호쿠토나 겨우 닿을 정도로 까마득했기 때문에 연습에 들어가면 토모야는 언제나 혹평일색이었다. 매일 안간힘을 쓰고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토모야가 주역 자리를 받게 된 것은 입부 때보다 훨씬 성장한 것은 맞다는 주변의 인정과, 역할과의 밀착도 덕분이었다. 여러가지를 고려해 여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부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작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주연은 토모야가 가장 잘 어울렸다. 결국 운으로 받은 역할. 토모야가 제일 마음에 새기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둥근 눈매를 빠릿하게 치켜세웠다. 천장을 노려보는 연한 모래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토모야의 역할은 단순했다. 순하고 착하고 성실하며 지고지순하게 남주인공을 사랑하면 되었다. 참 평범한 배역이었다. 와타루가 선택한 대본 치고는 의외여서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다. 고전이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도 하다는 법이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납득했지만. 사실 주연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출현은 많지 않았다. 무대 전체를 따져보아도 남주연에게 대체로 중심이 몰려 있었다. 남자 주연이 와타루였으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가장 힘든 점은 와타루와 호흡을 맞추는 점이었다. 


 주연으로서 토모야가 함께 무대에 서는 다른 배역은 많지 않았다. 가장 오래 무대를 공유하는 건 당연히 와타루였고, 그 외에 조연인 호쿠토나 단역 몇 명 정도. 호쿠토나 단역선배들과 함께 연기할 때는 그렇게까지 혹평이 강하지 않았다. 고칠 부분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그 다음 날, 짧게는 그 다음 무대에서 극복할 수 있었다. 바로 어제는 와타루에게조차 모든 부분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문제는 와타루와 사랑을 하는 부분이었다. 달큰한 목소리도, 상냥한 몸짓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그 모든 것에 체할 것 같았다. 짝사랑하는 대상과 사랑하고 사랑받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직 배우로써 어린 마시로 토모야에게 너무 힘든 역할이었다. 


 배역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큼 형편없는 연기는 없다. 짧은 틈새에서 드러나는 토모야의 설렘을 와타루는 기민하게 눈치챘을 터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얼음송곳같은 혹평이 뒤따랐다. 너무 많이 찔려서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어제의 마지막 연습마저도 남자 주연에게, 와타루에게 연심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혹평을 받았다. 너무도 평범하고, 형편없군요! 그렇게 시작하는 쓴소리였다. 지금 생각해도 속이 쓰렸다. 울분과 자괴로 끓는 통증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오늘만큼만은. 토모야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복의 구겨진 부분을 적당히 털어 펴내고 붉은 넥타이를 제대로 매었다. 아침의 자기한탄과 마인드컨트롤은 여기까지였다. 완벽하게 무대에 서야 했다. 수천 수백번 연습을 했다고 해도 본방에서 실패하면 다 부질없는 것처럼, 얼마의 혹평을 듣던 무대 위에서 완벽하여 관객들에게 칭송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연극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 위에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의미였다. 조명과 관객들의 시선 아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만큼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 분위기에 홀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외우다 못해 새겨놓은 대사들과 이입감뿐이었다. 한없이 배역의 사람에게 가까워지는 감각이었다. 토모야가 자신의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애처롭게 떨어지는 선이 사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 이 순간만큼은 히비키 와타루를 사랑하지 않는 마시로 토모야였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평생 그 한마디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명 아래에서, 연습 내내 부족함을 보이던 배우가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히비키 와타루는 이상을 감지했다. 눈 앞에서 완벽하게 연기로 점칠된 정제된 감정이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토모야는 확실히 본방에 강한 배우였다. 무대 위라는 것도 잊은 채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뻔 했던 그가 능숙하게 표정을 숨겼다. 그럼에도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소리가 제 존재를 드러냈다. 무대 배역처럼 웃었다. 그럼에도 반 템포 대사가 늦었다.


“사랑합니다. 영원토록.”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설마 감정 따위에 발목이 잡혀 끌려내려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인생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히비키는 가면 너머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반해버렸다. 히비키 와타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완벽하게 연기해낸 마시로 토모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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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