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카오] 여우구슬

2016. 10. 3. 19:43 from ENSTARS/NOVEL





 천 년을 살면서 손에 겨우 남은 건 저와 같은 수명을 가진 존재들과의 인연 정도였다. 열 개의 복슬복슬한 꼬리를 오랜만에 드러내며 카오루가 바닷바위 위에 섰다. 까마득하게 오래 전 산에 살며 바다를 동경했던 어린 여우는 이제 바다 위를 걸을 수도 있을 정도의 신력을 얻었다. 세상이 발전하면서 신비와 자연은 설 자리를 잃었다. 여우의 모습으로는 시골 마을조차 걷기 힘들어졌다. 위장하여 살아가거나 깊고 깊은 곳에 처박히거나, 선택지는 둘이었다. 카오루는 전자를 선택했다. 화려한 외형과 신력으로 인간들을 속아넘기며 살아가기는 나쁘지 않았으나,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것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귀도 꼬리도 둘둘 묶어놓은 것 같은 억압이 있었다. 간만에 이 정도라도 기운을 해방하니 속이 트였다.


“카나타 군!”


 그의 사랑은 후자를 선택했다. 깊고 깊은 바닷속 맑은 물의 정수에서만 살아가고 있었다. 카오루는 그가 보고싶을 적마다 이 바다에 와서 그를 불렀다. 망망대해에 놓여있는 바닷바위는 물의 신이 저의 연인을 위해 남겨놓은 발디딤대였다. 꼬리 열 개의 천호의 모습이 되어 파도치는 바다를 달려 카나타에게 왔다. 약속의 장소에 도달해 그를 끌어안기 편한 인간의 형태를 조금 빌렸다. 머리 위의 여우 귀가 쫑긋하게 섰지만 파도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 연인이 느긋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없었다. 


 덜컥 불안함이 찾아왔다. 예고치 않은 급습에 심장이 선뜩해졌다. 바다가 오염되고 있다는 정도는 카오루도 알았다. 바다 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는 자연이 없는데 어찌 모를까. 그나마 카오루는 자연에 완전히 소속된 신령이 아니었으니 영향력이 덜할 뿐이었다. 그는 여우였으니. 

 그러나 카나타는 달랐다. 그는 물에서 태어난 물의 신령이었다. 바다의 오염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할 존재였다. 그렇기에 가장 깨끗한 정수인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었는데. 신령의 소멸은 느닷없고 완벽하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존재였다. 카나타가 사라졌다고 해도 카오루는 그 흔적조차 손에 쥘 수 없었고, 그의 부재로 겨우 소멸을 깨달을 뿐이었다. 설마, 안 돼. 카오루가 바다에 바짝 얼굴을 가져다댔다. 꼬리 열 개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카나타 군! 카나타 군? 카나타!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카오루...”

“카나타!”


 우유거품같은 물보라가 작게 일더니 그 안에서 카나타가 걸어나왔다. 쓰러지는 것처럼 카오루에게 기대어 왔다. 힘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무력한 몸짓이었다. 카오루. 속삭이는 목소리에 카오루가 그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얇아진 육체가 잡혔다. 늦지 않게 왔다는 안도와 그럼에도 약해진 연인이 안타까운 감정이 묽게 퍼져나갔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울상이 되어있는 표정이며 축 쳐진 귀나 꼬리에 카나타는 작게 웃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카오루는 사랑스러웠다. 카나타만의 사랑스러운 여우였다. 


“카오루, 지쳤어요...”

“먼저 가 버리면 미워할 거야, 카나타 군.”

“카나타라고 불러주지 않는 건가요? 좋았는데...”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야?”


 기가 찬 타박이 튀어나왔다. 카나타의 몸을 살피는 시선이 조금 더 집요해졌다. 하얀 피부에 얼룩덜룩한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오염의 증거였다. 생각보다 정도가 심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카나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염되었을 터였다. 카오루는 물이 아니라 여우였다. 그를 정화시키는 방법 따위 당연히 몰랐다. 


 사쿠마 씨? 아니야, 히비키 군? 그것도 아니면... 머리가 복잡하게 엉켰다. 알고 지내는 신령이야 몇 있었다만, 어디에 사는지 몰랐다. 찾는 것이야 어렵지 않아도 그때까지 카나타가 버텨 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카나타를 회복시키는 방법을 아는지도 불확실했다. 엉망진창이었다. 올 때 조금 더 준비하고 왔어야 했는데. 아냐, 그럼 늦었어. 수십명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싸워댔다. 결론이 나오지 않는 쓰레기통의 토론이었다. 


“카나타 군, 정신 놓으면 안 돼. 나랑 계속 살아야지.”

“카오루랑... 계속...”

“날 사랑해준다고 했잖아.”


 거짓말쟁이. 카오루가 원망을 피워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카오루가 먼저 죽을 줄로만 알았다. 신령이라 해도 급이 있다. 생명체로부터 시작된 카오루는 언젠가 끝의 수명이 있고, 카나타는 아니었다. 이 따위 오염만 아니었어도 그는 정녕 영원을 살아갈 수 있었다. 카오루는 먼저 죽고 떠나는 제 모습은 수천 번 상상했지만 먼저 저를 두고 가 버리는 카나타의 모습 따위는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얼룩 묻은 하얀 손이 카오루의 뺨에 닿았다.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도닥여지는 미약한 힘에 기대어 카오루는 생각했다. 영리한 여우는 방법을 도출해내기 위해 많은 것을 갈아넣었다. 정의, 규칙, 도덕. 그 모든 것을 팔아넘겨도 카나타를 구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규율을 갈아넣자 방법이 보였다. 희망이라기에는 너무 작았지만 희망답게 불확실했다. 

 카오루가 카나타에게 입을 맞췄다. 


 입 안을 헤집고 엉겨 오는 움직임에 카나타도 천천히 반응했다. 카오루가 시작한 입맞춤의 주도권은 금방 카나타에게 넘어갔다. 빳빳하게 치켜올라가 있던 카오루의 귀가 바짝 젖혀졌다. 짧게 흘려지는 신음소리가 띄엄띄엄 끊어졌다. 카오루가 제 안의 무언가를 뭉쳤다. 농염해지는 입맞춤 사이로 무언가가 카나타에게 넘어갔다. 


 카나타가 눈을 반짝 떴다. 조금 젖어있는 연한 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강한 의문을 주장하는 풀잎색 눈동자를 보며 카오루도 강요했다. 먹어, 카나타 군. 재촉하는 혀의 움직임에 카나타가 결국 무언가를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고 입 안이 빈 것을 샅샅히 확인한 카오루가 천천히 떨어졌다. 하아. 두 사람의 호흡이 잠깐 내려앉았다. 


“뭘 준 거에요, 카오루?”

“내 여우구슬.”


 먼저 호흡을 골라낸 카오루가 카나타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얼굴에도 떠올랐던 검은 얼룩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오염이 잠식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행히 카오루의 신력도 제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천 년동안 헛산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안도하고 있는 카오루와 달리 카나타의 얼굴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카나타가 제 얼굴을 잡고 있는 카오루의 두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건 남에게 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응. 그게 규율이지.”

“나한테 주면 어떻게 해요. 다시 가져가요, 카오루.”


 어, 어떻게 주는 거지요? 카나타가 울상이 되어 제 몸을 짚었다. 몸 속에 깨끗한 힘이 맴도는 것은 느껴지지만 그걸 어찌 사용해야 할 지는 몰랐다. 카오루가 짓궂게 웃었다. 꼬리가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내 여우구슬은 카나타 군의 여의주에 흡수되지 않았을까?”

“내 여의주라도 줄까요?”

“안 받을 거니까~.”


 카나타의 품에 안겨 그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억지로 떠넘긴다고 해도 힘을 조절하는 솜씨는 카나타보다 카오루가 더 뛰어났다. 금방 다시 카나타에게 돌아올 게 뻔했다. 결국 방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카나타가 곤란한 기색으로 카오루를 끌어안았다. 눈에 한가득 들어찬 황금색 머리카락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매 사이에 박힌 연회색 눈동자는 여우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요요했다. 


“나 이제 신령이라고 하기 부족하니까, 카나타 군이 잘 키워 줘야 해?”

“정말이지...”


 당연한 걸 묻지 말아요. 카나타가 제 앞의 황금밀밭에 얼굴을 묻었다. 잘 건조된 햇빛 냄새가 났다. 작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살짝 파득이는 여우 귀의 움직임 사이에서 카나타도 결국은 웃었다.

 다시 한 번 오래 살아가기 위해, 서로 품의 온기에 기대어 위로했다. 네가 여기에 있다고. 


 

'ENSTARS >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나카오] 아침  (0) 2016.10.05
[리츠마오] 빛나는 밤  (0) 2016.10.04
[테토히나] 둘은 사귄다  (0) 2016.10.03
[카나카오] 리허설  (0) 2016.10.02
[리츠마오] 외톨이  (0) 2016.10.01
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