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시호] 발렌타인

2017. 2. 14. 23:59 from 기타




 검은 조직과의 마지막 결투에서 살아남은 지 꼭 5년째 되는 겨울이었다. 곧 봄이 찾아온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양 날씨는 포근했다. 바람 한 줄기에도 냉기가 없는 것을 보아 꽃구경을 나갈 때가 그다지 멀지 않을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봄꽃망울이 터지는 시기가 되면 박사님이라던가, 쿠도 군이나 모리 양이라던가. 아, 역시 쿠도 군을 데려가면 또 사건이 터져버리려나...... 보잘것없는 생각을 이어가며 시호는 흐린 창 밖을 멀겋게 응시했다. 부드러운 기온과는 별개로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날씨였다. 공기에 맴도는 달콤함을 적시기라도 하겠다는 양 어두컴컴하게 내려앉은 하늘을 응시하며 시호는 시큰둥하게 턱을 괴었다. 지금의 하늘을 보며 울상이 되어 있을 몇몇 소녀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다만 심심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발렌타인이라고는 하나 시호와는 그다지 관계 없는 날이었다. 


 몇몇 감사하는 사람에게 소소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는 했지만 아가사 박사님에게 주었다가 다시 살이 오르면 곤란했고, 쿠도 군에게 주었다가 모리 양이 오해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 외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만 애초에 시호는 초콜릿을 사거나 만든다는 선택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을 고려씩이나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든 물어물어 부탁하여서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고.

 검은 조직의 소탕과 동시에 전 조직원이라고는 하나, 분명 그곳에 소속되어 사람들을 죽이는 약을 만들었던 여인에게 너그러이 자유를 내 줄 정도로 호락호락한 나라도 법도 없었다. 다행히 반성하고 있다는 점과 고의성이 낮았다는 점, 조직의 소탕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 그녀를 변호해 준 쿠도 군이나 아카이 씨 등 여러가지 이유를 빌미로 죄를 많이 사하기는 하였으나 분명 그녀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 무엇보다 시호 스스로 그것을 원했다. 하이바라 아이에서 미야노 시호로 돌아올 때 이미 단단히 마음의 매듭을 지었으니까. 


 그 검은 조직에서 각광받던 천재 과학자라는 머리를 사용하여 국가의 연구에 참가하고, 연구실과 집 이외에는 오갈 수 없었다. 집에도 군데군데 감시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일견 감금에 가까웠다만 저가 살아야 할 곳이 감옥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호는 꽤나 너그러운 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5년 내내 그녀는 참으로 얌전한 죄인이었으니, 그것 역시 참작되어 앞으로 1년만 더 버티면 되었다. 고작 이 정도로 괜찮은 걸까, 시호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만든 약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괜찮은 걸까. 짙은 늪색 눈동자가 느리게 침잠했다. 천천히 가라앉는 의식을 건진 건 타인의 목소리였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시호 씨?”

“......후루야 씨.”


 시호가 고개를 돌렸다. 각이 딱 떨어지는 양복을 입은 사내가 문가에 서 있었다. 살짝 좁혀진 미간이 일견 못마땅함을 그렸다. 그는 시호가 이런 식으로 상념에 잠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유능한 만큼 눈치도 귀신같은 사내는 여인이 죽은 자들에게 사로잡힐 때마다 그녀를 억지로 건져오고는 했다. 차라리 잠겨 숨이 막히도록 두는 게 편할텐데. 시호는 반사적으로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그렸다.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틈을 보이려 들지 않는 것은 시호의 버릇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생존본능에 가까웠다. 벌을 받는 죄인의 입장에서 저에게 벌을 내리는 응징자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5년 내내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그가 퍽 다정했기에 벽이 많이 물러졌을 뿐. 


“오늘도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예정된 방문 날짜는 내일 모레 아니던가?”

“저는 언제나 이곳에 찾아올 수 있는 입장이죠.”

“그렇지. 나는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고. 하지만 당신이 계획을 지키지 않는 건 드문 일이잖아?”

“뭐, 우선은 충동이라고 해 두죠.”


 그와의 대화는 늘 영양가가 없었다. 서로 중요한 말을 터놓고 할 정도로 어리석지 못한 탓이었다. 시호는 문가에서 다가와 소파에 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후루야를 가만히 응시했다. 창가에 바짝 붙어앉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고개만 돌려 보는 것은 털 세운 고양이를 닮아있었다. 새초롬한 녹색이 느릿하게 상대를 훑었다. 엷은 금발에 짙은 갈색 피부. 청색 눈동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형은 퍽 수려했다. 관찰하는 시선은 익숙한 것이었으므로, 후루야는 더 묻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시호도 침묵 속에서 제 상념을 이었다. 왜 다정하게 대해주는 걸까. 시호는 5년 내내 품었던 의문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공안의 경찰이었고 조직의 스파이였으며 시호의 신변을 감시하는 감시자였다. 냉정하다 못해 가혹하게 굴어도 기꺼이 이해할 법 하건만. 그는 늘 시호를 배려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한 사람. 천 번은 넘게 내렸던 결론을 다시 한 번 도출해내며 시호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초콜릿 케이크로 시선을 내렸다. 꾸덕하고 달아보이는 케이크는 수제인 티가 났다. 손재주 좋은 저 사람은 오늘도 제 솜씨를 부린 모양이었다. 


“초콜릿 케이크 좋아하세요? 한 입이라도 드셔보시겠어요?”

“글쎄, 그다지 많이 즐기지는 않지만. 공안 경찰은 시간이 여유로운 것도 아닐 텐데, 이런 것 만들 짬도 있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지는 않아요.”


 역시 이상한 사람. 시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자리 소파에 앉았다. 능숙하게 찬장을 뒤져 포크와 나이프, 접시를 꺼내온 후루야가 시호에게 작은 조각을 덜어주었다. 향내부터 끈적하게 단 것을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송곳니로 오독오독 초콜릿 칩을 부수고 혀끝에 엉겨오는 단 것들을 녹여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재료부터 만든 이의 실력까지 전부 좋은 것이었는지 뒷맛도 깔끔했다. 케이크의 맛은 훌륭했다. 여인은 일견 풀어지려는 입매를 단단히 잠그고 케이크를 마저 먹었다. 속에 넣은 것은 고작 한 조각이 전부였지만, 시호로 돌아온 뒤 유독 입이 짧아진 여인이 애를 써서 다 먹은 것을 두 사람 다 알았다. 후루야는 기쁘게 웃었다. 정녕 그 표정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다만, 시호의 눈에 기쁜 것처럼 보였다.

 왜 여기까지 찾아와 이런 것을 내놓는 것인지 정녕 모르겠다만, 시호는 빈 접시를 내려놓으며 담백한 감사를 표했다.


“잘 먹었어. 고마워.”


 후루야는 그 한 마디에 정녕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식기를 치우고 남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은 뒤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후루야의 뒷모습을 시호는 내내 보았다. 흘러내리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여인은 지금의 상황이 퍽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어디가 이상한지 집어내기에는 이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 이상이 싫지 않은 탓이었다. 단내 사이로 섞여가는 커피 냄새를 맡으며 시호가 눈을 감았다. 대화 없는 고요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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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