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마오] 머리핀

2016. 10. 8. 23:00 from ENSTARS/NOVEL




 부드럽게 흩어지는 흑발 머리카락에 깨끗한 적안. 하얀 피부는 햇볕 한 줌 받지 않은 것처럼 고왔다. 조그마한 팔다리며 주먹만한 얼굴에 오목조목 이목구비가 사랑스러운 조형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어린 외형의 사쿠마 리츠는 천사처럼 어여쁜 아이였다. 레이는 사진 속의 리츠를 보며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몇 번 사진의 표면을 쓸어내린 레이는 반으로 접혀있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폈다. 접혀져 보이지 않는 쪽에는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사진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란히 앉아있는 두 꼬마아이가 찍혀 있었다. 



 사쿠마 리츠와 이사라 마오는 지금까지 끈질기게 인연을 이어 온 사이 좋은 소꿉친구였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린 리츠는 귀찮게 자꾸 저에게 참견해오는 어린 마오가 성가셨고, 어린 마오는 제멋대로의 어린 리츠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곤란했다. 마오가 최선을 다해 리츠에게 맞추기는 했지만, 두 개의 별이 충돌하면 양 쪽 다 충격을 받는 것처럼 리츠의 세계에 마오라는 별이 떨어져 흔적이 새겨졌다. 첫 순간에는 그게 놀랍고 짜증스러워 경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린 짐승이 영역을 찾아온 누군가에게 털을 세우는 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 군의 참견쟁이 성향 덕분이지♪ 방바닥에 앉아 앨범을 뒤지다가 어린 시절의 사진을 발견한 리츠가 회상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리츠였지만 잘 움직이지 않고 아름답기까지 한 리츠는 좋은 피사체였기에 찍혀 있는 사진은 많았다. 처음에는 혼자이거나 레이와 함께 찍혀있었고,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마오와 함께 있는 사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어라. 리츠가 문득 앨범의 빈 자국을 매만졌다. 사진이 있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마 군, 여기 있던 사진 가져갔었어?”

“사진? 아니. 왜, 없어?”

“응. 형이 가져갔나?”


 리츠가 미간을 좁혔다. 마 군과 찍은 사진이었을 텐데? 목소리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리츠의 심기가 순식간에 불편해졌다는 것을 기민하게 감지해낸 마오가 머쓱하게 웃었다. 평소에는 방치하다가 지금처럼 언뜻 생각이 날 때만 모든 앨범을 뒤집어 하나씩 느긋하게 살피는 것을 좋아하는 리츠는 관리를 앨범을 잘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진을 앨범에 정리하고 제자리에 꽂아두는 건 사실 마오의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리츠는 몰랐지만, 마오는 종종 레이가 앨범을 빌려 그 중 몇 개를 챙겨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사진이지. 왜 멋대로 가져가고 난리야? 돌려달라고 할 거야.”

“그거야. 그, 어렸을 때. 리츠랑 나랑 싸우고 뚱해져서 토라져 있던 사진.”

“아아.”


 마오의 짧은 설명에 리츠가 금방 알아차렸다. 두 사람이 만난지 극초반부의 일이었다. 사진까지 남을 정도는 손에 꼽힐 수준이었으니 알아내기 어렵지도 않았다. 리츠가 턱을 괴고 마오를 보았다. 그의 적발머리가 앞머리를 가리고 있을 무렵의 사진이었다. 노란 머리핀이 장식되기 이전의 일. 그에게 있어서 그렇게까지 옛날의 일도 아니었다만 유독 까마득한 시절이었다. 리츠의 침대 위에 누워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던 마오가 턱을 괴고 호수처럼 웃었다. 


“그 때 왜 싸웠더라?”

“내가 마 군더러 귀찮다고 했었어.”

“그게 유독 서러웠던 날이었지. 아마 그랬을걸.”

“날 노려보던 마 군이 울어버렸었어.”

“내가 우니까 리츠가 어쩔 줄 몰라했던 건 기억 나.”


 마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렸다. 그에게 있어서는 조금 쑥스럽고 즐거웠던 추억에 불과했다. 리츠는 되새겨보니 과거의 자신에게 꿀밤을 놓아야 할 지, 칭찬을 해야 할 지 모를 일이었지만. 마오에게 괘씸한 소리를 했던 저는 혼내주고 싶었지만, 아마도 한창 슬픈 감정을 꾸역꾸역 참고 있었을 마오가 울 수 있게 해 준 것만큼은 칭찬해주고 싶었다. 소 뒷걸음질 쳐서 쥐를 잡은 격이었지만, 그 무렵에는. 리츠가 고개를 돌려 마오를 보았다. 어릴 적처럼 머리핀을 빼고 색 잘 물든 자주빛 머리카락을 흘러내린 채로 제 베개에 뺨을 댄 채 저를 보고 웃는 마오가 보였다. 옅게 웃는 얼굴에 슬픔은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는 마 군을 어떻게 달래야 할 지 몰라서, 마 군 뺨에 뽀뽀했었어.”

“맞아. 그 때도 궁금했는데 이제야 물어보네. 그거 왜 그랬어?”

“내가 어릴 때 울면 형이 그렇게 달래줬었어. ...지금 생각하니 기분 나쁘네.”

“그래서였구나. 그 때의 나, 너무 당황해서 리츠를 밀쳐 버렸지?”

“응. 그래서 내가 무슨 짓이냐고 화냈고.”

“나도 덩달아 화냈었고... 그러다 지쳐서 그만뒀던가?”

“아마도?”


 리츠가 얼버무렸다. 마오의 부모가 달려오기 전에 두 사람의 싸움은 싱겁게 끝났었다. 싸움이래봐야 흔한 잡아당기기도 물어뜯기도 없는 가벼운 말다툼이었다. 싸우던 도중 마오가 갈수록 힘들어하는 것이 보여 리츠가 중간에 싸움을 그만두었던 기억이 있었다. 애초에 마오는 서로 꾸역꾸역 남을 물어뜯는 것에 익숙치 않은 아이였다. 그 무렵에도 요령이 좋았던 리츠가 도마뱀 꼬리를 자르는 것처럼 싸움을 끝내버렸었다. 다만 둘 다 앙금처럼 토라짐만 남아 뾰루퉁해 있는 것이 어찌 사진으로 남겨져 있었다. 


 역시 형한테 달라고 해야겠어. 속으로 미래의 예정을 끼워넣으며 리츠가 무릎걸음으로 마오에게 다가왔다. 뒤지고 있던 앨범은 덮은 지 오래였다. 날 것의 차림새를 하고 있는 마오의 외향에 어린 시절을 작게 겹쳐보았다. 눈물에 젖어있던 뽀얀 얼굴에 했던 것처럼, 말끔한 선의 하얀 맨뺨에 입을 맞추자 이번엔 마오가 웃었다. 크게 휘어지는 녹안이 어여뻤다. 


“좋아해, 마 군.”

“나도 좋아해, 릿쨩.”


 지금이 좋다. 너에게 애정을 품는 게 훨씬 좋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는 게 행복하다. 리츠는 눈으로 모든 것을 속삭이며 다시 한 번 마오의 뺨에 입맞췄다. 이사라 마오의 이름이 붙은 별이 날아와 사쿠마 리츠에게 크레이터를 남겼다. 충격으로 시작한 마음의 흔적에 시간이 흐르자 애정이라는 물이 들어차 호수가 되었다. 그 안에 잠겨도 행복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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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