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세상의 옐로, 다른 세상의 토키와 삼인방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옐로 + 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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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가까워진 것을 확인하며 실버는 돈크로우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그는 살짝 올라오는 충격은 적당히 무시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는 그는 곧장 성큼성큼 짐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오르는 듯한 적발과 날카로운 눈매의 은안이 어딜 가더라도 시선을 붙잡는 외모를 가진 그는 더없이 익숙하게 짐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마다 반갑게 건네오는 인사를 적당히 받아주면서도 그는 반쯤 정신없이 걷고 있었다. 뛰는 것에 가깝다고 여겨질만한 발걸음으로 걷는 그를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왜 그렇게 다급하게 행동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띠우며 손가락으로 길을 가르쳐주곤 했다. 그리고 실버는 적당히 대꾸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치 뒤에서 화난 갸라도스에게 쫒기는 사람마냥 숨가쁘게 걸어온 실버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짐의 가장 안쪽,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다다르자마자 실버의 발걸음은 여유로운 척하는 것처럼 느긋해졌다. 어쩌면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예민하기도 했다. 그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는 짐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짐리더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실버는 그 익숙한 장소를 눈으로 훑었다. 이름과 같은 색의 눈이 사방을 뒤지면서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에 귀물과 같은 이름의 눈이 일순 초조함을 보였다. 

누나? 실버가 잠깐 목소리를 내었다.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있었다. 조금 느긋하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 실버는 그제서야 조금 안심했다. 가장 안쪽에서 느긋하게 나오는 자신의 포켓몬, 쟝크로다일의 모습에 실버는 곧장 그 품을 살폈다. 냉정한 성격의 그가 보물처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사람. 있었다. 작고 작은 체구의 사람. 실버는 그제서야 완전히 표정을 풀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옐로 누나. 실버의 부름에 옐로는 고개를 들었다. 치렁치렁한 금발 머리카락과 사이에 박힌 새까만 흑안이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는 곡선에 실버 역시 덩달아 조금 풀린 미소를 지었다. 망설임없이 뻗어오는 두 팔에 실버는 곧장 옐로를 품에 안아 익숙하게 어깨에 올렸다. 걸터앉듯 실버의 어깨에 앉아 한 팔로 그 머리를 끌어안은 옐로는 붉은 정수리에 제 흰 뺨을 부비며 말갛게 웃었다. 

좋은 아침, 실버. 그 인삿말에 실버도 간단한 인사로 답했다. 그가 옐로를 짐의 안쪽에 두고 잠만 자러 집으로 가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실버는 언제나 옐로를 뒤에 두고 떠날 때 강한 불안을 느꼈다. 지독한 죄책감 역시도 바지춤에 달라붙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 역시 같이 집에 돌아가면 좋을 텐데, 옐로는 짐리더라는 자신의 위치 상 결코 짐을 비워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들어 고개를 젓곤 했다. 그렇게 따진다면 자신 역시도 짐에 남겠다고 했을 땐 아버지를 혼자 두어선 안된다는 이유로 또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리고 실버는 이제껏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혼자서 옐로의 고집을 꺾어본 적 없었다.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쟝크로다일은 냉정한 성격에 빈틈이 없어서 실버는 언제나 자신의 포켓몬 중 쟝크로다일만큼은 옐로의 곁에 두고는 했다. 위험한 순간 옐로를 품에 안고도 싸울 수 있을 만 한 상대는 쟝크로다일과 거대코뿌리, 망나뇽뿐이었으니까. 의젓하지만 싸움을 좋아하는 거대코뿌리는 불안했고, 건방진 성격에 낮잠을 좋아하는 망나뇽은 걱정스러웠다. 물론 옐로는 강한 짐리더였고, 옐로의 수중에도 망나뇽을 필두로 한 괴수형 포켓몬들이 몇 있었지만 실버는 자신의 안심을 위해 늘 제 포켓몬을 옐로에게 붙여두었다. 그것이 익숙해진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행해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처음엔 옐로는 그것을 어지간히도 불만스러워했었다. 그것만큼은 실버가 목호와 비주기의 도움을 받아 성사시킨 유일한 고집이기도 했다. 

실버는 곁눈질로 제 가슴께에서 힘없이 달랑거리는 옐로의 두 다리를 바라보았다. 세 살 때부터 한 번도 땅을 딛어본 적 없는 연약한 다리는 결코 천성적인 것이 아니었다. 옐로가 걷지 못하게 된 것은 전부 실버의 탓이었다. 그런 어투의 말을 입에 담은 순간부터 옐로는 크게 화를 내곤 했지만 실버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긴 옷으로 늘 다리를 가리고 있었지만, 실버의 팔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얇고 힘없는 다리의 위에는 길게 적나라한 흉터가 나 있었다. 옐로가 겨우 세 살, 실버가 고작 두 살이었을 때 난 상처였다. 실버를 납치하려는 칠색조의 발톱에 적나라하게 할퀴어진 상처.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지만 그 날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자신을 노리던 날카로운 눈. 강력하고 위협적이던 발톱. 그리고 자신을 품에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옐로. 도망치다가 결국 다리에 길고 깊은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로 땅을 뒹굴던 옐로의 모습까지도. 

옐로가 상록숲의 축복을 받은 아이가 아니었으면 그 때 옐로는 틀림없이 과다출혈로 죽었을 위기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어렸던 만큼 잠재력도 엄청났던 옐로의 능력이 폭주에 가깝게 발현되어 주변의 야생 포켓몬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죽고 싶지 않아, 살려줘, 실버를 지켜줘. 제발, 제발. 지독하리만치 간절했던 어린아이의 기원은 포켓몬들과 교감할수 있는 능력으로 발현되어 상록숲의 수많은 포켓몬들을 불러들였고, 결국 두 사람은 가까스로 달려온 비주기의 손에 구조될 수 있었다. 결고 '무사히' 는 아니었지만. 

외상으로 인해 앞으로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뒤 죄책감으로 뒹군 것은 결코 실버 혼자만이 아니었다. 목호나 비주기 역시 상황은 같았다. 한참 어린 여동생인 옐로와 남동생인 실버를 지키지 못했다는 목호의 죄책감과 딸과 다름 없는 옐로가 친아들인 실버를 지키기 위해 저렇게나 상처입었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비주기의 죄책감 역시도 강렬했다. 결국 와타루는 강해지기 위해 상록시티를 떠났고, 비주기는 옐로의 치료를 위해 의료시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결국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떠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남은 것은 실버와 옐로 뿐이었다. 걷지 못하게 되어버린 옐로와, 그런 옐로를 바라보는 실버. 단 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옐로는 실버에게 곱게 미소지어주었다. 모든 것의 용서를 뜻하는 그 미소에 실버는 결국 옐로의 앞에 무릎꿇고 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어리디 어렸던 두 살의 실버는 평생을 옐로의 곁에서 지키겠다는 맹세를 다졌다. 

강해지기를 원했다. 실버도, 옐로도. 실버가 다섯 살이 되고, 옐로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배틀 훈련을 시작했다. 실버는 옐로를 지킬 힘을 원했다. 다리를 다쳐 걷지 못하는 옐로의 곁에서 행동의 어려움이 없도록 보필하면서 도울 수 있도록. 옐로는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을 힘을 원했다. 눈 앞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강탈당할뻔한 공포를 다시는 느끼지 않도록. 

두 사람의 훈련을 봐 주는 것은 한때는 비주기였고, 다른 때에는 목호였다. 가끔 상록시티에 돌아온 목호는 두 사람에게 실전 배틀에서 필요한 배짱과 판단력을 가르쳤고, 로켓단이라는 이름의 의료회사를 만들어낸 비주기는 회사를 보지 않을 때면 곧장 실버와 옐로를 가르쳤다. 짐 전에 가까운 정식 배틀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재능이 있었다. 힘의 폭주 이후 제 힘을 좀 더 광범위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어진 옐로와 천성적인 배틀 센스가 있는 실버는 뛰어난 두 스승의 밑에서 흡수하듯 강해졌다. 그건 두 사람의 오기와 집념의 힘이기도 했다. 

옐로는 아주 느리게 자랐다. 실버가 여덟살이 되는 날 실버는 이미 옐로의 키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신보다 작아진 옐로를 바라보며 실버는 울고 싶은 심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다친 옐로는 성장이 아주 더뎠고,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 자신보다 한 살 많은 누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체구에서 자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실버가 열 살이 되는 날부터 실버는 자신이 옐로를 끌어안고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공주님처럼 모시듯 안기 시작해서, 체구의 차이가 더 나기 시작하면서 어깨에 앉히기 시작했다. 옐로는 그런 실버를 이해해 주었고, 따라주었다. 그리고 실버가 열 두 살이 되는 해. 두 사람은 나란히 상록시티의 짐 리더가 되었다. 

비주기가 본격적으로 로켓단 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비게 된 상록시티의 짐에는 주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옐로는 실버가 자신을 끌어안고 다니기 시작한 날부터 그 짐의 주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황폐해진 짐과 짐리더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마을이 안타까워서 옐로는 자신이 짐리더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홀로 서지 못하는 연약한 몸의 짐리더가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실버와 옐로의 페어는 강했다. 솔직히 말하지면,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짐리더 자격 시험을 보기 전 있었던 목호와 비주기와의 더블배틀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뒤, 두 사람은 인정받았다. 더블배틀이라면, 두 사람은 최강이라고.

최강의 짐 리더. 최강의 페어. 상록시티 짐 리더. 그 이름을 얼마나 기꺼이 받았던가. 얼마나 기쁘게 받았던가. 무심코 그리 생각하며 실버는 옐로의 다리 한쪽에 제 뺨을 가만히 가져다댔다. 촉감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그리고 그런 실버의 고요한 행동에 옐로 역시 손을 뻗어 실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시간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산책을 하고, 낮잠을 자고, 짐 리더로서 해야만 할 일들을 했다. 사실 대부분의 일은 옐로가 했다. 실버는 그저 어깨에 옐로를 앉힌 채로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고 그녀의 다리를 대신했다. 그가 하는 일은 가끔 일 대 일 배틀을 원하는 도전자를 쓰러뜨리는 것이었고, 옐로가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해 주는 것이었다. 

실버는 짐 안쪽의 배틀 필드에 섰다. 수 많은 트레이너들을 이곳에서 쓰러뜨렸다. 너무 많은 트레이너를 쓰러뜨리면 협회에서 제제가 들어오고는 했지만, 최강의 짐 리더라는 명칭이 붙자 도리어 제제는 사라졌다. 자신이 지켜야만 하는 사람의 곁에서 쓰러지지 않겠다는 두 사람 각자의 결의는 두 사람을 최강의 페어로 만들었다. 상록 숲의 두 사람. 금발과 적발. 흑안과 은안의 최강의 페어. 최강의 남매. 

고요한 필드 위에서, 두 사람은 잠시 정적을 즐겼다. 그리고 그 고요를 깬 것은 사람의 말소리였다. 도전자입니다! 기대와 무언가에 가득 찬 목소리. 그 목소리에 실버와 옐로는 가만히 서로를 마주보고, 각자의 방식으로 웃었다. 파트너가 들어있는 볼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두 사람은 몸에 가벼운 긴장을 흘렸다.

그리고 맞은편의 도전자의 자리. 익숙한 얼굴. 같은 도감 소유자 중 두 명. 그 모습을 확인한 실버는 조금 기가 차서 소리쳤다. 


“챔피언. 그리고 그 제자 씨. 뭐하는 겁니까?”

“최강의 페어에게 하는 도전이지!”

“나한텐 타이틀도 없냐?!”


투지로 불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말투는 개구지게 말하는 레드와, 바락바락 화를 내는 골드를 보며 실버는 기가 찼고 옐로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도전자의 타이틀을 들고 온 이상 짐 리더로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도전을 후회하시는 거 아니에요?”

“더블배틀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그리고 가볍게 던져진 몬스터볼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늘씬한 몸을 가진 두 마리의 포켓몬. 쏙 빼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에브이와 블랙키. 아주 예전 비주기에게 받게 된 이브이가 나란히 진화하게 되어 생겨난 파트너. 평소라면 도전자에게 가장 마지막에 보여주는 에이스 콤비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전력으로 싸워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레드와 골드는 눈을 빛내며 제 몬스터 볼을 쥐어들었다. 삼 대 삼. 그리고 동시에 육 대 육 배틀. 상대의 포켓몬은 강챙이와 왕구리. 잠시 정적이 흐르고, 곧 트레이너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격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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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는 알 수 없지만, 페어로서의 최강은 옐로와 실버의 콤비입니다. 상록시티의 두 사람.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이 세상에서 로켓단은 없어도 같은 의미의 악당 조직은 있었다고 합니다. 와타루는 없었지만 같은 의미의 악역도 있었고. 레드그린블루는 원작과 다름이 없고, 옐로나 실버의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결국 두 사람은 도감소유자로서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상록시티의 두 사람을 좋아합니다. 원작적으로도 좋아해요. 어쩌면 같은 고향의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같이 싸웠던 사람. 나를 위해 싸워주었던 사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는 존재겠죠. 옐로는 누구와 같이 있어도 좋아하지만 그린이나 실버처럼 말수적고 무뚝뚝한 사람과 두는 쪽을 좋아해요. 글이 뒤로 갈수록 허술해져서 그만 총총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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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