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빛 곱게 빛나는 돌. 시들기 전에 굳혀서 보관한 꽃반지. 왕님이 작곡한 미공개 악보. 마음에 들게 녹음된 노래의 테이프. 터치감과 음색이 좋은 피아노. 빼곡하게 들어찬 사진. 엣쨩이 추천해준 홍차...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싶어한다. 뭇 사람들은 모르는 사쿠마 리츠의 특징 중 하나였다. 덕분에 리츠의 방은 늘 소소하게 난잡했다. 자기 딴에는 정리되어 있기에 타인이 손대는 것도 진저리치게 싫어했다. 작지 않지만 안락한 그 공간은 리츠의 보물상자였다. 그 사이에 틀어박혀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이불 사이에 틀어박혀 있으면 늘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찾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보물상자 안으로 들어와주는 사람. 사쿠마 리츠가 가장 좋아하지만 상자 속에 넣어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피아노 소리가 밤의 침묵 사이를 홀로 걷고 있었다. 방음은 잘 되어있기에 방안에 갖혀 나가지 못하는 소리였다. 사쿠마 리츠의 유일한 왕님이 며칠 전 리츠를 부여잡고 작곡했던 곡이었다. 손에 한 뭉치 넉넉하게 잡히던 종이를 한가득 안겨주며 그는 만족하여 웃었다. 배부른 짐승마냥 흡족한 미소였다. 그는 선물이라고 했다. 부러 선물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도, 그렇게 웃었던 것도, 리츠를 뮤즈로 삼아 작곡을 한 것도 모조리 날짜를 의식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오늘 왕님은 등교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루 일찍 받은 생일 선물은 음은 조금 느리고 슬러가 많았다. 굳이 꼽자면 바흐의 사단조 푸가와 느낌이 닮아있었다.

 한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치며 악보를 읽던 리츠가 문득 창 밖을 확인했다. 마오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하기야 늦은 시간인데다가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하니 일찍 잠드는 게 정답이었다. 이런 시간에 도리어 힘이 나는 건 사쿠마 형제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성실한 마오는 내일을 기약하며 꿈나라를 산책하고 있겠지. 작게 아쉬움을 삼켰다. 


 보고 싶다. 리츠가 턱을 괴고 마오의 방 창문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리츠도 마오도 2층에 방이 있는 건 같았지만, 사쿠마 저택 쪽이 훨씬 큰 탓에 리츠의 방 위치가 조금 더 높았다. 커튼이 쳐진 창문은 안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자고 있는 마오의 털끝 하나 볼 수 없었다. 조금 삐죽해진 감정이 속을 콕콕 찔렀다. 다음에는 마~군더러 커튼 치지 말라고 해야지. 시덥잖은 계획 하나를 세우는 리츠의 고개가 조금 기울어졌다. 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시선이 퍽 다정해졌다. 이사라 마오를 떠올리는 사쿠마 리츠는 언제나 놀랄만큼 상냥한 시선을 품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잦아든 방안에 초침 소리만 바쁘게 일했다. 갑작스러운 알람 소리가 날짜가 바뀌었음을 알렸다. 리츠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의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메일 오는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렸다가 겨우 잠잠해졌다. 손을 뻗어 확인해보니 가장 먼저 온 건 막내의 생일축하 메세지였다. 몇 초 차이를 두고 아라시, 세나. 왕님의 것은 없었지만 이미 그에게 받을 수 있는 최고를 받았으니 신경쓰지 않았다. 같은 반의 클레스메이트들에게도 몇 개. 에이치와 하지메에게도 하나씩 메일이 와 있었다. 다들 잠도 안 자나? 중얼거렸지만 조금 기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생일 축하 메세지를 보낸 형의 것은 삭제를 조금 고민했지만. 

 각자 제 개성 넘치게 축하해주는 메세지를 확인하고 적당히 답변까지 돌린 리츠가 다시 창 밖을 보았다. 마침 창을 열던 사람과 시선이 정확히 맞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던 눈이 순간 둥그렇게 떠졌다. 마~군? 속삭이듯 부른 이름을 들은 것처럼 마오가 웃었다. 


「좋은 밤, 리츠. 생일 축하해.」


 띠롱,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인이 날아왔다. 날짜가 바뀐 늦은 밤이다. 거리가 꽤 있었으니 소리를 내었다가 사람들을 깨우기라도 하면 민폐였으니 가장 합당한 방법이었다. 마오의 얼굴을 멀뚱히 보던 리츠가 빠르게 답했다. 


「고마워, 마~군. 자고 있는 거 아니었어?」

「리츠의 생일이잖아. 일찍 축하해주고 싶었어.」


 근데 조금 늦었나... 욕조에서 졸아버려서. 리츠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마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리츠는 찬찬히 마오의 모습을 살폈다. 막 씻고 나온 것인지 젖은 머리카락에 잠들기 직전의 편한 옷차림.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의 마오를 보며 리츠는 근질거리는 입꼬리를 내리눌렀다. 밤눈이 밝은 게 이만큼 감사한 적도 처음이었다. 


「마~군의 키스를 받으면 완벽할 것 같은데. 지금 올라올래, 마~군?」


 뭣. 마오가 순간 어깨를 떨었다. 확 붉어진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마오를 보며 리츠가 숨죽여 웃었다. 성실한 마오가 설마 밤 늦은 시간에 부모님이 주무시고 계실 1층의 안방을 지나 현관을 넘어 레이까지 통과한 뒤 제 방까지 와 줄 거라고는 리츠도 기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키스까지 해 준다니 그야말로 꿈 속 이야기. 그저 약간의 소망과 쑥스러워하는 마오를 보고 싶다는 심술이었다. 

 개구쟁이마냥 싱글벙글 웃는 리츠를 흘겨보던 시선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망설임이 채웠다. 마오가 입을 열었다가 꾹 닫는것을 보며 리츠가 내심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심으로 받은 건가 싶었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마~군? 장난이었으니까. 리츠가 막 타자를 치려던 찰나였다. 


 마오의 손이 입술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녹색 눈이 정확히 리츠에게 향해 있었다. 얽힌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쪽, 하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이사라 마오가 사쿠마 리츠에게 키스를 보냈다. 답지않게 대담한 애정표현이었다. 마오의 얼굴은 진작에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온통 사랑스러웠다. 리츠의 의식이 잠시 멀어졌다가 급하게 되돌아왔다. 정신차려, 사쿠마 리츠! 경종이 뎅뎅 울렸다. 하얀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붉어졌다는 자각은, 당연히 있었다. 

 아우우.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한 말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마~군, 너무 귀여워. 너무 좋아해. 사랑하고 있어. 제 마음을 표현할 단어들이 속에서 가득 뭉쳤다.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렸지만 여전히 손끝에 닿는 체온이 화끈거렸다. 차가운 새벽바람마저 뜨거운 기분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한 일에 부끄러워 제 방 바닥만 열심히 노려보던 마오가 몇 번 손을 흔들더니 창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에 뭐라 할 정신도 없었다. 리츠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귀까지 얼얼했다. 


「나중에 나랑 같이 살자, 마~군.」


 결국 보내버렸다. 제 보물상자 속에 완전히 들어와달라는 작은 요청이었다. 손가락만 겨우 움직여 라인을 보낸 뒤에는 무릎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가 드러누웠다. 다시 회상해도 좋았다.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작게 키스를 보내준 마오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입꼬리가 간질간질했다.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깨도 간질간질했다.

 띠롱, 알림이 울렸다.


「그래.」


 다른 미사여구 없이 짧은 허락에 사쿠마 리츠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졌다. 환히 빛나는 화면에 띄워진 글자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키스했다. 미처 보내지 못한 답례였다. 짙은 홍적색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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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