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10시. 운 좋게 스케줄이 빈다면 이사라 마오는 꼭 휴대전화에 헤드셋을 연결하고 눈을 감았다. 어둡게 화면을 조정한 스마트폰이 30초가량 라디오 화면을 비췄다가 절전모드로 전환되었다. 조곤조곤하게 속삭이듯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입가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오늘의 마오는 운이 좋게 일이 일찍 끝났다. 공용숙소는 Trickstar 멤버 전원이 함께 사용하지만 호쿠토는 오늘 드라마 촬영으로 늦게 들어오고, 마코토와 스바루는 예능 프로 게스트 출현이 있어서 정각이 넘어야 들어갈 수 있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텅 빈 숙소가 낯설었지만 고요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반갑기도 했다. 온전히 이사라 마오에게 선물된 시간이었다. 불이 꺼진 침실의 2층침대에 누워 마오는 라디오 소리에 집중했다. 전파선 너머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안녕하세요. 우주와 세상과 당신의 마음을 여행하는 시간. 꿈처럼 찾아왔습니다.」
언제나와 같은 오프닝 멘트였다. 마오의 기감이 바짝 섰다. 중요한 건 그 다음에 찾아오는 매주 변하는 본론이었다.
「화려한 색이 보기 힘들어지는 겨울입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회색이나 검정색의 옷을 입고 있는 게 눈에 띄던데요. 가끔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녹색이 그립기도 합니다. 모두 유채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하루를 보냈나요? 언제나 당신에게 화사한 시간을, 토요일 10시의 사쿠마 리츠입니다.」
오늘의 멘트도 상냥했다. 리츠답지 않은 딱딱한 존대가 여전히 낯설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설레게 만들었다. 마오가 작게 중얼거렸다. 좋은 밤, 릿쨩. 언제나 함께하는 들리지 않을 인사였다.
사쿠마 리츠가 라디오 고정 DJ를 맡게 된 건 약 3개월 전의 일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밤에 하는 라디오니까 졸리지는 않겠다며 슬쩍 웃는 것을 본 기억이 생생했다. 마오는 솔직히 리츠가 잘 할지 조금 걱정이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리츠는 잘 해나가고 있었다. knights나 리츠의 본래 팬들 뿐 아니라 라디오를 듣고 유입된 새로운 팬들도 제법 생겼다는 소식을 아라시를 통해 들었다. 마오는 그럴 법 하다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 없는 장소에서 들리는 리츠의 목소리는 굉장히 새삼스럽게 수려했다. 가끔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이사라 마오는 이 라디오의 대단한 애청자였다.
DJ가 리츠다보니 종종 찾아오는 게스트는 주로 유메노사키 출신의 아이돌이었다. 즉, 지금 아이돌계를 휘어잡고 있는 톱 아이돌들이었다. 마오도 한 번 게스트로 나간 적 있었다. 그 외에도 Ra*bits의 시노 하지메나 FINE의 텐쇼인 에이치, UNDEAD의 사쿠마 레이, Knights의 다른 멤버들까지 포함해서 게스트가 화려하기로 유명한 라디오이기도 했다. 오늘은 찾아오는 손님 없이 리츠 혼자 진행하고 있었다. 사연을 읽어주고 자기 나름대로의 답변을 이어가는 목소리에 서툰 연륜이 조금씩 묻어나고 있었다.
오프닝 탓에 오늘의 주제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정답이었다. 리츠가 노란 해바라기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꽃밭에서 첫사랑을 만났던 사람의 사연을 읽었다. 꽤 낭만적인 이미지였다. 마오도 리츠와 그런 해바라기 밭을 본 적 있었다. 쓰고 있던 밀짚모자는 진작 리츠에게 넘겨주고 한 손에는 잠자리채, 다른 한 손에는 리츠의 손을 꼬옥 부여잡고 곤충채집을 위해 건너가던 길목에서 만난 꽃밭이었다. 예뻤었지. 마오는 잠시 회상했다. 화분증인 탓에 짧게 응시했다가 바로 다른 길로 꺾어서 멀리 돌아갔지만. 조금 아쉬워서 몇 번 뒤를 돌아보는 마오를 보며 길가 틈새에 몇 개 핀 민들레를 제 귓가에 꽂고는 이게 더 예쁘지, 하고 웃었던 리츠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황홀하게 예뻐서 무심코 리츠의 손을 놓고 얼굴을 가렸던 것도. 마오가 반사적으로 제 입가를 한 번 쓸어내렸다.
「첫사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색이 여러분도 있나요? 분홍색이나 빨간색같은, 짙은 홍색 계열을 떠올리시는 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제 경우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녹색이 떠오르고는 합니다. 앗, 이런 말 라디오에서 막 하면 셋쨩한테 혼나는데. 뭐, 셋쨩은 쿠마 군 라디오따위는 안듣는다고 했으니까요. 화내면 라디오 들어주고 있었냐고 놀리면 되니까~.」
낙승이네♪ 즐겁게 흥얼거리는 목소리에 마오는 웃어야 할지 어떨지 모를 감정에 어색하게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세나 선배처럼 라디오같은 곳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는 간질간질한 기쁨이 작게 울리고 있었다. 첫사랑. 사쿠마 리츠의 첫사랑. 마오가 녹색 눈을 조금 살짝 내리깔았다. 몇 번을 들어도 부끄럽고 그만큼 기뻤다.
리츠의 라디오에는 은근하게 사랑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같은 마음으로 듣고 있는 이사라 마오만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이었다. 조심조심, 서로만 알 수 있게 찍어놓은 발자국마다 마음이 가득 담겨있어서, 그 뒤를 따라가는 이사라 마오가 흠뻑 젖을 정도였다. 온통 사랑스러운 색감이었다. 전파로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가 전부 곱게 칠해진 붉은 색이었다.
라디오를 듣는 것은 가장 빠르게 2시간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리츠가 마지막 사연을 읊었다. 마오가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2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무관심했던 것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는 건 아주 특별한 느낌이 아닐까요. 내 안에 특별한 것이 가득 생기는 순간 그 밑에 깔린 애정을 느끼고는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소중한 사람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즐거운 여행이 되셨기를 바라며, 사쿠마 리츠였습니다.」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깔렸다. 츠키나가 레오가 작곡하고 사쿠마 리츠가 연주하는 전용 엔딩이었다. 마오가 헤드셋을 벗고 잠시 기다렸다.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리츠?”
「좋은 밤, 마~군. 라디오 잘 들었어?」
“응. 오늘도 좋았어.”
마오가 작게 웃었다. 불을 전부 끈 방에 마오의 휴대전화 화면만 별처럼 빛났다. 라디오가 끝나면 리츠는 꼭 전화를 걸었다. 서로 있었던 하루의 이야기를 하고, 많은 감정을 풀어내고 마음을 나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가 서로에게 다가가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게 목소리로 얽혔다. 언젠가 매주 전화를 거는 이유를 물은 적 있었다. 반 쯤 졸고 있던 리츠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대답했다.
‘그 라디오로 나는 많은 사람들의 사연 속을 여행하는 거야. 왕님 말처럼 우주를 여행한다는 느낌일까...... 내 경우에는 꿈 속을 여행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하지만 내 정착지는 언제나 마~군이니까.’
그러니까 언제나 마지막 사연을 듣기 위해 마~군에게 전화하는 거야. 리츠는 그렇게 말했다. 대답이 되었어? 그렇게 말하듯이 미소지었다. 이사라 마오는 사쿠마 리츠의 라디오의 최후이자 유일한 손님이었다. 동시에 사연을 여행하는 여행자의 최후의 정착지였다.
“오늘의 사연은 여기까지네.”
「그래? 마~군은 그럼 잘 시간이겠네.」
“응. 잘 자, 리츠.”
「잘 자, 마~군.」
전화가 끊기고, 라디오가 끝났다. 길게 숨을 내뱉고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조금 긴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혔다. 마오는 조금 뜨거워진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잠들기 직전 무음의 통신을 보냈다. 전파에 사랑을 실어서 라디오로 세상에 펼치는 리츠처럼, 마오는 아주 작게 제 마음만 조금 담아 한 사람에게만 닿을 통신을 내뱉었다. 달콤한 원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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