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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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아니, 다른 점이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집주인들이 모두 있다는 점이었다. 작지 않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두 사람은 지금과 같은 계절에 대부분을 바쁘게 보냈고, 소속된 곳이 다른 그들의 휴일은 겹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요즈음은 두 사람이 함께 아침을 맞기는 커녕 한 사람이라도 있는 날이 드물기까지 했다. 집주인 중 한 명, 프로선수 사와무라 에이준은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들이켰다. 빈속에 들어오는 찬기에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가 풀어낸 사와무라는 곧 컵을 비우고 새로 잔을 채웠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물은 동거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집주인 중 나머지 한 명, 프로선수 미유키 카즈야는 사와무라가 올려놓은 컵을 들어 입에 가져다대며 물었다. 무심한 듯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눈에 숨길수 없는 감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사와무라, 혹시 결혼할 생각 없어?”
...넘어질 뻔 했다. 거실로 걸어가던 사와무라가 그대로 제 발에 제가 꼬여 헛발질을 했다. 잽싸게 벽을 짚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넘어져도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쿵쿵 뛰는 심장이 넘어질뻔한것에 대한 놀람인지 방금 들은 말에 대한 놀람인지 구분하지 못하며, 사와무라는 급히 뒤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미유키의 뒷모습뿐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슴까?!”
“혹시 결혼할 생각 없어?”
결혼, 결혼?! 사와무라가 한 번 얼빠지게 그 명칭을 내뱉고는, 화들짝 놀라 다시 소리쳤다. 미유키는 직접 보지 않아도 그 새빨갛게 달아오른 당황한 얼굴을 고스란히 상상할 수 있었다. 제 뒤에서 당황한 기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미유키의 상상 속 그대로의 얼굴로 몇 번이고 입을 벙긋거리던 사와무라가, 곧 흠칫 놀랐다. 낮게 되묻는 목소리는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미유키, 혹시 결혼하고 싶슴까...?”
그래서 저더러 결혼하라고 등떠미는 검까?! 이제는 기가 찬 사와무라의 목소리를 듣다못한 미유키가 드디어 뒤돌아 사와무라를 마주보았다. 여전히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황금빛 눈에 깃들어 있는 것은 묘한 불안함이었다. 쟤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미유키는 속으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몇 년을 사귀었는데 나는 이 정도의 신뢰도 없는 거야?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야 결혼하고 싶지.”
“......”
“사와무라 너랑.”
미유키의 첫 말에 새파랗게 질리던 사와무라의 표정이 덧붙여진 말에 빨갛게 변했다. 퍼랬다가 붉었다가 알록달록해지는 사와무라의 얼굴은 적잖게 우스웠지만, 미유키도 여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이렇게 멋없는 청혼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대로 꼬인 계획에 미유키는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잔뜩 헤집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물론 진짜로 했다가는 더욱 꼴사나울 것을 알기에 미유키는 참았다. 대신 조금 더 밀어붙이기를 선택했다. 지금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허접하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도 기회였고, 미유키는 찬스를 놓치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테이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미유키가 사와무라에게 성큼 다가섰다.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시선만 도록도록 굴리는 사와무라가 보였다. 청혼, 청혼? 결혼? 나, 미유키? 혼자 중얼거리며 혼란에 빠져 있는 사와무라는 정신이 반 쯤, 아니 반 이상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제서야 흠칫 정신을 끌어온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올려다보았다. 고등학생때와 거의 변하지 않은 황금의 눈과, 얼굴이 있었다. 긴장이던, 뭐던. 어떠한 감정으로 파르라니 떨리는 그 둥근 눈을 보며, 미유키는 한 번 말을 가다듬었다. 머릿카락 속에 감춰진 시뻘겋게 변한 귀만이, 미유키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대변해주었다.
“나랑 결혼해 줘, 사와무라.”
“아니... 그게... 그...”
“결혼해 줘.”
같이 살고 있지만 그래도 결혼하는 것과는 다르잖아. 응? 조곤조곤 속삭이는 미유키의 목소리는 낮고 달콤했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이런 미유키의 목소리에 퍽 약했다. 차마 미유키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쩔쩔매던 사와무라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안 됌다!”
“...응?”
“못 함다!”
...어? 이번에는 미유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애써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그 잘생긴 얼굴에 들어찬 것은 고뇌였다. 거절당했다, 사와무라한테. 아니, 그. 결혼이 싫다는 건가? 설마 싫은 걸 밀어붙였다고 나한테 정이 떨어져 버린 건... 스스로 한 생각에 본인의 심장이 몇 번이나 쿵쿵 떨어졌는지 몰랐다. 점점 나빠지는 미유키의 표정을 미처 보지 못한 사와무라가 말을 이었다.
“미유키는 프로고, 인기도 무진장 많은데! 저는 남자고, 미유키랑 다른 팀이고... 물론 미유키는 좋지만! 그러니까... 결혼해서 미유키에게 방해가 되는 건 싫슴다!”
“......아아.”
다행이다. ‘그런’ 이유구나... 미유키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그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녹아내릴듯 상냥한 미소가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에 걸리자, 빈말없이 뒤에서 후광이 비칠 정도였다. 사와무라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미유키는 저가 붙잡은 사와무라의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속삭였다.
“사와무라 너도 프로고, 두루두루 인기 있고, 남자인데다가. 나랑 다른 팀이지. 조건은 똑같잖아? 나도 결혼해서 사와무라에게 방해가 되는 건데, 왜 너만 쏙 빼.”
“저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혼하는 나는 진짜 못됬는데.”
하지만, 그런데도.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조금 더 잡아끌었다. 살짝 찡그린 인상의 저 얼굴마저도 퍽 사랑스러웠다. 언제나 그랬다. 미유키 역시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쏟아질 시선이 무섭지는 않아도 그것이 사와무라에게 향한다면 무서웠다. 그런데도 이런 청혼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사와무라와 결혼한다는 것이 행복할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사와무라에게 미유키라는 성을 준다는 것이, 그만큼이나.
“저랑 결혼해주세요.”
“미유키,”
“부디 결혼해주세요, 사와무라 에이준 군.”
에이준. 그 목소리에 사와무라는 결국 절박하게 미유키를 올려다보았다. 달콤함이 흘러넘치는 그 표정만이 사와무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벙긋거렸던 사와무라는,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함다, 미유키.”
“나도 좋아해.”
“......결혼했는데 스캔이라던가 나버리면 진짜진짜 질투할 검다.”
“환영이야.”
진심이었다. 사와무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이 잔뜩 물들어있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미유키 카즈야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처음 만났을 적과 전혀 변하지 않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앳된 미소.
“저랑 결혼해 주십쇼, 미유키 카즈야.”
“...네.”
미유키가 키득키득 웃었다. 사와무라 역시도 웃는 얼굴이었다. 미유키가 손을 뻗어 사와무라를 끌어안자, 사와무라 역시도 손을 뻗어 등을 감싸안았다. 품 속에 안긴 온기에게 속삭였다.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저야말로.”
아침햇살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