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꽤 과거... 19세기 즈음...? 시대고증은 제대로 안 되어있지만()() 중앙아시아 정도의 배경입니다() 이어... 쓸까..? 쓰려나? 잘 모르겠다...
00.
“여행을 왔슴까?”
눈이 마주친 순간 사내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크게 휘어지는 미소가 명쾌했다.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들 제 갈길 따라 걷는 사람들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상대의 시선은 정확하게 미유키에게 닿아있었다. 미유키는 그제야 상대가 자신을 향해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행을 왔슴까?”
상대가 다시 물었다. 미유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그러자 상대가 환하게 웃었다. 미유키는 그제야 천천히 상대를 살폈다. 갈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아무리 봐도 앳된 얼굴이었다만, 내미는 손은 단단해보였다. 미유키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웃는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며 한 번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맞잡으라는 의미였다. 미유키는 곧 상대의 손을 맞잡아 가벼이 흔들었다. 의미없는 악수였다.
“사와무라 에이준임다! 앞으로 잘 부탁드림다!”
아. 미유키는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를 깨달았다. 혈혈단신으로 타국에 떠난다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부터 미유키를 걱정하던 대학 선배 크리스가 추천해 준 안내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여행을 다닐 일 년간 미유키와 동행할 유일한 동행자이기도 했다. 미유키는 다시 한 번 상대를 바라보았다가, 가볍게 목인사를 건냈다.
미유키 카즈야입니다.
일 년을 함께할 여행의 첫날이었다.
01.
동행자,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많이 다른사람이었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말이 많고, 소란스러웠으며, 안내인 일에 서툴렀다. 손길은 다부졌지만 야무지지 못했고, 소소하게 빠뜨리는 구석도 있었다. 요리는 잘하지만 설거지에 서툰 것처럼 아주 미묘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채우는 것은 미유키의 역할이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그렇게 하나씩 챙겨줄때마다 머쓱하게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미유키는 어느정도 지금의 동행인에게 만족했다. 사와무라가 안내인 일이 완전히 몸에 벤 숙련된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재주가 하나 있었는데, 함께하는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재주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잠깐 품었던 상상 이상으로, 지금의 여행은 기분나쁘지 않을정도의 소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사와무라의 덕분이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로써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 이곳에 대해 말하는 사와무라의 표정에는 언제나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별처럼 빛나고 있어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감탄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향이 싫어 도망치듯 이곳으로 오게 된 미유키로써는 차마 흉내내기도 힘든 것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양때 울음소리, 청명한 하늘, 그 하늘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매와 야생 동물을 사냥하여 낚아채는 그 몸놀림, 날개짓. 까마득한 돌산과 그 위를 뛰어오르는 산양. 별이 가득한 밤하늘과 흥겨운 춤과 노래. 모두가 어울리는 축제와 화려한 자수,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 전통들. 장인이 만들어낸 나무장식과 사람이 가득한 결혼식, 그리고 결혼하는 신부...
마치 노래에 가깝게 음을 붙여 흥얼거리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유일한 청자인 미유키에게는 참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다.
02.
사와무라는 언제나 한 쪽 어깨에 활을 매고 다녔다. 사와무라의 말에게는 화살통과 화살 역시도 묶여있었다. 사와무라는 밤에 종종 사용하지도 않은 그것을 손질하고는 했다. 그것은 일견 버릇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장식용, 혹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위협용이 아닌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미유키가 알게 된 것은 여행을 시작한 지 삼 주가 조금 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미유키는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건강이 약하다거나 심신이 미약하지도 않았으니 어떻게든 입에 쑤셔넣어 한 입이라도 더 씹고는 했지만, 썩 맛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너무 기름지거나, 너무 퍽퍽하거나, 혹은 너무 짰다. 음식을 만드는 사와무라는 그 사실에 미안해하고는 했지만, 그리고 어떻게든 미유키에게 맞춰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와무라의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또,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음식은 훌륭했으나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인 탓에 적응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익숙해지면 괜찮을 겁니다.
미유키는 그리 말하며 기 죽은 표정의 사와무라를 달랬다. 사와무라가 저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여행을 떠난 뒤 바로 다음날의 일이었지만, 미유키는 아직까지도 사와무라에게 거리감 있는 존칭을 쓰는 중이었다. 말을 꽤나 편하게 하는 사와무라와는 반대의 일이었다.
미유키는 그 뒤로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식생활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마 미유키의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와무라에게 있어서 그 일은 어지간히 중요한 것이었는지, 사와무라는 그 날 옆을 지나가는 야생 토끼에게 활을 겨눴다. 이제껏 몇 번이고 야생동물을 지나친 적이 있었지만, 사와무라가 활을 쥔 것은 처음이었다.
미유키는 그 날 처음으로 사와무라의 과거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과 힘이 들어간 팔, 둥근 눈매가 순간 날카로운 위압감을 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일견 정적이 내려앉았다가, 쏘아진 화살은 그대로 토끼의 목을 꿰뚫었다. 즉사였다.
죽은 토끼를 앞에 두고 기도하는 사와무라의 모습을 미유키는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아마 하늘일 대상에게 기도하고, 화살을 뽑아내고 칼로 토끼를 해체하기 시작하는 모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사와무라는 능숙한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안내인은 사냥꾼일 필요가 없었다.
미유키는 한 손에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빠짐없이 응시했다. 도축작업따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미약하게 꺼림칙하기까지 했지만 사와무라의 모습에서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일견 경건해보이기까지 했다. 이유는 몰랐다. 어쩌면 활을 쏘는 그 옆모습이 꽤나 아름다워서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기도하는 그 모습이 그 누구보다 진중해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 같은 것은 알 수 없엇고, 미유키는 그런 감각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날 저녁은 토끼구이였다. 그것은 맛있었고, 그 뒤로 더 이상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일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끼손가락에 엮여져 있다는 그것.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져 있었다. 그 실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물게, 아주 드물게 실존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그 사실을 침묵하고는 했다. 다른 사람의 인연이 보인다는 것은 아주 위험했고, 세상에는 운명으로 엮여있지 않아도 사랑하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리어 운명을 정확히 찾아 만나는 것이 더 드물었다. 타인의 운명의 상대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으로 그 사람들을 몇 번이고 불행하게 만든 이후, 그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이제 붉은 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것은 실존하는 환상처럼 특별한 무언가로써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미유키 카즈야는, 바로 그 ‘특별한’ 사람에 속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보이던 것은 모든 사람들의 새끼손가락에 엮혀있는 빨간 실이었다. 얇지만 질기고, 어째서인지 벽이며 건물을 모조리 통과해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듯 싶었다. 미유키가 그것이 운명의 붉은 실임을 알아차린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였다. 미유키와 같은 사람들이 주로 초등학교 저학년에 그 사실을 눈치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미유키 카즈야는 또래보다 조금 영리하여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또 다른 점은 그런 비밀을 선뜻 말해줄 정도로 친분을 깊게 쌓은 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유키의 비밀은 우연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기연으로 인해 지켜질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 그것이 운명의 붉은 실임을 알게되자, 미유키 역시도 실 끝에 연결된 사람이 궁금할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에 흥미를 잘 두지 않는 야구 외길을 걷고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호기심 정도는 가지게 되었다. 제 운명의 상대는 누구일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 것들.
하지만 미유키의 운명의 상대는 아마도 먼 곳에 살고 있는 듯 싶었고, 아무리 실을 따라가도 그에 얽혀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렸던 미유키는 금방 제 짝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야구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미유키는 충분히 바쁜 사람이었고, 기력을 다른 곳으로 쏟을 마음도 쏟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만날 사람이라면 만나겠고, 아니면 말겠지. 미유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금방 실에 관한 것을 잊었다. 야구하는 도중 경기장 여기저기에 실이 엉켜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곤란한 일이었지만, 그것 역시도 시간이 흐르면서 금방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익숙함이 생소함으로 변했던 순간이 바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세이도 고등하교 그라운드. 아마도 레이쨩이 데려온 것 같은 중학생. 처음 보는 소년이었지만 미유키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제 새끼손가락에 얽힌 끈이 어지럽게 시야를 가렸다. 상대와 이어져있었다. 빛을 받아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시끄럽게 소리치는 목소리, 야구를 하는 사람, 투수.
허, 미유키는 짧게 숨을 뱉어냈다. 투수, 투수였다. 미유키의 붉으 끈으로 이어진 사람은. 아마도 운명이라고 이름붙여진 사람은.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있었다. 그래, 어떻게 미유키 카즈야의 짝이 야구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미유키 카즈야의 운명으로 엮인 사람이라면 어찌 투수이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저 투수가 내 운명의 상대.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매만졌다. 단단히 묶여있는 붉은 실이 있었다. 제대로 상대와 이어진. 사와무라, 사와무라 에이준. 미유키는 입 속으로 그 이름을 굴려보았다. 혀끝이 묘하게 간질간질했다. 단것도 같았다.
그리고 사와무라 에이준은 결국 미유키 카즈야가 있는 세이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다시 한 번 소년을 만났을 때, 미유키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관계상(..) 잘라낸 부분이 많아서 조금 아쉬운 글... 어쩌면 이어지는 무언가를 쓸지도 모르겠다()
미유키가 아주 조금 등장합니다... 주의! 개연성 없음도 주의하고 이것저것... 이제 이건 고정멘트같군요 언제나 봐주시는 분들께는 감사합니다 umu)*
잠에서 깨어난 순간, 사와무라 에이준은 상실을 직감했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지만, 명백하게 달랐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평범한 일상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찾아 헤맸다. 두어번 둥근 눈이 깜박여지고, 윗층 침대천장만 멀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오늘의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었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감각이었다. 사와무라 에이준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했다. 그 감정은 진솔해서, 그의 내면 어딘가에 위치하여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얼굴모를 누군가를 떠올릴 때마다 사와무라는 조금 행복해지고, 조금 기뻐졌으며, 어딘가가 조금 쓰렸다. 두근두근 울리는 심장소리에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였다. 사와무라는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했다. 그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주 큰 문제처럼 느껴질 정도로 좋아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 스스로도 의아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잊은 거지? 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을 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누구지?
사와무라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같은 방의 쿠라모치 요이치였다. 사와무라는 자신에게 어서 일어나라며 걷어차는 선배에게 바락바락 소리치며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아침을 먹기 위해 니적니적 준비하며, 사와무라는 물었다. 무심한 목소리였다.
“쿠라모치 선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심까?”
“뭐? 그딴 걸 왜 나한테 물어?”
사와무라의 질문에 쿠라모치는 단박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전에 사와무라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쿠라모치는 일단 근본적인 의문을 찾았다. 사와무라는 그의 후배이자 룸메이트였고, 같은 부활동을 하고 있기도 했다. 즉, 함께 공유하는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더군다나 쿠라모치는 결코 둔한 타입도, 무언가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도리어 쿠라모치만큼 예리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런 쿠라모치마저도 제 시끄럽고 활발한 후배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런 간질간질한 분홍빛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쿠라모치는 당황스러울수밖에 없었다. 쿠라모치는 다시 되물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냐?”
“있슴다. 근데 모르겠슴다.”
이건 또 뭔 헛소리야. 쿠라모치는 이상한 말을 하는 후배를 다시 한 번 걷어차주는 것으로 선배의 애정을 과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배는 왜 때리냐며 버럭거리기는 했지만서도. 건방진 짓을 해 주는 후배에게 다시 한 번 관절기를 거는 것으로 아침을 맞은 두 선후배는 곧 아침을 먹으러 그제야 방 밖으로 나왔다. 쿠라모치에게 아침운동처럼 흠씬 혼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와무라는 여전히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아침공기인 탓인지 바깥은 생각보다 싸늘했다.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몸을 곧게 세운 사와무라는 여전히 곰곰히 생각에 빠진 채로 식당 안에 들어섰다. 누구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생각은 사와무라가 밥공기 세 그릇을 비운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평소 입장부터 쩌렁쩌렁했을 사람의 기묘한 침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바로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하루이치나 카네마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식사를 끝마친 사와무라가 제 숟가락 끝을 입에 물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까지 확인한 하루이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이준 군, 무슨 일 있어?”
“응? 응. 그럴지도?”
“무슨 일인데?”
하루이치는 직구로 물었고, 동시에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있었다. 알게모르게 틀림없이 신경을 끌었을 터였다. 고요한 사와무라 에이준은. 하지만 그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사와무라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결론은 담백했는지, 금방 사와무라는 하루이치를 돌아보았다.
“하룻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예상못한 질문에 하루이치의 표정이 단박에 흔들렸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당혹스러워하는 친구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사와무라는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도 좋아하는데,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그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그 상황에 마주쳤다는 답답함과 초조함을 논리없는 말로 모조리 뱉어낸 사와무라는 은근한 기대를 담아 하루이치를 바라보았다. 마치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사와무라의 말을 들은 주변이 숨죽여 시끄러워지는 것은 들리지도 않는지, 사와무라는 눈을 빛내며 하루이치를 보고 있었기에, 하루이치는 결국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응. 전혀!”
“그런데... 그, 좋아...하고?”
“응!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은 당당하기까지 했다. 하루이치는 할 말이 없었다. 에이준 군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루이치의 머릿속에 제일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루이치 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카네마루나 후루야, 토죠의 경우도 같은 것을 떠올렸을 터였다. 하지만 역시,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가장 확신되는 것이 야구라는 점에서 이미 망한 것 같았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야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야구를 잊었더라면 지금처럼 조용할 리 없을 터였고.
그렇기에 하루이치는 조금 감탄마저 나왔다. 하루이치마저도 사와무라의 감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사와무라 에이준이었는데도.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사방팔방 내뿜는 것을 훨씬 잘 하는 사와무라건만. 그렇기에 하루이치는 물었다.
“생각나는 이미지라던가, 그런 건?”
“으음...”
사와무라가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허공을 헤메는 시선이 불확실하게 어느 한 지점을 응시했다. 얼굴을 찐빵처럼 일그러뜨리며 끙끙거린 사와무라는 딱 한 마디를 뱉었다.
“노란색.”
“노란색?”
하루이치가 되물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노란색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근처에 노란 머리카락이나 눈을 가진 사람 역시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진행되기 전에 사와무라가 말을 이었다.
“보고 있으면 눈을 땔 수가 없어. 뜨겁고... 흙 냄새랑... 땀 냄새가 나고. 뭔가 머리가 멍하고 아득한데 심장이 두근두근해. 굉장히 기분이 좋아. 계속 그렇게 있고 싶었고. 좋아해. 보고 있으면 계속 좋아한다가 가득 쌓였어. 그래, 그런... 기분이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낯뜨거워질 정도의 고백이었다. 그 감정을 제대로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그 경악을 이끌어낸 장본인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 감정은 아직도 제대로 제 안에 있건만, 누구에게 향하는지를 기억해낼 수 없어 괴로웠다.
누구였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로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보고 있으면 행복해졌고, 조금 화가 났지만 그래도 좋았다. 언젠가는 인정하게 만들어주겠다며 이를 갈곤 했던──
“뭐야,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사와무라는 막 안쪽으로 들어서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잘생긴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네 짓이냐?’ 시선이 그리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와무라는 깨달았다. 깨닫지 못할 수가 없었다. 상대에 대한 기억은 잃었어도 몸은 놀랄 정도로 정직하게 반응했다. 심장뛰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사와무라 에이준은 꽤나 인기 있는 아이돌이었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아홉. 그보다 훨씬 젊고 앳된 아이돌이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조금 애매한 나이에 데뷔하였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놀랄 정도로 승승장구. 노래나 춤도 괜찮았지만 주로 예능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특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인지도를 높이는 데에 성공한 아이돌이었다. 능력은 있어도 운이 없거나 운은 있어도 능력이 부족해 채 꽃피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수많은 아이돌들을 생각한다면 사와무라는 정말로 운도 타고나고, 또 재능도 충분히 있었기에 아름답게 피어난 사람이었다.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고 어딜 가든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며 나쁜 소문도 거의 따라붙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목적으로 했던 사람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사와무라 역시도 그것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있는 힘껏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 역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매니저, 이름은 미유키 카즈야. 졸업 직후 저가 붙잡아버린 사람이었다. 그것도 온전히 자신의 재능과 능력으로 붙잡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미유키가 품고 있는 마음에 매달려서 붙잡아버린. 그런 사람. 그는 사와무라의 매니저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위해 언제나 노력해주었다. 그리고 미유키는 사와무라같은, 과거 아직 장래가 한참 불투명했던 새내기가 아닌 톱 아이돌의 매니저를 해도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에 대해 언젠가 미유키는 별로 주눅들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었고, 사와무라 역시도 그러면 제가 톱 아이돌이 되면 되잖슴까! 하며 당당하게 웃었지만, 그 사실은 결국 사와무라에게 있어서 은근한 죄책감으로 마음 한편에 묻어있었다.
*
“수고했어, 사와무라.”
“고맙슴다!”
사와무라는 막 미유키가 건내준 물을 받아마시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뺨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땀이 화장에 섞여 끈적했다. 하지만 공연 자체는 대성공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기에 사와무라는 기분좋게 웃었다. 자신을 보며 울고 웃고 환호해준 팬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벅차올랐다. 무대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그 얼얼한 함성이 고스란히 피부에 묻어있었다. 몇 번이고 팔을 쓸어내리며 사와무라는 환하게 웃었다. 기뻐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와무라의 모습을 보며 미유키는 짓궂게 웃었다. 공연이 끝나서 괜찮다는 판단이 내려졌는지, 미유키는 이미 반 쯤 흐트러져있는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도 사와무라와 거의 흡사한 감정이 소리없이 내려앉아있었다.
“오늘로 첫 공연인데 이렇게 들뜨면 어떻게 해? 앞으로 일주일동안 전국순회라고.”
“알고있슴다! 걱정마십쇼, 잘할테니까!”
“그래, 그래. 오늘만큼만 해라.”
그 말은 ‘방금 공연은 좋았어.’ 혹은 ‘오늘은 괜찮았어.’ 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였기에, 사와무라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잘했다지만 이렇게 쉽게 칭찬해줄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자 의혹이 짙어졋다. 고양이를 쏙 빼닮은 눈이 급하게 미유키를 훑어보았다. 섬세하게 세로꼴로 뜨여진 눈은 미약한 경계심까지 담고있었다. 그 행동이며 표정 하나하나가 한 가지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람 진짜 미유키 카즈야인가?!’ 하는, 우습지도 않은 의심. 나 참. 바보같다고 해야할지 한결같다고 해야할지.
그리고 그 대꾸에 미유키는 조금 당황했다가, 씩 웃었다. 사와무라는 별 생각없이 던졌던 말에 언제나 상상 이상의 반응을 보여주고는 했었고, 그에 일일히 놀라는 것은 이제 졸업한 지 오래였다. 칭찬을 해 줘도 이런 반응이라니 어떤 의미에서는 참 칭찬하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었다. 미유키 카즈야의 아이돌은.
“왜? 너무 쉬우면 오늘보다 앞으로 훨씬 더 힘을 쏟아서 잘하겠다는 그런건가?”
“엑!? ...아니, 그럼요! 당연함다!”
오늘 사와무라가 무대에서 얼마만치의 기력을 쏟아부었는지 고스란히 알고있으면서도 미유키는 그런 말을 했고, 사와무라는 기꺼이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이 끝난 무대 뒤. 흐린 조명만 겨우 닿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의 사와무라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의지와 미래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까지 섞여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의 눈동자는 미유키가 처음 사와무라의 매니저를 하겠다고 결정한 그 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에 순간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베어물었다. 그래, 미유키는 이 사와무라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었기에 그의 곁에 있기로 결정했으니까.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그를 좋아하고 있기에 이 길을 선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리고 어쩌면 그것도 이유의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결국 독점욕 강한 미유키가 사와무라의 곁에서 그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자 결정한 이유는 저 눈이었고, 사와무라의 사랑스러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토록이나 빛나는 사람이니까, 너희들도 보아라. 그리고 사랑해라. 그런 오만하기까지 한 감정.
그러니까 이럴 때는 기특하다고 해 줘야겠지? 미유키는 소리없이 입속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각자 바쁜데다가 정신이 없어서, 공연이 끝난 아이돌과 그 아이돌을 챙기고 있을 매니저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직후 미유키는 곧장 사와무라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찍었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수준의 입맞춤이었지만, 사와무라의 뺨이 단박에 붉어졌다. 이미 천천히 식어가는 공연의 열기 탓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미유키가 또 한 번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사와무라에게서 이런 표정을 이끌어낼수밖에 없는 사람은 미유키밖에 없다는 점에서, 일단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
“미유키, 여기 또 미유키 글 떴슴다.”
“나? ...아아, 그렇네.”
사와무라가 가리키는 노트북 화면을 미유키는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기 아이돌 사와무라 에이준의 잘생긴 매니저는 사와무라의 팬클럽에서 어떤 의미로는 화젯거리였다. 그래도 어차피 그 사와무라의 팬클럽에서 돌아다니는 말인지라, 들어도 기분나쁘지 않을 정도의 농담이나 외모에 대한 감탄. 혹은 사와무라의 매니저로 있어줘서 고맙다는 수준의 감사가 대부분이었기에 미유키도 그 쪽에 관해서는 크게 제지하지 않는 편이었고 말이다. 특히 감사를 들을 때에는, 확실히 기분이 좋았으니까.
이번에 올라온 글 역시도 감사에 가까운 말이었다. 언젠가 미유키와 사와무라가 함께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인지, 흐릿한 사진 한 장과 함께 기쁨으로 인한 자음과 모음으로 도배된 글이 잔뜩 덧붙여져있었다. 그런 제 팬의 모습이 귀엽기라도 한지, 키득키득 웃으며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사와무라의 뒷모습을 보며 미유키는 제 일로 시선을 돌렸다. 빼곡히 적힌 일정표는 사와무라의 것이었다.
“내일 제일 첫 스케줄은 코미나토랑 같이 찍는 화보야. 아침 여덟 시. 일찍 자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와무라.”
“코미나토?! 하룻치임까, 아님 형님쪽임까?!”
“동생 쪽.”
오옷, 하룻치!! 오랜만에 실물로 봄다!! 주먹을 불끈 움켜쥔 사와무라가 허공을 향해 몇 번 붕붕 휘둘렀다. 신이 난 기색이 역력한 사와무라를 보며 미유키는 별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데뷔 초반에 야구 고정 예능을 함께 찍으면서 코미나토 하루이치와 사와무라 에이준이 얼마나 친분을 쌓았는지는 꽤나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아, 거기에 후루야 사토루까지 포함해서 세 명. 신이 나서 방방 뛰는 사와무라를 적당히 방치하며 미유키는 그 옆에 자신이 써 놓은 설명을 덧붙여 읽었다.
“생화를 들고 찍는 거라네. 설마해서 묻는건데 꽃가루 알레르기 없지?”
“없슴다! 으하하! 하룻치랑 꽃이라니, 어울리네요!”
“너도 들어야 하거든?”
그 자각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미유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베게를 품에 안고 침대를 구르기 시작하는 사와무라의 옆에 앉았다. 침대 한 쪽이 움푹하게 내려앉았다. 손을 뻗어 사와무라의 베게를 빼앗아온 미유키가 문득 물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꽃, 뭐더라? 들은 적 있는것 같은데.”
“뭠까, 기억 못하는 검까?!”
“......”
긍정하면 기분 나쁜데. 부정하기에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와무라에게 지금과 같은 의미의 관심을 품고있을 때였던 것 같기는 하다만,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시간들 중에서 지나가듯 했던 대화였으니까. 인상을 찡그리고 찬찬히 흐릿한 과거를 되짚어보고있는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는 싱글벙글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은 기억하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그 미소에 미유키는 은근한 불만을 담아 사와무라의 머리를 꾸욱 눌러주었다.
“아, 본인이 기억 못하는 걸 저한테 화풀이 하지 마십쇼! 소중한 아이돌의 머리를!”
“네에, 네. 그래서 퀴즈라면 맥을 못 추는 소중한 아이돌 님. 그쪽은 기억을 하고 계시나보죠?”
“당연함다! 미유키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해바라기!”
뭐야, 꽤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잖아? 지금까지도 같은 꽃을 제일 좋아하고 있는 미유키는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미유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개구지게 웃은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다시 제 베게를 빼앗아 얼굴을 파묻었다.
“미유키도 한 번 기억해내 보십쇼~!”
“...오냐.”
솔직히 말해 진짜로 기억이 날 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노력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미유키는 허탈하게 웃으며 사와무라에게 제대로 누워서 자라며 잔소리 한 웅큼을 던졌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사와무라는 왜 자신이 아직까지도 해바라기를 좋아하고 있는지. 이유는 모르는 모양이었으니까. 해를 쫒는 꽃이라니, 마치 그와 같지 않은가.
물론, 제대로 태양을 손에 넣었다는 점에서 슬슬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것을 졸업해도 될 것 같지만. 미유키는 불을 끄고 사와무라의 옆자리에 누웠다. 그 온기를 품에 끌어안으며 달큰하게 웃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더더욱 상냥해지는 미소였다. 천천히 등을 도닥이며, 미유키는 느린 숨을 뱉어냈다.
이제 밤이 찾아왔으니, 그만 잘 시간이었다.
이상하다 과거의 나는 해바라기를 저렇게 쓸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미유키의 좋아하는 꽃은 자작입니다 날조입니다(밑줄쫙) 그래도 일단 전력 60분이니까! 괜찮겠지!(?) 미사와 행쇼! (손붕붕)
사와무라 에이준은 제 감정에 솔직했다. 솔직하다 못해 일견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도리어 그를 아는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긍정했다.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소리치고,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했다. 그러면서도 애정 담긴 매 한 대, 잔소리 한 줌으로 끝내고 다시 웃을 수 있는 것이 그의 특별한 점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장기였다.
그렇게까지 특출나지는 않은 외향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가을 밀밭의 눈은 언제나 의지를 담아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렇기에, 미유키 카즈야는 그 눈에 집중할수밖에 없었다. 마운드 위에서 온전히 빛나는 그 모습은 얼마나 눈부신지.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가 투수이고, 본인이 포수인 것은 이것과는 다른 문제로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연정이라는 감정을 품은 것은 가랑비에 옷을 적시는 것처럼 소리없이 다가왔고, 눈 깜짝할 새에 미유키를 잠식하고 들어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코 야구였지만, 그것을 사와무라 역시도 함께하고 있기 때문일까, 종종 어디에 있던 가장 큰 소리를 내고 있는 그를 눈으로 쫒고는 했다. 언제나 변하지 않았다. 시끄럽고, 활기차고. 눈은 그대로 반짝반짝. 미유키가 좋아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랬는데,
그럤었건만.
사랑에 빠진 사와무라 에이준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생소한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웃는 사와무라의 모습은 낯설었다. 다른 의미로 붉어진 뺨도, 접히는 눈매도, 평소보다 낮은 성량으로 외치는 목소리도. 누구를 좋아하는지는 몰랐다만 미유키는 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매만지는 흉내를 내며 애써 능숙하게 가렸다고 생각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대로 있어달라고 바라는 것이 오만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사와무라는 사람이었고, 성장하는 만큼 다른 식으로 변화할수도 있는 인간이었다.
여름의 끝물이었다. 늦더위라도 몰려오는지, 기온은 드물게 높기까지 했다. 마지막 하소연이라도 하듯 매미가 울고, 슬슬 새 것을 살 때가 된 낡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애처로웠다. 사와무라는 마루 위에 드러누워 올해 여름의 마지막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며칠이라는 기한을 두고 주어진 휴식은 달콤했지만, 그것의 끝물이 다가올수록 지루해지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연습이 일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점심으로 백숙 한마리에 후식으로 수박도 크게 한조각 잘라 모조리 먹어치운 사와무라는 따땃한 배를 매만지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당장 일어나서 공이라도 던질까, 싶었지만 지금 당장 공을 받아줄 사람도 없으니 썩 흥이 나지 않았다. 언제나 필요할 때에는 없다니까. 사와무라는 그리 중얼거리며 입을 비죽였다. 벽이나 그물망에 던지는 것도 싫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보다 흥이 덜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밥을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잠깐만 쉬고 미유키 오면 시작해도 되겠지. 사와무라는 단순히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외출한 미유키의 입장으로써는 오자마자 공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는 것은 깨끗하게 외면한 채였다.
빨리 오라고, 미유키! 사와무라는 그리 중얼거리며 깊게 숨을 뱉어냈다. 울리듯 멀찍이서 들리는 매미소리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흐릿해지는 시야를 느끼며 사와무라는 느즈막히 저가 잠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장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한낮의 낮잠이라니, 대단한 사치였다.
사와무라가 기다리던 미유키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고작 삼십 분 조금 더 지난 뒤였다. 가을의 초입이라 불러도 될만한 날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운 한낮의 햇살에 고생 깨나 했는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은 한여름 못지 않았다. 팔목으로 그것들을 대충 닦아내며 미유키는 집으로 들어섰다. 제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집에 발을 디딘 사내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음에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와무라? 다시 한 번 부르며 미유키는 집 안을 모조리 돌아다녔다. 사와무라의 모습을 발견한 곳은 침실과 부엌, 거실이며 화장실에 손님방까지 모조리 다 뒤진 뒤에야 걸음한 마루였다. 코드가 길게 연결된 선풍기는 소리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주변을 굴러다니는 건 익숙한 야구공. 더운 탓인지 배까지 내놓고 넓게 누워 도롱도롱 잠들어있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미유키는 헛웃음을 뱉어냈다. 쓸 데 없이 걱정했잖아. 찾아도 보이지 않는 것에 초조했던 심정을 단박에 날려버릴 정도로 평화롭게 잠든 그 모습에 괜사리 심술이 나서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만, 일단 그것은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드물 정도로 기분좋게 자고 있었으니까.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머리를 향해 돌아가는 선풍기를 발치로 옮기며 그 주위의 야구공을 치웠다. 사와무라의 잠버릇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지만, 혹시 뒤척이다가 몸에 눌려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걷어올라간 웃옷은 다시 얌전히 내려준 뒤, 짧게 그 배를 토닥여주기도 했다. 단단하게 느껴지는 근육에 포수로서 만족스럽게 웃기도 했다. 그렇게 사와무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집 안쪽으로 들어선 미유키는 얼마 안있어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스코어북과 부채를 하나 들고 나왔다.
사실 그리 집중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맘좋게 마루에 누워 선풍기나 돌리고 있었지만, 집 안에 들어가 문이라는 문은 모조리 꽁꽁 닫고 에어컨이라도 켜는 편이 훨씬 시원할 게 뻔했다. 그리고 매미소리나 가끔 자동차 굴러가는 생활소음도 들리지 않겠지. 하지만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스코어북에 집중하며 부채질을 시작했다. 사와무라의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다.
스코어북을 보면서도 짬짬히 돌아보면, 자고 있는 사와무라의 얼굴이 보였다. 마냥 풀려서 헤실거리는 모습이 조금 바보같기는 했지만 가만히 침묵하면 도롱도롱하고 작게 들려오는 숨소리가 있었다. 미유키의 표정이 더없이 상냥해졌다. 사와무라가 깨어있더라면 당신은 누굼까!! 미유키 카즈야가 아니구나!! 하고 외칠 정도의 달콤함이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잘 지어주지 않는 거지만. 미유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와무라의 뺨을 잠시 찔러보았다. 그 정도 자극에는 깨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확신대로, 한 번 입을 우물거렸을 뿐 사와무라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오래 잠들어 있지는 마. 미유키는 속으로 속삭이며 천천히 사와무라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드물게 고요한 한낮이었다.
사와무라 에이준은 퉁퉁 부어있었다. 뾰로통한 표정이며 잔뜩 날을 세운 고양이눈이 제 불만을 온 사방에 소리치고 있었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님까! 다시 생각해보고 또 북받쳐오른 것인지, 발을 쾅쾅 구른 사와무라는 뒤를 획 돌아보며 외쳤다. 그리고 그 뾰족한 목소리가 향하는 장본인, 미유키 카즈야는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이야, 하지만 네가 너무 잘 자고 있더라고?”
“그래도! 시간이 이렇게 됬으면! 깨웠어야 되는 거 아님까!”
마지막 휴일이었는데! 미유키에게 공 받아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에!!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탁상시계를 단단히 잡아 마구 흔드는 사와무라를 보며, 미유키는 허탈하게 웃었다. 물론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공 받아준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한 적 없었다. 하지만 뭐, 너무 오래 재운 건 맞나? 미유키는 시선을 돌려 벌써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집에 와서 잠든 사와무라를 발견한 것이 막 점심을 먹고 한 시간이 채 안 되었을 무렵이니, 확실히 오래 잔 것 맞았다. 이제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아직 해가 길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으니까. 미유키는 그렇게 제 행동에 정당화를 세웠다. 낯선 고요였지만 낯설기에 싫지 않았고, 처음에야 어서 일어나기를 바랬다만 오래 잠들어 저를 홀로 두는 사와무라가 꽤나 신선했기에 한 번 쯤은 그냥 두어보고도 싶었다. 그렇기에 결국 깨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군다가 몇 시간에 한 번 정도 잠꼬대로 미유키의 이름을 부르는 사와무라가 과하게 사랑스러웠던 탓도 있었다. 미유키는 스스로 그리 납득하며 얼굴에 웃음을 그렸다. 그 웃음에 사와무라가 조금 더 발끈해하는 것도 같았다. 물론 알고서 하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지금이라도 공 받아 주십쇼!! 10구라도! 아니 20구! 40구!”
“왜 점점 늘어나는 건데?”
본래 줄이는 쪽이 맞는 거잖아?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미유키였다만 그 얼굴에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웃는 표정만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도 그쪽으로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본격적으로 졸라대기 시작했다. 조른다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과격하기는 했다. 곧장 미유키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으니까.
“오늘 에이스님이 공을 하나도 못던진 것의 책임을 지고 받아내는 검다!”
“아직 에이스 아니잖아?”
“미래의 에이스!”
말하는 모습은 당당했다. 그리고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에이스 넘버를 받을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 다른 사람마저도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러한 무언가. 그것을 가득 담아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의 눈동자가 올곧게 미유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유키는 언제나 그 눈에 약했다. 물론 사와무라가 들었다면 거짓부렁이라며 또 목소리를 높였겠다만, 미유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이번에도 먼저 손을 든 것은 미유키였다.
“...딱 30구만이야.”
“앗싸!!”
역시 미유키!! 로 시작하는 온갖 칭찬일색들을 반은 흘리고 반은 기쁘게 받아내며 미유키는 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사와무라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글러브와 야구공을 챙긴 사와무라는 벌써 준비 끝났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미유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그 옷차림을 눈으로 훑어내렸다. 공을 던지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옷차림이었다만, 문제가 있다면.
“겉옷 하나 더 챙겨입어.”
“에? 덥슴다!”
“공 던지고 오는 길에 추워져.”
슬슬 초가을이었고, 지금 당장이야 해가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본격적으로 밤이 되면 기온은 낮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뚝 떨어졌다. 더군다가 공을 주고받는 동안 데워진 몸이나 흐른 땀도 그 사이에 식을 게 뻔했고. 미유키의 주장은 타당했기에, 사와무라는 별 말 없이 그리 두껍지 않은 겉옷을 하나 더 챙겨 허리에 묶었다. 그에 미유키가 칭찬의 의미로 웃으며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집 밖으로 나서며 사와무라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걷는 길과 별달리 달라진 것도 없건만, 그 시선에는 묘한 호기심과 들뜬 감정이 남아있어서 미유키는 가끔 신기하기도 했다. 시력차이를 제외하고는 딱히 다른 것도 없을 텐데, 사와무라의 눈에는 언제나 특별한 것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공을 던질만한 공터는 느긋하게 걸어 십오분이면 도착했고, 그 시간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벌써 가을이 되가는 것 같슴다! 고교 시절이었으면 가을 대회 준비인가요! 아니, 3학년 선배님들의 은퇴가 먼저겠나?! 하며 쫑알쫑알 말을 붙여오는 사와무라에게 적당히 대꾸해주는 게 미유키의 역할이었다.
도착하여 부러 볼록하게 만들어둔 임시마운드에 선다면 다시 조용해질 테니까, 그때까지는 이 기분좋은 소음을 즐기는 것도 좋았기에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던져대는 온갖 말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받아주었다. 언제나처럼 소란스러운 밤이었다.
소년은 제 삶이 참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반, 같은 부활동의 1군 주전이라는 녀석은 한없이 칠칠맞고, 소란스럽고,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여러가지 의미로 바보여서 카네마루는 그런 사와무라의 뒷목을 낚아채고 화내고 잔소리하며. 하지만 결국 챙겨주고 도와주기는 해야 하는. 여하튼 그런 식으로 잡아두지 않으면 어디로 굴러갈 지 모르는 1학년 투수 사와무라를 통제하는 것이 카네마루가 선배들로부터 건내받은 임무였다. 이제 막 1학년 여름이 기울어져가는 지금 카네마루에게 있어서 3학년 선배의 명령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튼 시간이 흐르고 상대와 부딪치는 시간이 길어지며 미운정도 들어버린 것인지, 본인의 상상 이상으로 카네마루는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런 부분은 카네마루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저기 자는 녀석 누구냐?”
“사와무라요-.”
벌써 수업은 6교시에 돌입했는데, 저 질문을 받은 것이 여섯 번째라는 것을 생각하면 통탄할 노릇이었다. 저런 녀석이 야구명문 세이도 고교의 주전이라고 생각한다면 같은 세이도 고교 야구부 소속, 주전은 아닌 카네마루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담당교사인 국어선생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결국 염치 불문하고 카네마루는 또다시 옆 자리 남자아이의 옆구리를 찌를 수밖에 없었다. 성격이 좋은 것인지, 바보지만 그래도 미워할수는 없는 사와무라이기에 너그럽게 봐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같은 반의 학생들은 다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사와무라의 등을 대신 두드려주었다. 사와무라군, 일어나. 사와무라의 뒷자리에 앉은 소녀가 그를 깨웠다. 그 목소리에 사와무라가 일단 몸을 일으켰다.
물론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반 쯤도 아니고 완전히 감긴 눈으로 앉아서는, 연필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고개도 반 쯤 옆으로 기울어 침이라도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저게 진짜 가지가지하네. 카네마루는 어이가 없어서 턱을 괴고 사와무라의 등을 노려보았다. 결국 쉬는 시간의 종이 칠 때까지 사와무라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꿈나라에서 공이나 던지고 있었다.
“얌마, 사와무라. 언제까지 잠만 잘거야?! 평소보다 훨씬 심각하잖아.”
“오오, 카네마루... 괜찮아, 공은 던진다!”
“그게 문제라서 물은 것 같냐?!”
적당히 자라고! 양심없는 놈아! 카네마루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책상 위에 엎어져 헤롱거리는 사와무라를 보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평소에도 자주 조는 놈이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정신 못차리는 경우는 없었다. 뭔 일 있나. 결국 시작한 계기가 어떻든간에 사와무라에게 무르게 굴게 되어버린 카네마루는 시큰둥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 뭔 일 있었어? 평소처럼 연습하지 않았냐?”
“......아무일도 없었어!”
저게 어디서 거짓부렁이야. 카네마루는 엎드린 사와무라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를 보며 소리없이 혀를 찼다. 미유키 선배 일이구만.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물론, 저 연애질 사이에 낄 생각도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다. 나한테만 폐끼치지 마라, 나한테만... 그리 한숨쉬었다만, 결국 무슨 일이 생기면 사와무라에게 붙들려 고생하게 될 것은 카네마루라는 것은 명확해서, 그는 일견 우울해졌다.
새벽이었다.
사와무라가 자율연습을 끝마친 것은 이미 날짜가 바뀐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와무라에게 있어서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언제나 가장 늦은 시간까지 훈련장을 사용하다가 소등하고 나오는 것이 사와무라의 일이었다. 느즈막하게 샤워까지 하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걷던 사와무라는 문득 제 앞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람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미유키 선배? 뭠까, 이 시간에 안 자고.”
“그건 내가 할 소리거든?”
내가 무리하지 말랬지. 그리 말하며 가볍게 이마를 때리는 미유키의 행동에 사와무라가 단박에 미간을 찡그렸다. 금방이라도 특유의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지를 것 같은 그 모습에 미유키는 자연스럽게 그 입을 막아버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빙글 웃는 그 얼굴은 기분나빴지만, 정말 기분나빴지만! 그만큼 잘 생겨서, 결국 사와무라는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억지로 삼킬수밖에 없었다. 고양이를 닮은 뾰족한 눈이 불만을 가득 담고 치켜올라갔다.
당장이라도 불만을 소리칠 것 같은 사와무라의 표정에 결국 한 번 더 웃어버린 것은 미유키였다. 진짜 어떡하면 좋냐. 딱 그렇게 말하고 있는 눈으로 사와무라를 내려다보던 미유키는 곧 그 손을 사와무라의 머리에 얹었다. 막 씻고 나와 아직도 반 쯤 젖어있는 머리를 거칠게 헤집는 손은 사와무라가 가장 좋아하는 포수의 손이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차마 그것을 뿌리치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 뭐하는 검까, 진짜! 다만 그렇게 소리죽인 외침을 던질 뿐이었다.
가서 머리 제대로 말리고 자라. 그리 말하며 등을 떠미는 손길에 사와무라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뒤돌아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꽤나 심란했다. 어쩌면 곤란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쑥쓰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와무라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들어갈 생각이었던 미유키는 자연스럽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미유키가 막 그렇게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
“...안녕히 주무십쇼!”
멱살을 붙잡히고, 몸이 끌어당겨졌다. 공을 던지는 투수의 손이 제 입을 틀어막고, 가볍게 들리는 것은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인지 바싹 다가온 사와무라의 얼굴. 어라? 미유키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박였다. 그리고 사와무라가 격하게 멱살을 풀어내고 몇 발자국 물러난 순간 느즈막히 상황이 정리되었다. 지금, 사와무라가.
내, 내일은 제 공부터 받아 주십쇼! 그리 외치며 뛰쳐들어가는 사와무라의 발걸음은 방 안의 사람들을 다 깨우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힘찼지만, 미유키는 그에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와무라의 뒷모습기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은 미유키는 고개를 숙였다. 불그스름한 얼굴이 부끄러웠다.
“와... 그 정도에 이 정도로 설레는 거야?”
진짜 장난 아니네. 손으로 틀어막고 그 위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 땐 것 뿐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이 두근거려 견딜수가 없었다. 온 몸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미유키는 기분좋게 잠들었고 에이준은 내가 미쳤지!!!! 하고 밤을 거의 꼴딱 새웠다는 이야기... 의외로 길어졌다 :0
세상 모든 사람들이 1개 이상의 이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세상이라는 설정으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1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드물게 2개 혹은 3개까지도 이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있다는 설정. 하지만 2개도 나라에서 드물 정도로 극소수이고, 3개부터는 세계에서도 다섯손가락 안쪽에 꼽힐 정도로 드문 정도. 급은 D에서 SS까지 나뉘며, 숟가락을 구부리거나 라이터 수준의 불을 낼 수 있는 D부터 천재지변 수준까지 이르는 SS급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D~C급이고 학교에 몇 명 B급이 있는 정도. A부터는 도시에서 찾아봐야 할 정도고, S나 SS의 경우는 나라에서 한두명 있다면 많은 정도로. 이들 역시도 나라에서 관리 중.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은 제대로 된 친분이 있거나 하는 그런? 초면에 능력을 묻는 것은 무례인... 그렇다거나.
야구같은 스포츠에도 영향을 끼치는 이능력이 많으니까, 그런 이능력을 일시적으로 봉인하고 야구해야 하는 것. 야구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전부 그런 쪽. 덕분에 스포츠 소년들은 특히 이능력의 존재에 대해 무덤덤하다고 해야 하나 아아 있었지() 같은 느낌으로? 자주 쓰지도 않고, 스포츠나 야구 명문이면 명문일수록 부원들이 능력을 대부분 봉인해놓고 있으니까... 세이도들도 마찬가지로 제 능력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히 무덤덤할것같다.
그 중 에이준은 수인화였으면 좋겠다. 변하는 동물은 들고양이... 고양이귀가 쫑긋쫑긋 꼬리가 살랑살랑인 그러한 것도 좋지만 완전히 들고양이처럼 변해서 돌아다닐수도 있는 거. 등급은 C? C+? B-? 대충 그정도 선이지 않을까... 산고양이처럼 사납게 굴면 몇 명 다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결국 수준을 넘지는 않고 신체능력이 보통 인간보다는 훌쩍 뛰지만 그것도 결국 한계는 있는..? 그리고 미유키는 전격. 급은 A급 정도... 여서 나라에서도 집중하고 있다던가. 아직 어린 나이를 생각하자면 성장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후루야는 얼음 쪽이면 좋겠고 하루이치는 그... 물건을 띄울 수 있는... 이름이 뭐더라. 부유? 아닌데... 아니 비슷한데... 어쨌든 그런 것. 후루야는 B+혹은 아슬아슬 A-. 하지만 B+쪽이 맞다고 치는 쪽. 하루이치는 B정도. 료스케 선배는 무조건 암시 세뇌쪽이다()() 쿠라모치 선배는 에이준이랑 똑같이 수인화쪽이면 좋겠다. 하지만 에이준보다 급이 높은... B+ 정도? 변하는 동물은 당연하겠지만 치타! 치타선배! 하지만 같은 고양잇과니까 에이준이랑 투닥투닥 조금 더 형제같이 잘 지내지 않을까...? 가끔 둘 다 수인화해서 손톱 안세우고 으르렁 캬르렁하면 귀엽겠다... (의미불명)
그래도 어차피 연습 다 끝나고의 일상을 제외하면 다들 능력을 봉인하고 있으니까 원작 스토리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뭐... 미사와인 이상 캐붕이며 원작붕괴는 당연한 거니까... 에이준이 미유키를 좋아하는 순간이 언제인지는 본인도 잘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그 시선에 귀를 쫑긋하게 되어버리고 가끔 떠올리며 목 안에서부터 골골거리는 울음소리가 튀어나온다거나. 그렇게 제 감정을 자각하고는 조그마한 고양이로 변해 침대 위에서 뒹굴면 좋겠다. 캬앙거리는 그 울음소리에 못치선배가 버럭하고 화내겠지... 시끄러 임마! 울지마! 털날리니까 자꾸 변하지도 마! 하면서... 물론 같은 수인능력자 못치선배는 에이준이 고양이로 변하고 외쳐도 무슨 말인지 해석되기 때문에 강제로 전부 알게되어버리는 고통을 겪는다거나... 못치선배 사랑해()
그리고 그런 에이준의 감정을 미유키도 알고 있는 거. 정확히는 들렸다고 해야 하나... 사실 미유키가 그 드물다는 이중능력자. 전격 외에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또다른 능력으로 타인의 마음 속 소리가 들리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고. 물론 야구중에는 이보다 더 반칙인 능력이 없으니 당연하게 꽁꽁 봉인하고 있어서 잘 쓰지 않지만, 봉인을 풀어두는 수업시간이라던가 연습이 끝난 쉬는시간 같은 경우에는 그게 밀려오다시피해서 더 잘들린다거나 그런 거... 덕분에 에이준의 감정을 가장 빨리 눈치채버린 것이 장본인인 미유키라는 그런 거()
언제나 이 선배는 공 언제 받아주나!! 같은 겉이나 속이나 변화 따윈 없는 에이준의 생각에 미유키는 킥킥 웃는 그런 쪽이었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내면 깊은 목소리는 안정적인 호감을 깔아주고 있어서 미유키도 은근히 만족했다고 해야 하나... 그건 미유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러했는데 어느 날을 계기로 에이준의 마음의 소리가 좋아해 좋아해 좋아합니다로 바뀌어서 당황스러운 미유키랑 에이준이 의외로 놀랄만큼 그걸 잘 숨기고 자신을 대해서 또 당황스러운 미유키가 보고싶은 것 같다...
A급 능력자가 이중능력자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인생 피곤할 것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이제것 꽁꽁 숨겼던 미유키고, 그렇기에 숨기는 것에는 익숙한데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에이준의 마음속 말이 솔직하게 다정해서 알게모르게 쑥쓰러운 미유키라던가. 그리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면서 에이준이 솔직하게 입 밖으로 내뱉는 속과 똑같은 말이 과하게 돌직구라 당황스러운 미유키라던가... 그냥 당황스럽고 쑥쓰러워하는 미유키가 보고 싶은 건가, 나는...?
어쨌든 에이준이 언제나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좋아한다는 말에 결국 완전히 넘어가버린 미유키라던가 이것저것 보고싶다 되게 내용도 없고 결론도 없지만 미사와 행쇼....
막 집에 들어선 미유키는 텅 빈 고요에 의아함을 느꼈다. 다녀왔어, 라는 인사에 곧장 대답해주는 커다란 목소리가 없었다. 어서오십쇼! 정도의 다정함이 아니더라도 늦었슴다! 정도는 들릴 법 한데. 더군다나 사와무라에게 저보다 늦게 들어온다는 소식 역시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미유키도 미유키지만, 한동안 사와무라쪽이 바빴던 터라 제대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탓에 서로의 일이 일찍 끝나는 오늘을 꽤나 기대하고 있던 표정이었는데. 그렇기에 곧장 집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미유키는 정적만이 남아있는 거실이나 부엌을 빠르게 눈으로 훑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 고요의 원인을 알아챘다. 미유키의 눈에 침대 위에서 세상모르게 잠들어있는 사와무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 단잠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퍽 달콤하고 부드러웠기에, 집에 돌아온 이 시간을 퍽 고대했던 미유키마저도 선뜻 깨우기를 망설이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잠시 침실 문가에서 머뭇거린 미유키는 곧 안쪽으로 들어서 사와무라가 잠들어있는 침대 한편에 걸터앉았다. 둥글고 반짝거리는 눈도, 언제나 시끄럽게 떠드는 입도, 온갖 감정을 적나라하게 소리치고 있는 얼굴마저도 모두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제 베게는 제대로 베고 있으면서도 미유키의 것은 품 속에 끌어안고 있었고, 이불은 이미 깔개가 된 지 오래처럼 보였다. 잠들어있음에도 살짝 올라가있는 입꼬리며, 가끔 입술을 우물거리는 모습은 성인이 된 지 오래인 남성의 모습이라기에는 과하게 앳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사와무라, 계속 잘 거야?”
미유키는 슬쩍 물어보았다. 사와무라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미유키는 찬찬히 그 얼굴을 살폈다. 일이 고되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약간 푸석해진 얼굴이며 거뭇한 눈두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살이 빠졌나? 미유키는 속으로 가늠해보며 손등으로 그 뺨을 살짝 쓸어내렸다. 닿아오는 온기는 적당히 따끈했다.
잠시 그 상태로 사와무라를 바라보던 미유키는, 곧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렇게 행복하게 자고 있는 사와무라를 보고 있자면 당연하게도 깨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오랫동안 마음껏 단잠을 잘 수 있도록 그냥 두고 싶었다. 마냥 사랑스럽다는 시선으로 사와무라에게 이불을 덮어준 미유키가 허리를 숙여 그 귓가에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