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비키 와타루'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9.26 [와타토모] 불협화음
  2. 2016.08.28 [와타토모] 순간

[와타토모] 불협화음

2016. 9. 26. 18:36 from ENSTARS/NOVEL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겼어요.”


 마시로 토모야는 히비키 와타루의 앞에서 덤덤히 고했다.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몸까지 섞었던 남자의 앞에서. 말은 무참한 회색이었고 더없이 건조했다. 히비키 와타루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의자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던 와타루를 토모야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드문 눈높이였다. 당혹스러움을 능숙하게 감추고 그저 무심함을 가장하여 토모야를 보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단지 물끄러미 와타루의 눈을 응시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담긴 감정의 색을 읽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했던 말을 내뱉은 토모야이기에 잘못 짚을까 두려워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Amazing, 그렇군요.”


 내뱉는 말은 그런 것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지만 남은 것은 자조 뿐이었다. 결국은 토모야군도. 실망과 닮은 것. 뒷맛 씁쓸한 그런 말만 남아서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안기지도 않을 거고, 부장이랑 키스하거나 손 잡을 일도 없어요.”

“......네, 알고 있답니다.”


 토모야에게 다른 사랑이 생겼으니 와타루와의 관계는 거기서 끊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부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듣는 순간 울컥 치미는 무언가가 있었다. 히비키 와타루는 훌륭한 연기자였고, 그 감정을 모조리 능숙하게 숨겨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토모야가 한눈에 반했던 완벽한 히비키 와타루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엷은 미소가 걸쳐진 얼굴은 자연스럽게 눈부셨다. 토모야의 눈이 서벅하게 와타루를 스쳐지나갔다. 물기 없는 모래처럼 버석한 시선이었다. 잘 있어요, 부장. 자연스러운 인사와 함께 토모야가 몸을 돌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박혔다. 문으로 걸어나가, 문고리를 잡고, 열린 문 틈으로 나가서, 몇 발자국. 문을 닫았다.

 텅,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관계의 종말을 고했다. 


 두 명에서 한 명으로 변한 연극부 부실은 고요했다. 무대가 크게 비었다. 혼자 남은 히비키 와타루는 생각했다. 사실 자주 있었던 일이었다. 토모야처럼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내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사랑한 상대에게 외면당하는 것 정도는 몇 번이고 겪었었다. 틀림없이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상처 난 환부를 서걱서걱 잘라 멀리 버리면 금방 잊었다. 감정을 넣어놓은 상자를 닫아버리면 그만이었다. 토모야에 대한 감정도 똑같이 행동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괴로울까요. 히비키 와타루는 생각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욱신거렸다.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저물어가는 슬픔에 마음이 아팠다. 송곳이 자비없이 푹푹 찔러들어오는 감각이었다. 와타루가 얼굴을 가렸다.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잔뜩 웅크린 몸에서 많은 것이 꿈틀거렸다. 토모야 군, 토모야 군. 부르지 못한 이름이 한가득 차올랐다. 목구멍을 간지럽히다가, 치밀었다. 


“후회할 것 같아요.”


 무심코 새어나온 말이 모든 진심이었다. 이성이 말보다 늦게 깨달음을 물고 왔다. 자각하는 순간 와타루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대로 뛰쳐나갔다. 지금 토모야를 놓치면 후회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찾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을까. 적어도 1학년인 토모야보다는 3학년인 와타루가 숨겨진 통로나 지름길을 더 잘 알았다. 유메노사키 학원을 뒤집어놓으며 와타루는 토모야를 찾았다. 사랑하는 어린 토끼는 언제 재주를 그렇게 익힌 것인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라이브를 뛸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은 있었지만, 달리기와는 조금 별개인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지쳤는데도 토모야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토모야 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불길한 상상뿐이었다. 얼굴 모를 소녀와, 그 옆에서 웃고 있는 토모야. 종종 와타루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수줍게 웃는, 붉은 뺨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이렇게 달려서 겨우 찾은 토모야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그답지 않게 대책 따윈 없이 막막한 구석 투성이였다. 와타루의 머리 한구석이 찌릿하게 울렸다. 


 아, 찾았다. 와타루의 눈에 그 뒷모습이 비쳤다. 다행히 혼자 걷고 있었다. 부드러워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똑바르게 걷는 걸음걸이, 정면 외에는 잘 보지 않고 걷는 모습까지 빠짐없이 마시로 토모야였다. 토모야 군! 와타루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쳐서 숨소리가 섞인, 갈라진 목소리였다. 꼴사나웠다. 토모야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와타루를 곧게 바라보았다. 부장? 당혹이 어렸다. 


“가지 마세요, 토모야 군.”


 그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토모야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제 얼굴을 보는 토모야를 보며, 와타루가 모든 것을 쏟아냈다. 언제나 완벽하게 감춰놓았던 것을 모조리 풀어냈다. 표정부터가 엉망이라고,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추스릴 여유도 없었다. 


“사랑합니다, 토모야 군. 가지 마세요, 제발...... 제가 조금 더, 잘 할 테니까...”


 이렇게까지 타인에게 매달린 것은 처음이었고, 여기서 뿌리쳐지면 어디까지 형편없어질지 아주 잘 알았다. 공포가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어깨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토모야도 그걸 기민하게 눈치챘다. 토모야의 표정이 이상하게 찌그러졌다. 몸을 섞는 그 순간까지도 한 번도 좋아한다 말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저 저를 심심풀이로 여기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지금 이 모습은. 기묘한 현실이 눈 앞에 들이밀어졌다. 토모야가 느리게, 와타루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와타루의 표정에 절망이 어렸다. 


“......우리, 대화가 많이 필요했던 것 같네요.”


 솔직하게 말해준다고 약속하면, 돌아가서 얘기해볼래요? 붙잡은 손은 놓지 않고, 토모야가 제안했다. 가냘픈 실이 다시 얽혀들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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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와타토모] 순간

2016. 8. 28. 21:29 from ENSTARS/NOVEL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그리고 비참에 사로잡히는 건 오래 간다. 마시로 토모야는 그 절절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어지는 숨소리 사이사이에 한탄이 담겨있었다. 내가 왜, 정말 미쳤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미약하게 헛웃음마저 삼켰다. 동경으로 시작해서 실망으로 끝났던 마음은 그래도 미운정으로 끝날 줄 알았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사랑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마음은 마시로 토모야의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있었다. 중학교 때 겪었던 풋풋한 첫사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사랑이었다.


 선배를 사랑하지 않는 후배를 연기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사랑하기 이전의 자신이 기억나지 않은 탓이었다. 히비키 와타루가 비범의 영역에 손이 닿은 인간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사실 어느 정도 이미 들통나 있을 거라고, 토모야는 예상하고 있었다. 가끔 저에게 향하는 시선이 그랬다. 평범하게 히비키 와타루를 사랑해버린 마시로 토모야에게 향하는 별 수 없는 체념, 미약한 동정. 대충 그런 감정들. 전혀 고맙지 않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어서 눈 감고 넘기는 것들이었다. 그 감정들이 가득 차서 토모야가 견디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고백을 하는 순간이 아닐까. 최악의 고백이 되겠지만. 토모야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뭐, Amazing!을 외치며 당장 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단 참는 수밖에 없었다. 히비키 나름의 배려라고 저 좋을 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어디야. 해탈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달기보다는 쓴맛에 가까운 사랑임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대체 뭘까. 토모야는 진심으로 저 자신의 마음이 궁금했다. 파고들어봤자 결론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었지만 매일 밤 침대에 누워서 궁리하고는 했다. 외형, 물론 아름다웠다. 무대에 선 그를 보고 유메노사키의 입학을 각오했을 정도로 수려한 미남자였다. 하지만 와타루에게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만 해도 토모야의 이성취향은 평범한 편이었고,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남자는 남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외형은, 그래. 사랑에 빠진 지금에서야 유혹적인 부분이었다. 성격? 세상에. 그 성격 탓에 사랑에 빠진다면 토모야는 진심으로 자신의 취향을 고민해보고 싶었다. 매일의 괴로움과 비명과 도주의 연속인 게 누구의 탓인데. 토모야는 성격을 떠올렸던 자신을 한 대 때려주었다. 뺨이 얼얼했다. 

 그럼 뭔데? 머릿 속의 토모야가 불평했다. 나도 모르지. 입 밖으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베개를 뒤짚어 얼굴을 덮었다. 숨이 막혔다. 그 가쁨을 기꺼이 받으며 토모야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는데도. 싫은 점으로 꼽히는 게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좋아했다. 사랑하고 있는 탓이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포기한 게 몇 가지 있었다. 히비키 와타루에게서 이기는 것은 그 중 하나였다. 그 전까지는 바락바락 기를 쓰고 와타루가 봐 준다는 조건 하에 가끔 이길 수도 있기는 했는데. 토모야는 속으로 불평을 꾹꾹 삼켰다. 와타루의 실망한 표정과 자존심을 저울질 해 볼 때, 종종 자존심이 지고는 했다. 그리고 패배한 자존심을 끌어안고 별 수 없이 와타루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밖에 없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웃는 얼굴을 보면 비참할 만큼 기분이 나아졌다. 


 와타루는 그런 토모야를 조금 심심해하는 기색이었지만. 토모야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히비키가 토모야에게 질려 멀어진다면 이 사랑을 포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시 원래대로의 마시로 토모야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아마도. 히비키 와타루를 사랑하는 마시로 토모야는 본인 스스로도 가끔 버리고 싶은 자신의 일면이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한심한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사랑에 빠진 이후 행복했던 순간들도 가슴 떨리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던 순간과 고민하고 괴로워한 순간들을 반대쪽 저울에 놓고 기울어짐을 확인해보면 후자가 압도적이었다. 다만 그에게 포기당한다는 그 사실 하나가 끔찍할만큼 싫을 뿐이었다. 


 엉망진창이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쓰게 한숨을 삼켰다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라빗츠의 세일즈 포인트인 귀여운 미소였다. 그래도 마시로 토모야는 놀랄만큼 잘 해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물론 눈치챈 것 같은 사람이 장본인인 히비키 와타루라는 점에서 좀 문제가 크긴 하지만, 그 부분을 생략하자면 그랬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되내었다. 침대에 바짝 붙은 책상 위에 푸른 표지의 대본이 놓여있었다. 여자 주연의 역할에 마시로 토모야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연극부에서 주연의 역할을 맡는 것은 주로 와타루와 호쿠토 두 사람이었다. 성별 구분없이 완벽하게 역할을 소화해내는 기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토모야는 조연 혹은 단역. 그것도 여성의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남성 역할은 그보다 더 능숙한 2, 3학년 다른 선배들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부터가 감지덕지였다. 1학년은 대부분 무대에 서지 못했다. 연기를 목표로 들어왔다고 해도 1학년은 뒤에서 무대장치를 맡았다. 애초에 올해 연극부 1학년은 손꼽히게 적기는 했지만.


 주역을 맡을만큼 실력을 키운 건 아니었다. 와타루의 기준은 호쿠토나 겨우 닿을 정도로 까마득했기 때문에 연습에 들어가면 토모야는 언제나 혹평일색이었다. 매일 안간힘을 쓰고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토모야가 주역 자리를 받게 된 것은 입부 때보다 훨씬 성장한 것은 맞다는 주변의 인정과, 역할과의 밀착도 덕분이었다. 여러가지를 고려해 여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부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작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주연은 토모야가 가장 잘 어울렸다. 결국 운으로 받은 역할. 토모야가 제일 마음에 새기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둥근 눈매를 빠릿하게 치켜세웠다. 천장을 노려보는 연한 모래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토모야의 역할은 단순했다. 순하고 착하고 성실하며 지고지순하게 남주인공을 사랑하면 되었다. 참 평범한 배역이었다. 와타루가 선택한 대본 치고는 의외여서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다. 고전이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도 하다는 법이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납득했지만. 사실 주연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출현은 많지 않았다. 무대 전체를 따져보아도 남주연에게 대체로 중심이 몰려 있었다. 남자 주연이 와타루였으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가장 힘든 점은 와타루와 호흡을 맞추는 점이었다. 


 주연으로서 토모야가 함께 무대에 서는 다른 배역은 많지 않았다. 가장 오래 무대를 공유하는 건 당연히 와타루였고, 그 외에 조연인 호쿠토나 단역 몇 명 정도. 호쿠토나 단역선배들과 함께 연기할 때는 그렇게까지 혹평이 강하지 않았다. 고칠 부분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그 다음 날, 짧게는 그 다음 무대에서 극복할 수 있었다. 바로 어제는 와타루에게조차 모든 부분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문제는 와타루와 사랑을 하는 부분이었다. 달큰한 목소리도, 상냥한 몸짓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그 모든 것에 체할 것 같았다. 짝사랑하는 대상과 사랑하고 사랑받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직 배우로써 어린 마시로 토모야에게 너무 힘든 역할이었다. 


 배역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큼 형편없는 연기는 없다. 짧은 틈새에서 드러나는 토모야의 설렘을 와타루는 기민하게 눈치챘을 터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얼음송곳같은 혹평이 뒤따랐다. 너무 많이 찔려서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어제의 마지막 연습마저도 남자 주연에게, 와타루에게 연심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혹평을 받았다. 너무도 평범하고, 형편없군요! 그렇게 시작하는 쓴소리였다. 지금 생각해도 속이 쓰렸다. 울분과 자괴로 끓는 통증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오늘만큼만은. 토모야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복의 구겨진 부분을 적당히 털어 펴내고 붉은 넥타이를 제대로 매었다. 아침의 자기한탄과 마인드컨트롤은 여기까지였다. 완벽하게 무대에 서야 했다. 수천 수백번 연습을 했다고 해도 본방에서 실패하면 다 부질없는 것처럼, 얼마의 혹평을 듣던 무대 위에서 완벽하여 관객들에게 칭송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연극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 위에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의미였다. 조명과 관객들의 시선 아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만큼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 분위기에 홀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외우다 못해 새겨놓은 대사들과 이입감뿐이었다. 한없이 배역의 사람에게 가까워지는 감각이었다. 토모야가 자신의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애처롭게 떨어지는 선이 사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 이 순간만큼은 히비키 와타루를 사랑하지 않는 마시로 토모야였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평생 그 한마디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명 아래에서, 연습 내내 부족함을 보이던 배우가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히비키 와타루는 이상을 감지했다. 눈 앞에서 완벽하게 연기로 점칠된 정제된 감정이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토모야는 확실히 본방에 강한 배우였다. 무대 위라는 것도 잊은 채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뻔 했던 그가 능숙하게 표정을 숨겼다. 그럼에도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소리가 제 존재를 드러냈다. 무대 배역처럼 웃었다. 그럼에도 반 템포 대사가 늦었다.


“사랑합니다. 영원토록.”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설마 감정 따위에 발목이 잡혀 끌려내려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인생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히비키는 가면 너머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반해버렸다. 히비키 와타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완벽하게 연기해낸 마시로 토모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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