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님(@bucket_da)님께 받은 리퀘! 질투하는 에이준... 이었는데 과연 리퀘가... 이걸로 괜찮을지...(흐린눈
사와무라는 자신의 애인이 인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얼굴부터 잘생긴 데다가, 야구 실력도 어디 모자란 구석이 없었고, 저번 시합에서는 역전 홈런을 친 적도 있었다. 연봉도 억소리 나게 받고, 나이도 젊은 편. 성격이야 뭐, 최악이라고 방송 땅땅 때리지 않는 이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화면이나 대회장에서만 보는 사람의 성격을 어떻게 알겠는가. 나쁘다는 말만 들려오지 않는다면 일단 합격선이었다. 즉, 미유키와 직접 만나본 적도 없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그는 인기가 적다면 도리어 이상할 정도의 사람이었다. 사와무라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 나쁜건 어쩔 수 없잖아?! 미유키 카즈야의 애인으로써 당연히 휘두를 수 있는 권리잖아, 이건?! 울분에 차서 소리치는 목소리는 지금 곁에 없는 제 애인을 향한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날이 있었다. 유달리 미유키의 칭찬이 귀에 잘 들려오는 날. 그리고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겹치고 쌓아져 폭발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리고 그 성격 상, 결판을 지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바로 오늘. 마음을 단단히 먹은 사와무라는 불만이 쌓인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규칙적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모습은 잔뜩 억눌려있는 것도 같았다. 몇 번이고 시계를 곁눈질하며 사와무라는 현관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양이를 닮은 눈으로 새초롬해진 표정은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것이 전혀 없었다.
멀찍이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낯익은 것이었다. 사와무라의 귀가 단박에 그 소리를 잡아냈다. 그것이 들려오는 순간 발소리의 주인을 확신했고, 문이 열리자 망설임없이 뛰쳐나갈 수 있었다. 미유키 카즈야!! 쩌렁쩌렁 소리치는 목소리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있슴다!! 들어오십쇼!! 아니, 앉으십쇼!!”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목소리 폭격을 맞은 미유키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일단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사와무라가 이끄는대로 소파에 앉았다. 집에 들어와 사와무라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알 수 있었다. 뭔가 있구나, 하고. 그리고 이럴 때는 조용히 저 쪽의 말을 따라주는 것이 제일 덜 피곤한 길이라는 것을 미유키는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옆자리에 꿇어앉은 사와무라를 마주보며 미유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하고. 그 표정을 보며 사와무라는 두 손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미유키 너무 인기가 많슴다!!”
“뭐?”
“그만 좀 홈런 치십쇼!! 아니, 그 전에 잘생기지 말아야 하나? 얼굴에 뭐라도 하십쇼!! 머리라도 밀... 아냐, 그건 아님다. 절대 그건 아니고... 젠장!!”
미유키는 황당함을 가득 담아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온 몸으로 자기주장을 똑바로 하고 있는데, 모를 리가. 미유키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미소였다.
“사와무라, 그거 질투?”
“큭...!”
차마 똑바로 말할수는 없었기에, 사와무라의 입이 그대로 다물렸다. 불만스럽게 치켜뜬 눈이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사와무라의 모습에 미유키의 얼굴에 유쾌한 표정이 걸렸다. 결국 제 열을 못 이겨 소리치는 것은 사와무라의 역할이었다.
“그래, 질투임다!! 저는 질투할 수 있는 자격 있는 사람 아님까?! 내가 왜 여직원들 대화에서 미유키랑 사귀어보고싶다는 말을 들어야 함까!! 미유키 애인은 나인데!!”
“어, 저기. 음. 사와무라, 진정...”
“가끔 어디 구장에라도 뛰쳐가서 미유키 카즈야 내 거라고 소리라도 치고싶은 제 심정을 미유키가 암까?!”
이거 옆집까지 들리는 거 아니야? 미유키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제는 뚝뚝 울기 시작한 사와무라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미유키가 그를 끌어안았다. 조금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사와무라의 등을 두드려주는 미유키였다만, 사와무라는 아직 쌓인게 많았다. 그 비싼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꿋꿋했다.
“미유키 카즈야는 사와무라 에이준 애인 아님까... 인기 관리 좀 하십쇼...”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에이준.”
“알면 고치십쇼.”
평소 잘 불러주지 않는 이름까지 부르며 속삭이는 달램이었지만, 오래 참았던 사와무라의 표정은 영 뾰로통했다. 과거 투수의 매운 손길이 미유키의 등을 노리고 떨어졌다. 짝짝 때리는 그 손길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애써 티내지 않으며 미유키가 에이준의 등을 토닥였다. 몇 번이고 미유키의 등을 때리던 손이 곧 느릿하게 마주 끌어안았다. 솔직하게 울음까지 터트린 못난 얼굴로, 사와무라는 중얼거렸다.
“좋아함다, 미유키.”
“응,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잘난 것은 역시 손해였지만, 그래도 너무 좋은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코미나토 하루이치(2학년, 2루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야구에 전념한 탓에 상대적으로 학업에 소홀하기는 해도 야구부에서는 영특한 편에 속하는 그였는데 말이다. 아니, 지금 이 말이 상식적으로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이 아닐까. 하루이치는 스스로에게 그리 속삭이며 상대에게 되물었다. 기왕이면 방금 들은 말이 잘못 들은 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사항도 품고 있었다.
“에이준 군, 방금 뭐라고 했어?”
“푸딩 먹을래?”
“그보다 좀 전에.”
“심부름 다녀왔어?”
“그거 뒤에.”
하루이치는 끈기있게 사와무라의 말을 수정해주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와무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맞는 답을 뱉어냈다.
“좋아하는 사람?”
“그래, 그거.”
하루이치는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슬퍼졌다. 그와 동시에 의아해지기도 했다.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에 감춰진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제 형을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보통 시합 때나 보여주는 하루이치의 모습에 사와무라가 은근히 몸을 움츠렸다. 그런 사와무라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이치는 그가 했던 말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미유키의 심부름을 다녀왔다는 말과 함께 잔뜩 불평을 내뱉었었고, 하루이치는 그 말에 후배들을 시키면 되지 않겠냐는 말로 대꾸해주었다. 그러자 사와무라가 했던 말이...
‘좋아하는 사람 심부름은 다녀오는게 점수따기 좋을테니까!’
...이랬더래지. 하루이치는 다시 사와무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빠지고 어리둥절한 표정. 새까맣게 탄 얼굴. 주관적인 시선으로 아무리 봐도 사랑과는 백만광년 정도 거리가 있는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야구밖에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하루이치는 입 밖으로 내뱉으면 실례인 말을 속으로 마음껏 중얼거렸다. 친구로써 아끼는 만큼 인정사정없는 평가였다. 더군다나 상대도 상대였다. 미유키 선배라. 하루이치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입가를 매만졌다. 차라리 매니저들이었으면 훨씬 승산이 있었을텐데, 골라도 어쩜 그런 사람을 골랐는지. 그리고 좋은 연애 대상도 아닐 것 같은데. 하루이치는 하늘같은 삼학년 선배에게도 망설임없이 실례일 말을 중얼거렸다. 그 눈에 어린 것은 염려이기도 했다.
하지만 뭐, 에이준 군이 좋다면야... 하루이치는 언제나 그렇듯이 한숨 한 번 내뱉는 것으로 염려를 끝마치고 응원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와무라이니, 어떻게든 잘 될 것이라 생각할수밖에 없기도 했다.
“혹시 에이준 군이 미유키 선배를 좋아...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더 있어?”
이 말은 그냥 해 본 것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혹시’ 였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이런 기대까지도 시원하게 부숴버리는 남자였다.
“응! 못치 선배에... 형님도 아실걸?”
“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예상범위 안이었다. 쿠라모치 선배라면 같은 방 룸메이트인데다가 눈치 또한 보통이 아니니 알 수 있을 법도 싶었다. 제 형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지금 형은 졸업했지만... 하루이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삐딱하게 턱을 괴고 내뱉는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제 말이 틀림없다는 확신.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단박에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 “하아?” 하고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을수밖에 없었다. 손에 들려있던 게임기가 그대로 바닥에 내려졌다. 쿠라모치가 한 말이 딱히 어려운 문장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영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한 후배를 보며 쿠라모치는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사와무라 너, 엄청 미묘하게 미유키에게 사근사근하다고.”
“...제가? 말임까?!”
이, 무슨, 말도 안 돼! 거짓말하지 마십쇼!! 온 몸으로 거부반응을 드러내는 사와무라를 보면서도 쿠라모치는 확신어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도리어 제게 건방진 말을 읊는 사와무라에게 응징의 의미로 한 대 걷어차주기도 했다. 쓰읍, 짜식이 어디서 선배한테. 얻어맞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사와무라를 내려다보며 쿠라모치가 한 번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태생적으로 그리 곱지 않은 인상과 결합하여 굉장히 까칠한 분위기가 드러났지만, 사와무라는 아랑곳않고 징징거렸다. 쿠라모치에게 격렬하게 해명을 요구하는 몸짓이었다.
귀찮게시리. 괜히 말했네.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쿠라모치는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사와무라를 내려다보았다.
“본인은 무자각이냐?”
“제가 그럴리가 없슴다!!”
“뭐... 본인이 그리 믿고싶다면 믿던가.”
짧게 코웃음치는 모습이 절대 사와무라의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억울해졌다. 내가 뭘 했다고!! 맛있는 거 먹을 때 미유키 몫을 하나쯤 챙겨준 것도! 지나가면 꼬박꼬박 불러서 인사하는 것도! 없으면 찾는 것도! 다 그냥 선후배 사이에서도 할 수 있는 거잖아! 아니지, 배터리니까 더더욱!!
억울함과 항변의 의지로 번쩍번쩍 빛나는 그 눈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쿠라모치의 말을 납득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래, 바카무라는 그냥 멍청하게 있어라. 쿠라모치는 오래 끌지 않고 산뜻하게 놓아주었다. 깊게 신경쓰면 본인만 피곤해진다는 것을 쿠라모치는 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물론 그 죽일 놈의 정 때문에 완전히 신경을 끊기는 어렵겠지만.
듣지도 않는 쿠라모치에게 열심히 뭐라뭐라 씨알도 안먹힐 말들을 하는 사와무라를 그는 다시 한 번 걷어차주었다. 그것으로 대화를 강제로 끝마친 쿠라모치는 대놓고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게임에 집중하는 사와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은근히 호의를 내보내던 말던, 그게 투수로서 포수에게 보내는 어필이던 혹은 뜻모를 다른 감정 탓이던 쿠라모치는 전혀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만,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쿠라모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알 바는 아니라고 몇 번이고 자기세뇌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결국 하나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미유키의 태도였다.
사와무라가 묘하게 미유키를 챙기는 호감을 보인다면 미유키는 정 반대였다. 묘하게 사와무라에게 냉랭한 면모가 있었다. 조금 덜 챙기고, 조금 덜 신경쓰고. 물론 쿠라모치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의 차이였고, 포수로써 투수를 챙기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서 야구부 대표 둔탱이 사와무라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쿠라모치는 그것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내가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욕하면 기분 나쁜 원리라고 해야 할까, 제가 걷어차고 다니는 못난 후배놈이지만 남에게 홀대당하는 것을 보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다. 이래서 정이란 게 문제라니까. 쿠라모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신경쓰기 싫다고 중얼거려도, 결국 연관된 것이 사와무라고 미유키라는 사실에 제가 끼어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나한테 감사해야 할 거다, 사와무라. 들리지도 않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쿠라모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
“사와무라가 너한테 잘못한 거 있냐?”
쿠라모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유키의 앞자리로 옮겨가 물었다. 교과서를 집어넣자마자 스코어북을 꺼내 살펴보고 있던 미유키가 고개들어 쿠라모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 얼굴에 쿠라모치는 머릿속에 세워놓았던 하나의 가정을 지웠다. 사와무라야 워낙 바보이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미유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미유키도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쓰는 놈은 아니었다만. 쿠라모치가 가볍게 인상을 구겼다. 그럼 뭔데?
“너 사와무라한테 묘하게 냉랭하잖아.”
“내가 언제?”
“시치미 떼지 마라.”
어디서 아닌 척이야. 너도 사와무라도, 태도에 온도차이 있다고.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쿠라모치는 까칠하게 확답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미유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리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은근한 곤란함이 섞인 그 표정에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제 태도를 본인이 모르던 멍청이 후배와는 달리, 이 녀석은 고의로 그렇게 행동하던 모양이었다.
왜? 쿠라모치는 동시에 의문을 가졌다. 멍청하다 바보다 욕은 하고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기본적으로 좋은 녀석이었다. 어딜 가든 어떤 녀석에게든, 미움받지는 않을 타입. 더군다나 투수인 이상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싫어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사와무라를 싫어하는 건 아냐.”
제 뒷목을 쓸어내리며 미유키가 말했다. 쿠라모치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말을 꺼내면서도 여전히 곤란해하는 기색이 짙었지만, 쿠라모치는 그걸 무시했다. 시선으로 대답을 독촉하고 있었다. 무언의 강요를 받으며 미유키는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비어있는 운동장이 보였다.
스코어북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미유키는 망설였다. 정확히는 쿠라모치에게 말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을 터였다. 한 번 틈새를 보여주는 것으로 많은 것을 눈치챌 정도로 쿠라모치는 예민한 사람이었으니까. 몇 번이고 그리 주저하던 미유키는, 결국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지금보다 더는 곤란하니까.”
딱 한 마디. 그 뒤로 입을 다물어버린 미유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많은 것을 가정해두고 있던 쿠라모치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눈치채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동시에 인정사정없이 표정이 구겨졌다. 듣게 된 지금 확신컨대, 들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역시 깊게 참견하는 게 아니었어. 뒤늦은 후회였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쿠라모치를 배웅하지 않으며 미유키는 스코어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숫자들의 나열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스코어북을 보며 넋을 놓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방금 전의 대화가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다. 냉랭하잖아. 쿠라모치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이제 점점 더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날지도 몰랐다. 그 정도는 곤란해. 미유키는 입술을 짓씹었다.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할 리 없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지금보다 더 좋아하게 된다면, 곤란하니까. 미유키는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에게 은근한 호의를 보이는 사와무라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사와무라가 아직은 자각하지 못한 감정이노라고. 그렇기에 미유키는 반대로 냉정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은근하고 티나지도 않는 차이였지만, 그게 미유키의 최선이었다. 사와무라가 깨닫는다면 자신 역시도 지금보다 훨씬 더 참기 힘들어질테니까. 좋아해서는 안될 사랑이었고, 티내서도 안 되는 사랑이었다. 시작하지 않는 게 좋은 마음이었다.
내가 너를 더 좋아하게 만들지 말아줘. 헛된 소망이었다.
쌍방 짝사랑 미사와... 라고 해야 할지, 짝사랑 무자각 사와무라 >< 짝사랑 자각(+ 사와무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자각한) 미유키
다음웹툰 GONE의 설정을 빌려왔습니다! 설정을 모르셔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궁금하시다면 이쪽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gone 에서 웹툰을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8편 정도로 끝나니까 어려움 없이 보실 수 있지 않을까...!
며칠정도 질질 끌어서...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냥 올리는 것으로. 조금... 조금 긴 글.
00.
이 세상에는 불치병이 하나 있다.
01.
미유키는 턱을 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닫힌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언뜻 보였다. 귓가에 닿아오는 것은 틀어놓은 라디오의 뉴스소리뿐이었다. [상승포자 바이러스의 감염자가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 호흡기를 통해 감염된다는 가설이 유력합니다. 감염자의 주변인들은 근처에 가까이 가는 것을 주의해주시고,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매일 텔레비전을 켜면 나오는 뉴스내용이었다. 미유키는 별 생각 없이 라디오 프로를 돌려버렸다. 상승포자 바이러스, 현재 불치병. 생방송으로 감염자의 사망 모습까지 나온 적 있었으니, 미유키도 감염자에 대해 본 적 있었다. 아주 조금씩 빛가루처럼 바스러지다가, 결국 부서지듯이 빛과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죽음이라는 것을 고려하자면 꽤나 끔찍한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소름이 돋았을 뿐, 미유키는 금방 그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도리어 미유키의 신경을 간지럽히는 상대는 따로 있었다. 제 동거인, 그리고 연인. 오랫동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는 상대. 이름은 사와무라 에이준. 미유키의 곧게 뻗은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 표정에 은근한 초조함이 묻어났다.
프로 선수라는 직업 탓에 미유키는 한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겨우 틈을 내어 발도장을 찍었을 때 얼굴을 보았던 사와무라는 어딘지 이상했다. 표정을 잘 숨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억지로 숨기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초조해보이기도 했고, 피곤해보이기도 했다. 은근히 미유키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 미유키는 제 입술을 자근거릴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 미유키는 한동안 긴 오프시즌이었다. 그 사이에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되내이며, 그는 집앞에 섰다. 묘한 긴장감이 그 몸을 타고 흘렀다.
괜찮아. ...괜찮아. 미유키는 두어번 되내이고 집의 문을 열었다. 벨을 한 번 누르자 답변 없이 문이 열렀다. 사와무라. 미유키는 그 이름을 부르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는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현관에서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안쪽에서 문을 열어줬다. 아무도 없을 리 없었다. 애써 정돈한 얼굴을 살짝 구기며 미유키는 거실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야 미유키는 자신이 원하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사와무라.”
미유키의 부름에 상대가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미유키의 시선이 그를 쓸고 지나갔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수척해진 안색이나 조금 마른 티가 나는 몸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유키의 표정에 문득 걱정이 스쳐지나갔다. 사와무라는 그것을 잡아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전과 다를 바 없는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미유키의 걱정이나 이제껏 했던 고민을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의 강력한 위력을 가진 더없이 반짝거리는 미소.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향해 양 팔을 뻗었다. 그 행동이 요구하고 있는 바는 명확했다.
“미유키, 이리 와서 나를 꼭 안아주십쇼.”
“어?”
“빨리.”
상상도 하지 못했던 조름에 미유키의 표정에 당황이 스쳐지나갔다. 사와무라 역시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그는 모른 척 미유키를 재촉했다. 잠시 망설였던 미유키는 곧 거부감 없이 사와무라에게 다가가 그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느리게 등을 쓸어내렸다. 품에 안기는 온기는 언제나 마음 깊은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사와무라가 제 등을 마주 끌어안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미유키는 위화감을 감지했다.
“미유키, 상승포자 바이러스라고 암까?”
“......”
이 말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 미유키의 영리한 머리가 순간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최악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동시에 가장 현실에 가까운 결론이기도 했다. 소리없이 희게 질리는 미유키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유키를 끌어안은 사와무라는 그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전염병이라는 소문은 있어도 확실한 건 아니라고 했슴다. 그래도 미유키가 싫다면 어쩔 수 없네요.”
“...잠깐. 잠깐만, 사와무라.”
“그래도 아직 약도 없는 병이라고 하고. 혹시 미유키까지 감염되는건 저도 싫슴다.”
“잠깐만...”
한 쪽이 따라가지 못하는 대화는 평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미유키가 품 속에서 사와무라를 때어냈다.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순순히 떨어지는 에이준의 무게가 낯설었다. 그래, 그가 느낀 위화감은 이것이었다. 프로의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사와무라는 오랫동안 야구를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을 선수였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니었고, 당연하게도 근육의 무게를 포함해 그 몸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 가벼웠다. 사와무라의 그 몸이. 그럴 리 없고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도.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는 한 번 씩 웃었다.
“이제 감염 삼 개월 정도 됐슴다. 남은 기간은 훨씬 짧다고 함다.”
말 안해서 미안함다. 그리 덧붙이는 사와무라를 보며, 미유키의 표정이 멍해졌다. 머리에 데드볼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 어딘가가 심하게 욱신거리는 것도 같았다. 아니 한 군데 무너졌나? 뻥 뚫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그것도 아니고...
미유키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헤어질까요?”
사와무라는 물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유키는,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것에 관계없이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사랑했다. 그러니까 놓을 수 없었다.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 미유키의 대답에, 사와무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도 다시 한 번 미유키를 끌어안고 그 어깨에 뺨을 기댔다. 미유키는 자신을 끌어안은 손길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02.
미유키는 제 손에 들린 종이들을 팔랑거렸다. 언제나 스코어북이 자리잡던 그 손에는 이제 다른 것이 들려있었다. 신문부터 시작하여 어디에서든 처음 보는 정보라면 모조리 뽑아 모아둔 상승포자 바이러스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리 정독해봐야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현재 불치병. 해약제 발명에 차도 미미함.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흰 종이 위에 빼곡히 적혀있는 사실들에 눈을 돌려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사와무라는 벌써 많이 가벼워진 상태였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그 발이 몇 센치 정도 허공에 떠 있을 때도 자주 있었다. 아무리 시즌 중에 정신없는 상태였다고는 해도 저 정도까지 진행되는 동안 투병중인 사와무라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과거의 자신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다. 가볍게 땅을 박차는 것으로 허공에 부드럽게 떠오르기까지 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염병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병이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대학에서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던 야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전염병이 아니라고 해도 야구를 그만두게 된 것이 당연할 정도였다. 몸의 무게가 달라졌고, 결국 던지는 공의 위력부터 달라졌을테니까.
병. 그것도 약도 없는 죽을 병.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무게와 숨을 쉴 때마다 퍼져나오는 포자를 볼 때마다 사와무라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유키는 어딘가 단단한 것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그 때 자신이 곁에 없었다는 것에 더더욱 그랬다. 또다시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키며 미유키는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사와무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야구를 그만둔 뒤부터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사와무라의 말처럼, 꽤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사와무라는 꽤나 책을 자주 빌려읽었다. 그는 이제 발목에는 모래주머니에, 양 주머니에는 돌들까지 채워넣고 자신이 아닌 몸의 무게를 무겁게 만들어놓고 나서야 안전하게 외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인데다가 혹시 모를 위험성도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와무라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의 단골손님이었다. 미유키로써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알 수 없는 책들이었지만.
사와무라가 좋아하는 순정만화와 닮은 연애소설도 있었고, 고전문학이라던가, 혹은 위인전기 같은 것도 있었다. 미유키는 몇 번 들춰보고는 그만두었지만, 사와무라가 특히 집중해서 읽는 책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며칠이면 한 권을 다 읽는 사와무라가 일 주일이 넘도록 끼고 있는 책이라면 좋아하는 책일 테니까. 책의 내용은 대부분 희망적인 것이었다. 장애를 극복하고, 병을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무언가를 극복해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내용들. 미유키는 그런 책을 보며 울고웃는 사와무라가 진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할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투구 배분을 하는 것보다 사람 마음 하나 읽는 것이 오천 배는 어려웠고, 더 이상 투수가 아닌 사와무라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은 그보다도 더 어려웠다.
그런데도, 웃어줘서 다행이다. 미유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책에 코를 박고 읽다가도 때때로 사와무라는 고개를 돌려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언제나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금갈색의 동그란 눈동자가, 고등학교 때와 달라지지 않은 앳되고 밝은 눈동자가 호쾌히 휘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모습을 볼 때면 꽉 막혀있는 것 같던 명치깨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사와무라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미유키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 사와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동그란 두상과 조금 거친 머리카락. 그 틈새로 보이는 하얀 귀와 뻗어내려오는 목선을 전부 눈에 담았다. 사와무라가 호흡함에 따라 부드럽게 번져나오는 포자가 빛나고 있었다. 기분나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03.
이제 어딘가에 줄을 묶어두거나 무거운 것을 몸에 달아놓지 않으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사와무라는 가벼워졌다. 동시에 호흡으로 퍼져나오는 포자의 양도 훨씬 늘어났다. 참 잔인할 정도로 죽을 때를 착실하게 알려주고 있는 꼴이었다. 미유키는 몇 번이고 괴롭게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정돈했다. 사와무라가 웃고 있는데 미유키가 한심한 꼴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모를 전염성이라는 것은 정말로 짜증나는 것이었다. 차라리 전염성이라고 못이 박혔더라면 단 둘이서 집에 틀어박혀 시간을 함께 보냈을 터였고, 비전염성이라면 야구장이던 어디던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사와무라와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이도 저도 아닌 지금의 상황은 사와무라의 마지막 시간마저 대부분 속박하고 있었다.
결국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답시고 사와무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바깥으로 나갈 때는 마스크까지 꽁꽁 싸맨 채로 나가는 도서관이라던가, 아니면 가끔 미유키의 손을 꼭 붙잡고 데이트를 나서는 것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상승포자 바이러스의 감염자들에게는 사람 역시도 위험한 대상이었다. 몸이 빛과 먼지로 흩어지며 고통없이 죽는다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도 적잖았고, 그로 인해 납치되는 감염자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뉴스도 종종 뜨고는 했다. 그 기사를 볼 때마다 덜컥 겁을 먹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사와무라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으니까.
미유키는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소파 위’에 떠 있는 모습이었다. 스스로 몸을 땅에 붙이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미유키는 소파에 주저앉아 사와무라에게 손을 뻗었다. 체온이 맞닿고, 가볍게 힘을 주자 그 몸이 이끌려 내려왔다. 사와무라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미유키를 보며 방긋 웃었다.
“하늘을 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슴다!”
“니가 무슨 동화 속 공주님도 아니고, 무슨. 땅에 잘 붙어있으라고.”
“공주님은 아니어도 뭐 어떻슴까!!”
정말인데!! 그렇게 소리치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운넘쳐서, 미유키는 소리없이 안도했다. 지금 사와무라가 하늘을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는 이유도 아마 미유키를 걱정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유키가 한 말 역시도 진심이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하늘에 떠 있는 사와무라는 참 현실감이 없어서, 덜컥 불안해질 때가 자주 있었다. 땅에 잘 붙어있어 줘.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 죽지 마. 정작 가장 중요한 속마음은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미유키의 손을 힐긋 보았다가, 자신이 앉은 미유키의 무릎을 보았다가, 미유키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동그란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가볍게 그 입술이 뺨에 닿았다. 쪽, 하고 입술이 피부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유키의 표정이 순간 멍해지는 것을 보며, 사와무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 금갈색의 눈에 한가득 개구쟁이같은 감정이 아로새겨졌다.
왼뺨에 한 번, 오른뺨에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몇 번이고 쪼아대듯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미유키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닿는 것은 심장에 무리가 갈 지경이었다. 쩔쩔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주제에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의 힘은 전혀 풀지 않는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는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표정 웃김다, 미유키. 그리 말하는 연인을 보며 미유키 역시도 씩 웃어버렸다. 한동안 그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자신만만하고 성격 나쁜 미소였다. 사와무라가 사랑하는 표정 중 하나.
미유키의 얼굴이 바싹 가깝게 다가왔다.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사뫄무라가 손끝으로 미유키의 입술을 꾸욱 눌렀다. 은근한 불안감이 그 표정에 어렸다.
“호흡기 전염성일지도 모름다.”
“상관없다고 말하면 화낼 거야?”
“......”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 쯤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면서. 사와무라의 표정에 미묘한 불만이 드러났다. 그 표정을 보며 미유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곧장 사와무라의 손을 잡아 내리며 그 입술에 자신의 것을 내리찍는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맞닿은 입술을 혀로 슬쩍 핥아올리며 무심코 생각했다. 이대로 사라져버릴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텐데. 아니, 시간을 멈출수만 있다면. 그것도 아니면...
허튼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고,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아랫입술을 살살 자근거리는 것으로 제 머릿속의 온갖 잡념들을 떨쳐버리려 애를 썼다. 그게 미유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04.
자고 있는 사와무라를 보는 것은 미유키에게 심란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몸의 긴장이 상당히 풀어진다는 의미인지라, 사와무라는 자연스럽게 공중에 뜨고는 했다. 미유키는 그런 사와무라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린아이보다도 훨씬 가벼워진 무게가 괴로웠다. 더 강하게 안으면 이 몸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이제 감염 말기. 상승포자 바이러스 말기 환자들은 강하게 움켜쥐면 부서지고는 했다. 먼지가 되어서, 빛이 되어서.
얼마나 더 오래 사와무라를 볼 수 있지? 미유키는 정답 없는 의문을 중얼거렸다. 자고 있는 사와무라는 편안해보였다. 부드럽게 그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벼 미유키는 이마를 가져다댔다. 가볍게 서로의 이마가 맞닿았다. 코 앞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었다.
조금 원망스러울 정도로 사와무라는 멀쩡했다. 통증이 없기 때문인지, 이미 공포를 극복했기 때문인지는 미유키도 몰랐다. 다만 언제나 태양처럼 환히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미유키도 결국은 얼굴에 미소를 걸 수밖에 없었다. 미유키가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언제나 지금처럼 사와무라가 자고 있을 때처럼,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가끔 앓아도 아프지 않게, 종종 싸워도 행복하게, 그렇게 오래오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옛날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째서, 왜 이렇게 힘든 소망이 되어버린 거지?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등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05.
사와무라는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야구 시합의 재방송을 틀어주고 있었다. 천장에 가까워지지 않도록 한 쪽 팔을 소파에 묶어 놓은 사와무라는 유독 기분좋아 보였다. 미유키가 무심코 안도할 정도였다. 아침을 차리기 위해 부엌에 들어가있는 미유키에게도 어렵지않게 들릴 정도의 성량으로 사와무라는 노래하고 있었다. 즐겁게 살랑이는 음은 히팅마치였다. 미유키의 네라이우치.
동시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경기에도 미유키가 나오고 있었다. 사와무라가 사랑하는 야구복에 고글을 쓴 포수 차림의 미유키. 이미 생방송으로 본 경기였고, 결과가 어떤지도 알고 있었지만 사와무라는 처음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얼굴로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발끝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여전히 사와무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미유키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미유키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대신 설명해주었다. 손끝도 머리카락도 전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팔목을 묶고 있던 끈이 묶을 대상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끝에서부터 조금씩 몸이 빛가루와 먼지가 되어 산화하고 있었다. 에이준은 그 황금색의 눈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보았다가, 부엌 방향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의 미유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상대 투수의 공을 골라내고 있었다.
미유키, 사와무라의 입이 그리 벙긋거렸다. 차마 목소리내어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쓰린 표정이 지어졌다.
부른다면 미유키는 틀림없이 달려올테고, 자신의 모습을 볼 것이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사와무라는 물끄러미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낮게 흥얼거리던 콧노랫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기분좋게 흥얼거리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몸은 점점 더 많이 부서져가고 있었다. 이게 끝이라고, 사와무라는 알 수 있었다.
미유키, 미유키... 사와무라가 속으로 끊임없이 그 이름을 되내였다. ...카즈야.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사와무라, 너무 과하게는─…”
미유키의 목소리가 단박에 흐려졌다. 틀림없이 제 연인이 노래부르고 있던 거실에 남은 것은 텔레비전의 소음 뿐이었다. 홈런을 쳤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회자의 목소리만 욍욍 울렸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텅 빈 거실을, 미유키는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사와무라?”
대답이 없었다.
“...사와무라?”
대답할 사람은 사라져 있었다.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06.
장례식은 간소했지만 찾아와준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뼛가루 한 줌 남기지 못한 죽음이었다. 남은 흔적이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남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미유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07.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남기는 게 없는데 쓸쓸하지 않겠어? 그리 묻는 미유키가 도리어 더 괴롭게 표정을 찡그리고 있어서, 사와무라는 웃어버렸다. 보이기에 한 점 거리낌 없는 밝은 미소였다.
미유키가 기억해줄텐데 뭐가 문제임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얄밉다고 웃어 넘겼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텅 빈 집의 소파 위. 사와무라가 마지막으로 존재했을 그 공간에 누워 미유키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사와무라는 언제나 불현득 미유키에게 찾아오고는 했다.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선명하게. 그리고 잊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게.
정말이지, 못된 녀석이었다. 더없이 고약했다.
08.
스코어북이라면 모를까, 책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미유키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은 흔적을 밟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와무라가 자주 찾아가던 도서관에서, 미유키가 기억하고 있는 책들을 모조리 빌려읽기 시작했다. 죽기 전 사와무라가 읽었던 책들이었다. 그것을 읽으며 사와무라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은 특히 사와무라가 좋아했던 것이었지만, 중반을 넘게 읽고 있는 지금까지도 미유키는 그 이유를 영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등장인물은 꽤나 사랑스러웠다. 미유키도 등장인물로서의 매력은 느끼고 있었다. 내용도 적당히 밝고 희망찼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갈수록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성의없어졌다. 미유키는 살풋 미간을 찡그리고 책을 훑어내려갔다. 그래, 단언컨대 미유키의 취향은 아니었다.
사와무라, 너는 이것의 어디가 그리 좋았던 거야? 대답없는 물음을 중얼거리던 미유키의 손길이 문득 멈춰섰다. 책 한귀퉁이에 새까맣게 쓰여진 낙서가 눈에 띄었다. 미유키가 책을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댔다. 잔뜩 흐트러진 글씨는 낯익은 것이었다. 미유키의 미간이 짧게 찡그려졌다. 글씨를 조금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였다. 펜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이 다 빠졌었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형편없는 글씨로 쓰여있는 문장은 딱 하나였다.
「조금만 더 오래, 미유키랑 같이」
살고싶어. 차마 덧붙이지 못했을 끝맻음을 속으로 삼켰다. 천천히 책을 덮어 멀찍이 밀어넣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자 어둠이 찾아왔다. 그 위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모습이 있었다. 제 연인의 모습이. 그 미소가. 그 온기를 품에 끌어안고 다시 한 번 속삭이고 싶었다.
버킷님 (@bucket_da)과 트위터에서 함께 풀었던 썰을 기반으로 소소하게 연성해보았습니다(..) 사실 뒷내용이랄지 조금 더 있기는 했었는데 미사와가 쪽쪽거리는 내용뿐이기도 하고 시간관계상 생략을(....) 미사와 행쇼!
사와무라는 바닥을 뒹굴거렸다. 지금 있는 곳은 제 집도, 심지어 5호실도 아니었지만 행동거지에는 편안함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도리어 삭막한 방 풍경에 소소하게 투덜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사와무라가 챙겨온 순정만화만 방 한 쪽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미유키의 방이었다. 그 중 분홍 글씨로 제목이 쓰여 있는 한 권을 손에 들고 내용에 집중하고 있던 사와무라가 슬그머니 시선을 한 쪽으로 돌렸다. 제 침대 위에 앉아 스코어북을 보고 있는 미유키가 눈에 담겼다. 천천히 그 옆모습을 바라보던 사와무라가 문득 인상을 구겼다. 불퉁하게 찡그려진 얼굴이 뾰로통한 형태를 띄었다.
잘 생기긴 정말 잘 생겼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사와무라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금갈색의 눈에 별처럼 박힌 것은 호기심이었다.
“미유키!”
“─선배.”
“미유키 선배!”
곧장 따라붙는 목소리에 사와무라가 뒤늦게 덧붙였다. 드러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영 불안했는지, 미유키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던 스코어북에서 눈을 때고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왜? 그리 묻는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사와무라는 아랑곳하지도 않았지만.
“선배도 안경 벗으면 이미지 체인지 하는 쪽임까?”
“이건 또 뭔 소리야...”
“3자눈이 된다거나!”
그렇게 외치는 눈은 호기심이며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황금에 가까운 색 고운 금갈색 눈이 커다랗게 반짝였다. 둥글게 빛나는 그 모습은 참 고왔지만, 연인에게 하는 말 치고는 참... 미유키는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그건 만화잖아...”
“그럼... 더 잘생겨짐까...?”
순정만화에서 안경을 쓰고 있는 캐릭터들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안경을 벗으면 못나지거나, 과하게 잘나지거나. 전자가 아니라면 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에이준은 말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표정이 못마땅하게 찡그려졌다. 방금 전 흥미가 가득한 표정에 비하자면 순식간에 불만이 가득해진 표정이었다. 미유키는 이제 기가 찼다. 저기요, 사와무라 군. 저는 당신 애인입니다만.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리 말해봤자 저 둔하디 둔한 사와무라는 그게 뭐 문제 있슴까? 같은 말이나 하겠지만.
“만화에서 벗어나줄래, 사와무라?”
“확인해봐도 됨까?!”
질문의 형태를 하고는 있었다만 이건 통보였다. 미유키는 어렵잖게 그걸 알 수 있었다. 무릎걸음으로 순식간에 미유키에게 다가온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안경에 손을 뻗었다. 미유키는 딱히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여기서 뭐라고 타박해봐야 불씨를 받은 사와무라가 활활 불타기만 할 것이라는 것을 미유키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안경을 벗겨냈다. 그리고 물끄러미 시선을 맞췄다. 미유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사와무라의 표정이 느리게 구겨졌다. 미유키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리는 것도 그와 거의 동시였다.
“이... 세상 혼자 사는 사람 같으니!!” “??”
미유키는 순간 사와무라의 말을 이해하지를 못했다. 이건 또 무슨,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런 미유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와무라는 새빨게진 얼굴로 그대로 물러섰다. 미유키는 날 선 고양이마냥 카르릉거리는 사와무라를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데? 그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생각이었다.
“이, 이! 왜 혼자 만화적 연출 속에서 삽니까?! 치사한 인간 같으니!!”
“하아...?”
“못되먹은 인간!”
나는 왜 지금 사와무라에게 욕을 먹고 있는가. 미유키는 천천히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미유키는 당연히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순식간에 수려한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사와무라가 소리없이 몸을 굳혔다. 가히 불길했다.
“지금 내가 잘생겼다고 화내는 거야?”
“......”
맞는 말이다만 긍정하기 참으로 껄끄러웠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사와무라를 보며, 미유키가 키득키득 웃었다. 좀 황당하기는 했다만 연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고, 미유키 역시도 그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와무라게 자신을 멋있게 보아준다면 도리어 고마울 따름이었다.
기분이 흡족한 탓인지, 평소보다 기분좋게 웃고 있는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가 볼멘소리를 흘렸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만, 그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이 말임다... 뭐 이리 잘생겼슴까...? 양심없어... 반칙임다...”
사와무라의 말이 이어질수록 미유키의 표정이 점점 머쓱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에 가까웠다. 칭찬을 듣는 것은, 그것도 사와무라에게 듣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만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그런 성격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만, 가감없이 튀어나오는 상상 이상의 칭찬에 아무리 미유키라고 좀 민망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미유키에게 있어서 단 하나뿐인 연인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미유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소파에 드러누워 야구공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몸 하나 뉘이면 끝인 공간에서도 요령좋게 이리저리 몸을 틀며 투구자세를 잡으려 드는 모습이 바보같아 보여서 조금 우습고도, 꽤 귀여웠다. 미유키의 표정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걸렸다. 조금 어이없기야 하겠지만 문득 묻고 싶은 게 생각난 찰나였다.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모습이 있었다. 미유키는 턱을 괴고 그를 불렀다.
“사와무라, 궁금한 게 있는데.”
“옷? 뭠까? 미유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천장을 향해 누워있던 사와무라가 곧장 몸을 틀어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며 흥미진진함을 가득 담은 표정이 그 얼굴에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며 미유키는 소리없이 과거를 겹쳐보았다. 지금의 사랑스러운 표정과는 조금 다른 우는 얼굴이었다. 더없이 서럽게 우는 얼굴. 미유키는 지금까지도 그 때만큼이나 서럽게 우는 사와무라를 본 적 없었다.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너, 그 때. 내가 삼학년 마지막으로 나갔었던 코시엔 시합에서 졌었을 때, 울었었지?”
“네, 뭐. 그랬죠?”
고개를 갸우뚱하는 움직임에는 의아함만 가득했다. 그 때를 기억하고는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잊기에는 고교 삼 년 내내 코시엔만을 노리는 삶을 지냈으니 잊기에도 힘들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 걸 묻슴까? 순간 부루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꽤나 자주 우는 주제에, 어렸을 때 운 것은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에 미유키는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어? 너는 그 때 잘 던졌잖아.”
새삼스럽게 궁금해진 일이었다. 그 때는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세 명의 투수 중에 사와무라는 실점 하나 없이 잘 던졌었다. 패배가 서러웠다기에는 사와무라가 삼학년 경기에서 졌을 때보다도 섪게 울었더랜다. 이미 한참은 더 전의 일을 이제야 물어오는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민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야... 진 게 억울하기도 했고...”
“그런 것 치고는 되게 울었잖아.”
쿠라모치나 노리보다도 더 오랫동안 울던 것이 기억에 선명했다. 말꼬투리를 잡고 집요하게 놓아주지 않는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가 결국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언뜻 보이는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가 그 때... 좀 더 잘 던졌으면... 그, 미유키랑, 선배들이랑 같이... 더 시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었슴다...”
“그리고?”
더 있지?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지금 말한 사와무라의 대답이 거짓은 아닐지언정 전부도 아니라는 것을 미유키는 기민하게 눈치챘다. 날카롭게 찔러오는 미유키의 질문에 사와무라가 고개를 숙였다. 우물거리는 것이 평소답지 않았다. 미유키는 반 쯤 본능적으로, 지금 기다리고 있는 대답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아 진짜, 꼭 들어야 함까?!”
“응. 부탁할게.”
곧장 날아온 대답에 사와무라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바로 이 때 부탁해라니, 정말이지 반칙이 따로 없었다. 치사한 남자였다. 단박에 울상을 지어버렸으면서도, 결국 사뫄무라는 대답할수밖에 없었다.
“...미유키가 안 울었으니까.”
“......응? 뭐라고?”
못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잘못 들었나 싶었다. 되묻는 미유키의 목소리에 결국 사와무라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집이 울리지나 않았나 착각할 수준의 데시벨이었다.
“져서 그런 표정 짓고 있는 주제에!! 미유키가 안 울었으니까!! 서러워져서 울었슴다!! 나는 그 때 미유키 대신 운 거니까!! 그렇게 많이 운 검다!!”
“......”
진짜, 이런 거 묻지 좀 마십쇼!! 그리 소리치며 방으로 뛰어들어가버리는 사와무라를 차마 붙잡지 못하고, 미유키는 그대로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머리를 박았다. 도저히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와무라 에이준은 감정이 풍부했다. 그는 잘 웃는 만큼 잘 울었고, 그리고 금방 다시 웃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공유하는 세이도 야구부원들에게 있어서 그 모습은 익숙한 것이었고, 어디서든 울고 있는 사와무라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순정만화를 붙잡고도, 또는 조금 기쁘거나 조금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사와무라는 잘 울었다. 그것은 사와무라에게 있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 번 엉덩이를 걷어차주거나 손등으로 한 번 때려주면, 또 금방 눈물을 그치고 버럭대고는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가볍지 않게 흘리는 눈물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닦아내고 또 일어서는 것이 사와무라 에이준이었다. 그런 사와무라를 보고 경탄하는 일반부원들마저 있을 정도로 그는 참 꿋꿋한 사람이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눈물은 딱히 드문 것도 아니었고, 운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챙겨줘야 한다는 의미 역시도 아니었다.
미유키 역시도 세이도의 야구부원으로써 몇 번이고 사와무라의 우는 얼굴을 본 적 있었다. 투수로써 자신의 피칭에 만족하지 못해서, 시합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서라는 이유로도 사와무라는 몇 번 울었고, 반대의 의미로도 울었다. 가끔은 식사의 반찬이 맛있다는 의미로도 웃으며 울었으니 딱히 비싼 눈물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사와무라가 그럴 때마다 미유키는 웃고는 했다. 바-보. 하고 입을 벙긋여 놀린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사와무라는 옷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아버리고는 버럭 화를 냈으니까. 미유키는 그 사실에 평범하게 만족했다. 어떤 의미로든 결국 눈물흘리는 사와무라보다는 고양이눈이 되어 버럭 화를 내는 사와무라 쪽이 편했으니까. 그런 일상이었다.
야구부의 여름은 뜨거웠고, 땀이 줄줄 흘렀으며, 그만큼 눈물이 흐르고, 큰 소리로 고함을 치는 시간이었다. 매미 우는 소리마저 묻혀버릴 정도의 배팅 소리가 울리고, 세이도의 여름은 길었다. 수백 수천개의 고등학교가 희망하는 길고 긴 여름이었다.
여름이 끝난 것은 한 개의 경기가 끝난 순간이었다. 딱 두 번만 더 이긴다면 우승이었다. 코시엔의 우승이라는 최고의 명패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번을 이기지 못해 벽앞에서 무릎꿇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휘둘러진 배트가 어슬퍼니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이 미유키 카즈야를 포함한 세이도 삼학년들의 마지막 고교 공식 경기였다.
미유키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울음을 터트리는 부원들이 있었다. 경기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졌다는 것 역시도 알았다. 미유키는 천천히 제 손의 미트를 바라보았다가, 정면을 보았다. 사와무라가 보였다. 울고 있었다.
한 쪽 눈을 불편하게 찡그리고 황금색 눈의 소년은 눈물흘리고 있었다. 괴롭다는 듯이 일그러진 얼굴이 올곧게 미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쉴 틈 없이 떨어지는 짠물이 그 뺨을 가득 채웠다. 차마 목소리도 나오지 못해서 사와무라는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울고 있었다. 미유키는 그 모습을 조금 생소하게 바라보았다. 이번 경기에서 사와무라는 잘 던졌고, 실점도 없었다. 진 것을 사와무라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벤치에서 응원하는 목소리도 귀청 터져라 잘 들렸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와무라는 마치 제 실수로 졌다는 것처럼 울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그렇기에, 미유키는. 잠시 머뭇거린 그는 사와무라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가볍게 몇 번 토닥여주었다. 무언의 말이었지만 괜찮다는 의미였는데, 그것을 알아챈 것인지 아닌 것인지. 사와무라는 제 어깨에 얹어진 손에 뺨을 기대고 훨씬 서럽게 눈물을 터트렸다. 꽉 막혀있던 목구멍이 뚫린 것처럼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띄엄띄엄 미유키의 이름이 섞여들었다. 미안하다는 사과 역시도 있었다. 손등에 닿는 뜨거운 액체가 금방 가득 차서 곧 흘러내렸다. 온통 손을 적신 눈물을 닦아낼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도리어 미유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삼학년이 은퇴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 다음 세대의 일이었다. 주장직을 이어주고, 마음을 이어주었으니 남은 자들의 할 일은 공백을 지우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일 앞자리에서 다른 부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주장이 된 사와무라와, 1학년 여름부터 주전 멤버의 자리를 가지고 있던 다른 두 명의 일이었다. 은퇴경기까지 모조리 끝마친 미유키는, 가끔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세이도의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던 그에게 내밀어져오는 손은 많았고, 프로에 들어갈 생각인 그는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세이도 야구부원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생소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사이나쁜 친구 씨는 그런 미유키를 보며 특유의 웃음소리로 한 번 웃고 말고는 했다.
여름이 끝나니 시간이 흐르는 것은 빠르기도 빨랐고, 어쩌면 느리기도 했다. 그러나 졸업식이 찾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새로운 팀으로 구성된 세이도 야구부원들은 가을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센바츠의 출전 역시도 확정지어두고 있었다. 은퇴한 삼학년들은 그 마지막 경기를 보면서 화내고 칭찬하고 웃었다. 미유키 역시도 그 틈새에 끼어서 구장을 내려다보았다. 마운드 위의 한 사람, 그리고 그의 공을 받는 또 한사람.
미유키는 조금 생소한 기분으로 학교를 돌아보았다. 졸업이었다. 이제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가는 것이고, 동시에 프로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어색하기만 했다. 프로, 프로 야구선수. 언젠가 자신의 소속된 팀의 주전 포수가 되는 것이 일단의 목표였다. 미유키의 입꼬리가 소리없이 올라갔다. 자신의 선택은 그 곳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변에는 야구부원들이 가득했다. 품에 안겨지는 꽃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후배들에 선배에게. 후배 선수들이 선배 선수에게 전해주는 감사의 인사는 세이도의 전통과도 같았으니 당연하다고 해야 했다. 그리고 미유키는 주장이기까지 했었으니까. 자신에게 꽃을 안겨주며 동시에 정중하게 고개숙이는 후루야를 보며 미유키는 한 번 웃고 말았다. 그 등을 한 번 때려주기도 했다. 삼학년이 된 후루야는 그 어떤 선수보다도 주목받는 투수였으니까. 내년이 기대되는 것은 미유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한명의 투수도,
미유키는 그 사실을 문득 깨닫고 주변을 살폈다. 또 한명의 투수가 있어야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숨기기도 민망한 우렁찬 목소리 역시도 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미유키가 소리없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고개돌려 제 곁에 있는 후루야에게 물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질문에 후루야는 표정변화 없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의미였다.
미유키는 곧장 저와 함께 졸업하는 팀메이트들을 찾았다. 같은 투수인 노리의 곁에도 사와무라는 없었다. 심지어 같은 방의 룸메이트인 쿠라모치의 곁에도 없었다. 물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중 쿠라모치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조노의 곁에 있는 코미나토에게 물었다. 사와무라는? 코미나토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다가 고개를 저었다. 거의 두 시간 쯤 전에 불펜에 있는 것은 보았는데요... 끝이 어물거리는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스스로에게도 없다는 의미였다.
미유키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세이도 야구부의 그라운드. 텅 빈 그곳에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마운드 위에 서 있었으나 교복 차림이었다. 손에 글러브를 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졸업식까지 연습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심답게 연습중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소리없이 마운드에 서서, 포수가 앉아있는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와무라!”
미유키는 소리높여 그 이름을 불렀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미유키는 그런 사와무라를 보며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미유키 선배?”
사와무라가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미유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표정에 놀람이 가득했다. 어째서 여기 있슴까? 되묻는 목소리에 조금 기가 차기도 했다.
“여기서 뭐 해? 던지고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좀 보고 있었슴다.”
뭐야, 내가 졸업한다고 해서 새삼 감상에 잠기는 거냐? 그리 말하며 미유키는 짓궂게 웃었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평소처럼 버럭 하고 화내는 대신, 한 손을 턱에 대고 잠깐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미유키를 돌아보며 환히 웃었다.
“비슷함다!”
그 대답에 도리어 미유키가 당황했다. 안경 너머로 둥글게 떠진 눈을 향해, 사와무라는 깊이 고개숙였다.
“졸업 축하드림다! 미유키 선배.”
고마웠슴다, 감사함다. 공 받아줘서 기뻤슴다. 코시엔 우승 못시켜드려서 죄송함다. 당신에게 공 던질 수 있어서 행복했슴다. 그 모든 감정을 한데 그러모아 사와무라는 웃었다.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예쁘지는 않았지만, 숨이 턱 하니 막힐 정도로 찬란한 미소였다. 온전히 미유키를 위해서. 그에게 감사를 건내기 위해 피어난 미소였다. 미유키가 잠시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 한 쪽이 희게 비는 감각은 생소한 것이었다.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소리가 낯설었다.
아, 그. ...그래, 고맙다. 미유키는 겨우 내뱉은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한 손으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날짜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제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늦었다면 한참 늦은 자각이었다.
아마... 꽤 과거... 19세기 즈음...? 시대고증은 제대로 안 되어있지만()() 중앙아시아 정도의 배경입니다() 이어... 쓸까..? 쓰려나? 잘 모르겠다...
00.
“여행을 왔슴까?”
눈이 마주친 순간 사내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크게 휘어지는 미소가 명쾌했다.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들 제 갈길 따라 걷는 사람들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상대의 시선은 정확하게 미유키에게 닿아있었다. 미유키는 그제야 상대가 자신을 향해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행을 왔슴까?”
상대가 다시 물었다. 미유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그러자 상대가 환하게 웃었다. 미유키는 그제야 천천히 상대를 살폈다. 갈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아무리 봐도 앳된 얼굴이었다만, 내미는 손은 단단해보였다. 미유키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웃는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며 한 번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맞잡으라는 의미였다. 미유키는 곧 상대의 손을 맞잡아 가벼이 흔들었다. 의미없는 악수였다.
“사와무라 에이준임다! 앞으로 잘 부탁드림다!”
아. 미유키는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를 깨달았다. 혈혈단신으로 타국에 떠난다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부터 미유키를 걱정하던 대학 선배 크리스가 추천해 준 안내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여행을 다닐 일 년간 미유키와 동행할 유일한 동행자이기도 했다. 미유키는 다시 한 번 상대를 바라보았다가, 가볍게 목인사를 건냈다.
미유키 카즈야입니다.
일 년을 함께할 여행의 첫날이었다.
01.
동행자,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많이 다른사람이었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말이 많고, 소란스러웠으며, 안내인 일에 서툴렀다. 손길은 다부졌지만 야무지지 못했고, 소소하게 빠뜨리는 구석도 있었다. 요리는 잘하지만 설거지에 서툰 것처럼 아주 미묘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채우는 것은 미유키의 역할이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그렇게 하나씩 챙겨줄때마다 머쓱하게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미유키는 어느정도 지금의 동행인에게 만족했다. 사와무라가 안내인 일이 완전히 몸에 벤 숙련된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재주가 하나 있었는데, 함께하는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재주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잠깐 품었던 상상 이상으로, 지금의 여행은 기분나쁘지 않을정도의 소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사와무라의 덕분이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로써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 이곳에 대해 말하는 사와무라의 표정에는 언제나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별처럼 빛나고 있어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감탄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향이 싫어 도망치듯 이곳으로 오게 된 미유키로써는 차마 흉내내기도 힘든 것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양때 울음소리, 청명한 하늘, 그 하늘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매와 야생 동물을 사냥하여 낚아채는 그 몸놀림, 날개짓. 까마득한 돌산과 그 위를 뛰어오르는 산양. 별이 가득한 밤하늘과 흥겨운 춤과 노래. 모두가 어울리는 축제와 화려한 자수,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 전통들. 장인이 만들어낸 나무장식과 사람이 가득한 결혼식, 그리고 결혼하는 신부...
마치 노래에 가깝게 음을 붙여 흥얼거리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유일한 청자인 미유키에게는 참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다.
02.
사와무라는 언제나 한 쪽 어깨에 활을 매고 다녔다. 사와무라의 말에게는 화살통과 화살 역시도 묶여있었다. 사와무라는 밤에 종종 사용하지도 않은 그것을 손질하고는 했다. 그것은 일견 버릇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장식용, 혹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위협용이 아닌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미유키가 알게 된 것은 여행을 시작한 지 삼 주가 조금 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미유키는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건강이 약하다거나 심신이 미약하지도 않았으니 어떻게든 입에 쑤셔넣어 한 입이라도 더 씹고는 했지만, 썩 맛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너무 기름지거나, 너무 퍽퍽하거나, 혹은 너무 짰다. 음식을 만드는 사와무라는 그 사실에 미안해하고는 했지만, 그리고 어떻게든 미유키에게 맞춰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와무라의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또,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음식은 훌륭했으나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인 탓에 적응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익숙해지면 괜찮을 겁니다.
미유키는 그리 말하며 기 죽은 표정의 사와무라를 달랬다. 사와무라가 저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여행을 떠난 뒤 바로 다음날의 일이었지만, 미유키는 아직까지도 사와무라에게 거리감 있는 존칭을 쓰는 중이었다. 말을 꽤나 편하게 하는 사와무라와는 반대의 일이었다.
미유키는 그 뒤로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식생활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마 미유키의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와무라에게 있어서 그 일은 어지간히 중요한 것이었는지, 사와무라는 그 날 옆을 지나가는 야생 토끼에게 활을 겨눴다. 이제껏 몇 번이고 야생동물을 지나친 적이 있었지만, 사와무라가 활을 쥔 것은 처음이었다.
미유키는 그 날 처음으로 사와무라의 과거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과 힘이 들어간 팔, 둥근 눈매가 순간 날카로운 위압감을 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일견 정적이 내려앉았다가, 쏘아진 화살은 그대로 토끼의 목을 꿰뚫었다. 즉사였다.
죽은 토끼를 앞에 두고 기도하는 사와무라의 모습을 미유키는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아마 하늘일 대상에게 기도하고, 화살을 뽑아내고 칼로 토끼를 해체하기 시작하는 모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사와무라는 능숙한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안내인은 사냥꾼일 필요가 없었다.
미유키는 한 손에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빠짐없이 응시했다. 도축작업따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미약하게 꺼림칙하기까지 했지만 사와무라의 모습에서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일견 경건해보이기까지 했다. 이유는 몰랐다. 어쩌면 활을 쏘는 그 옆모습이 꽤나 아름다워서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기도하는 그 모습이 그 누구보다 진중해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 같은 것은 알 수 없엇고, 미유키는 그런 감각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날 저녁은 토끼구이였다. 그것은 맛있었고, 그 뒤로 더 이상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일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끼손가락에 엮여져 있다는 그것.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져 있었다. 그 실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물게, 아주 드물게 실존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그 사실을 침묵하고는 했다. 다른 사람의 인연이 보인다는 것은 아주 위험했고, 세상에는 운명으로 엮여있지 않아도 사랑하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리어 운명을 정확히 찾아 만나는 것이 더 드물었다. 타인의 운명의 상대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으로 그 사람들을 몇 번이고 불행하게 만든 이후, 그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이제 붉은 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것은 실존하는 환상처럼 특별한 무언가로써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미유키 카즈야는, 바로 그 ‘특별한’ 사람에 속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보이던 것은 모든 사람들의 새끼손가락에 엮혀있는 빨간 실이었다. 얇지만 질기고, 어째서인지 벽이며 건물을 모조리 통과해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듯 싶었다. 미유키가 그것이 운명의 붉은 실임을 알아차린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였다. 미유키와 같은 사람들이 주로 초등학교 저학년에 그 사실을 눈치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미유키 카즈야는 또래보다 조금 영리하여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또 다른 점은 그런 비밀을 선뜻 말해줄 정도로 친분을 깊게 쌓은 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유키의 비밀은 우연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기연으로 인해 지켜질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 그것이 운명의 붉은 실임을 알게되자, 미유키 역시도 실 끝에 연결된 사람이 궁금할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에 흥미를 잘 두지 않는 야구 외길을 걷고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호기심 정도는 가지게 되었다. 제 운명의 상대는 누구일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 것들.
하지만 미유키의 운명의 상대는 아마도 먼 곳에 살고 있는 듯 싶었고, 아무리 실을 따라가도 그에 얽혀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렸던 미유키는 금방 제 짝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야구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미유키는 충분히 바쁜 사람이었고, 기력을 다른 곳으로 쏟을 마음도 쏟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만날 사람이라면 만나겠고, 아니면 말겠지. 미유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금방 실에 관한 것을 잊었다. 야구하는 도중 경기장 여기저기에 실이 엉켜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곤란한 일이었지만, 그것 역시도 시간이 흐르면서 금방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익숙함이 생소함으로 변했던 순간이 바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세이도 고등하교 그라운드. 아마도 레이쨩이 데려온 것 같은 중학생. 처음 보는 소년이었지만 미유키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제 새끼손가락에 얽힌 끈이 어지럽게 시야를 가렸다. 상대와 이어져있었다. 빛을 받아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시끄럽게 소리치는 목소리, 야구를 하는 사람, 투수.
허, 미유키는 짧게 숨을 뱉어냈다. 투수, 투수였다. 미유키의 붉으 끈으로 이어진 사람은. 아마도 운명이라고 이름붙여진 사람은.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있었다. 그래, 어떻게 미유키 카즈야의 짝이 야구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미유키 카즈야의 운명으로 엮인 사람이라면 어찌 투수이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저 투수가 내 운명의 상대.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매만졌다. 단단히 묶여있는 붉은 실이 있었다. 제대로 상대와 이어진. 사와무라, 사와무라 에이준. 미유키는 입 속으로 그 이름을 굴려보았다. 혀끝이 묘하게 간질간질했다. 단것도 같았다.
그리고 사와무라 에이준은 결국 미유키 카즈야가 있는 세이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다시 한 번 소년을 만났을 때, 미유키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관계상(..) 잘라낸 부분이 많아서 조금 아쉬운 글... 어쩌면 이어지는 무언가를 쓸지도 모르겠다()
미유키가 아주 조금 등장합니다... 주의! 개연성 없음도 주의하고 이것저것... 이제 이건 고정멘트같군요 언제나 봐주시는 분들께는 감사합니다 umu)*
잠에서 깨어난 순간, 사와무라 에이준은 상실을 직감했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지만, 명백하게 달랐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평범한 일상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찾아 헤맸다. 두어번 둥근 눈이 깜박여지고, 윗층 침대천장만 멀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오늘의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었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감각이었다. 사와무라 에이준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했다. 그 감정은 진솔해서, 그의 내면 어딘가에 위치하여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얼굴모를 누군가를 떠올릴 때마다 사와무라는 조금 행복해지고, 조금 기뻐졌으며, 어딘가가 조금 쓰렸다. 두근두근 울리는 심장소리에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였다. 사와무라는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했다. 그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주 큰 문제처럼 느껴질 정도로 좋아했다. 그렇기에 사와무라 스스로도 의아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잊은 거지? 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을 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누구지?
사와무라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같은 방의 쿠라모치 요이치였다. 사와무라는 자신에게 어서 일어나라며 걷어차는 선배에게 바락바락 소리치며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아침을 먹기 위해 니적니적 준비하며, 사와무라는 물었다. 무심한 목소리였다.
“쿠라모치 선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심까?”
“뭐? 그딴 걸 왜 나한테 물어?”
사와무라의 질문에 쿠라모치는 단박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전에 사와무라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쿠라모치는 일단 근본적인 의문을 찾았다. 사와무라는 그의 후배이자 룸메이트였고, 같은 부활동을 하고 있기도 했다. 즉, 함께 공유하는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더군다나 쿠라모치는 결코 둔한 타입도, 무언가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도리어 쿠라모치만큼 예리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런 쿠라모치마저도 제 시끄럽고 활발한 후배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런 간질간질한 분홍빛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쿠라모치는 당황스러울수밖에 없었다. 쿠라모치는 다시 되물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냐?”
“있슴다. 근데 모르겠슴다.”
이건 또 뭔 헛소리야. 쿠라모치는 이상한 말을 하는 후배를 다시 한 번 걷어차주는 것으로 선배의 애정을 과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배는 왜 때리냐며 버럭거리기는 했지만서도. 건방진 짓을 해 주는 후배에게 다시 한 번 관절기를 거는 것으로 아침을 맞은 두 선후배는 곧 아침을 먹으러 그제야 방 밖으로 나왔다. 쿠라모치에게 아침운동처럼 흠씬 혼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와무라는 여전히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아침공기인 탓인지 바깥은 생각보다 싸늘했다.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몸을 곧게 세운 사와무라는 여전히 곰곰히 생각에 빠진 채로 식당 안에 들어섰다. 누구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생각은 사와무라가 밥공기 세 그릇을 비운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평소 입장부터 쩌렁쩌렁했을 사람의 기묘한 침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바로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하루이치나 카네마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식사를 끝마친 사와무라가 제 숟가락 끝을 입에 물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까지 확인한 하루이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이준 군, 무슨 일 있어?”
“응? 응. 그럴지도?”
“무슨 일인데?”
하루이치는 직구로 물었고, 동시에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있었다. 알게모르게 틀림없이 신경을 끌었을 터였다. 고요한 사와무라 에이준은. 하지만 그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사와무라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결론은 담백했는지, 금방 사와무라는 하루이치를 돌아보았다.
“하룻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예상못한 질문에 하루이치의 표정이 단박에 흔들렸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당혹스러워하는 친구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사와무라는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도 좋아하는데,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그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그 상황에 마주쳤다는 답답함과 초조함을 논리없는 말로 모조리 뱉어낸 사와무라는 은근한 기대를 담아 하루이치를 바라보았다. 마치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사와무라의 말을 들은 주변이 숨죽여 시끄러워지는 것은 들리지도 않는지, 사와무라는 눈을 빛내며 하루이치를 보고 있었기에, 하루이치는 결국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응. 전혀!”
“그런데... 그, 좋아...하고?”
“응!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은 당당하기까지 했다. 하루이치는 할 말이 없었다. 에이준 군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루이치의 머릿속에 제일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루이치 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카네마루나 후루야, 토죠의 경우도 같은 것을 떠올렸을 터였다. 하지만 역시,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가장 확신되는 것이 야구라는 점에서 이미 망한 것 같았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야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야구를 잊었더라면 지금처럼 조용할 리 없을 터였고.
그렇기에 하루이치는 조금 감탄마저 나왔다. 하루이치마저도 사와무라의 감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사와무라 에이준이었는데도.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사방팔방 내뿜는 것을 훨씬 잘 하는 사와무라건만. 그렇기에 하루이치는 물었다.
“생각나는 이미지라던가, 그런 건?”
“으음...”
사와무라가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허공을 헤메는 시선이 불확실하게 어느 한 지점을 응시했다. 얼굴을 찐빵처럼 일그러뜨리며 끙끙거린 사와무라는 딱 한 마디를 뱉었다.
“노란색.”
“노란색?”
하루이치가 되물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노란색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근처에 노란 머리카락이나 눈을 가진 사람 역시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진행되기 전에 사와무라가 말을 이었다.
“보고 있으면 눈을 땔 수가 없어. 뜨겁고... 흙 냄새랑... 땀 냄새가 나고. 뭔가 머리가 멍하고 아득한데 심장이 두근두근해. 굉장히 기분이 좋아. 계속 그렇게 있고 싶었고. 좋아해. 보고 있으면 계속 좋아한다가 가득 쌓였어. 그래, 그런... 기분이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낯뜨거워질 정도의 고백이었다. 그 감정을 제대로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그 경악을 이끌어낸 장본인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 감정은 아직도 제대로 제 안에 있건만, 누구에게 향하는지를 기억해낼 수 없어 괴로웠다.
누구였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로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보고 있으면 행복해졌고, 조금 화가 났지만 그래도 좋았다. 언젠가는 인정하게 만들어주겠다며 이를 갈곤 했던──
“뭐야,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사와무라는 막 안쪽으로 들어서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잘생긴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네 짓이냐?’ 시선이 그리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와무라는 깨달았다. 깨닫지 못할 수가 없었다. 상대에 대한 기억은 잃었어도 몸은 놀랄 정도로 정직하게 반응했다. 심장뛰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