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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02.02 [카나카오] 열대야
  3. 2017.01.02 [리츠마오] 머리카락
  4. 2017.01.01 [카나카오] 온천
  5. 2016.12.28 [리츠마오] 홍월
  6. 2016.12.25 [카나카오] 크리스마스
  7. 2016.12.11 [리츠마오] 질투
  8. 2016.12.04 [카나카오] 심해의 별
  9. 2016.12.04 [카나카오] 감기
  10. 2016.12.03 [리츠마오] 청혼

[카나카오] 동화

2017. 2. 21. 18:37 from ENSTARS/NOVEL




 약 3개월 전, 하카제 카오루는 해변을 걷다가 상처입고 쓰러진 인어를 발견했다. 남자를 싫어하던 소년은 남자 인어를 주워 치료해줬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낯선 세계를 배우게 된 인어와 낯선 생명체와 교류하게 된 인간은 수많은 갈등을 겪었고, 그만큼 마음 고생을 했었다. 끝내 소년은 바다로 돌아가기 직전인 인어를 붙잡아 사랑을 고백했다. 동화라기에는 조금 구질구질하고 많이 힘든 이야기였지만, 결말만큼은 분명 아름다웠다. 달 비추는 밤바다를 뒤로 하고 저에게 키스하는 인어의 모습을 카오루는 결코 잊을 수 없을 터였다. 음, 분명 해피엔딩. 그 이후로 이어질 이야기는, 분명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심각하게 분홍색의.



 키스는 입술에 한 번, 이마에 두 번. 뺨에 몇 번이고 쪽쪽거렸다가 콧잔등에 한 번.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입술에. 허리를 끌어안고 카오루의 얼굴에 온통 입술을 찍어대는 카나타는 행복해 보였다. 키스받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언제나 느끼는 감상이었지만, 심장을 토할 것 같았고. 카오루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대번 시선을 저 멀리로 피했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트를 뿅뿅 날리고 있는 카나타의 얼굴을 마주 보기 머쓱했다. 심장에 좀 안 좋은 광경이기도 했다. 

 카나타는 제 시선을 피하는 연인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인어는 독점욕이 강했다. 조금 고개를 숙여 목덜미를 쪽쪽이기 시작하자 카오루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목덜미며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으, 카나타 군. 시선을 맞추며 띄엄띄엄 뱉어내는 목소리에 카나타가 대번 환하게 웃었다. 만개하는 꽃보다 어여쁜 얼굴을 보며 카오루는 입술을 꾹 붙였다. 하고 싶은 말도 삼킬 정도의 위력이었다. 과연 인어. 마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심장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카오루, 카오루.”


 카나타는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늘 그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입술이 붙지 않고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카오루, 하고 부르는 소리를 카오루는 매우 좋아했다. 그의 목소리는 늘 지나치게 다정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를 황홀하게 만들 정도로 달았다. 혀끝을 자근자근 물던 카오루가 곧 답했다.


“......왜, 카나타 군?”

“우리 바다에 갈까요?”

“벌써 저녁인데. 바다에 다녀 오기에는 너무 늦지 않겠어?”

“음, 그런가요?”

 

 카나타는 조금 아쉽게 답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는 건 카오루에 대한 배려였다. 더 치근거리는 대신 카나타는 카오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체온이 조금 더 바싹 붙었다. 목덜미에 이마가 닿았다. 체온 나누는 어린 짐승처럼 가까이 붙자 숨소리 드나드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카오루는 침묵했다. 그의 맥박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 전해지는 심장 뛰는 소리가 기꺼웠다. 격동적으로 시작하게 된 두 사람의 사랑은 놀라우리만치 평화로웠다. 다만 사랑만이 넘쳐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어린 인어였고, 그는 그보다 더 어린 인간이었다. 두 사람의 삶은 하늘과 바다만큼 달랐다. 자그마한 교차점 하나로 이어진 세계는 사랑스러운 만큼 불편한 것도 많았다. 사랑은 두 사람의 세상에 적응해가는 이유이자 결과였다. 카오루는 카나타와 침묵으로 체온을 나누는 지금같은 시간을 좋아했다. 시계 초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우주에 둘만 남은 것처럼 고요한 시간.


 카오루, 카오루. 침묵을 가르고 두 번 부르는 목소리에 조용히 답했다. 카나타는 덧붙이는 말 대신 키스했다. 입술 닿았다가 떨어지며 나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미약한 웃음소리가 그 뒤에 섞여들어가고, 자그마한 대화가 엉겼다. 행복하게 끝난 동화는 평화롭고 잔잔한 바다처럼 온유했다. 거친 파도 한 자락 불지 않는 아름답고 잔잔한 바다. 


 시선이 끈질기게 달았다. 도무지 상대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붙박이장처럼 바라보는 모양새가 내심 마음 한구석을 흔흔하게 만들었다. 카오루는 카나타의 목덜미에 흔적처럼 돋아나있는 에메랄드 색 비늘 위에 입술을 댔다. 카나타가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가, 크게 끌어안았다. 간지러워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웃음소리도 흘렸다. 인어인 그는 체온이 낮았지만, 카오루와 닿은 순간만큼은 인간만큼이나 뜨거워졌다. 카오루는 따끈하게 열이 오른 체온을 좋아했다. 귓가가 붉었다.

 카오루가 온전한 인간이듯 카나타는 온전한 인어였고, 바다에 살던 그는 바다의 규칙에 익숙했다. 카오루가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없어 그의 세계에 살 수 없기에 카나타가 카오루의 세계에 올라왔으니 카오루는 카나타에게 최선의 배려를 주고 싶었다. 카나타는 자신의 세계를 등지고 카오루의 곁을 선택해주었으니까. 사랑이 희생 위에 세워져있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으나, 카오루는 카나타의 일에 지나치게 시야가 좁아졌다. 독점욕 강한 인어는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저에게 신경써주는 연인은 사랑스러웠으므로. 


 카나타가 카오루의 손을 쥐어 자신의 다리 위에 얹었다. 인어의 다리는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만들어졌다. 길고 아름다운 인어의 꼬리가 아니라 인간과 꼭 같은 다리는 카오루를 향한 사랑의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카오루의 뺨이 미약하게 붉어졌다. 내심을 들켜 쑥쓰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귀여운 카오루. 늘 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며 카나타가 그 뺨에 입맞췄다. 카오루가 눈을 감았다. 숨결이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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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열대야

2017. 2. 2.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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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마오] 머리카락

2017. 1. 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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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카오] 온천

2017. 1. 1. 22:00 from ENSTARS/NOVEL




 문득 스스로가 부허하다고 느껴졌다. 졸업과 함께 찾아온 어떤 이유 탓에 마음 한 구석이 둥실거렸다. 그 탓에 도리어 하릴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카오루를 보며 소마는 경망스럽다며 열을 올렸었다. 그런 후배를 놀리는 것도 재미가 없어 그의 앞에서 얌전하게 굴기 시작한 것도 벌써 2주째였다. 그 사이 소마는 카오루가 뭘 잘못 먹거나 크게 탈이 나거나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하다며 케이토에게 열변을 토했다. 교실에 얌전히 앉아있던 카오루에게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다가와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오던 케이토를 생각하며 카오루는 슬쩍 웃음을 물었다가, 시선을 내리깔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건조한 공기에 피부가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카나타 군이 싫어하는 겨울이었다. 


 카오루도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겨울 바다는 좋아했다. 추운 탓에 여자아이들도 집에서 나오지 않는 시기가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굳이 바깥으로 끌어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기에 카오루는 홀로 다녔다. 겨울 바다는 혼자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도 없는 탓에 누구도 카오루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뺨이 차게 얼어붙을 때까지 카오루는 오래오래 겨울 바다를 보다가 들어오고는 했다.

 카나타는 물장구를 칠 수 없어서 겨울을 싫어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그에게 실내수영장도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어서, 분수대에서 물장구를 칠 수 없는 시기는 참으로 괴로운 시기였다. 온천은 어때? 2학년 어느 봄에 물었던 질문이었다. 뜨거운 물은 질색이니까요~. 카나타의 답변에 카오루는 수긍했다. 그는 언제나 찬 물을 좋아했다. 뜨거운 물은 익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카나타는 미묘한 곳에서 참 섬세한 사람이었으니 그 역시도 카나타답다고 생각하며 카오루는 납득했던 기억이 있었다. 


 카오루와 카나타의 관계는 오랫동안 평행선이었다. 카오루는 깊게 참견하고 싶지 않아 했고, 카나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맞닿아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두 사람은 3년이라는 고교생활을 함께했다. 닿은 온기 사이에 피어난 애정이나 열기 따위는 무시하고 있었다. 카오루는 건조했고 카나타는 차가웠다. 그 사이에 따뜻한 것이 끼어 보았자 금방 식을 것이라고, 둘 다 내심 그리 취급했다. 어쩌면 그러기를 바란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림자 깊은 곳에서 피어난 애정은 쉬이 꺾이지 않는 종류였다는 점이었다. 어느 순간 평행선을 걷는 것만으로는 만족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욕심을 품은 것은 누구였을까. 순서를 정하는 것은 부질없었다. 다만 좋아하게 되었다. 서로의 애정은 낯설기에 숨이 막혔다. 카오루는 물끄러미 카나타를 보았다. 카나타의 바다를 보았다. 감히 건조하게 마르기 싫어하는 카나타와 물에 잠길 수 있는 카오루 중 먼저 용기를 낸 것은 카오루였다. 그는 기꺼이 그의 바다에 몸을 실었다. 


 카나타는, 퍼드득 겁을 먹었다. 심해 속에 꼭꼭 숨어들었다. 태양의 열기에 이끌려 수면으로 살짝 올라와 땅에 발을 디뎌보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신카이 카나타는 바다에 사는 해양생물이었다. 따뜻한 태양은 멀리 있어서, 그를 비춰주기는 하였으나 모두의 것이었다. 공평하게 주어지는 온기는 카나타를 기쁘게 하였다. 바람은 달랐다. 바짝 다가와 그를 감싸고 몸을 건조하게 만들었다. 카나타를 변하게 만들었다. 그건 몹시도 두려운 일이었다. 카나타는 꼬르륵 잠겨들었다. 


 신카이 카나타에게만 주는 애정은 낯설었다. 카오루는 이해했다. 저였어도 겁을 먹었을 터였다. 오롯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감정은 너무나 감미롭고 그만큼 위험해 보였다. 자신을 통째로 잡아먹어 다른 사람으로 만들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카오루는 인내하기로 했다. 겨울은 길고 건조했으며 카나타가 살기 힘든 계절이었으니. 성인이 되기 직전의 소년은, 의외라고 평할 지 모르겠으나, 기다리는 걸 잘 했다. 남에게 무언가 강요하는 것은 소년이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졸업하기 전까지만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카오루는 시간을 요구하는 카나타에게 제한을 걸어주었다. 지금은 12월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카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 후에는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카오루에게 더 긴 시간을 요구하는 것은 그에게도 가혹한 일이었다. 카오루와 카나타는 그렇게 헤어졌고, 그 뒤로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다. 

 카나타가 카오루를 피했다. 카오루는 별 일 없는 듯 일상에 녹았고, 카나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래 곱씹어 감정을 소화시키고 고백으로 표현해낸 카오루와 모르는 척 하던 것을 갑작스럽게 눈앞에 들이밀어진 카나타는 처지가 달랐다. 카오루는 이해했다. 하카제, 카나타랑 무슨 일 있었나? 치아키가 한 번 물은 적 있었다. 응, 고백을 했어. 카오루는 주스를 쭉 빨며 대답했다. 옆에서 세나가 물을 잘못 삼켜 기침을 했다. 뭐?!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카나타의 대답은 늦었다. 생각보다는 빨랐다. 졸업식날 대답해 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보다 이르면 뭐든 빠르지 않을까. 그 사이에 부장 공에게 무슨 짓을 했냐며 칼을 휘두른 소마가 있었고 카오루 군 무슨 짓을 했느냐며 저를 찔러대던 래이가 있었지만 카오루는 너그러이 모른 척 했다. 딱히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카나타가 카오루에게 무슨 짓을 했지. 남자를 좋아하게 만들다니, 대단한 짓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렇기에 고백을 하기는 했지만 반하게 만든 카나타도 잘못이 있다며 카오루는 속으로 우겼다. 반한 사람이 진다고 했으니까. 


 카나타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근 두 달만이었다. 카오루는 물끄러미 카나타를 살폈다. 하얀 얼굴, 조금 창백한 뺨.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며 복잡하지만 결정을 담은 섬세한 옥빛 눈동자까지도. 


“저는, 무서워요.” 


 카나타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카오루랑 같이 있으면, 저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여기가 온천처럼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해일이 오는 것처럼 감정이 변해요.”


 카나타가 가슴께를 잠깐 매만지다가 손을 내렸다. 입을 달싹이며 고민하던 소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마지막에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은 결국 카나타 역시도 카오루와 꼭 닮은 감정을 진주조개처럼 물고 있던 탓이었다. 한참 망설이던 카나타는 결국 붉은 진주에 사랑이라 이름을 붙였다. 대답을 예상하고 산호보다 곱게 빛나는 눈을 보며 카나타가 웃었다. 


“다시 한 번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카오루.”

“좋아해, 카나타 군.”


 좋아합니다. 기대와 불안이 비슷하게 뒤엉킨 색 연한 눈을 보며 카나타가 그 눈가에 키스했다. 눈가에 한 번, 이마에 한 번, 콧잔등에 두 번 쪽쪽 입맞췄다가 뺨에 키스하는 것으로 떨어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체온이 따끈따끈했다. 그도, 자신도.


“저도 좋아해요, 카오루.”


 아주 많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잔뜩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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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홍월

2016. 12. 28. 00:14 from ENSTARS/NOVEL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이미 여러 번 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리츠는 못마땅한 얼굴로 마오의 뒷모습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낯선 유닛복을 몸에 걸친 마오는 거울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어색한지 몇 번이고 껄끄러이 복장을 살피던 마오가 몸을 돌려 리츠를 보았다. 답을 바라는 녹빛 눈동자는 어느 순간에도 사랑스러웠지만 리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라리. 그런 생각이 벼락처럼 불쑥 떠올랐다. 수십 번도 넘게 한 생각인데 질리지도 않았다. 차라리 나이츠의 유닛복을 입었더라면. 리츠는 또 한 번 그 생각을 하며 입을 땠다. 


“불편하지는 않아?”

“키류 선배가 만들어 주셨으니까. 불편한 부분은...”


 수예부는 아니지만 그의 실력은 이미 교내에 충분히 알려져 있었다. 머쓱한 미소로 제 감정을 표하는 마오를 보며 리츠는 속 꼬인 감정을 삼키고 또 삼켰다. 허나 사쿠마 리츠는 언제나처럼 이사라 마오의 앞에서 무언가 숨기는 것을 참으로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결국 다시 입이 비죽 나왔다. 불평으로 연인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으니 눌러 참았다. 질질 흐르는 것까지 정돈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붉은 눈동자가 느리게 전신을 쓸었다. 핀 없이 풀어진 머리카락은 하나로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전통복에 가까운 복장에 희고 긴 소매. 부드러운 털로 만들어진 장식이며 붉은 색 포인트 모두 마오와 잘 어울렸다. 유메노사키에서 손에 꼽히는 인기 유닛 홍월의 유닛복이었다. 그저 옷을 갈아입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오는 정식으로 유닛 이전을 했고, 무대에 서서 팬들의 앞에서 선보이기까지 했다. 명실상부 홍월의 소속이 되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어도 유메노사키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들이었기에 나쁜 말도 그리 듣지 않았다. 마오가 꽤 부드럽게 유닛에 녹아든 탓도 있었고. 그래, 객관적으로... 이사라 마오는 홍월에 제법 잘 어울렸다. 


 리더인 케이토는 본디부터 학생회에서 합을 맞췄던 사이였고 소마는 나이가 같은 데다가 올곧은 면이 있어 마오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키류와는 큰 인연이 없었지만 그는 본디 호인이었으니 후배를 푸대접할 사람이 아니었다. 트릭스타를 잊지 못해 미련이 남은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마오는 홍월에 남았다. 도리어 남기로 결정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홍월에서 제 지분을 만들었다. 그에 소마는 저도 분발하겠노라 외쳤고 케이토는 흡족해했으며 키류도 잘 해 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비췄다. 겉이던 속이던 홍월의 사이는 원만했다. 


 사쿠마 리츠는, 아쉬웠다. 트릭스타를 그토록 아끼는 마오가 웃는 게 좋아 마냥 바라보았더니 엣쨩이 저 좋을 대로 손을 쓴 것도 약이 올랐다. 홍차부에서 리츠가 심술을 부리는 건 이 탓이 컸다. 에이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귀찮은 선을 넘지 않는 리츠의 심술을 용인해주고 있었다. 킹의 암묵적인 배려와 비숍의 강한 어필로 미묘하게 폰 비슷한 것으로 들어와 있는 마코토를 볼 때마다 이 감정의 색이 짙어졌다. 저가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알았지만, 리츠는 언제나 마오에 관한 것을 참기 어려웠다. 


“마 군네 리더가 마 군 괴롭히는 거 아니야? 트릭스타랑 싸워서 꼴사납게 무너졌다고 심술이나 부린다던가.”

“하스미 선배가 그럴 리 없잖아, 리츠...... 그리고 그런 말 하지 마.”

“마 군한테는 나이츠 유닛복이 더 잘어울려.”

“한 번도 안 입어봤는데?”


 더군다나 색감 같은 걸 보면 나한테는 홍월이나 트릭스타 옷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여상하게 덧붙이는 말에 리츠가 잔뜩 뺨을 부풀렸다. 이런 점에서도 리츠는 대단히 못마땅스러웠다. 물론 그 전에도 마오는 과분한 업무를 소화해내고도 꿋꿋한 케이토를 제법 호의를 품고 있었지만 홍월에 들어가 더 가까이에서 보게 된 하스미 케이토는 이사라 마오가 존경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리츠가 토라져 조금만 투정부리려 해도 마오는 바로바로 차단해버리고는 했다. 

 저 입에서 케이토나 키류, 소마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못마땅했다. 물론 트릭스타도 마오의 관심을 너무 가져가는 것이 싫었지만 트릭스타야 모조리 동급생에다가 마오와 다른 반이었고, 가장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던 마코토는 상냥한 것인지 심약한 것인지 고민되는 성격인지라 리츠는 언제든지 그에게서 마오를 빼앗아 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홍월의 셋은 달랐다. 마오는 자신이 뒤늦게 합류한 처지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썩 좋은 방법으로 합류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는 의미였다. 어지간해서는 부름을 거절하지도 않았고 트릭스타에는 없던 선배들의 가르침도 고분고분하게 받았다. 새삼스러워진 저의 새로운 포지션에서 적응해나갔다. 덧붙여 셋은 하나같이 심약이라는 단어가 참 어울리지 않는 성격으로 3학년의 둘은 심리적인 면모로 찌를 구석도 거의 없이 안정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소마 역시도 무사의 집안에서 올곧게 자란 덕인지 정신적으로 강건했다.

 유닛끼리 만나는 일도 잦은데 리더인 케이토는 학생회 부회장까지 겸하고 있어서,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마오와 함께한다는 것도 불만거리였다. 나보다 마 군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잖아. 못난 말이라고 해도 리츠는 진심이었다. 매달려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 군. 내가 좋아, 홍월이 좋아?”

“무슨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다 있어...”


 마오는 대답을 피하며 둘밖에 없는 연습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아마 무의식이겠지만 조심하는 기색이 강했다. 마 군 바보. 리츠가 입을 비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잠이나 푹 자고 싶었다. 마오가 저에게만 신경써 줄 정도로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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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크리스마스의 아이돌은 바쁘다. 


 실시간으로 정상급 아이돌 위치에 발을 디디고 있는 카오루는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쉴 시간 따위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특집으로 진행되는 예능은 며칠 전 이미 녹화를 끝냈지만 다른 멤버들과 함께 예정된 팬미팅과 악수회가 있었고 그 뒤에는 빠듯하게 다음 주 방영될 프로그램 녹화에 참여했다가 삼십 분 겨우 쉬고 타야 할 비행기를 위해 공항으로 달려야 할 처지였다. 아이돌에게는 크리스마스는 휴일도 아닌 거지. 카오루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지어 연인과 달콤한 시간을 보낼 짬도 없었다. 짬은 커녕 얼굴 보는 것도 사흘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카오루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프로그램 녹화가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공항으로 가는 자동차에서 카나타에게 영상통화를 거는 게 전부일 확률이 아주아주 높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정점급 아이돌은 아쉬움을 삼켰다. 이제 와 새삼 그러기에는 작년도 재작년도 카오루와 카나타는 일에 치여 아주 소소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연말과 연인의 날이라는 이름은 몇 년째 열렬하게 연애중인 두 사람을 묘하게 들뜨는 상태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키스 한 번 나누지 못하는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렇다고 키스해달라며 칭얼대기에는 부끄러웠다. 좀 심각하게. 학창 시절에는 어떻게 젊은 패기에 말했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한 글자만 내뱉어도 혀끝을 깨물만큼 부끄러웠다.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줍어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직접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보다 훨씬 부끄러운 말들도 수줍은 요청도 수십번이나 주고받은 사이였지만 이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양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덮었던 카오루가 붉어진 뺨을 열심히 수습했다. 


 메이크업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손부채질하여 얼굴을 수습해낸 카오루는 금방 말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카오루가 얼굴을 식힌 것과 스텝이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하카제 씨, 시작합니다! 부름에 카오루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팬들과 가까이서 교류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아까의 설렘과는 다른 의미로 들뜨는 것을 느끼며 카오루가 걸음을 서둘렀다. 




 팬미팅도 악수회도 그 뒤에 있던 방송 녹화까지도 별 문제 없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드문드문 예상치 못한 소소한 사고는 일어났지만 별 문제 없이 덮을 수 있는 작은 사고에 불과했다. 카오루에게만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녹화가 끝난 시간이었다. 중간중간 생겼던 NG들로 지연된 시간이 쌓여 카오루의 짧았던 쉬는시간마저 증발시켜버렸다. 아니, 공항 가는 차가 막히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아쉽기는 했다. 카나타 군이랑 만날 시간은 진짜 없네. 사탕을 본 개미때처럼 슬금슬금 기어오는 감정들을 카오루는 애써 떨쳐냈다. 


 차 안에서 카나타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만, 벤은 심하게 흔들렸다. 속도를 과하게 내는 탓이었다. 사고 나면 큰일 난다고? 보험 들어놨어? 카오루는 손잡이를 꽉 잡고 농담처럼 진담을 걸었다. 미안, 급해서! 운전하는 매니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차가 다시 한 번 크게 위아래로 덜컹거렸다. 카오루는 죽기 싫어 손잡이에서 손을 놓을수가 없었다. 수속을 밟는 절차가 있으니 전화할 짬 하나 없을까. 애써 자위하며 카오루가 창 밖을 슬쩍 보았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찾기도 힘들었지만, 어둠 앉은 밤에 빛나는 차의 불빛도 하나의 일루미네이션이 되어 반짝였다. 크리스마스라는 날짜적 특성 탓일지도 몰랐다. 감상에 잠기다니, 나도 설마 늙었나? 카오루는 상상하기 싫은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창 때의 아이돌이었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것도 웃겼다. 


 도착하자마자 티켓팅을 하고 입국절차를 밟고 급하게 이동하는 속도는 빨랐다. 카오루도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이번 비행기를 놓치면 곤란했다. 스케줄이 크게 틀어지는 것은 카오루도 바라지 않았다. 다행히 늦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막 비행기 탑승로까지 걸어온 카오루는 화면에 떠 있는 대기 표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의 준비로 10분정도 대기 시간이 생긴 모양이었다. 의자 하나에 앉으며 카오루가 그제야 좀 숨을 골랐다. 너무 급하게 움직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연락하면 받으려나. 카오루가 엄지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쓸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스텝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카오루에게 크게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구석으로 슬쩍 빠져 전화를 걸면 받을까. 지금 카나타 군 스케줄이 어디지? 카오루는 고민했다. 걸었는데 받지 않으면 그것도 조금 아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걸지 않는 쪽이 훨씬 후회될 것 같아서, 카오루는 이미 외운 번호를 화면에 찍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은 언데드의 신곡이었다. 첫 반주가 한 마디 울리기도 전에 뒤에서 진동이 울렸다. 카오루가 문득 뒤돌았다. 


“카나타 군?”

“카오루~.”


 카나타가 쓰고 있던 썬글라스를 살짝 끌어내렸다. 작은 틈새 사이로 보이는 에메랄드 색 눈동자가 반갑게 휘어졌다. 아니, 정말로 카나타 군? 카오루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여기에? 온통 의문을 보이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가 턱을 괴었다. 상냥하게 고아지는 얼굴은 고스란히 제 연인의 것이었다. 주변을 살짝 둘러본 카나타가 조심스럽게 카오루의 손을 잡았다. 은밀하고 따뜻했다. 


“새 스케줄이 생겨서, 홋카이도로 간답니다.”

“지금? 아, 그래서 비행기로?”

“네. 저는 국내선이에요. 30분 뒤에 타야 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카오루가 와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반갑게 웃는 얼굴이 유독 들떠 보이는 건 그 탓인 것 같았다. 카오루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기쁘게 웃었다. 연인과의 만남에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예상치 못했기에 훨씬 기꺼웠다. 사소하게나마 산타의 선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사람이 슬쩍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다른 사람의 눈에 쉬이 띄지 않을 곳으로 숨은 연인이 마주 웃었다. 둘 다 곧 비행기가 뜨는 처지이니 오래 숨을 수는 없었지만, 짧은 틈새로도 충분했다. 


 시선이 얽혔다. 잔뜩 휘어져있는 색채가 뒤섞여 애정의 빛을 그렸다. 카나타가 고개 숙여 카오루의 입술에 제 것을 부볐다. 몇 번이고 노크하듯 쪼아내리던 입맞춤이 금새 농밀해졌다. 호흡 삼키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뺨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손끝이 저릿해지는 순간이 좋았다. 몇 번 헤매던 카오루의 손이 카나타의 옷자락을 잔뜩 구겼다. 체온은 떨어지는 구석 없이 밀착해 있었다. 키스하면서 둘이 떨어지는 순간은 한 쪽의 호흡이 한계에 다다는 순간 뿐이었다. 카오루가 먼저 떨어졌다. 더 멀어지는 게 아쉬워 카나타가 반듯한 이마를 맞댔다.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숨 고르는 소리가 열기에 섞였다. 카나타는 카오루의 귓가마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사랑스러웠다. 


“나 갈 시간 아니야?”

“아마 맞을 거에요.”

“찾으러 왔다가 카나타 군을 보면 곤란한데.”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완곡한 말이었다. 이해는 했지만 아쉬움에 작게 입을 비죽였다.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카오루에게 짧게 키스하는 카나타의 모습에 카오루가 짙게 웃었다. 저도 아쉬웠다만 연인이 표현해주는 감정이 기꺼워 가벼이 녹아내렸다. 카오루가 카나타의 뺨에 입맞췄다. 


“신년에 집에서 보자, 카나타 군.”

“도착하면 전화해요, 카오루.”


 카오루의 짧은 입맞춤에 카나타가 답례처럼 카오루의 양 뺨에 입맞췄다. 시선이 맞고 다정하게 휘어졌다. 짧게 맞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조금 부푼 입술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카오루가 몸을 돌렸다. 저를 찾는 부름에 답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산타의 선물이 끝나고 이제 다시 모두의 아이돌이 될 시간이었다.

 얼굴, 이상하지 않겠지? 기내에 탑승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며 가방에 넣어뒀던 여권을 꺼낸 카오루가 손등으로 뺨을 꾹 눌렀다. 여전히 따끈따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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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질투

2016. 12. 11. 00:10 from ENSTARS/NOVEL




 소년은 중학생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고등학생이었다. 

 고작 일 년의 차이였지만 그 틈새는 어마어마했다. 중학교에 남은 소년은 그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미 초등학생과 중학생으로 갈라졌던 시기를 한 번 경험해보아 이번에는 넉넉하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간과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어쩌면 다니고 있는 학교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평범한 일반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사라와는 달리 사쿠마는 유메노사키 학원으로 진학했다. 아이돌 양성학교. 조금씩 쇠퇴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 명성만큼은 견고한 이름을 떠올리며 이사라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황량한 겨울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이제 곧 졸업을 한다. 제 또래의 아이들은 고교 진학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사라는 허리를 굽히고 책상에 뺨을 댔다. 차가운 책상에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복잡한 감정을 담은 녹색 눈동자가 살짝 눈꺼풀 아래로 몸을 감췄다. 


 이사라는 단 한번도 아이돌을 꿈꾼 적 없었다. 객관적으로 춤도 노래도 일반인 치고는 수준급인 마오였기에 장기자랑에서는 환영받는 인사였고, 종종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반짝거리는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기는 했어도 아이돌이라는 대단한 직업을 욕심낸 적은 없었다. 동생이 생긴 뒤로 관심에서 한 발자국 멀어지게 된 어린 소년은 사람들의 많은 시선은 받지 않는 직업을 얻어 적당히 돈을 벌며 살고 싶었다. 선생님이라던가, 비서, 의사도 좋았다. 남을 치료하거나 도와주는 직업은 적성에 맞을 것 같았기에 중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쭉 고려하고 있던 직업이었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사라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턱을 괴었다. 칠판 한 편에 써진 진학상담이라는 글씨가 진하게 눈에 새겨졌다. 

 사실 이사라는 사쿠마가 유메노사키에 진학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종종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유메노사키 아이돌의 모습에 깊게 집중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노래도 잘 하는 사쿠마였기에 관심을 가져도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던 작년의 이맘때 사쿠마는 이사라에게 통보했다. 유메노사키 학원에 갈 거야, 하고. 이미 합격통지서까지 받아온 그는 유메노사키 이외의 학교에는 아예 시험조차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사라는 당혹스러웠다. 아이돌? 그가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고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이사라는 살짝 자괴감을 느꼈다. 오랜 소꿉친구로서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에 처음으로 금이 간 순간이었다. 그 작은 금으로 참 많은 것이 새어나갔다. 


 그 뒤로 사쿠마는 종종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다. 이사라가 직접 그의 초대를 받아 무대 위의 모습을 보러 찾아간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서 있던 사쿠마를 본 순간 이사라는 깨달았다. 그는 타고난 아이돌이었다. 시선을 휘어잡고 무대를 춤추며 다른 동료들과 함께 웃는 모습은 너무나도 낯선 얼굴이었다. 이사라는 제 바짓자락이 잔뜩 구겨지도록 움켜쥐었다. 몇 번이고 손으로 펴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남을 정도로 단단히. 

 동시에 그 날 이사라는 사쿠마의 유메노사키 진학의 이유를 알게 됬다. 사쿠마의 무대 다음다음 정도에 등장했던 아이돌. 검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사쿠마와 빼닮았으면서도 조금 더 위험하고 섹시한 분위기. 그의 이름은 레이였다. 이사라는 사쿠마 레이가 사쿠마 리츠의 형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을 알고 있었다. 얼굴을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레이가 유메노사키의 유명인이라는 것도 몰랐다. 사쿠마는 레이를 따라 유메노사키에 진학했다. 이사라는 그것을 배웠다. 이사라는 사쿠마와 저 사이의 거리를 새삼 실감했다. 참 까마득해보이는 거리가 아득했다. 


 이대로 너와 나 사이는 조금씩 멀어져서, 어른이 되면 한 때의 친구로 남는 걸까? 중학교 3학년의 이사라는 내내 그 물음을 속에 품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사쿠마는 이사라가 알고 있는 사쿠마로 돌아와 그의 무릎 위에서 어리광과 불평을 내뱉었지만, 그 입에서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 정보들조차 모조리 낯선 이야기였다. 드림패스, 팬서비스, 유닛, 작곡가, 리더, 셋쨩, 같은 유닛의 동료들. 모두 이사라와는 관계 없으면서도 사쿠마와는 깊은 관계가 있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졌다는 증거였다. 이사라는 그것을 쓸쓸하다고 여겼다. 아득한 미래의 그 어느 순간까지도 영원히 제일 가까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리라 생각했는데 그 확신마저도 흘러나가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지독한 쓴 맛 뿐이었다. 

 이사라는 회사원이나 선생님이 되려 했다. 가을부터 알아보던 학교도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일반계 고등학교였다. 평범한 삶. 곁에 사쿠마가 없는 삶. 이사라는 수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없는 세계에 살 각오를 다지는 데에는 꼬박 일 년이 걸렸다. 봄부터 겨울까지 사쿠마가 없는 미래를 그리기 위해 애를 썼다. 가까스로 사쿠마 없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세뇌시키고 납득시키는 데까지 네 개의 계절을 온전히 소모해야만 했다. 눈물과 우울함과 자괴로 젖은 밤이 수없이 많이 지나갔다.  

 사쿠마는 그것을 너무도 간단하게 망가뜨렸다. 마 군, 유메노사키에 올 거지? 저가 먼저 가져왔다며 진학시험 신청서를 손에 쥐어주며 웃는 사쿠마는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웠지만, 이사라는 화가 났다. 미래를 고민했던 과거도 우울했던 밤도 모두 그 말 아래서 가치를 잃었다. 이사라는 그에 분노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가 사쿠마를 따라갈거라 판단해버리는 것도 싫었다.

 이사라는 처음 사쿠마에게 화를 냈다. 사쿠마는 당혹에 젖어 어쩔 줄 몰라했다. 이사라가 화를 내는 이유도 잘 모르는 듯 보였다. 이사라도 그걸 알았다. 사실 저가 화를 내는 것이 나쁘다는 것도 알았다. 사쿠마는 그저 언제나처럼 이사라가 와 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딴에는 배려하여 신청서를 가져왔겠지. 이사라 혼자 아이돌이 되는 미래에 대번 겁을 먹어 멀리한 것 뿐이었다. 사실 유메노사키에 진학해도 성인이 되었을 때 아이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고려하지도 않은 미래로 길이 좁혀지는 게 무서웠고 그 길을 선택하는 이유가 오로지 사쿠마 하나 뿐이라는 점에서 스스로가 한심했다. 가장 문제는 사쿠마와 함께 있을 그 시간을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는 저 자신이었다. 그토록 고민하여 멀어지는 길을 납득했건만. 이사라는 제 자신이 싫어지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몸을 돌렸다. 마 군! 뒤에서 부르는 사쿠마의 목소리에 녹아든 수많은 감정을 그는 읽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자, 리츠. 다만 그는 상냥했기에 한 마디의 여지를 남겼다. 사쿠마의 집에서 뛰쳐나온 이사라는 그대로 제 방에 틀어박혔다. 속에 응어리진 많은 것들이 눈물로 녹아 떨어졌다. 이사라는 저가 우는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냥 눈물이 나왔다. 서러워서 이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음을 삼켰다. 그림자 진 날이었다. 


 이사라는 그 뒤로도 며칠동안 사쿠마에게 연락을 끊었다. 사쿠마도 먼저 이사라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이사라에게 미움받을까 극도로 행동을 조심하는 게 이사라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미안했다. 먼저 사과하고 싶었건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한 여전히 고민하고 있던 탓이 컸다. 이사라는 제 앞에 놓인 길을 응시했다. 그가 내내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던 평범한 길인지, 아니면 사쿠마를 따라 걸을 아이돌의 길인지. 전자는 평화로웠으나 사쿠마가 없었고 후자는 두려웠으나 사쿠마가 있었다. 이사라는 제 미래를 놓고 정해야 할 길을 이런 식으로 고민하는 것이 기가 찼다. 저가 얼마나 사쿠마를 좋아하는지만 수없이 깨닫은 날이었다. 

 그 날 새벽 사쿠마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초대였다. 유메노사키 S1.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는 최고 드림패스에 사쿠마도 유닛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꼭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은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언제나처럼 느긋한 말투나 말을 대신하던 이모티콘은 없었다. 딱딱한 문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사라는 꼭 가겠다는 답장을 남겼다. 이사라는 이 드림패스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마지막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소년이 눈을 감았다. 


 그 날은 눈이 왔다. 매우 추웠다. 이사라는 자켓과 목도리로 저를 둘둘 감고도 몸을 떨었다. 하얀 입김이 사방에 번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몹시 많았다. 이사라는 아이돌을 보러 온 팬들의 열기를 경외시하며 바라보았다. 신기하기도 했다. 저 중 몇은 사쿠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추운 날씨를 이기고 여기까지 왔다. 이사라는 뽀득하게 밟히는 눈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사쿠마가 참가하는 무대가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 몸을 움츠렸다. 발끝부터 얼고 있었다. 

 사쿠마의 유닛은 중간하고도 조금 뒤편에 차례가 배정되어 있었다. 이사라는 무덤덤하게 아이돌들의 무대를 응시했다. 인기 유닛과 그렇지 않은 유닛의 차이는 이사라도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팬들의 비명의 차이가 달랐다. 날씨가 험한 탓에 일반인들보다는 특정 유닛의 팬의 비율이 높았다. 인기 유닛은 그럴 이유가 있다고 이사라는 생각했다. 무대 수준이 달랐다. 노래도 춤도 이사라보다 못한 사람도 꽤 자주 눈에 띄었다. 마음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제 자신을 너무 높게 치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다. 사쿠마 하나를 보러 왔으니 이사라는 내내 사쿠마만 무대에 서기를 기다렸다. 코며 귀가 얼얼했다. 이사라도 종종 무대를 즐기기도 했다. 이름을 아는 사람으로는 레이가 무대에 섰을 때, 이름을 모른는 사람으로는 이츠키나 히비키라는 이름의 사람이 무대에 섰을 때는 즐거웠다. 혹은 감탄했다. 대단한 사람들도 있구나. 그리 생각했다. 대단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를 그는 무대 밑에서 응시했다.


 그리고 등장했다. 사쿠마의 모습은 보이는 순간 시선을 빼앗앗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이사라는 사쿠마와 그의 유닛을 보러 온 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쿠마는 무대 위에서 이사라를 보고 있었다. 대번 눈치챘다. 시선이 얽혔다. 붉은 눈동자가 조금 불안함을 담아 이사라를 보았다가, 곧 천천히 휘어졌다. 똑같이 불안함을 담고 있는 이사라를 위로하듯 다정한 시선이었다. 추위를 타는 이사라의 얼굴을 살짝 걱정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이사라는 어이가 없었다. 두껍지 않은 무대의상을 입고 눈까지 오는 무대 위에 서 있는게 누군데. 춥기야 사쿠마가 훨씬 추울 터였다. 이사라는 사쿠마를 걱정했다. 사쿠마의 옆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은발의 수려한 미인이었다. 살짝 미간을 좁히고 무어라 말을 하는 그와 평온하게 대꾸하는 사쿠마 사이로 주황 머리카락의 소년이 둘의 어깨를 두르며 뛰어들었다. 친근함이 묻은 행동이었다. 무어라 말하며 웃은 그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이사라와 닮고도 다른 녹색 눈동자가 짐승처럼 날카로워지는 모습에 이사라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이름만 알던 사쿠마의 동료들이 바로 구분되었다. 잔소리쟁이라 사쿠마가 불평하던 세나가 은발의 소년이었고, 리더이자 작곡가라던 소년이 주황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사쿠마의 리더가 마이크를 쥐고 입을 열었다. 팬들을 고양시키는 말을 몇 마디 내뱉고 그 다음 세나에게 순서를 돌렸다가, 마지막은 사쿠마의 차례였다. 최선을 다할 거니까, 다들 잘 봐줘. 그리 말하며 사쿠마는 웃었지만, 말끝의 시선에 분명 이사라를 담았다. 이사라는 표정을 굳히고 무대를 응시했다. 곧 반주가 주변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사라는, 저의 시선이 몹시도 주관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사쿠마의 무대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을 매혹시키는 사쿠마는 평소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아이돌의 모습이었다. 처음 보았던 여름의 무대보다 훌쩍 성장해 있었다. 조금은 격한 춤을 추면서 황홀하게 노래를 부른다. 저 혼자의 생각일지도 몰랐지만 이사라는 지금의 무대가 가장 완벽하게 보였다. 사쿠마는 무대 위에서도 종종 이사라를 응시했다. 홍옥의 눈동자가 말을 걸고 있었다. 보고 있어, 마 군? 이사라는 알았다. 지금 이것은 사쿠마의 진심이었다. 그는 이사라를 부르고 있었다. 같이 와 줘. 나랑 같은 길을 걸어 줘. 노래로 그는 애원하고 있었다. 함께 무대 위에 서 있는 세나와 츠키나가는 그것을 눈치챘지만 침묵해주었다. 이사라는 하염없이 사쿠마를 응시하고 또 응시했다. 어쩐지 그는 다시 한 번 울고싶었다. 이름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아. 

 사쿠마가 넘어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무대의 열기에 녹아 고인 물 탓이었다. 조금 큰 소리가 났고, 주변이 웅성거렸다. 이사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선이 하릴없이 떨렸다. 사쿠마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춤을 추며 제 파트의 노래를 불렀다. 그의 동료들 모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었고, 웅성거림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뒷사람의 원성에 이사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사라의 눈에는 보였다. 조금 창백한 사쿠마의 얼굴이며 작게 떨리는 손끝이. 티나지 않게 절고 있는 다리가. 이사라와 같은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의 두 동료들 뿐인 듯 보였다. 몇 번이고 시선을 사쿠마에게 던지며 신경쓰는 게 보였다. 이사라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쿠마는 꿋꿋하게 노래했다. 무대에서 내려갈 때까지 그는 버텼다. 그들의 차례가 끝나고 그는 안심하고 무대 뒤에서 그의 동료들에게 몸을 기댔다. 사쿠마를 받아주는 세나와 츠키나가의 뒷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다음 아이돌의 등장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았다. 이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과 염려와 은근한 질투가 뒤섞인 제 자신이 추했다. 


 이사라는 곧장 사쿠마의 집으로 향했다. 1시간 가량을 기다리고 나서야 사쿠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선이 마주치마자 그는 물었다. 

“봤어, 마 군?”

“......응.”

 모두 보았다. 사쿠마가 제법 열심히 아이돌 활동을 하는 것도. 꿋꿋하게 제 길을 걷는 것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그는 아이돌로 살아갈 자기 자신을 연마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끊임없이 이사라를 원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나. 이제 아이돌이네, 마 군.”

“그렇더라.”

“열심히 하는 건 귀찮지만, 셋쨩이나 츳쨩을 따라가고 있어.”

“응.”

“지금의 유메노사키는, 조금...... 험하지만.”

 사쿠마가 눈을 내리깔았다. 잠깐 망설이던 그는 말을 붙였다. 

“나는 마 군이, 함께 있어주면 좋겠어.”

 그건 사쿠마의 마지막 청이었다. 이미 한 번 이사라에게 거절당했던 사쿠마가 낸 용기였다. 이사라와 멀어지기 싫다는 손 내밈이었다. 이사라는 물끄러미 사쿠마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멀어보였던 거리는 어디 갔을까.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 두 발자국이었다. 사쿠마가 먼저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제 거리는 한 발자국. 이사라는 고개를 들었다. 사쿠마의 얼굴이 보였다. 곱디 고운 얼굴은 저번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간절한 그 눈은 어찌나 예쁘게 빛나는지. 이사라는 설핏 웃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많은 고민은 가치를 잃고 녹아내려버렸다. 이번 일 년의 고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곁에 있고 싶고, 함께 길을 걸으며 닮은 미래를 꿈꾸고 싶다는 욕심이 한없이 부풀었다. 가득, 또 한가득. 

 이사라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조심스럽게 뻗은 손끝이 다정하게 맞닿았다.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한 번도 아이돌을 꿈꾼 적 없어.”

“응.”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무서워.”

“생각보다, 별 거 아니더라.”

 사쿠마가 손을 올려 이사라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토닥임이 도닥도닥 이어졌다. 

“그런데 말이야, 나 혼자 평범한 길을 걸으려는 것도 무섭더라고.”

 이사라의 목소리에 미미한 웃음기가 섞였다. 

“리츠가 없는 길을 혼자 걷는 건... 무섭잖아.”

 손가락이 얽혔다. 단단히 서로를 맞잡았다. 온기가 닿자 힘이 빠졌다. 안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같이 있어줄거지?”

“마 군만 괜찮다면 평생이라도.”

“그거 좋네...”

 이사라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어설프게 웃는 시선이 다정한 걸 알았다. 그래서 사쿠마도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거리는 없었다. 한없이 가까웠다. 이사라가 물끄러미 사쿠마의 눈을 보았다. 그 안에 담긴 애정을 읽었다. 

“마 군은 고작 중학생이고, 나는 겨우 고등학생이잖아.”

 사쿠마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아직은, 많이 고민하지 말자.”

 뺨에 손이 닿았다. 이사라가 사쿠마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평소보다 높은 체온이 따뜻했다. 

“응. 그럴게.”

 이사라가 웃었다.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소년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작게 휘어졌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감겼다. 


 리츠가 마오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의 첫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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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바다 위에 뜬 하나의 별.

 그리고 나는 심해에 가라앉은 부서진 유리 조각이었다. 



 심해의 이름을 가진 소년은 의외로 제 감정 숨기는 것을 잘 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을 많은 것을 숨기기에 퍽 용이했다. 바다 속에 가라앉아 세상을 보고 싶었다. 물로 가득찬 공간은 숨을 쉬기 편했다. 아가미로 호흡하며 소년은 깊게 가라앉고 싶었다. 오래오래 어두운 그 안에 잠겨 있던 소년에게 빛 한 줄기가 뻗어졌다. 자신에게 다가온 빛을 따라 손을 뻗은 소년은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다. 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별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별. 황금빛 별. 멀고 손이 닿지 않는 아름다운 너. 소년은 별에게 사랑에 빠졌다. 목이 아프고 아파도 개의치 않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해변으로 걸어나와 만나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는 별과 닮아 있었다. 

 그는 신카이 카나타의 가장 아름다운 별이었다.


 카나타 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았다. 카나타가 먼저 부르기 시작한 이름에 카오루도 결국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사실이 마냥 기뻤다.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좋았고, 부르면 꼭 눈을 보아준다는 점이 좋았다. 고집을 부리면 별 수 없이 져 준다는 것도 좋았고, 알게 모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는 점이 좋았고, 그 나잇대 소년처럼 장난기 어린 말투도 좋았고, 결국 하카제 카오루에게 신카이 카나타라는 사람이 특별하다는 점이 좋았다. 

 전부 좋아했다. 


 카나타가 그에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었다면 카오루가 그에게 품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친애? 우정? 카나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카오루는 카나타를 특별하게 여겼고, 그렇기에 카나타를 잃고 싶지 않아했다. 손을 잡고 몸을 기대오는 카나타를 카오루는 거절하지 않았다. 받아주지 않았지만 밀어내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저 카나타의 성격이라고 보아 넘겨준 것일지도 몰랐다. 조금 과할 때가 있었지만 친구로서의 스킨십으로 이해할 수 있을 선을 넘지 않았으니까. 카나타는 충분히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는 여기까지. 그만큼에 만족했다. 키스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친구로 볼 수 있을 정도로만 다정하게. 카오루가 다른 사람에게는 해주지 않는 것을 받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그런 관계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건방진 맹신이었다. 카나타는 온유하게 생각했던 스스로를 잠시 비웃었다. 그 관계에 만족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하카제 카오루에게 다른 특별한 사람이 없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전제가 무너지는 순간 카나타의 내부에 숨막히도록 욕심이 밀려 차올랐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울한 감정이었다. 

 있지 카나타 군,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뺨을 붉히며 속삭이는 말은 카나타의 많은 것을 무너뜨렸다. 귓가에 와르르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나타는 멍하니 카오루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 곱다. 사랑에 빠진 카오루는 상상했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고왔다. 사랑스러웠다. 귀여운 카오루. 카나타는 심장을 꽉 움켜쥐는 통증을 억지로 참았다. 


 카나타 군에게만 말해주는 거니까. 뺨을 긁적이며 말하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는 울컥 차오르는 충동을 쓰게 삼켰다. 하늘에 떠 있는 너를 끌어내리고 싶었다. 심해에 가둬 품에 끌어안고 싶었다. 내 안의 어둠 속에서 빛나주는 심해의 별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끔찍한 이기심이었다. 너를 상처입힐 감정에 소름이 끼쳤다. 


 축하해요, 카오루. 잘 되기를... 응원, 할게요.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지만 어떻게든 감춰 넘겼다. 고마워. 그리 웃는 카오루를 보며 카나타는 쉴 새 없이 짠 물을 삼켰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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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카나카오] 감기

2016. 12. 4. 22:01 from ENSTARS/NOVEL



 열병에 걸렸다. 증상은 감기와 몹시 흡사했다. 심장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설레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종종 언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병이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한 눈에 사랑에 빠졌다. 하카제 카오루는 쉽게 타인에게 호감을 주었지만, 결코 제 마음을 순순히 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그만한 인내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보기보다 고집이 있고, 상냥하고 정에 약했지만 솔직하지 못했다. 별사탕처럼 작고 물렁한 심술이 말 속에 들어가 진심을 감췄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꽤 길게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하카제 카오루는 결국 강해진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첫사랑에 걸려 버렸다. 


 신카이 카나타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는 하카제 카오루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카오루는 처음 빠진 사랑에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다. 가장 기본적인 시선부터가 관리하기 힘들었다. 좋아해, 좋아해. 온통 속삭이는 색소 연한 회색 눈동자가 엷게 반짝였다. 앓고 있는 것은 첫사랑이었지만 카오루는 타인과 애정을 교류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그 상대를 신카이 카나타로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상상조차 잘 떠오르지 않았다. 


 덕분에 선택한 방법은 꽤나 극단적이었다. 열병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먼저 열병의 원인과 이어지는 것. 어쩌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깊게 사로잡히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게 아니라면 효력은 미미했지만 사랑을 쫒는 약을 사 먹거나, 다른 방법으로는 멀리 떨어지는 것.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카오루는 믿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도 돌아가신 뒤 오래 만나지 못하니 많은 것을 잊게 되어버렸으니. 그러니 카나타도 보지 않고 만나지 않는다면 금방 잊혀질것이라고. 열병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신카이 카나타에게 향하는 걸음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사실 만나지 않는 것은 꽤 쉬웠다. 카오루와 카나타는 같은 반도, 같은 유닛도 아니었다. 고작 부활동으로 엮인 관계에 불과했다. 카오루는 본디 부활동에 충실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다시 불성실하게 참가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한 학년 낮은 후배는 틀림없이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겠지만, 그 정도야 손쉽게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해양생물부는 물론이고 분수대로 가는 발걸음마저 완전히 끊어버렸다. 하카제 카오루의 일상에서 신카이 카나타의 자리를 완전히 비워버렸다. 

 

 그러니 남은 것은 카오루의 마음 속에 남은 카나타뿐이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카오루는 고민했다. 몸의 내성이 일을 하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약을 먹어야 할까. 카오루는 약국 앞에서 고민했다. 사랑을 쫒아주는 약을 사서 먹을까. 그럼 이 감정은 깨끗하게 지워지겠지? 카오루는 작은 기대를 가졌다. 일시적으로 지워져도 금방 감정을 피워내주는 바람에 약은 그닥 뛰어난 효과가 없었지만, 그 일시적인 효과마저 간절했던 수많은 사람 덕분에 약은 언제나 인기기 많았다. 결국 약국에 들어가 약을 한 통 산 카오루는 그 날 저녁 식후 30분 뒤에 물과 함께 알약을 삼켰다. 위로 함께 들어가 사르르 녹은 약은 하카제 카오루 속에 남은 사랑을 지워버렸다. 온갖 달콤하고 맵고 뜨거운 것은 녹아버리고, 남은 것은 담백한 것 뿐이었다. 카오루는 안심했다. 


 열병에서 벗어난 뒤에도 카나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위험했다. 감정은 피어나는 것. 사랑의 약은 내성이 금방 붙었다. 또한 감정은 너무도 금방 자랐다. 카오루는 카나타에 대한 모든 감정을 지웠지만, 카나타를 보면 감정이 자랄 것이 무서웠다. 다음도 또 다음도. 신카이 카나타는 너무 금방 카오루에게 침입했다. 다시 앓을 것이 두려워 카오루는 카나타를 외면했다. 그에게 가는 걸음은 여전히 뚝 끊은 채였다. 

 


 다만 그가 모르고 있던 것이 있다면, 신카이 카나타의 감정이었다. 카나타는 갑작스럽게 제 앞에서 모습을 감춘 카오루에게 화가 났다. 그가 학교에 꼬박꼬박 등교를 한다는 소식 정도는 유닛의 멤버인 치아키에게 모조리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어떤 얼굴로 웃는지. 카나타의 동료인 치아키는 카오루의 친구였고, 그만큼 많은 것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카나타와의 연결고리를 모조리 끊어버린 카오루는 즐거워보였다. 카나타는 그게 화가 났다. 저 혼자 카오루가 보고싶어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카오루는 전혀 카나타를 소중히 여겨주지 않는 것 같았다. 카나타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는 마이페이스였지만, 행동력만큼은 있었다. 분수대에서 빠져나온 물빛 청년은 망설임없이 옆반의 문을 열어젖혔다. 


 

 하카제 카오루는 숨을 삼켰다. 에메랄드 바다 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조금 화가 나고, 하지만 만났다는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맑은 색 눈동자가 단단히 카오루를 얽어잡았다. 사라졌던 감정이 몽글몽글 다시 피어났다. 오래 막아두었던 반향이라도 되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와 사람의 모든 것을 사로잡아버린 감정에 카오루는 조금 울상이 되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열병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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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리츠마오] 청혼

2016. 12. 3. 23:00 from ENSTARS/NOVEL




 마을은 작고 한적했다.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아 흔히 시골 촌구석이라 폄하받고 있는 곳이었지만, 있을 것은 다 있고 평온하게 살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곳이 싫은 사람은 진작 떠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전체 인원이 오십을 가까스로 채우는 그곳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안면이 있으며, 친분도 두터웠고, 덕분에 비밀을 숨기기도 어려운 장소였다. 그러니 그런 마을에 고급스럽게 잘 차려입은 도련님이 방문했다는 사실은, 그가 마을입구에 발을 디딘지 딱 삼십분만에 모든 마을주민에게 퍼진 소식이었다.

 어리거나 젊거나 늙은 시선이 똑 닮은 호기심을 담고 마을의 유일한 서점을 향했다. 마을에 딱 넷 있는 젊은 청년 중 하나가 운영하고 있는 작은 서점이었다. 큰 도시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애인이 있는 청년이라 마을 처녀들이 눈물만 삼키는 상대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래요? 누군가가 호기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지. 다른 누군가가 답했다. 아주 잘 생겼던데. 미약한 감탄이 섞여 있었다. 되게 예쁘다. 어린 아이의 속삭임이 작게 터져나왔다. 지나가는 척 은근슬쩍 서점을 기웃거리며 사람들은 목이 빠져라 서점 창문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안에 들어서자마자 커튼을 쳐서 안이 보이지 않는 게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그 붉은 머리 청년, 대체 누구래요? 마을 모두가 호기심에 차서 소근거렸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하게 모든 화제의 중심에 서 있게 되 버린 붉은 머리의 청년은 머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편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시선을 도통 숨기기 어려웠다. 말끔한 도련님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었건만, 이 사람에게만큼은 유독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꾸며 웃어야 하는 사람였건만 그런 입장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불편한 건 당연했다. 후배의 입장으로 선배의 연인과 단 둘이 만나는 상황이라니. 

 스오우 츠카사는 정말 진심으로 이 자리가 어색했다. 얼음장보다 굳은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츠카사와 비슷하게 지금 상황을 머쓱해하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츠카사는 용기를 냈다. 


“제가 갑작스럽게 visit하여... 음, 실례를 끼친 듯 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 그. 부디 존칭은 그만둬주세요. 편히 말씀해주시길.”


 츠카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사쿠마 리츠의 바로 그 이사라 마오에게 듣는 존칭이라니 온몸에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스 쨩, 나의 마 군에게 건방지게 대하면...... 알지? 리츠의 가느다란 시선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랑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 군에게 굴면 막내의 엉덩이를 때려 줄 거야. 작은 미소와 함께 건내진 말은 어조만큼은 참 다정했다. 리츠는 매우 게으른 것을 제외하면 꽤나 좋은 선배였지만, 한 번 화가 나면 인정사정이 없었다. 츠카사는 이제껏 리츠가 화내는 것을 딱 한 번 보았다. 그리고 그의 분노를 공포 랭킹 순위권에 올렸다. 진심으로 화가 난 왕님 바로 다음으로 무서웠다. 

 리츠는 언제나 마오의 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고 있거나 일을 하지 않는 리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9할이 이사라 마오였다. 리츠에게 이사라 마오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막내인데다가 조금 고지식해서 과하게 부당하지 않은 명령이라면 선배라는 입장에서 시키는 말에 쉽게 수긍하고, 불만을 가져도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츠카사는 제일 떠넘기기 쉬운 상대였기에 츠카사는 마오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이었다. 츠카사는 마오의 집에 있는 검은 바탕에 하얀 고양이가 그려진 머그컵이 사쿠마 리츠 전용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정말 원치 않은 지식이었다. 


“저기, 그래서... 여기엔 무슨 일이시죠? ...일이야?”


 마오가 어색하게 덧붙였다.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츠카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츠카사는 그런 마오를 이해했다. 수도 왕궁 기사단 훈련실에 누워 느긋하게 자고 있을 리츠의 모습을 떠올리며 츠카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저가 하지 않아도 되는 추가업무에 한참 시달리다가 여기까지 와야 했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했다. 사실 조금 많이. 왜 하필 저냐는 질문에 스 쨩이 제일 좋은 가문이라서~. 그리고 막내잖아? 하며 나른히 웃던 리츠의 얼굴도 떠올렸다. 아직도 검술로 리츠를 이길 수 없어 하극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억울했다. 

 자연스럽게 츠카사의 얼굴에 심통이 묻었다. 생각에 잠겼다가 뾰루퉁해져버린 도련님을 보며 마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츠카사가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반듯한 서류였다. 


“이게 뭐에요? ...뭐야?”

“이곳에 sign 부탁드립니다.”

“사인? 왜?”

“이사라 씨를 스오우 가문의 가신으로 넣는 마지막 절차입니다.”


 평민에게 작위를 주는 제일 간편하고 빠른 방법이었다. 물론 엄청난 서류작업을 거쳐야 하고, 3대 이상의 전통을 가진 가주와 가주 후계자만 쓸 수 있는 방법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왕의 동의가 필요한다는 치명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바로 그 왕부터 간단하게 사인해서 던져줬다. 리츠의 부탁 한마디에 레오는 되묻지도 않고 제 앞으로 올라온 서류에 승인 도장을 찍었다. 그 모든 서류를 작성해 올려야만 했던 츠카사는 다시 한 번 더 억울해졌다. 기사단 막내의 표정에 약간 울망함이 섞였다. 아주 조금 서럽기도 했다. 


“스오우 공작가? 아니 내가 거기에 왜......?”


 마오는 얼이 빠져 되물었다. 왕국에 딱 하나뿐인 공작가 이름이 대체 왜 여기서 나오는 것인지 그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눈앞의 앳된 청년이 스오우의 이름을 손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 신분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리츠가 손님이 찾아갈 거라고 미리 연락을 해 주기는 했지만, 일하고 있는 직장의 후배라고만 써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거 이 마을에서 살던 사쿠마 리츠가 레이의 사정에 따라 이사하게 되면서 수도로 적을 옮긴 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되어버렸는지 마오는 몰랐으니까. 그가 순수히 능력만으로 작위를 받아 단 네 명뿐인 근위기사단의 참모로 일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시골이라 기사의 이름까지 흘러들어오지도 않았다. 쉽게 읽히는 암시를 끝없이 던져주었지만, 이사라 마오의 기억에 남은 사쿠마 리츠의 흔적이 너무 컸다. 어린 시절 작고 여렸던 사쿠마 리츠의 흔적. 다 큰 뒤에도 몇 번이나 만나서 그가 이미 건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사와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뒤 리츠는 적당히 포기했다. 나중에 현실을 보면 되겠지. 간단한 결론이었다.

 다만 귀족과 평민은 결혼하기 까다로웠다. 주변의 시선은 딱히 신경쓰지 않는 리츠였지만, 근위기사라는 그의 입장상 리츠의 불명예는 왕의 불명예와도 직결되는 과제였다. 그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기에, 리츠는 마오도 귀족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방법을 조사하고 안심했다. 생각보다 쉬웠다. 그 날로 리츠는 츠카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전혀 모르는 스오우 츠카사는 조금 더 어이가 없어졌다. 당장이라도 밖에 세워진 애마를 타고 수도로 달려가 훈련장에서 자고 있을 그에게 리츠 선배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신 겁니까를 외치고 싶어졌다. 조금 뺨이 붉어진 츠카사가 바닥을 한참 노려보다가, 시선을 올려 마오와 눈을 맞췄다. 어린시절부터 받은 교육의 결과였다. 보라색 눈동자가 오묘하게 빛났다. 


“리츠 선배가, 15년 전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아.”


 마오의 뺨이 화끈 붉어졌다. 츠카사는 마오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안심했다. 제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었다. 선배에게 명령과 부탁을 구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선사받은 츠카사는 리츠에게 물었었다. 왜 그를 귀족으로 만드려는 겁니까? 후배의 물음에 검은 머리카락의 선배는 오묘하게 웃었다. 그 요요한 눈웃음에 츠카사는 바짝 몸을 굳히고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휘어지는 붉은 눈동자 끝무리에 애정이 흘러내렸다. 마 군이랑 결혼할 거라서. 간단한 대답이었다. 동성이라는 문제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선선대 왕이 바꾼 국법은 이제 조금씩 생활에 녹아가고 있었다. propose는 하셨습니까? 츠카사의 물음에 리츠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물론, 15년 전에. 

 그 애들 약속으로 괜찮냐고 열 번도 넘게 물었고, 그 때마다 리츠는 걱정할 필요 없다며 일갈했다. 말을 꺼내기 직전까지도 불안했건만 이번에도 리츠의 장담은 맞는 모양이었다. 복숭아빛으로 물든 마오의 뺨이 꽤 사랑스러웠다.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복잡하게 사방으로 향하는 녹색 시선을 보며 츠카사가 슬쩍 웃었다. 그는 츠카사가 존경하는 선배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기꺼이 존중해야 마땅했다. 이제껏 했던 낯선 서류작업이며 선배의 부려먹음에 토라져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막내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는 그가 저에게 부탁해올정도로 선배는 이 사람을 좋아했다. 청년의 몸가짐이 한층 정중해졌다. 쑥스러움에 빠져있는 마오는 그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라도 좋으니, 선배께서 이사라 씨를 수도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escort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츠카사가 손을 내밀었다. 붉어진 얼굴로 벽을 한참 노려보던 마오가─츠카사는 입속말로 바보 리츠, 후배에게 뭘 시킨 거냐고. 하고 중얼거리는 마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정중하게 못 들은 척 했다─천천히 츠카사의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츠카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색 고운 하늘 아래 붉은 머리카락이 작게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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