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타기는 한숨처럼 더운 숨을 뱉어 냈다. 텅 빈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스스로가 혼자있기를 원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홀로 있다는 것은 기묘한 외로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평소에 이렇게 감정 변화가 격한 사람이 아니었건만, 우습게도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빌어먹을.
마타타기는 거칠게 욕설을 뱉어 냈다. 제 자신의 몸상태와 그 증상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화가 났다. 감정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운동장 몇 바퀴를 뛸 수 있을 만큼 기운이 나다가도, 탈진한 것처럼 힘이 쭉 빠지곤 했다. 이게 정신적인 문제라는 것은 마타타기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의심하고 부정하고, 끊임없이 자기학대처럼 제 감정을 몰아붙였었다. 몇 달을 그렇게 혼자 앓았을까, 결국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 결론에 마타타기는 집 안에 틀어박힐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얼굴도 보고싶지 않았고, 누구의 목소리도 듣고싶지 않았다. 그렇게 믿으려고 했다. 마타타기의 상태를 보며 동생들은 조용히 자리를 피해 밖을 떠돌아다니곤 했다. 마타타기는 그들에게 미안했지만 그걸 신경쓸만큼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다시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에 마타타기가 제 심장께를 꾹 눌렀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심호흡처럼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물론 심장박동의 변화는 없었다.
"어이, 마타타기-! 안에 있냐?"
...환청인가? 마타타기가 입을 쩍 벌리며 문가를 바라보았다. 이 목소리가 왜 하필 지금 이곳에서 들리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환청이면 좋을 것 같았다. 자괴감이야 늘어나겠지만 진짜 이 목소리의 주인이 저 문 밖에 서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끔찍했다.
"어? 문 열려 있네."
내가 왜 저 문을 안 잠궜을까. 마타타기는 과거의 자신에게 백만 번 쯤 욕을 날려주며 침음성을 삼켰다. 조금은 거칠게 문고리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마타타기는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흰 색 머리카락, 길쭉하니 큰 키. 말쑥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마타타기가 알고 있는 장본인의 모습 그대로였기에 마타타기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삼켰다. 하필 제일 피하고 싶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왜 지금 여기에.
"진짜 상태 안 좋아 보이잖아?"
조금은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하며 다가오는 이부키의 모습에 마타타기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차라리 텐마였다면. 물론 제일 피하고 싶은 두 사람 중 한명이기도 했지만 차라리 텐마였다면 더 나았을 터였다. 이 꼴을 하필 이부키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이 마타타기의 자존심을 건들였다.
"괜찮은 거냐, 마타타기?"
그리고 이, 미묘하게 걱정이 스며든 목소리에 별 수 없이 진정해버리는 자신이 싫어질수밖에 없었다. 젠장, 젠장, 빌어먹을. 차마 나오지 못하는 험악한 말들을 마타타기는 속으로 꾹꾹 삼켰다. 정말 부정하고 싶지만, 이부키의 존재에 명백히 안정하면서 동시에 설레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마타타기는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제 이마에 손을 얹는 이부키의 손길에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 특유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것에, 마타타기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피부를 콕콕 찌르며 파고들었다.
제가 앓고 있는 병이 상사병이라는 사실만큼은, 정말 죽는 한이 있어도 이부키에게 말할 수 없었다.
'INAZUMA'에 해당되는 글 39건
- 2014.03.16 마타이부, 상사병
- 2014.03.08 캡틴, 명령
- 2014.03.08 츠루키나, 200년 1
- 2014.03.08 마타이부 내기 1
- 2014.03.04 마타이부, 싸움.
- 2014.03.02 축제, 집사2
- 2014.03.02 축제, 집사.
- 2014.02.19 마타이부 사랑의 묘약 1
- 2014.02.18 마타이부 고백
- 2014.02.17 마타이부 AU
캡틴의 지시.
이것을 완벽하게 수행했을 때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나는 천국에서 최고로 멋진 축구 필드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조급해 할 필요 없어. 축구처럼 제한시간은 없으니까, 최대한 느긋하게.
언젠가 얼굴을 마주 보고 [네 지시, 완벽하게 수행했다고!]라고 외치며 웃을 수 있다면 괜찮아.
언제까지고 기다릴테니까.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
이나링크에 적혀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마츠카제 텐마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의 이름이 붙은 말이었다.
찾았다. 츠루기는 멍한 눈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더라,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적이자 저주에 가까운 그 시간동안 무슨 생각으로 살아왔는지도 이제는 가물가물했다. 수백 번 후회하고 수 천번 울었다. 하지만 다시 수 만 번 생각해도, 시간이 돌아간다면 이 길을 선택했을 것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츠루기는 가만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의아한 눈빛의 시선과 마주쳤다. 동그랗고 부드러운 그 색감을 얼마만에 마주보게 되었을까. 벅차오르는 이 감정은 감격일까, 아니면 드디어 거의 다 왔다는 해방감일까.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만족했다.
"오빠는 누구에여?"
어린 아이 특유의 혀짧은 소리로 물어오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양새가 사랑스러웠다. 머리카락을 한 번 만져보고 싶다는 욕심을 억누르며 츠루기가 웃었다.
"나는, 츠루기 쿄스케."
라이몬의 에이스 스트라이커이자, 츠루기 유이치의 동생이자,
"오늘 너희 옆집으로 이사 왔어."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잘 부탁해."
널 만나기 위해서, 200년을 기다려왔어.
있지, 너 나랑 내기 하나 해 보지 않을래?
기분나쁘다-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게 만드는 모습을 하고 있는 외계인을 보며 마타타기는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온 몸을 칭칭 천으로 감고 있어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요요한 자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사자나라 행성 사람이라는 것만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푸른 피부뿐. 그리고 그 자색 눈동자가 이상할 만큼 마타타기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보라색 눈동자라면 몇 번이고 본 적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사자나라와의 승부는 승리했으니 이 별은 멸망하겠지.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이렇게 수작을 부려오는 걸까, 라고 생각하며 마타타기는 기분나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상대에게 쏘아붙였다. 솔직히 말해서 말을 붙이기도 싫었다. 혼자 떨어진 이 때에 이런 이상한 녀석이 붙어버린 것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내가 왜 너 따위랑 내기를 하지?"
"왜냐하면, 너에게 필요할테니까."
그러면서 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키득키득 웃는 꼴은 영락없는 비웃음이었기에 마타타기는 울컥 분노가 치솟았다. 이 자식을 뭐지. 꽉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순간적으로 휘두를까를 고민한 마타타기는 결국 손에 힘을 풀었다. 곧 죽을 놈의 헛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체념 비슷한 감정이 그를 잠식했다. 마타타기는 뒤를 돌았다.
"네게 필요하지 않아? 네 가족들의 삶이."
...발걸음이 멈췄다. 마타타기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상대가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울만큼 중성적인 목소리가 귀에 파고드는 것이 역겨웠다. 그 소리에 담긴 뜻 탓일지도 몰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 가족들의 삶을 걸고 나랑 내기하지 않을래?"
가늘게 휘어지는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타타기는 제 입술을 한 번 꽉 깨물었다.
결국 그가 선택할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마타타기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정신없이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얼굴을 힐긋거리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조금 많았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라는 명패는 이런 걸까, 생각하면서도 마타타기는 그저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지구의 환경은 역시 다른 별들보다 몇 배는 편안했지만, 동시에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을 찾는 거야. 한 사람이면 괜찮아. 네 인생의 중심이자, 변혁이자, 적이자 아군. 그 사람을 찾으면 돼.
기회는 한 번. 정하면 돌이킬 수 없어. 알았지?
이기면 네 가족들의 수명을 두세 배쯤 늘려줄게. 하지만 네가 지면 네 생명도 내 거야.
알았지?
속삭이듯 들었던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 쟁쟁거리며 울려왔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심장을 콱 얽매이듯 다가오는 답답함에 마타타기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길거리에서 마타타기가 그랬다간 정신적 문제로 인터넷 신문에라도 실릴까 못하는 짓이었지만.
몇 번이고 숨을 푹푹 몰아쉬며 마타타기는 몇 번이고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자신에게 관련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도통 답을 찾기 힘들었다.
내 인생의 중심.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렴풋이 자기 자신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만 어쩐지 아니라는 묘한 확신 역시 들었다.
내 인생의 변혁. 가장 먼저 생각난건, 별 수 없이 이부키였다. 같은 사내자식을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굉장한 것 아닐까. 하지만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난 건 캡틴이였다. 마츠카제 텐마. 지금으로서는 답이 아닐까, 가장 확신이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의 적이자 아군. 이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아군이라면 모를까, 적? 생각나는게 많고도 적었지만 위의 조건을 전부 따져본다면 생각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적]이라는 부분 때문에 텐마라고 답하기에 망설임이 커지곤 했다.
모르겠어, 짜증나, 열받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 사실이 마타타기를 짓눌렀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마타타기?"
의아함이 담겨 있는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하여 마타타기는 그 주인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짐작 그대로의 사람이 짐작 그대로의 얼굴로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얼굴, 두어 번 눈을 껌벅거리는 모습마저 너무 상상대로의 모습이라 실없이 웃음까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가 갓산쿠니미츠였던가. 딱히 목적지는 없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생각하면 멋쩍기까지 했다.
컥, 하고 숨이 틀어막히는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얼굴에 걸린 여유로움을 가장한 비웃음이 지워지지 않은 것에 상대의 얼굴이 더더욱 사나워졌다. 그런 일그러진 이부키의 얼굴을 보는 것은 마타타기에게 씌워진 비웃음을 더 짙게 만드는 것 이상의 일을 해주지 못했다. 둥근 눈매가 날카로움을 가장해 치켜뜨이고, 그 속에 잔뜩 빈정거림을 담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이부키는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마타타기의 멱살을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애써 버티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키와 체격부터가 차이가 나는 터라 반 쯤은 까치발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마타타기로서는 속절없이 그에 끌려다닐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부키에게서 시선을 때지 않고 있었다.
그 표정을, 이부키의 만면에 얼룩진 감정의 흔적을 마타타기는 샅샅히 파헤치고 있었다. 그 색을 읽어내고는 속절없이 웃어버리고 있었다. 화를 내는 형태로 제 감정을 드러냄과 동시에 숨기고 있었지만, 마타타기에게는 소용없었다.
멱살을 잡고 있는 사람은 이부키였고, 그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마타타기였지만. 정말 이상할 만큼, 이부키가 마타타기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열하듯, 애원하듯. 정말로 의아할만큼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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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추장스러운 자켓은 이미 벗어버리고, 와이셔츠에 조끼, 넥타이 차림으로 마타타기는 기지개를 쭉 펴며 웃었다. 드디어 탈출이었다. 비록 그 덕분에 어스 일레븐의 전원과 이리저리 헤어져버렸지만 딱히 이곳이 우주도 아니고, 위험 지역도 아니고, 걱정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딜 가든 시선을 집중시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찾기도 어렵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아무나 붙잡고 이나즈마 재팬 못봤냐고 물어보면 된다는 것을 마타타기는 알았다.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성큼성큼 걷던 마타타기의 눈에 띈 것은 과하게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하얀 머리카락, 껑충 큰 키, 운동선수다운 체격. 물론 마타타기가 가장 자주 본 건 저 앞모습이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상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부키?"
"어?"
작은 목소리의 부름이었지만 민감하게 그것을 잡아낸 이부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장 마타타기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표정이 순간 일변했다. 마타타기는 몹시도 못마땅한 듯 미간이 좁혀졌고, 이부키는 조금 멍한 듯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팔짱을 끼고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마타타기의 모습을 이부키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 마타타기는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이 집사복 때문이겠지.
불만 있어? 당장이라도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참지 않고 그대로 실현시켰다.
두 사람이 있던 장소가 말다툼의 소란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타타기는 애써 불편한 기색을 숨기고 상냥한 척 미소지었다. 몸에 맞지 않는 각잡힌 집사복이 어색하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이 옷을 벗어던지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고 솟구쳤지만 전교생이 참여하는 축제에 반 아이들 전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알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사라니, 역시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마타타기는 목을 단단히 죄는 타이를 조금 잡아당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타이틀이 '집사와 메이드 카페' 인 만큼, 허술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며 여자 아이들이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는 했지만 지금은 손님들도 거의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마타타기는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전 이나즈마 재팬 출신, 세계대회-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우주 대회-의 우승자 출신의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인 마타타기가 얼굴 마담격으로 존재하는 반이었기에 손님은 끊임없이 찾아왔었다. 지금도 손님이 몰렸다가 빠져나간 직후인지라 이렇게 사람이 적은 것이지, 곧 다시 가득 찰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잠깐의 휴식시간임을 선명하게 자각하며 마타타기는 다시 한 번 숨을 내쉬었다. 어색하지 않게 웃어주는 것이 이제는 낮설어서 얼굴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예전엔 너무 당연하게만 웃었었는데.
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제 뺨을 꾹꾹 누르던 마타타기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인사하며 미소지었다. 눈을 접어 부드럽게 휘면서 짜증어린 제 눈을 자연스럽게 감추었다. 그리고, 손님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진심으로 다시 웃었다.
"캡틴!"
"마타타기, 안녕! 축제라기에 구경 왔어!"
"...캡틴밖에 안보이나 보네, 마타타기군 눈에는."
"반겨 줄 필요를 캡틴 외에 못느껴서."
텐마를 선두로 한 이나즈마 재팬, 아니 그리 알려진 어스 일레븐들의 등장에 마타타기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미나호가 슬그머니 불만을 제시하는 것도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상냥한 척 웃는 얼굴에서 벗어나 자신만만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어스 일레븐들이 각자 자리를 잡아 앉는 것에 마타타기가 주문서를 들고 그들의 앞에 섰다. 반듯한 집사복차림의 마타타기를 보며 텐마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잘 어울려, 마타타기."
"고마워. 뭐, 난 별로 맘에 안들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옷깃을 정리하는 마타타기의 모습은 정말로 불만스러움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아서, 텐마는 키득키득 웃었다. 다른 동료들은 이곳 저곳 꾸며져 있는 마타타기의 반을 두리번거리는 데에 정신이 없었다. 조금 생소한 사복 차림의 그들을 보며 마타타기가 주문서를 어깨에 걸치며 뻔뻔하게 물었다.
"그래서 주문은? 열 두 명이나 왔으니까... 아니, 열 한 명이네?"
"그게, 이부키도 틀림없이 같이 왔는데 중간에 없어졌더라구."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 마타타기의 모습에 텐마가 변명하듯 설명해주었다. 멋쩍은 표정의 텐마를 보며 마타타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미안하다는 듯이 텐마가 미소지었다. 텐마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마타타기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도가 벽 한 쪽에 달려 있는 주문표와 계산서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제일 비싸고 맛있는 것으로 열 한 개 부탁해."
"에엑?! 신도 상,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저희도 돈 가지고 있고, 그러니까..."
"괜찮아. 우르르 몰려왔는데 이정도면 매상은 괜찮겠지, 마타타기?"
그렇게 말하면서 제 지갑을 꺼내드는 신도를 보며 마타타기는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신도 가의 후계자. 학교 축제에서 하는 카페인지라 그리 값이 비싸지 않다는 것도 있지만 열 한 명의 값을 한번에 치르는 것은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부의 차이란 건 이런 건가. 그리 생각하며 마타타기는 주문서에 신도의 요청 그대로를 써넣은 뒤 음식 담당에게 넘겼다.
그리곤 다시 돌아와 어스 일레븐의 옆에 앉았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니, 이미 선망과 기대의 시선 비슷한 것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타타기는 혀를 찼다.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밀려왔다. 도망칠까. 마타타기가 가늘게 뜬 눈에 그런 고민이 어렸다. 그걸 민감하게 잡아낸 미나호가 빙그레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옛 어스 일레븐의 주장으로서 전부 발견한 텐마는 한숨 비스무리한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곧 이곳을 탈출한 마타타기를 볼 수 있을거라는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제멋대로의 뻘설정 주의 부탁드립니다! 개연성 없음 등등등은 이미 기본사항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냥 마타이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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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그걸 마시고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특별한 마법의 약. 소녀들의 꿈 속에서나 나온다고 여겨지는 그것을 직접 눈 앞에서 보게 된 마타타기는 꽤나 복잡한 표정이었다. 텐마 직속 실험팀의 마나베와 미나호가 만들어냈다는 이것이 정말 그들의 이름을 걸 수 있는 '성공작'이라는 알았지만 그렇기에 더 복잡한 기분이었다. 설명하자면, 흥미는 떨어지고 골치아픔만 늘어났달까. 딱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에는 마타타기는 사랑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본인부터가 가족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이 약물 따위가 일으키는 화학작용이 정말로 사랑인지도 알 수 없고. 그렇게 생각하며 마타타기는 성의없이 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옅게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는 향도 전혀 없어서 언뜻 보기에 물처럼 보였다.
"야, 마타타기. 여기 있냐?"
"어."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부키의 목소리에 마타타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보고서를 뒤적거리면서 마타타기는 이부키에게 반 쯤 관심을 끄고 있었다.
"이거 뭐냐? 마셔도 돼?"
"마시든가."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던 마타타기가 멈칫했다. 이 연구실 안에서 마실 것은, 틀림없이, 하나 뿐일 텐데.
...어?
마타타기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깨끗하게 묘약을 비운 이부키의 모습이 선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얀 머리카락, 하얀 실험복. 껑충한 키에 말쑥한 생김새의 이부키는 방금 전까지 묘약이 들어있었을 텅 빈 컵을 손에 들고 곧게 마타타기를 보고 있었다.
낭패다, 순식간에 마타타기의 표정이 당혹스러움과 골치아픔으로 물들었다. 묘약의 효과는 절대적. 마나베와 미나호가 자신만만하게 보여주었던 모습에서 묘약을 마신 모르모트들은 순식간에 행동이 변하곤 했다. 마음 속에 순식간에 타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모르모트들은 전부 동물들이었지만 사람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을 터였다.
"뭐냐?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데."
시큰둥하게 던져진 이부키의 목소리에 마타타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퉁한 표정, 찌푸린 미간, 삐딱한 자세. 영락없는 평소의 이부키였다. 순식간에 마타타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틀림없이 저 묘약의 효과는 확실했다. 마타타기가 직접 본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부키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마음 속에 사랑이 피어오르고 있었을 텐데, 다른 실험체들은 틀림없이 없던 사랑이 급격하게 피어올라 그것을 주체하지 못하곤 했는데.
그런데도, 행동이 평소와 같다는건. 그 말 뜻은, 설마.
실험실이 침묵에 잠겼다. 들리는 것은 오직 두 사람의 가벼운 숨소리 뿐이었다.
"너를 좋아해."
담담한 척 전해진 말이 주변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가득 채운 것은 무거운 침묵인지라, 고백을 한 당사자도 고백을 받은 장본인도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제 입을 꾹 다물었다. 고백을 한 사람인 이부키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고, 고백을 받은 사람인 마타타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속 안에 꼭꼭 숨겨두었던 달콤한 감정을 속삭인다는 고백이 흘러나온 직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늘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마타타기였다.
"....나를?"
혹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잔뜩 깃들어 있는 짧은 물음이었다. 하긴, 별 수 없는 일이라고 이부키도 납득했다. 마타타기는 여자아이도 아니고, 친분이 깊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팀의 동료라는 수준의 그저 그런 관계. 그런데 왜? 마타타기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부키를 살폈다.
"혹시 게임의 벌칙이라던가?"
"아니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를 쥐어짜서 겨우 한 고백이 고작 게임의 벌칙 취급 받는 것에 이부키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이 똥멍청이야! 당장이라도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감정을 이부키는 꾹꾹 눌러 참았다. 이렇게 외쳤다간 기껏 용기 낸 보람도 없이 고백이 흐지부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타타기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런 녀석이라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좋아했지만 화가 나는 것은 별 수 없었다.
"좋, 아 한다고. 내가, 너를."
배짱 좋다는 말은 꽤나 자주 듣는 이부키였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고백의 말을 내뱉는 것은 배짱이 좋은 걸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용기를 전부 쥐어짜서 이부키는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이 끝나고 나서야 마타타기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새겨졌다. 그것으로 이부키는 제 고백이 마타타기에게 제대로 닿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표정의 마타타기는 이부키의 마음 속에 진득한 만족감을 선사해주었다. 제대로 닿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오만할만큼 자신만만한 얼굴을 무너뜨릴만큼의 감정을 선사해줄만큼이 되었다는 뜻이니까.
"나를, 좋아해..."
중얼거리는 것처럼 속삭이는 마타타기의 목소리를 캐치해낸 이부키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강한 긍정에 마타타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좋아한다, 나를. 마타타기 하야토를. 그 모든 본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좋아해준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이 좋아한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아지처럼 기대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부키의 모습을 힐긋 흘겨보았다.
나는, 너를.
마타타기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시작된 곳은, 어느 대륙이었다. 크고, 사람도 많고, 그렇기에 사건도 갈등도 많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장소. 그 거대하다고밖에 칭할 수 없는 대륙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대륙을 통치하는 단 한 사람의 지도자가 살아가는 중앙, 아름다운 해안가 덕분에 휴양지로 이름 높은 동부, 뜨거운 태양과 죽을 것 같은 더위가 내려앉아있는 남부, 산림과 인재들이 가득하다고 칭송이 자자한 서부, 서늘한 얼음 빙벽과 숨 한 줌마저 얼어버릴 것 같은 냉기가 가득한 북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전통도 생활 관습도 말투와 어조마저 전부 달라진 사람들이었지만, 단 하나.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들의 통치자는, 중앙에 있는 단 한 분.
물론 각 지방에 따라 그곳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동부에는 ‘선장’, 남부에서는 ‘족장’, 서부에서는 ‘지도자’, 그리고 북부에서는 ‘시저’ 라고 부르는 각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 하지만 그 지배자가 인정하는, 그들 위의 단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대륙의 통치자였다. 통치자를 부르는 명칭 역시 각 지방마다 달랐다. 동부는 ‘대선장’, 남부는 ‘칸’, 서부는 ‘왕’, 그리고 북부는 ‘차르’ 오로지 통치자에게만 선사되는 영광스럽고도 무겁기 짝이 없는 칭호였다.
통치자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넘겨지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대대로 통치자는 순조롭게 권력을 이어받곤 했다. 그리고 거의 한 세대마다 한 번 그 모든 대륙의 인재들이 한 곳에 모이는 시기 역시 있었다. 대륙의 크기 탓에 평생 한 번 만나기 힘든 인재들을 전부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시기였다. 그들은 각 지방의 지배자 후보임과 동시에 다음 시기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희망들이기도 했다.
통칭 ‘변화의 시기’ 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그 시기에는 전 대륙 각기의 인재들이 전부 모여든다. 그리고 한 장소에 모여 교육을 받고 수련을 받는다. 그리고 대륙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 내정 받은 소년, 혹은 소녀 역시 그 틈새에 끼어들어 그들과 시간을 보낸다. 언제 어째서 시작되었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르는 전통이었지만,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따르는 관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자주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찾아오는 변화의 시기에 맞춰 천재다 범재다 칭찬받고 기대 받던 소년소녀들이 전부 한 장소에 모이기 시작한 날. 그리고 훗날 일어날 어느 사건의 주인공들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 이야기의 시작의 불씨는 바로 이 시기의 이들에게서 일어났다.
남부 출신의 마타타기는 불쾌함으로 얼룩지다 못해 잔뜩 짜증어린 얼굴을 애써 웃는 얼굴로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좋은 옷차림을 하고 경계심 어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또래 애들의 모습이 마타타기에게는 참으로 같잖게 보였다. 제 경계심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더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얼굴을 하고 상냥한 사람 흉내를 내고 있는 마타타기였지만 눈으로, 감각으로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다들 마타타기의 평균에서 한참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몇 명만큼은 달랐다. 무표정하게 가만히 서서 주변에도 시선을 한 줌 주고 있지 않거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거나. 경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속으로 숨길 줄 아는 녀석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마타타기는 그런 녀석들에게 자연스럽게 촉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다들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고 해 봤자 여기에 모인 아이들의 수는 최대한도로 잡아봤자 백 명 안팎이었고, 그 안에서 마타타기가 눈길을 줄 만큼 무덤덤해하는 사람은 많이 잡아봤자 열 두어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드물게 웃는 얼굴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소풍 온 건지 의심될 만큼 싱글 벙글, 누가 봐도 즐겁다는 기색을 잔뜩 뿜어내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이상한 녀석.
마음속으로만 작게 그런 생각을 소년에게 낙인찍고 있던 마타타기는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마타타기 뿐만 아니라 몇 명의 소년들도 마타타기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점차 다른 아이들의 시선도 한 곳으로 모아졌다. 제 기척을 숨기지 않고 터벅터벅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곧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화려한 관복 차림의 어른이었다. 마타타기는 문득 그 사람이 상당한 고위직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틀림없이 칸 직속, 어쩌면 칸 본인. 강한 사람, 강한 어른. 마타타기의 눈에 미묘한 경계심과 적대감이 들어찼다. 허나 그 감정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몇 번의 눈 깜박임으로 그 모든 감정들을 꾹꾹 눌러 가둬버렸다. 자신에게 시선이 온전히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천천히 확인한 그 어른은 이내 입을 열고 소리를 높였다.
“다들 제대로 모였나? 나는 이곳의 관리자. 이 시기 동안 너희들의 총 책임자 역할을 한다.”
약간 강압적이게 느껴지는 그 말에 마타타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폈다. 못마땅하게 들어서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몰랐고, 서슴없이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마타타기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상대의 말에 집중했다. 그래 봤자 하는 말은 크게 대단한 것이 없었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교육을 듣는 것은 자율. 싸움은 금지되며 친분을 쌓는 것 역시 자유롭게 해도 상관없음. 규칙이라고 해 봤자 수면시간과 기상시간을 잘 지키라는 것 외에는 강압적인 것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자유로운 일정에, 가만히 듣고 있던 마타타기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조금 당황해버렸다.
너무 딱딱하게 생각했던 건가.
해산을 외치는 상대의 말에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조금 멋쩍게 한 번 제 머리카락을 긁적인 마타타기는 이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여유로운 생각을 하며 제 숙소로 돌아갔다. 한 사람당 한 개의 방이 배정되어 숙소에서의 생활은 자유로웠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억지로 웃고 있던 얼굴을 풀고 무표정하게 돌아온 마타타기는 제 짐을 뒤적여 지도를 꺼내들었다. 바닥에 길게 늘어지는 지도에는 남부와 동부, 중앙에 대한 제법 상세한 지리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숲이 대부분인지라 지리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서부와, 너무 먼 탓에 한 번 가기도 힘든 북부를 제외하면 이 지도만큼 좋은 지도는 중앙의 극비 서류실 정도는 가야 있지 않을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며 마타타기는 찬찬히 지도를 살폈다. 자신의 고향인 남부 중앙의 사막 마을을 지나 지금 있는 중앙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위치하는 마을. 그 외의 다른 마을들의 이름을 천천히 읽으며 마타타기는 생각에 빠졌다. 여기서 다른 인재들을 모아 남부에 내려갈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마타타기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고향마저 포기한 채 자신을 따라오게 만들 만큼의 매력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나마 친분을 유지하며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안전하면서도 최선의 선택. 그렇게 생각하며 마타타기는 지도를 덮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온 몸에 긴장을 풀자 그제야 피로가 밀려왔다. 몇날 며칠을 말과 마차를 번갈아 타며 달렸던 것의 반동이 이제야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마타타기는 눈을 감았다. 느릿하게 청한 잠은 금세 마타타기에게 다가와 주었다.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수마에게 몸을 맞기며 마타타기는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
귀찮아. 마타타기는 제 손에 들고 있는 창을 가볍게 휘둘러 자세를 정돈했다. 그의 주변엔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또래의 소년들이 가득했다. 그 눈에 담긴 것은 미묘한 질투와 동경심.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티를 내지는 않으며 마타타기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목을 풀었다. 마타타기의 창술은 남부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이었고, 그 스스로도 창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자부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이 비록 언젠간 형편없이 무너져버릴 오만일지는 몰라도 이제까지는 그 감정이 꺾인 적이 없었기에 여전히 건재하게 마타타기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손목을 사용하여 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마타타기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련을 신청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보였다. 도리어 잠깐 시선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슬슬 돌아갈까. 마타타기가 막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시시해.”
상대가 원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마타타기의 귀에 들려온 그 비난 소리에 마타타기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소년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흰 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이제껏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의아할 만큼 눈에 띄고, 또 지루하다는 표정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상대의 모습에 마타타기는 아주 짧은 시간 빠르게 고민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웃기에는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너는 얼마나 잘났냐며 시비를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정 처리에 능숙하다고는 해도 마타타기 역시 어렸다. 모든 부분에서 닳고 닳은 어른은 아니었다. 어찌 할까, 마타타기가 슬슬 마음을 굳히고 행동하려던 찰나였다.
“시시하다니! 엄청 대단한걸!”
“...?”
“...?”
갑작스럽게 상념을 지워버리듯 끼어드는 목소리에 마타타기도 흰 머리카락의 소년도 고개를 돌려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 갈색 머리카락. 저 웃는 얼굴. 아, 마타타기는 속으로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웃고 있던 이상한 녀석. 그 때와 별 다르지 않은 얼굴로 제 앞에서 웃는 이 소년을 내려다보며 마타타기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식혀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 쓸 데 없이 끼어들었다고 화를 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웃지도 화내지도 못한 채 애매한 표정을 하는 마타타기 대신 먼저 소년에게 말을 건 것은 흰 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넌 뭐야? 누구야?"
“아, 나는 마츠카제 텐마! 동부에서 왔어! 잘 부탁해!”
그러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마츠카제 텐마. 속으로 그 이름을 되내이며 마타타기는 마츠카제를 바라보았다. 소년다운 얼굴에 한가득 들어있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은 색의 상냥함인지라, 어쩐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대부분의 마을이 관광지인 동부 사람들은 어지간한 시골 아니고서는 계산이 빠르고 이익에 민감하다던데. 마츠카제를 보면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저 녀석이 별종인 게 확실해 보였기에 마타타기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가 이름을 밝혔기에 마타타기 역시 입을 열었다.
“나는 마타타기 하야토. 남부에서 왔어.”
“이부키 무네마사다. 북부 출신이지.”
마타타기 뿐만 아니라 같이 있던 흰 머리카락의 소년도 자기소개를 내뱉었다. 북부 출신. 그 말에 마타타기가 조금 흥미로운 시선을 이부키에게 던졌다. 남부와 북부라는 정 반대의 지리적 특성 탓에 마타타기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북부 사람을 본 적 없었다. 그것은 이부키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쪽 역시 흥미롭다는 시선을 마타타기에게 던지고 있었다. 잠시 시선이 마주치고, 강한 무언가가 서로에게 던져졌다. 시선 교환이 자존심 싸움 비스무리한 눈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은 것은 마츠카제였다.
“다들 다른 곳에서 왔네? 만나서 반가워!”
그리 말하면서 밝게 웃는 얼굴은 적의라고는 단 한 점도 들어있지 않은 새하얀 얼굴이어서, 마타타기나 이부키 역시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분명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위험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끼어들은 소년이건만 화를 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 역시, 슬슬 자존심의 충돌로 변했을 만한 상황이었는데. 그게 능력이라면 참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타타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 편하게 웃기만 하는 마츠카제가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짜증도 났다. 기분 나쁜 행운아. 불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랑받고 자랐다는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 마츠카제를 단언짓기에는 아직 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랬다. 별 수 없이 편견이 자라나는 것을 부러 막지 않으며 마타타기는 싸늘하게 마츠카제를 바라보았다. 이부키 역시 마츠카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적의 비스무리한 감정이 담긴 시선에도 마츠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저러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텐마!”
문득 들려오는 마츠카제의 이름에 세 사람 전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는 얼굴이었다. 물론 일방적으로 이쪽만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상대는 유명인이었으니까. 그것도, 상당히 많이.
신도 타쿠토, 츠루기 쿄스케. 순식간에 많은 아이들의 시선을 주목시킨 무리 안의 유명인이었다. 대대로 중앙 귀족 출신이던 신도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름을 알고 있던 수준이었고, 츠루기는 순식간에 검술로 이곳의 모든 아이들을 꺾은 실력자였다. 창술과 검술은 엄연히 달랐기 때문에 마타타기는 직접적으로 승부해보지 못했지만, 상대의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정진정명 미래에 중앙에서 대륙의 통치자의 곁을 이끌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마츠카제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다는 것은 나름 충격이기도 했다. 친구라고 부르기에 마츠카제는 평범하다 못해 얼핏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다만 그 웃는 얼굴만큼은 선연해서, 두 사람의 곁에 서도 지워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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